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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live/dfrE8tIaHY8?si=teXwts2uxA-sGeIK
모세보다 우월하신 예수님 3:1~6
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2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3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를 기억하라 3:7~11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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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우리는 믿는 도리의 사도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종으로서 신실했던 모세보다 아들로서 신실하셨던 예수님이 더욱더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굳게 잡으면 그분의 집(가족)입니다. 그러니 광야에서 거역한 이들처럼 마음을 완고하게 하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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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보다 우월하신 예수님 3:1~6
하나님 아들 예수님과 비견할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이 모세보다 우월하심을 증명합니다. 출애굽의 지도자요 율법의 수여자인 모세의 권위는 유대교에서 절대적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신실하신 것처럼 모세도 신실한 일꾼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분에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집을 맡은 ‘아들’이고, 모세는 하나님 집을 섬긴 ‘종’(일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위대한 모세조차 경외할 대상이십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소망에 대한 확신과 자랑(긍지)을 굳게 잡는 성도는, 예수님 재림 날에 그분의 가족(집)으로 인정받을 것입니다.
● 더 깊은 묵상
예수님과 모세의 신분에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하나님 아들 예수님을 매 순간 깊이 생각할 때, 내 말과 행실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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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를 기억하라 3:7~11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과 모세를 비교한 후 모세 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를 언급합니다. 20세 이상의 출애굽 1세대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40년간 광야에서 유리하다가 멸망했습니다. 완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을 시험했기 때문입니다(민 14:22~23; 시 95:7~11).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그들은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 한 사람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안식, 즉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비극을 경험했습니다. 성도는 이스라엘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들을 때, 완고함을 버리고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굳게 붙들고 순종하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 더 깊은 묵상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내게 깨우쳐 주신 완고함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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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리더십 훈련
풀러 신학교의 클린턴 교수는 크리스천 리더십을 연구한 저명한 학자다. 그는 한 개인의 리더십이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는다면, 그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리더십 훈련’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것이 평생에 걸친 훈련이라고 한다. 지난 목회를 돌아보며 나는 하나님의 리더십 훈련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앨빈 토플러는 「권력 이동」에서 세상 사람들의 권력은 강제력, 경제력, 정보력의 순서로 발달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 나라에서 권위는 ‘섬김’에 있다고 강조한다. 섬김이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과 손실에 좌우되지 않고 주님만 의지하는 태도에서 나온다. 그래서 하나님의 리더십은 세상의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눈에 보이는 진전이 없다고 내 힘과 꾀를 동원해서는 안 된다.
목회를 하다 보면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도 있고, 때려치우고 싶은 분노의 순간도 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은 그 시간을 통해 나의 리더십을 훈련시키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 리더십, 은사, 능력을 올바로 행할 때 그에 합당한 보상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의 차원에서 자신의 리더십을 평가하고, 날마다 말씀에 순종하며 전인적 성숙으로 나아가야 한다.
영혼을 혁신하는 목회 리더십 / 정인수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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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히브리서 3장 8절
성도는 '마음의 굳어짐'(완고함)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그들에게 음식과 물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출 17:7)라는 질문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마음을 반영합니다. 마음이 굳어진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현장에서도 불신의 목소리를 냅니다. 사람의 마음은 수시로 굳어집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태도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유지하게 합니다.
그리스도 없는 삶의 종착지는 영적 파산이다. - 매트 천들러
오늘의 기도
하나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신실하신 예수님을 좇아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행하게 하소서. 완악하고 탐욕스러운 마음 때문에 믿음의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안식의 주인이신 주님을 깊이 묵상하며, 주님의 평안을 누리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85 구주를 생각만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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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을 지으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종인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더 큰 은혜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에게 부어졌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종이 아닌 주인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일이기에 완전하며 더 큰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그 안에 있는 것을 모두 누릴 수 있는 양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집의 모든 유익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시편 95편의 경고의 말씀이 우리의 불순종을 흔들어 깨우길 소원합니다.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려고 할 때마다 하늘로부터 오는 경고를 듣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잡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고, 불순종의 열매를 끊어 버리고
오직 신성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여하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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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 도다’ - 이스라엘 백성이 항상 마음이 미혹돼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미혹되다’라는 말은 ‘길을 잃는다’, ‘속는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동사의 수동태로, ‘잘못된 길로 인도되다.’, ‘현혹되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이 성경에서는 속아 죄 가운데 행하는 뜻으로 쓰입니다. 미혹 당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곧 배척하지 못하고 동의하는 것이지요. 그 순간부터 죄 가운데 행하는 것이 됩니다. 동의하는 것에 스스로 의지를 싣는 까닭입니다. 그 전형적인 예가 가데스바네아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12명의 정탐꾼을 보내어 가나안 땅을 탐지합니다. 40일 후 10명과 2명의 보고가 있었는데, 그것은 정반대입니다. 10명은 그 땅에 거인들이 살고 있으니 자신들은 메뚜기 같다고 합니다. 하지만 2명은 오히려 그들이 자신들의 밥이라고 합니다. 10명은 그 땅으로부터 미혹되었지만, 2명은 같이 보기는 했지만 그땅으로부터 미혹되지 않은 것입니다. 2명, 여호수아와 갈렙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더 신뢰하기에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혹됨이 증명된 장소입니다. 진리를 떠났기 때문에 속임을 당한 것으로, 동의에 따라 불신과 믿음이 분리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의 질문을 던집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답변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탄식의 말씀입니다. 그리곤 최종 언도를 내리십니다.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 것이고,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출애굽 1세대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40년간 광야에서 유리하다가 멸망했습니다.
완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을 시험했기 때문입니다(민 14:22~23; 시 95:7~11).
성도는 이스라엘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들을 때, 완고함을 버리고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굳게 붙들고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사람이 갖고 오는 미혹도 있고, 상황이 불러오는 불신도 있습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순간순간 이 싸움을 쉬지 않고 계속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그것은 질문도 아니고 답변도 아닙니다. 불신일 뿐입니다.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이 믿음이요 우리가 고백해야 할 신앙고백입니다.
불신은 단순히 믿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어느 것에 동의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갈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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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들으면(7절)… 내 안식에(11절) 들어오지… ”
모세는 그토록 신실했지만 광야에서 백성들은 불평하고 불신이 가득해 결국 약속의 땅,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안식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보내신 분의 뜻에 충성하는 사도로,
자신에게 맡겨진 백성들에게 신실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셨지만
그를 따르는 자들은 그를 깊이 가슴에 두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불신하여 마음이 미혹되었으므로
결국 그 영원한 안식에 거하지 못하게 된 것을 대비적으로 시편 95편을 통해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든지 ‘오늘(7절)’로 표현된 ‘매 순간’ 그분의 음성을 듣기만 하면,
그 마음 가운데 깊이 새겨지기만 한다면 그는 죄로부터 돌이키고 그분의 신실함에 합당한 믿음의 군사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회개는 돌이키는 것에 멈추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걸어가는 것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 돌이킴의 축복에 거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단단히 붙들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보다 탁월하시고 천사보다 탁월하시며, 모세보다 탁월하십니다
물론 모세가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민12:6~8)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보다 탁월하십니다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히3:3)
왜냐하면 모세는 종으로서 신실하였지만,
예수님은 아들로서 신실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신실하셨다는 겁니까?
모세가 모형의 하나님의 성전에 신실했다면,
예수님은 참된 하나님의 성전 곧 하나님의 집이 되는 우리에게 신실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집이라"(히3:6)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겸손히 순종하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3:7~8)
모세에게 하신 말씀도 견고하게 하셔서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듣지 않던 자들을 다 광야에 엎드러지게 하셨는데, 하물며 아들에게 하신 말씀을 듣지 않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세우신 대제사장 예수님을 더욱 깊이 생각하고 따르기 원합니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
그리하면 다윗에게 주신 확실한 은혜를 우리에게도 부으시고 우리 영혼을 살게 하실 줄 믿습니다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사55:1~3)
7절 :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성령님은 지금도 매일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시편을 '지금' 성령님이 이르시는(현재형) 말씀으로 보았고,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음성으로 여겼습니다.
주의를 기울여 말씀을 묵상하면 오늘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선명한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당장 눈앞의 고민을 해결해 주는 말씀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디를 지향해야 할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지 들려줍니다.
출처 : 매일성경 7/8월호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로만 읽지 않아야 한다.
그 안에서 주님의 음성 듣기 원한다.
세상의 소리가 너무 시끄럽다.
주님의 음성 듣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많다.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잘 구별하길 원한다.
주님의 말씀에 더욱 귀 기울일 수 있도록 힘쓰는 삶을 원한다.
7-11,15-19절 : 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하나님은 순종하지 않는 자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길을 거절하는 이를 안식으로 이끌지 않으십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해 시편 95:7-11을 인용했습니다.
이 시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히. 맛사)하고 거역 (히. 므리바)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안식의 땅 가나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으신 사건을 들어, 불신과 불순종을 경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시편을 주해하며, 하나님이 광야에서 죽게 하신 사람들은 하나님이 애굽에서 구원하신 사람들이었음을 강조했습니다.
이로써 '믿음의 길에서 이탈하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강력한 경고를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구원을 따 놓은 당상처럼 여긴다면 착각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 없인 구원도 없습니다. 그 삶이 구원받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 매일성경 7/8월호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것을 싫어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를 버리신다.
온전한 순종을 원하신다.
사울 왕에게도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셨지 않은가?
믿음이 삶으로 증명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나의 편리함 대로 하나님의 뜻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얼마나 많이 내 뜻을 더 앞세우는가?
회개할 일이 많다.
따지지 않고 무조건 순종할 수 있길 기대한다.
➲ 마음을 완고하게 하는 신앙적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7~11절).
7~11절의 본문은 시편 95:7~11을 인용한 말씀이며, 민수기 13~14장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사건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루신 역사의 한 단면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7절a)이었습니다.
또한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있었던 다양한 신앙체험과 반역과 불순종의 사건을 기록한 책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그들의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8,15,4:7절)..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하는 40년 동안, 하나님은 그들을 만나로 먹이시고 입히시며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매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의심하고 시험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수십 년 간 완고한 마음을 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의 완고함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10~11절)를 불러오게 된 결과를 만들어 내고 말았습니다.
‘완고하다’는 거칠다, 딱딱하게 굳어진 토양을 말합니다. 그러한 땅에는 말씀의 씨가 뿌려져 봐야 싹이 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내 자신의 몸을 움직이게 하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의 삶과 불순종의 삶의 문제는 나의 마음의 문제입니다. 외적인 상태를 바꾸려고 애쓰지 말고,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섬세한 영적 감수성을 유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광야 생활의 기적도 일상화되고 굳은 마음으로 바라보면 우리의 신앙에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내 자신의 외적인 모습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무시하려는 완악한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마음의 점검이 필요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1.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 제사장이신 예수(1)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십니다(1). 여기서 저자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선생도 아니며, 단순한 위인도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도요,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되십니다. 여기서 생각하라는 것은 단순한 예수님의 행적만 아니라, 그분이 우리에게 행하신 은혜의 일들(죄사함과 구원 등)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2.모세보다 더 영광을 받을 만한 예수(2-6a)
히브리사람들은 모세를 대단히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입니다(11:23-29). 모세는 하나님의 집(백성)의 일부분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백성)을 지은 자이십니다. 또 모세는 나타날 계시에 대한 증인이지만, 예수님은 구약계시의 완성자 이십니다.
3.너희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6b-19)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기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안식(구원)에 대한 약속이 주어졌다 하더라도 끝까지 믿지 아니하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출애굽을 경험하였고, 안식에 대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끝까지 믿지 아니하고, 원망하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래서 1시대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곤 아무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오늘날 너희가 그 음성을 듣거든 마음을 강팍히 하지말고 끝까지 믿으라"고 합니다.
여기서 오늘이란 영원한 현재로서 구약의 역사가 오늘 이 시대에도 교훈이 되고 적용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롬1:17을 연상시켜 줍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없고, 손에 잡히는 것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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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1절)
우리는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때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그분의 소원을 이루어 드려야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본분입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한번 생각하고 그만두는 것이 아닙니다. 이말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가지신 뜻과 생각을 깊이 묵상하여 그분의 이 땅을 향한 소원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그 뜻을 이루는데 온 힘을 다하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때 우리의 영혼은 살찌게 되고 우리의 삶에도 영적 활기로 가득차게 되는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의 삶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일로 인하여 날마다 생기가 넘치고 있는가?
2.충성된 성도(2-6졀)
구약의 모세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한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그에게 맡겨진 구속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까지 순종하시고 충성하신 분이십니다. 모세와 예수님이 다른 것은 모세는 하나님의 집의 종으로 섬겼다면 예수님은 그 집의 아들의 신분을 가지고 충성되이 섬기셨습니다. 결국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 충성된 일군으로 장래 오게 될 예수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실 구원의 바른 소식을 앞서 증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는 모세와 같은 충성된 마음으로 증거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천국 시민이기 때문에 이 땅에 사는 동안 더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충성된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에게 요구되는 가장 큰 하나님의 요구는 바로 그분께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하나님 앞에 지금 충성된 성도의 삶을 살고 있는가?
3.바른 고집을 부리자(7-9절)
오늘 성경에서는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을 시험하였던 것을 상기시킵니다. 그들은 마음이 강퍅하여져서 하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광야의 생활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여러가지 모습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옛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성경을 이러한 그들의 태도를 마음이 완고하다고 표현합니다.
다른 역본에서는 고집을 부리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죄성에 물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즐기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일에 마음을 쉽게 빼앗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하여는 항상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로 고집부리지 말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일에 고집스러움을 가지고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하나님을 잘 섬기고자 하는 고집을 가진 사람인가?
4.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10-11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된 길을 갈 때 그들을 향하여 탄식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충성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길을 이해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우리가 받은 구원이 가지는 힘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줍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에 이릅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조건도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 곳곳에서는 참 구원에 이른 백성에게 나타나야 하는 참된 증거들이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참된 구원의 사람들은 구원의 절대 가치를 인정하고 날마다 성령님의 음성에 민감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입니다. 참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아무런 값없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자입니다. 그 삶은 천국을 목적하고 사는 삶이 아니라 이미 받은 천국영생의 은혜에 감사하여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오직 하나님께 참된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됨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약속의 땅을 이미 받은 성도임을 확신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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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이 땅에서 설교하실 때 예수님의 제자는 그 설교말씀에 감동받고 끝난 사람이 아니라 그 설교에 따라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와 그 행하심에 감동을 받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는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천명, 수만명, 수십만명이 예배드리러 한 교회로 모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제자는 아닙니다. 감동받는 것으로 크리스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계속 감동받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감동받고, 세상에서 감동 까먹고를 단순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 형상으로 사람들을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종교심이 있는데, 그 종교심이 단지 감동받는 것으로 채워지고 믿는 사람인냥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드라마와 신앙의 차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 감동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배에서, 말씀에서 감동을 받기는 하지만 그것에서 끝납니다.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대장금’이라는 드라마가 최근 홍콩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홍콩 역사상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홍콩 사람들은 그 드라마를 보며 흥분하였고 신문들은 온통 그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니어도 대장금이 방송될 때는 그 드라마에 감동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그 감동이 다 사라졌지요.
아마 아니 분명 홍콩인들도 시간이 조금 흐르면 그 감동이 사라질 것입니다. 대장금은 드라마이기 때문입니다.
드라마는 그렇습니다.
드라마를 볼 때는 감동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감동이 사라집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감동받았다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드라마에 익숙한 우리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가 TV요,
그 TV에서 가장 인기있는 것이 바로 드라마인데
그 드라마에 익숙한 우리들은 어느새 신앙도 드라마처럼 대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에배를 드리며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 드라마에서 감동받은 것과 같아서는 안 됩니다.
드라마는 가상(fiction)입니다. 드라마는 감동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단지 감동받으며 즐기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예배 드리며 그의 음성을 듣는 것)은 실재(nonfiction)입니다.
단지 감동만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반응을 해야 합니다. 곧 지.정.의 모두가 움직여야 합니다.
드라마는 감정만 움직이면 되지만
예배는 우리의 지식(생각)과 마음(감정)과 의지(행동)이 다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단지 즐기는 것이 아니라 따라가야합니다.
내가 가는 길이 멸망의 길이라는 말씀을 듣고 감동받아서
“그래 우리라 말씀을 따라가지 않는 길은 멸망의 길이지 아주 크게 감동받았어.
어쩜 그렇게 설교잘하시냐”라고 말하면서 계속 그 길을 간다면 어찌 정상이겠습니까?
“아 그렇구나”가 아니라 당장 길부터 바꾸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차를 타고 가다 위험에 처하면 바로 헨들을 움직여서 길을 바꾸어야 하듯이 말씀을 들으며 바로 바꾸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1절) 3장의 말씀은 2장 뒤에서 ‘그러므로’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
그러므로’가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까?
그렇습니다. 앞의 것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는 앞의 것의 종합이요 요약입니다.
앞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구원을 가벼이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어난 참으로 신비하고 위대한 일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시대가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시대이기에 우리도 그 속에서 구원을 등한히 여기며 그렇게 파묻혀서 살기 쉽다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그 시대속에서 우리는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말고 이제 그 아름다운 구원을 얻고 그 구원을 이루어 가며 그 구원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구원에 대해 우리가 듣고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함을 들었을 때
이제 우리는 그 말씀에 따라 가야합니다.
그 말씀에 따라 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오늘 본문 1절에서는 무엇을 주문하고 있습니까?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NIV영어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너의 생각을 예수님께 고정시켜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에 대해 듣고, 이제 구원을 이루어가기를 소망한 사람은 그 다음 행동으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 분의 말씀과 삶을 묵상하며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그 분에게 고정시켜야 합니다. 세상의 수없이 많은 급하고 복잡한 일들 속에서도 그 분을 잊지 않도록 그 분께 우리의 마음을 고정해야 합니다. 그 분은 최상의 가치를 가지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이 우리의 가장 절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상의 가치에 최상의 마음을 두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의 음성을 들었을 때 우리가 해야 하는 것에 대해 말씀은 몇가지 더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6절)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 분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충성하셨습니다.
충성은 신실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저는 군에서 군목으로 있었는데 군인들은 항상 충성하고 인사를 합니다.
군대는 충성이 생명입니다.
어떤 사명이 있는 사람은 충성해야 합니다.
충성하지 않으면 그 사명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들은 구원의 말씀에 충성해야 합니다.
구원이 무엇인지를 들었고, 그 구원을 우리가 이루어 가야 하는 것을 들었으니 우리는 그것에 충성해야 합니다.
우리의 전 인생을 두고 충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망각을 잘합니다.
그래서 신앙도 잊을 수는 있습니다.
드라마는 행동하려고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동하려는데 잊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 행동을 위해서 생각하고 계획하고 열심내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하면 할수록 더욱더 그래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법칙 아닙니까?
중요하면 할수록 메모도 하고 그렇게 행동하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충성해야 합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13-14절)
그의 음성을 우리가 들었을 때 그것을 인내하며 이루어 가기 위해서 우리는 성도의 교통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는 연약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를 지탱해줄 옆 사람이 필요합니다.
가정에서는 부부가 있듯이, 신앙에는 교회가 있습니다.
성도들은 매일서로 피차 권면하며 우리가 듣고 깨달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살아야 합니다.
다른 성도의 눈치도 보면서, 어떤 사람은 목사님 보고 예배에 나옵니다.
예수님 보고 교회에 나와야 하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이해하시 것 같은데 목사님은 마음 아파하실 것 같아 교회에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 것들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성도의 교통를 교회의 핵심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하고 싶은데 행동이 안 된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의 그런 상태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26:41) 그렇다면 우리는 그렇게 육신은 항상 실패하며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힌트가 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그렇습니다. 깨어 기도하면 육신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육신의 잠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조금후에는 육신의 안위를 위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을 갑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활을 알고 믿음을 더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마음으로만 원인 것이 아니라 육신으로도 따라가는 제자들이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숨을 다하여 헌신하였고 결국 순교함으로 그들의 믿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따라주지 않는 믿음에 대해 “다 그렇지 뭐”라고 합리화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연약한 믿음에 대해 애통해해야 합니다.
우리도 연약한 것 같은데 하다보면 어느새 아주 단단해집니다. 수고하고 수고하며 조심스럽고 어렵지만 행동하다 보면 아주 튼튼한 거목이 됩니다. 마치 산정상을 보면 너무 멀지만 한걸음씩 가다보면 어느새 정상에 올라있는 자신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은 되는데 행동이 안 되는 사람은 행동이 약해서가 아니라 아직 마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중 시험 잘보고 싶지 않은 학생있습니까?
반에서 한 두명 아주 이상한 아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나머지는 다 시험을 잘 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누구는 성적이 좋고 누구는 성적이 좋지 않습니까?
그것은 마음의 강함에 달려있는 것 아닙니까?
시험성적이 나올 때만, 일시적으로 시험을 잘 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공부를 못할것이요,
그 마음을 강하게 먹어 계속 공부를 하는 사람만이 공부를 잘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우리가 예배중에만 마음만 먹을 것이 아니라 마음을 먹었으면 그 것을 위해 계속 수고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처럼 우리는 예수님께 계속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한순간에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그 분께 고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말씀을 묵상해야합니다.
예배드리며 깨달음이 있을 때 그것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의 음성을 들었을 때 우리는 그 앞에 꿇어 엎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한 것에 헌신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듣고 깨달은 일에 우리의 마음이 진정으로 진리라고 고백하는 일에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상의 드라마처럼 대하지 말고 참으로 진리로서 대해야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 인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 분을 더 깊이 묵상하며 깨어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드리마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 반응하는 예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천국에 대해 듣고 감동한 사람이 아니라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길이 되어 주시고 생명과 평안의 손길이 되어주시는
측량할 수 없는 사랑과 구원의 은혜에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날마다 깊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 음성에 겸손과 순종으로 반응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의 곳곳마다 기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풍성하게 공급하여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사
회복과 치유의 은혜로 덮어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오직 아버지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구하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