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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탈출기의 말씀 23,20-23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0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21 너희는 그 앞에서 조심하고 그의 말을 들어라.
그가 너희 죄를 용서하지 않으리니, 그를 거역하지 마라.
그는 내 이름을 지니고 있다.
22 너희가 그의 말을 잘 들어 내가 일러 준 것을 모두 실행하면, 나는 너희 원수들을 나의 원수로 삼고, 너희의 적들을 나의 적으로 삼겠다.
23 나의 천사가 앞장서서 너희를 아모리족, 히타이트족, 프리즈족, 가나안족, 히위족, 여부스족이 사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나는 그들을 멸종시키겠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8,1-5.10
1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5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10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마태 18,10)
하느님께서는 ‘작은이들’ 하나라도 그지없이 존귀하게 여기신지라 그들의 수호천사들을 두어 당신과 함께 있도록 하셨음을 말해줍니다.
곧 천사들이 존귀한 존재인 것이라기보다 천사들을 붙여 보호해야 할 만큼 인간이 존귀한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서로 송사하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도들이 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세상이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아야 할 터인데, 여러분은 아주 사소한 송사도 처리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천사들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1코린 6,2-3)
그렇습니다.
그날이 오면, 천사들이 인간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천사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이토록 인간은 존귀합니다.
이는 시편 8편을 떠올려줍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시 8.5-6)
그렇습니다.
영광과 존귀의 관이 천사에게 씌워진 것이 아니라, 우리네 인간에게 씌워진 것입니다.
결국 천사는 하느님이 되지 못하지만, 인간은 하느님이 되는 영광과 존귀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참으로 존엄합니다.
그지없이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이 존귀함을 잘 보전해야 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존귀함도 잘 보호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 인간의 존귀함은 개인의 능력이나 재능에서 오는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인간의 존귀함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그 누구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인간의 존엄을 평가하거나 도구로 전락시키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존귀한 존재로 존중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이를 지켜나가야 할 사명도 부여받고 있음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혹 우리의 관심이 ‘큰 사람’에게 있지는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소중한 것을 소중한 것으로 볼 줄 아는 눈입니다.
곧 우리가 “큰 사람이냐 작은 사람이냐?”가 아니라, 하느님께 얼마나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이냐?”를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곁에 있는 내 형제가 나에게 ‘얼마나 귀중하고 소중한 존재인지’, 또 내가 내 형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가 되어주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태 18,5)
주님!
무엇을 하든 당신을 지향하여 일하게 하시고,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당신의 이름으로 하게 하소서!
모든 주어진 것을 당신의 이름으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당신의 이름으로 드리는 감사가 되게 하소서!
오늘 나의 모든 삶이 당신께 바치는 기도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
“천사”라는 말은 어떤 존재의 본성이 아니라 기능을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하느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천사는 “모두 구원을 상속받을 사람들에게 봉사하도록 파견된 시중드는 영들”(히브1,14)입니다.
그리스도의 협조자들이 된 인간을 보호합니다(마태 18,10).
그들은 하느님께 성도들의 기도를 전달하고, 의인들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합니다(루카 16,22).
그리고 자기들의 지휘자인 미카엘과 더불어 교회를 보호하기 위하여 태초부터 사탄과의 사움을 계속합니다(묵시 12,1-9).
모든 천사들은 그리스도께 복종함으로써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하나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우리를 보호하는 천사가 있어서 감사합니다.
특별히 각 개인의 인생여정을 지켜 주고 보살펴 주는 역할을 하도록 지정하신 영적존재를 수호천사라고 합니다.
수호천사가 있어서 행복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하늘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세워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주인공은 어린이가 아니라 어린이같이 된 사람입니다.
어린이가 지닌 가장 큰 특성은 의존성입니다.
어린이는 어리면 어릴수록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특별히 부모의 품에 있어야 합니다.
부모가 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이처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은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사람입니다.
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품에 안겨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많이 가진 사람, 높은 지위에 있고, 권력을 가진 사람을 높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위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마르 10,21),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태 19,2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관념, 틀, 명예욕, 지배욕, 물질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주님께로 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늘나라의 주인이 어린이가 아니라 ‘회개하여 어린같이 된 사람’이라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다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께만 의지하는 사람은 복됩니다.
워즈워드는 ‘어린이를 어른의 아버지’라고 말했습니다.
어린이의 솔직함과 겸손, 단순함, 신뢰, 특별히 의존성 안에서 한수 배우시기 바랍니다
키가 커서 큰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차지해서 큰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수호천사가 있음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
보통 수호천사는 우리를 보호해주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 추석에 박스를 나르다 눈 주위를 조금 다쳤습니다.
수호천사가 있었다면 다치지 않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실 수호천사가 있어서 보호받는 것보다 보호받지 못한다고 있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수호천사를 믿을 수 있을까요?
먼저 알아야 할 사실은 믿거나 안 믿거나 우리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증거가 있어서 믿는 게 아닙니다.
만약 배우자를 믿는다면 배우자가 자신만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있어서 믿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증거를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냥 믿는 게 속 편하니까 믿는 것입니다.
만약 의심한다면 배우자가 정말 자신을 싫어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람을 피우고 있더라도 믿어버리면 언젠가는 그 믿음에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자녀를 위해서도 믿는 게 좋습니다.
그러니까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선택입니다.
저도 넘어져 박스에 눈 주위가 긁혀서 피가 날 때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오랜만에 명절에 온 가족이 모이는 집으로 가야 하는데 기분 나쁜 상태로 가면 무엇이 좋을까요?
사람들은 분명 눈이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넘어져서 다친 것은 다행이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다행이라고 믿는 게 속 편합니다.
그래서 기분이 상하지 않았습니다.
피를 닦으면서 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다음 날 한가위 미사를 할 때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시퍼렇게 멍이 들고 붓기도 했지만, 그래도 미사를 할 수 있을 정도만 다쳐서 좋았습니다.
믿음은 이처럼 증거가 있어서 믿는 게 아니라 안 믿는 것보다 믿는 게 더 좋으니까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기 위해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은 좋은 것을 바라지 않는 악한 사람이 됩니다.
그렇다면 수호천사를 믿으면 무엇이 좋을까요?
먼저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대전교구 신리 성지에 가면 엄청난 크기의 순교 성화들을 볼 수 있습니다.
다블뤼 기념관 지하 2층에 ‘순교미술관’은 순교자들을 주제로 한 작품만을 전시한 특별한 곳입니다.
이종상 화백(요셉, 1938~ )이 3년에 걸쳐서 그린 13점의 대형 순교기록화와 5점의 성인화가 상설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종상 화백은 5천 원권 지폐에 들어간 율곡 이이 초상화나 5만 원권 신사임당을 그린 분입니다.
그러니까 손바닥만 한 그림을 그려도 수억 원에 달하는 그림을 그리는 분입니다.
그분이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않고 3년 동안 그린 그림의 가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지에서 보는 그림은 사실 원본이 아닙니다.
원본은 워낙 가치가 높기에 금고에 따로 보관한다고 합니다.
그 금고는 온도와 습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특수 제작된 것이고 유지비도 적지 않게 든다고 합니다.
정말 귀중한 것을 맡길 때 자기 작품이 망가지지 않게 그러한 정도의 금고를 요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렇기에 금고 안에 있는 원본의 그림이 비록 혼자 방치되는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누군가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고 믿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 됩니다.
나에게 수호천사가 붙어있다는 말은 주님께서 나를 창조하시고 보호하시기에 나는 가치 있는 존재라는 자존감을 가지게 됩니다.
혼자가 아니라고 여기면 절대 포기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도 이것을 믿게 해야 합니다.
수호천사를 믿으면 나만 가치 있는 사람으로 여기게 될까요?
나에게도 수호천사를 붙여주셔서 나를 가치 있는 존재로 믿을 수 있게 하셨다면 다른 존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할 수 없게 됩니다.
내가 수호천사를 믿어 자존감을 가졌다면 다른 피조물도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오래전에 어떤 조그만 녀석이 돈을 달라고 까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놈을 우습게 보고 까불지 말라고 꼴밤을 한 방 먹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더니 자기가 아는 형들을 몇 명 데리고 나온 것입니다.
저는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부터는 어린아이를 보아도 이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것은 수호천사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수호천사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수호천사에게 이것저것 청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더 쉽게 믿어집니다.
저도 주일학교 교사 할 때 한 아이를 야단치고는 겁이 나서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금방 돌아오게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그분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믿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니 믿으려면 먼저 왜 믿는 게 좋을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하고 그다음에는 믿고 대화를 나누며 기도하는 게 좋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수호천사가 되어 주어야 한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마태 18,10)
‘그들의 천사들’이 하느님의 얼굴을 늘 뵙고 있다는 말씀은 수호천사들이 각자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사정을 하느님께 곧바로 보고를 드린다는 뜻이고, “하느님께서는 각 개인의 사정을 세세하게 알고 계신다.” 라는 뜻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말은 보살펴 주신다는 뜻이기도 하고, 합당한 조치를 취하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조치를 취하실 때, 그것을 집행하는 존재가 바로 천사입니다.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작은 이라고 해도”입니다.
여기서 ‘업신여기다.’ 라는 말은 사랑을 거스르는 일들을 모두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작은 이들’에게만 수호천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수호천사가 있습니다.
따라서 업신여기면 안 되는 사람은 ‘작은 이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힘없는 처지에 있는 ‘작은 이들’을 특히 더 세심하게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업신여기지 마라.” 라는 명령입니다.
폭언이든지 폭행이든지 간에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것은 사랑을 거스르는 짓을 한다는 점에서도 죄이고, 주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짓을 한다는 점에서도 죄입니다.
여기서 ‘하늘에서’는 뜻으로는 “언제든지, 어디서든지”입니다.
하느님은 저 높은 하늘에 멀리 떨어져 계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항상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분이고,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살펴 주시는 분입니다.
나의 수호천사도 언제나 항상 ‘내 곁에’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라는 말씀은 하느님은 인간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죄가 됩니다.
‘작은 이들’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마태 25,40.45)
여기서 ‘작은 이들’은 ‘나보다 작은 이들’입니다.
‘작은 이들’이 따로 구분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나에게” 라는 말씀은 ‘작은 이들’이 곧 예수님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섬기듯이 ‘작은 이들’을 섬기라는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작은 이들’이 곧 예수님이니까 ‘작은 이들’을 섬기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작은 이’의 모습으로 나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각자 자기보다 작은 이들에게 수호천사가 되어 주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수호천사가 나를 도와준다고 믿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직 초보 단계의 믿음이고,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수호천사가 되어 주는 것이 성숙한 단계의 믿음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착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루카 10,30.33-35)
강도당한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착한 사마리아인’은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수호천사입니다.
또는 하느님께서 사마리아인의 모습으로 타나나셔서 도와주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강도당한 사람’과 마주친 일은 그 사람을 위해서 수호천사가 되어 주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이고,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것은 그 부르심에 응답한 일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은, 수호천사가 되어 주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거부한 자들입니다.
“작은 이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라는 말씀을 생각하면, ‘강도당한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착한 사마리아인’이 한 일은 ‘내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인간 세상이 착한 사마리아인은 하나도 없고 강도들과 그냥 지나가버린 사제와 레위인만 있는 세상이라면, 힘없는 사람들은 정말로 단 하루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착한 사마리아인들’도 많고, 남을 위해서 수호천사가 되어 주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이 정도라도 어떻게든 유지되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많아야만 남을 위해서 수호천사가 되어 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에서 사랑이 나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큰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수호천사가 되어 주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남을 위해서 수호천사가 되어 주는 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일도 되고, ‘나 자신’이 구원받기 위한 일도 됩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천사가 되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늘 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마태 18,1)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쭙니다.
질문에는 묻는 이의 관심사가 들어 있기 마련이지요.
"큰 사람". 제자들의 로망이고 욕망인 듯합니다.
하지만 이제 곧 제자들은 예수님의 답을 통해 지상의 나라에서의 "큰 사람" 개념과 하늘 나라의 "큰 사람" 개념이 다르다는 걸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태 18,3)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과 대조되는 "작은 이"를 보여 주십니다.
게다가 어린이처럼 작아지지 않고서는, 하늘 나라의 큰 사람을 꿈꾸기는커녕 그곳에 들어가지도 못하리라고 단호히 언급하시지요.
어린이처럼 작아지는 길은 "회개"입니다.
높고 강하고 큰 것을 추구하던 방향성을 되돌려, 낮고 약하고 작은 것에 눈길을 주고 다가가 하나가 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엽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마태 18,10)
사람은 누군가를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사람뿐 아니라 어떤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초라하고 나약하고 비천해 보여도 하느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은 그분의 생각과 마음을 담고 있고, 하느님 계획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람들이 작은 것 안에서 거대한 우주를 볼 수 있기를, 작은 이들 안에서 하느님 얼굴을 볼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럴 수 있다면 모든 존재에 대한 경외감과 존중은 절로 일어나지요.
제자들이 하늘 나라의 큰 사람 되기를 꿈꾸기 전에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를,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작음을 향해 회개하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너희들이 더, 더, 더 작은 것을 꿈꾸었으면 좋겠다." 하고 속삭이시는 듯합니다.
제1독서의 대목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에게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시며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는 내 이름을 지니고 있다."
(탈출 23,21)
하느님의 이름은 하느님 현존, 하느님 권능, 하느님 영광의 다른 표현입니다.
주님께서 천사에게 당신 이름을 맡기신 것은, 그 천사의 명예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기 위함이지요.
주님은 이스라엘이 당신의 천사를 존중하고, 거역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천사는 보내신 분의 뜻을 그대로 전달하고 실행하는 존재니까요.
천사를 신격화해서가 아니라 그의 말에 하느님 뜻이, 그의 행동에 하느님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천사들이 하늘 나라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분께 우리의 사정을 아룁니다.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 못해도 우리 주변에서 우리와 동행하며 보호하지요.
구약의 인물들이나 마리아처럼 직접 천사를 대면하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의 다양한 존재들을 통해 천사는 자신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천사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으려면 시선은 작고 낮은 곳으로, 마음은 약하고 고통 받는 곳으로 향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회개"인 것이지요.
이 시선과 이 마음을 지닌 이에게 천사는 도처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여줄 것입니다.
천사의 몸짓은 아주 고요하고 섬세해서 크고 강하고 높은 것을 좇는 시력에는 포착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 자리,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천사들이 우리를 떠받치고 보호해왔는지 모릅니다.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지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우리를 위해서 지구 반대편에서 홀로 촛불을 밝히고 기도하는 천사가 있습니다.
한 사건이 헤아릴 수 없이 무수한 원인과 결과들의 고리를 거쳐 우리 앞에서 폭발하기까지, 우리의 평화와 안녕을 위한 천사들의 피땀과 눈물이 격한 충격을 흡수하고 방향을 틀어 우리를 보호해 왔습니다.
다만 우리가 모를 뿐이지요.
우리도 누군가의 천사일 수 있습니다.
바람결에 실어 보낸 따뜻한 안부와 기도가 이 세상 누군가에게 밥이 되고 위로가 되고 살 힘이 될 수 있으니까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실천하는 모든 사랑의 몸짓이 곧 천사의 몸짓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천사가 되고 싶습니까?
살아서도 천사가 되는 길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가까운 이에게 또 모르는 이에게 기도 천사, 격려 천사, 위로 천사, 나눔 천사, 기쁨 천사, 감사 천사, 미소 천사, 안부 천사... 여러분 자신이 이미 누군가에게 작은 천사였다는 사실이 보이시지요?
여러분은 세상 눈에는 가려져 있지만, 작은 것을 보시는 주님 눈에는 선명히 감지되는 숨은 천사입니다.
이 세상 어둠과 고통 속에서 이렇듯 천사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천사 되시길 축윈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유레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랜 기간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풀었을 때를 뜻합니다.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갔을 때도 ‘유레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손님 신부님들이 신문사에 머물 때였습니다.
아침에 지하철역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고, 9시에는 운동을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지하에 하수관이 막혀서 물이 넘쳤습니다.
그때 저에게 ‘유레카’가 있었습니다.
24시간 막힌 하수관이나 싱크대를 뚫어 주는 회사가 있었는데 전화번호를 알았습니다.
전화를 했더니 8시까지 온다고 합니다.
기사 분이 큰 기계를 가져와서 막힌 하수관을 시원하게 뚫어 주었고, 저는 다른 일정을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신문기사에서 뜻밖에 좋은 글을 찾았을 때도 ‘유레카’라고 하겠습니다.
평화신문 9월 10일자 지면에서 ‘갈등’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갈등이 무엇인지는 알았지만 그 어원은 몰랐습니다.
갈은 칡나무를 뜻합니다.
등은 등나무를 뜻합니다.
칡나무는 왼쪽으로 꼬는 습성이 있고,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꼬는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칡나무와 등나무가 만나면 좀처럼 풀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저는 내용을 읽으면서 갈등이 풀기 어렵구나라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이 역시 ‘유레카’입니다.
인간관계에도 참 많은 갈등이 있습니다.
교회는 인간관계를 꼬이게 하는 대표적인 것을 칠죄종이라고 합니다.
일곱 죄의 뿌리가 얽히고설키면 인간관계는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물론 하느님과의 관계도 멀어집니다.
대표적인 죄의 뿌리는 교만입니다.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 때문에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분노도 있습니다.
분노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인색이 있습니다.
부자라서 하느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유함에도 인색하기 때문에 하느님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시기가 있습니다.
시기 때문에 카인은 동생을 죽였고, 시기 때문에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나태도 있습니다.
기름을 준비한 처녀는 신랑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지만 게으른 처녀들은 신랑의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탐욕이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은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으며 함께 살아야 할 생명을 죽음으로 몰고 있습니다.
탐욕은 전쟁과 폭력의 원인이 됩니다.
식탐이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인병 중 대부분은 과식에서 시작됩니다.
음욕이 있습니다.
다윗은 음욕 때문에 충실한 부하 우리야를 죽음으로 내 몰았습니다.
이 갈등은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이 갈등은 어쩌면 숙명처럼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누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회개와 겸손은 갈등을 풀어내는 열쇠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루카복음 15장은 ‘회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그리고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유다와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배반의 결과는 달랐습니다.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베드로는 회개하였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베드로에게 교회를 맡겨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는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천사는 날개가 달린 생명체가 아닙니다.
천사는 이웃에게 ‘유레카’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얽히고설킨 갈등을 풀어주는 사람이 수호천사입니다.
주변을 보면 이웃의 아픔을 보듬어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수호천사입니다.
아름다운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수호천사입니다.
오늘 하루 이웃을 위해서 ‘유레카’가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이웃을 위해서 ‘수호천사’가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몇 년 전에 기분 좋지 않은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저를 화나게 했고 또 너무 억울했습니다.
글쎄 예전에 있었던 본당에서 제가 성당 돈을 많이 챙겼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냥 말도 안 되는 소문으로 넘기려고 했지만, 생각할수록 어이없고 억울했습니다.
당시 본당에서는 성당 옆 건물을 매입하느라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 상황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려고 외부 강사료, 방송 출연료, 그리고 책 인세까지 모두 성당 수입으로 넣었습니다.
혹시라도 신자들 부담을 줄 것 같아서 축일 행사도 단 한 번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당 돈을 제 것인 양 챙기는 파렴치한 사람으로 소문이 나고 있다고 하니 억울한 것을 넘어서 화가 치밀었습니다.
이 상황을 잘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저를 믿어주었던 많은 신자 덕분이었습니다.
잘 모르는 몇 명의 말에 신경 쓰지 말라면서, 대부분의 신자는 저를 믿는다면서 힘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저를 지켜주는 수호천사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다른 이에게 믿음과 희망을 전하는 사제로 더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할 수 있었습니다.
즉, 저도 다른 이의 수호천사로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예수님을 떠올린 것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억울하다고 화를 내던 저였지만, 주님의 억울함과 비교하면 저의 경우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신당하고 또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인 인간에게 억울한 판단을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당하십니다.
아무 죄 없는 분에게 죽을 죄를 지었다면서 난리치는 인간의 죄악에 얼마나 억울하셨을까요?
죄 많은 저의 경우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비난받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은 낮아지지 못하고 그만큼 나를 드러내려는 욕심 때문이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회개해서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어린이는 단순합니다.
이것저것 재면서 자기 이익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이지만, 자신의 그런 부족함을 인정하면서 어른을 따릅니다.
이렇게 단순하고 겸손한 모습을 갖춰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쉽지 않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수호천사가 필요합니다.
어렵고 힘든 이 세상 안에서 나를 믿어주고 희망을 전해 줄 수호천사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과 희망이 가득할 수 있도록 나 역시 다른 이의 수호천사로 힘껏 일해야 합니다.
수호천사는 사람을 선으로 이끌며 악에서 보호하는 천사라고 하지요.
따라서 악을 피하고 선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내 이웃의 소중한 수호천사가 될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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