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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 26일 월요일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제1독서 : 탈출 32,15-24.30-34
복 음 : 마태 13,31-35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31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32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33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34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35 예언자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학창 시절, 저는 승리 욕구가 너무 컸습니다.
지는 것이 싫었고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해서 이기려고 했습니다.
아마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이 마음은 신부가 되어서도 이어졌습니다.
2001년부터 인터넷에 묵상 글을 올리면서, 한동안 제 글에 대한 댓글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혹시라도 제 글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으면 온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지요.
묵상 글이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쓸데없는 욕망의 포로가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이 욕망의 포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새벽에 묵상 글을 올린 뒤에 전혀 확인하지 않으면서 부터였습니다.
제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에 다시 보지 않습니다.
고칠 내용이 있을 때도 있겠지만, 구독자들이 알아서 고쳐 보시겠지 라는 마음으로 넘어갑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순수한 마음으로 묵상 글을 쓸 수 있었고,
이렇게 20년 넘게 묵상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몇 달 전에 SNS의 라이브 방송 중 위험하게도 25층 높이의 아파트 난간에서 춤추다
추락사를 했다는 뉴스를 보게 되었습니다.
보여주기 위한 방송 촬영이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은 그렇게 행복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닌 주님께 보여주기 위한 삶을 산다면 어떨까요?
굳이 나를 드러낼 필요도 없고, 그저 사랑 자체에만 집중하면서 살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가장 작은 씨라 할 수 있는 겨자씨가 새들이 깃들이는 큰 나무가 되는 것처럼,
또 누룩이 밀가루에 들어가서 크게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하늘 나라는 우리의 작은 마음에서 시작해서 성장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마음은 세상의 마음이 아닙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하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으로 채우는
욕망의 포로가 되는 마음이 아닙니다. 대신 주님께서 늘 강조하셨던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경쟁적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아닌,
모두를 포용하고 함께하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에서 시작해서 하늘 나라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이런 마음이 주님의 시선을 끌 수 있습니다.
이웃을 향한 자그마한 배려,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행하는 따뜻한 말 한마디,
지금 어렵고 힘든 사람을 위해 바치는 나의 기도 등등….
우리의 작은 마음이며 작은 행동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눈여겨보며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작은 마음을 통해서 커다란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십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우리는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가라지의 비유”에 이어,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태 13, 31)
‘겨자씨’는 유다 문학에서 ‘작은 것’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합니다.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밭’에 심었을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게 됩니다.
마치 십자나무가 모든 인류를 품고 있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거창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가르치십니다.
아니, 오히려 가장 작은 모습으로 오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당신께서도 아주 작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라는 말에서,
“깃들다”(κατασκηνω)는 단어의 뜻은 “밑에 거주하다”
곧 “장막에 들어가다”,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곧 새들이 단순히 가지 위에 잠시 내렸다가 다시 날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안전하고 영속적인 거처를 마련하고 지속해서 거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교회’라는 혹은 ‘올리베따노회 수도 가정’이라는
생명의 말씀나무에 한 둥지를 틀고 사는 새 떼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미 한 그루의 생명나무입니다.
당신께서 뿌려진 생명의 씨앗이 자라나 사랑으로 피어난 나무입니다.
한편, ‘겨자씨의 비유’가 하늘나라의 외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
‘누룩의 비유’는 내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랑으로 반죽되는 것이 ‘누룩의 비유’입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들어가 자기의 능력을 전체에 돌려줍니다.
그러나 먼저 반죽되어야 하고, 섞여야 됩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묻혀 보이지 않지만, 결코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밀가루 속으로 들어가 섞일 뿐입니다. 그리고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룩을 밀가루 “속에” 집어넣었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이 누룩을 우리 ‘속에’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적은 양의 누룩이 자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갈라진 우리의 내부를 통합할 것입니다. 그렇게 성장시키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누룩이 되어 세상 속으로, 형제들 속으로 들어가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하여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시작된 것처럼 보이는 하늘나라의 복음은
세상을 해방하는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적은 양의 누룩이 가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말입니다.
또한 “집어넣다”(εγκρυπτω)는 동사는 “숨기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밀가루 서 말 속에 숨긴 누룩이 온통 부풀어 오르듯이,
하늘나라도 현재 숨겨 있는데 미래에 엄청나게 확장되리라는 전망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겨자씨가 이미 ‘우리’라는 밭에 뿌려졌고,
누룩이 이미 ‘우리 공동체’라는 밀가루 안에 넣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맘껏 자라나고, 맘껏 부풀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태 13,31)
주님!
제 안에 넣은 누룩이 제 속을 파고들게 하소서!
섞여들지 못한 까닭에 부풀어 오르지 못하지 않게 하소서!
제 안에 뿌려진 씨를 묻어두고만 있지 않게 하소서!
죽지 못한 까닭에 싹을 피우지 못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저는 친할머니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제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친할아버지는 기억하지만 추억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는 추억이 많습니다.
제가 사제서품을 받은 후에도 살아 계셨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 외가에 놀러 가면 할머니는 맛있는 것을 주셨습니다.
어머니가 밥장사를 할 때였습니다.
외할머니는 어머니가 안쓰러워서인지 자주 오셔서
반찬도 만들어 주셨고, 설거지도 함께 해 주셨습니다.
외할아버지는 말씀은 별로 없으셨지만 긴 수염을 쓰다듬으셨고, 농사지으신 것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두 분은 아직 세례는 받지 않으셨지만 제가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
신학교에 오셔서 축하해 주셨습니다.
외할머니가 마리아로 세례를 받으셨고, 나중에 외할아버지는 요셉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두 분 모두 고운 모습으로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고, 제가 장례미사를 하였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성품을 많이 닮았습니다.
그러니 어머니를 낳아주신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성품도 닮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성모님의 부모님이신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의 기념일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에게서 신앙인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마음에 담는 인내를 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품에 안으신 성모님을 봅니다.
그러나 모든 슬픔을 이겨내고,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는 성모님을 봅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모든 것을 맡기며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했던 순명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린 시절에 외가에 다녀왔을 것입니다.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도 어린 예수님을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셨을 것입니다.
신학은 철학적인 사유와 이성적인 판단을 요구합니다.
교회의 조직이 커지면서 교리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문화와 언어가 다른 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신학, 철학, 교리, 교회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오늘 교회가 성모님의 부모님을 기억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어 오셨고, 우리와 같은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2,000년 전에 나자렛에서 우리처럼 웃고, 울면서 사셨기 때문입니다.
지난봄에 심었던 모종에서 가지가 열렸습니다.
고추도 열렸습니다. 호박도 열렸습니다. 오이도 열렸습니다.
그렇게 여리고 작은 모종이었는데 직원들과 함께 먹고도 남을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작은 텃밭이지만 농사의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누룩과 같다고 하십니다.
작은 겨자씨 안에 하느님 나라가 있다고 하십니다.
작은 누룩 한에 하느님 나라가 있다고 하십니다.
농사를 해본 사람은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는 비유입니다.
겨자씨는 스스로 큰 나무가 되지 않습니다. 누룩은 스스로 부풀지 않습니다.
텃밭은 매일 물을 주어야 하고, 여린 가지가 기댈 수 있는 쫄대를 세워주어야 하고,
잡초를 뽑아 주어야 합니다.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정결, 순명, 청빈이 있어야 합니다.
근심, 걱정, 불안을 떨구어 내야 합니다. 욕망, 시기, 질투를 뽑아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심어진 신앙의 씨앗이 풍성하게 열매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한 주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늘 나라가 어떻게 시작해 완성되는지 보여 주십니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마태 13,32)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십니다.
그 시작이 너무 작고 미약해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일에 골몰하고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이들의 눈에는 감추인 듯 드러나지 않지요.
그런 씨앗이 흙과 물과 양분을 만나면 어떤 풀보다 크게 자랄 싹을 틔웁니다.
새들도 깃들일 수 있을 정도의 나무로 자라서 그 잎은 채소가 되고 열매는 향신료가 되지요.
눈에 띄지도 않을 크기의 씨앗만으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미래입니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마태 13,33)
또한 예수님은 하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십니다.
누룩은 음식에 섞는 첨가물로 일종의 발효제입니다.
곡식과 섞여 물과 온도의 조건이 갖춰지면 빵도 부풀리고 술도 만들지요.
누룩은 그 자체로 남지 않고 녹아 버리지만 타자와 섞여 그 가치를 배가시켜 줍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 나라를 선사하신 대목입니다.
"그 무렵 모세는 두 증언판을 손에 들고 돌아서서 산을 내려왔다.
그 판들은 양면에, 곧 앞뒤로 글이 쓰여 있었다.
그 판은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시 것이며,
그 글씨는 하느님께서 손수 그 판에 새기신 것이었다."(탈출 32,15-16)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사십 일을 지낸 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계약의 증언판을 들고 내려옵니다.
하느님께서 "손수" 판을 마련하셔서 그 위에 "손수" 새기셨다고 하지요.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애정이 얼마나 지극한지,
그리고 이 계약을 그분이 얼마나 설레이며 열망하셨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두 존재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일련의 관계성이 정립되어야 합니다.
아직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계명은 하느님과 관계 맺는 방식을 알려 줍니다.
하느님께서 일상의 삶과 신앙 생활에서 지키라고 손수 백성에게 내리신 선물이라 할 수 있지요.
모세가 받아 온 십계명 안에는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이어가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것,
그리고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금지들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계명은 백성을 옭죄고 규제하는 올가미가 아니라 '하늘 나라'라는 완성태를 품고 있는 선물입니다.
"아, 이 백성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탈출 32,31)
그런데 모세가 백성을 떠나 하느님 앞에서 지낸 사십 일의 부재 기간이
이스라엘에게 너무 길었던 걸까요?
그들은 이 선물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마음이 조급해져
다른 신을 만들고 그 앞에서 날뛰고 맙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이것이 우상의 특징입니다.
불변하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맞추어 그분을 닮아가다가
종래에 그분과 일치하는 길이 신앙의 영적 여정이라면,
우상은 자기의 욕구와 욕망에 따라 재단한 맞춤형 신입니다.
그래서 우상을 신의 자리에 놓기는 해도 실은 자신들을 위한 장치에 불과하지요.
우상은 하늘 나라를 이룰 수 없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상 자리를 꿰어 찬 재물과 권력, 정보와 지식, 외모와 장수는
신앙의 눈에 그저 허망한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걸 우리는 모르지 않지요.
반면 십계명이라는 선물은 하느님 나라의 시민권을 보장합니다.
하느님 자녀로서,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다 보면,
겨자씨처럼 또 누룩처럼 그 안에 감추어져 있던 하늘 나라의 실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이 세상 한가운데서 완성되어 가는 겁니다.
하늘 나라와 우상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지는 우리의 몫입니다.
하늘 나라는 잇속만 따지는 눈에는 보이지 않을 만큼 작고 미약한데다 느리기까지 해서
특히 현세적 삶에 능한 이들에게는 매력이 떨어집니다.
게다가 제 맘대로 살고 싶은 이들에게 따분하고 성가시기까지 하니
세상을 아우를 비전과 가치를 알아보는 눈이 없으면 딱 찬밥 신세일 뿐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십계명을 선물로 받은 우리는 비록 나약한 죄인이어도 하늘 나라를 품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오늘은 여기 걸려 넘어지고 또 내일은 저기 걸려 주저앉으면서,
번갈아 삐걱대고 절룩거리면서도 미숙하나마 마음속에 간직한 사랑 덕분에
하늘 나라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지요.
현재의 미소하고 불완전한 모습에 실망하거나 지치지 않고 나아가는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이룰 하늘 나라의 모습이 지금 우리 눈에는 희미해보여도
하느님은 그걸 선명히 보시면서 우리를 이끌고 계시답니다.
우리에 대한 그분의 기대가 곧 완성이고 또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니,
함께 힘내어 나아가기를 기원합니다.
인간은 비유로 소통해야 하는 삼위일체 구조로 되어 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며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겨자씨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그 사람 안에서 나무처럼 자라나 휴식 같은 친구가 되게 합니다.
또 성령은 밀가루 서 말 속에 넣어진 누룩과 같아서 그 사람을 온통 부풀어 오르게 합니다.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를 맺어
누구나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부드러운 빵이 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중요한 것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며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라고 하신
시편 구절을 인용합니다. 직역하면 “나는 비유로 내 입을 열리라.”입니다.
정말 비유를 통하지 않고서는 말씀하지 않으시는 본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느님은 왜 비유로만 말씀하실까요?
우리는 먼저 하느님 삼위일체의 신비스러운 구조를 이해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으시는 ‘아버지’, 그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성자’,
그 계시를 완성하시는 ‘성령’이 계십니다.
인간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하느님 모습을 따라, 영-혼-육으로 되어있는데,
보이지 않는 ‘생각’(혼), 그 생각을 표현하는 ‘말’(육),
그리고 그 말이 생각과 일치하게 만드는 ‘마음’(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 인간이 동물이나 나무와 소통한다면 굳이 말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언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온전한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온전한 소통을 위해서는 같은 구조를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소통할 수 있는 이유는 이렇게 ‘생각’과 같은 ‘아버지’,
‘말’과 같은 ‘성자’, ‘마음’과 같은 ‘성령’의 같은 구조로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담긴 말은 생각과 일치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담기지 않은 말은 생각과 다릅니다.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담긴 표현을 생각해봅시다.
어떤 할머니가 신부님 쓰시라고 돈 만 원을 비닐봉지에 싸서 몸 깊숙한 곳에 감추어 두었다가
몰래 손에 쥐어 준다면 그것은 단순히 돈 만 원을 주시는 행위일까요?
돈 만 원 안에는 할머니가 사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상대에게 주는 선물이나, 행위, 혹은 말에
마음이 담겨야 비로소 완전한 소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담긴 선물은 분명 보이지 않는 생각을 계시하는 비유가 됩니다.
하지만 개에게 그렇게 준다면 그 비유는 무너져 아무 쓸모 없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 안에 마음이 담겨있다는 뜻이고
우리가 그 비유를 이해할 수 있어서 당신 생각의 계시를 이해할 수 있는,
당신을 닮은 구조를 지녔다는 뜻입니다.
얼마 전에 한 자매님이 “요즘 성인들이 저와 함께 해 주신다는 것을 느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 자매님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것만 들어서는 좀처럼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제가 며칠 전에 친구와 새벽 5시까지 통화하다 잠든 날이 있었거든요.
그날은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의 축일이었습니다. 그 전날 딸에게
‘내일은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 축일이니 천둥이 칠 수 있으니까 잘 들어봐!’라고 했었어요.
그냥 그분들이 이야기할 때 스콜라스티카 성녀가 오빠를 보내기 싫어 기도했더니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치며 비가 내려 베네딕도 성인이 수도원으로 돌아갈 수 없었잖아요.
그런데 정말 아침에 딸이 저를 흔들어 깨우면서
‘엄마 정말 천둥이 치고 비가 왔어!’라고 하는 거예요. 저도 참 신기하다 여겼죠.
그런데 손목을 보니 제가 ‘스콜라스티카’ 성녀의 그림이 있는 묵주 팔지를 차고 있는 거예요.
제가 그 팔지를 차지는 않거든요. 전 세례명이 마리아인데요. 그래서 친구에게 신기해서 전화했죠.
신기하게도 내가 성녀의 팔지를 차고 있는데 정말 그분들이 표징을 보여주셨다고요.
근데 그 친구가 더 놀라는 거예요. 그 친구는 베데딕도 팔찌를 차고 있었던 거예요.
정말 신기하죠, 그쵸? 요즘 성인들 축일을 미리 기억하고 기도하였는데,
정말 그분들이 함께 계심을 느꼈다니까요?”
이렇게까지 말해주니 정말 성인들이 그 자매님과 함께 해 주신다는 것이 믿어졌습니다.
처음에 말만 들었을 때는 머리로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담기니 그것이 비유가 되는 것이고
그 비유 말씀을 들으면 머리만 건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건들기 때문에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 인격적인 소통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비유를 통하지 않으면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인격적 소통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타인과 소통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게 “힘내, 파이팅!”한다고 해서 힘이 날까요?
머리로만 전달하는 정보에 불과합니다.
마음을 건들려면 내 마음을 그 생각과 합하여 비유로 전달해야 합니다.
“게도 탈피하는데 그때는 죽은 것처럼 보여. 하지만 더 강한 존재로 새로 태어나잖아.
우리도 보이지는 않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는 거 같아. 조금만 더 힘내자!”
이렇게 말해준다면 그 사람은 힘든 상황에서
‘아,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구나. 그래 힘내자!’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제가 굳이 복음 묵상을 할 때 억지로라도 비유를 끼워 넣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비유를 찾으면서 저의 마음을 담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따지자면 성령이십니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온전한 계시가 되지 못하십니다.
만약 우리도 하느님 삼위일체 모습대로 살아간다면
모든 행동과 말에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하나의 비유가 됨을 잊지 맙시다.
이태석 신부님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 보이지 않는 계시 대상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자라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마음으로 혼과 육이 하나가 된 사람은 반드시 하느님 나라의 계시가 됩니다.
그리고 그 비유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에게
그 사람은 완전한 소통과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