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테를 위한 변명
그의 일생은 어느 여름날 심심해서 던진 물수제비의 흔적이 아니었다 그건 나무의 울음이었다 나무가 울고 간 파문이었다
붙박인 삶이라고 사는 것이 고마고만한 나무는 슬프고 괴로울 것 없을 것이라 단정하지만 뿌리는 하루에도 몇 리를 물 길러 나갔다 와서 끙끙 앓는 것이었다
생이 아파 우는 것이었다 저 수만 마리 이파리들 뙤약볕 아래 나와 아우성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우듬지에 새의 둥지를 무상으로 세들이고 바깥소식을 듣긴 하지만 저 산 너머가 궁금하여 마음으로 가서 세상을 읽고 오는 것이었다
한 덩이 파문을 던져보는 것이 소원인 나무는 인내심 많은 시인이었던 것이었다
- 나석중 -
나이테란 나무를 가로로 잘랐을 때 보이는 동심원 모양의 테를 일컫는 말이다. 나무의 줄기가 굵어지며 계절에 따라 성장 속도가 다르기에 생긴다는데, 대체로 봄과 여름에는 물이 충분히 공급되니 성장이 활발하여 세포벽 부피가 크기에 색이 연하고 면적이 넓단다. 이 부분을 춘재라 부른다. 그러나 가을부터는 성장속도가 감소하여 세포벽이 두껍고 부피가 작으며 조직이 치밀하고 색이 진하단다. 이 부분을 추재라고 부른다. 이렇게 연한 조직과 짙은 조직이 번갈아 만들어져 동심원 모양의 테를 만들게 된다고 한다.
나석중의 시 <나이테를 위한 변명>은 이러한 나이테가 생성되는 과정 속에 나무의 마음을 읽고 있다. 나무의 삶의 기록이라 할 나이테는 ‘어느 여름날 / 심심해서 던진 물수제비의 흔적이 아니었다’고 한다. 즉 물수제비가 만들어내는 수면 위 무늬는 장난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시 속 화자의 말에 따르면, 나이테는 ‘나무의 울음’ 즉 ‘나무가 울고 간 파문’이라는 말이다. 파문(波紋)이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는 파도가 만들어 내는 무늬이지만 나이테를 파문이라 말할 때에는 단순한 ‘물수제비의 흔적’이 아니라 나무의 울음이 만들어낸 성장 기록이란 뜻이리라.
동물과 달리 나무는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지 못한다. 그러니 ‘붙박인 삶’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나무들을 ‘사는 것이 고마고만한’ 것들이라 인식하며 나무에게 특별히 ‘슬프고 괴로울 것 없을 것이라 단정’한다. 그러나 시 속 화자는 다르게 인식한다. 즉, 나무의 ‘뿌리는 / 하루에도 몇 리를 물 길러 나갔다 와서 / 끙끙 앓는 것’이란다. 그것은 바로 ‘생이 아파 우는 것’이요, ‘저 수만 마리 이파리들 뙤약볕 아래 나와 / 아우성치고 있었던 것’이라 한다. 비록 나무줄기는 그 자리에 붙박인 것일지 몰라도 뿌리는 물을 찾아 하루에도 몇 리를 움직여 영양분을 공급한다. 그 물을 먹고 자란 수 만 잎들은 활발히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뿐이 아니다. 나무는 맨 꼭대기 줄기 즉 ‘우듬지에 / 새의 둥지를 무상으로 세들이고 바깥소식을 듣긴 하지만 / 저 산 너머가 궁금하여 / 마음으로 가서 세상을 읽고 오는 것’이란다. 즉 붙박이 삶이라 하여 우물 안 개구리는 아니라는 뜻이다. 가지 끝에 세를 준 둥지에 사는 새들이 멀리 날아갔다가 돌아와 세상 소식을 전해주기도 하지만 나무는 마음만이라도 새들을 따라 넓은 세상과 소통을 하고 있다는 말이리라. 여기서 화자는 몸은 붙박이일지라도 넓은 세상을 향해 ‘한 덩이 파문을 던져보는 것이 소원인 / 나무’를 ‘인내심 많은 시인이었던 것이’라 인식한다.
그런데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이 시를 보면 어떤 경우 마지막 행이 안보인다. 즉 ‘한 덩이 파문을 던져보는 것이 소원인 / 나무는’ 하고 끝난다. 마지막 행은 아예 없다. 물론 나무는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시인이 시 속에 직접 토로하는 것보다 마지막 행 없이 ‘나무는’으로 끝날 경우 시 내용을 토대로 독자들은 상상을 하게 된다. 그것이 오히려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시인이 발표 후에 마지막 행을 생략하여 수정했는지 아니면 네티즌들이 빠뜨렸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느 경우라 하더라도 시를 이해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다. 시인이 처음에는 마지막 행까지 발표했다가 나중에 의도적으로 생략한 것이 아닐까. 게다가 ‘이었던 것이었다’는 어법에도 어색하다. 시의 표현 기법으로 볼 때에 마지막 행이 없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그렇다면 나무는 무엇일까. 시를 읽다 보면 시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직장에 매여 있으면서 궂은 일 마다 않고 열심히 일하며 가족을 부양하는 이 세상의 아버지들로 보인다. 직장에서 매월 따박따박 월급이 나오니 걱정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속내를 보면 꼭 그런 것이 아니다. 몸은 직장에 매어 있어 어디 움직이지도 못하지만 뿌리는 먼 곳까지 왕래하며 돈을 벌고 마음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 - 그렇게 살아온 연륜이 얼굴에 그대로 남아 그것이 곧 나무의 나이테가 된 것이 아닐까.
시의 제목이 ‘나이테를 위한 변명’이지만 결코 변명으로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나무에 대한 찬사 아니 이 세상 아버지들에게 바치는 ‘헌시(獻詩)’로 느껴진다. 가족을 위해 흘리는 땀과 눈물 그리고 온갖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파문처럼 얼굴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바로 나이테가 아닐까. 시를 읽다가 문득 가슴이 먹먹해진다. ♣
- 이병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