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카페 게시글
詩의 아뜨리에,.. 애송시 스크랩 미조항 남흥여객 남미식당 남미여관에서 일박 - 길 3 / 고성만
동산 추천 0 조회 53 13.05.14 08: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미조항 남흥여객 남미식당 남미여관에서 일박 - 길 3 / 고성만

 

 

침묵은 또 다른 말

바람은 또 다른 음악

결과 결 사이

무반주 첼로 소리 들린다

 

구불구불

논둑 밭둑 따라

끊어질 듯 이어지는 해안선 따라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마을의 이름 두곡 월포 사촌 설리

봉오리처럼 피어

갈매기처럼 내려앉는 기억들

 

- 오늘 내가 본 것들은 이미 오래 전에 본 듯한 것들이다

 

바다 안개 힘겹게 헤치며

다가온 남흥여객에 올라

배들이 순한 표정으로 묶인 미조포구에 도착

웬 변덕인지

삼겹살 먹고 싶다는 사람 있어

남미식당에서 저녁식사

삐걱거리는 나무계단 위 남미여관에서 일박

 

자다 깨어

대답 없는 바다를

가만히 불러보았다

 

 

 

 

 

 

 

************************************************

 

섬세한 덧칠 혹은 덜어냄의 흔적


-고성만 시인, '느림'과 여백의 시 세계

젊은 날에 시심을 가지고 누구나 한두 편의 시를 쓸 수는 있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 시절에 시심을 느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는 하여도 시심을 느끼는 누구나

시인이 되지는 못한다.

시인이 된다는 것, 그것을 나는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시인이 되기 위해선 타고난 특별한 재능이 구 할

이상이라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한 문학적 정열과 부단한 노력만으로는 이루어질

없다는 말일 것이다. 어찌 보면 천부적 재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운명론적인 얘기 같지만 나는 시인이란 차라리

숙명적 존재라고 말하고 싶다. 고성만 시인의 경우도

그렇게 보여진다.

한때 열렬한 문학 청년이었던 그가 십 년도 넘게 시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가 1998년 《동서문학》의 신인상에

시가 당선된 것을 보면 시인의 길이란 숙명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나는 그의 원고를 세 번, 네 번
정독했다.

그런데 번번이 나는 그의 시들이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에 적잖이 곤혹스러웠다.

내가 제대로 읽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그의 시들은 한 번

읽는 것만으로 쉽게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시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이상하게도 그의 시들은 읽을

때마다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짤막한 시일지라도 한 편의 완성을 위해서 거기에 부어 넣은

색깔이 다른 시간들, 섬세한 덧칠 혹은 덜어냄의 흔적이

한눈에 전체를 열어주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였다.
「올해 처음 본 나비」만 해도 그랬다.


그 해
처음 본 나비에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내 어릴 적 친구가
말했지

지금까지 먹었던
음식을 잊고
지금까지 해왔던
말들을 모두 잊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까맣게 잊고

얼룩진 세상
얼룩나비를 따라
얼룩얼룩얼룩……
날아가네


―「올해 처음 본 나비」전문



봄이 되어 그 해에 처음 본 나비에게 자기 마음속의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시의 이면에 감춰진

서정적 자아는 친구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과거를 잊어버린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나비에게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모든 과거의 기억을 잊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얼룩진 세상사를 잊어야 하는 일, 어디

그게 쉬운 일이겠는가. 마음속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의 시선은 저만큼 날아가는 얼룩나비

(호랑나비를 작자는 '얼룩'의 함의를 고려하여 얼룩나비

라고 부른 것이리라.)의 뒤를 얼룩얼룩 따라간다.

아울러 이 시의 마지막 행 '날아가네'는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나비를 따라서 서정적 자아의 눈물겨운 간절한

마음이 날아가는 것이기도 하고 얼룩나비가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마치 다리를 절 듯이 얼룩얼룩 날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비라는 존재를 대체로 죽은 사람의 현신으로

보는 무속적인 해석도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다.

'얼룩얼룩얼룩'이라는 의태어에서 '얼룩진 세상'이

곧바로 유추되었을 것이겠으나 이 말에서 묘하게도

눈물과 상처 같은 뉘앙스가 파생되고 있다.

눈물과 상처라는 아픈 과거를 지닌 서정적 자아가

올해 처음 본 나비에게 문득 소원을 빌어보고 싶은데,

그 소원의 정체를 미처 밝히기도 전에 나비는

안타깝게도 멀리 날아가버린다.



보았던 듯 전혀 본 적이 없는 듯 검은 가방을 메고

숲길을 걸어간다 아버지가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러

왔다가 고기 냄새 밥 냄새가 진동하는 이 도시를

떠나는 중일까

샌들 밖으로 나온 발뒤꿈치가 하얗다

크로마 하프처럼 울먹이는 어머니를 구하러 왔다가

화음이 맞지 않는 노래를 들으며 섬으로 가고 있는

중일까

서늘한 이마를 닮은 듯 전혀 닮지 않은 듯 천천히

 

―「섬, 검은 옷의 수도자」전문



이 시 속에는 검은 가방을 메고 숲길을 걸어가는 행동의

주체가 구체적으로 누구라고 밝혀져 있지 않다.

제목을 통해서 그 인물이 검은 옷을 입은 수도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독자를 당혹하게 하는 첫 행과 끝 행의 시구에도 깊은

탐색의 시간이 필요하다. '보았던 듯 전혀 본 적이 없는

듯'과 '서늘한 이마를 닮은 듯 전혀 닮지 않은 듯'한

긍정과 부정이 읽는 이의 가슴에 오래 두고 음미해야

하는 시간적 여유를 가지게 만든다.

세속적인 냄새만이 진동하는 도시를 떠나 섬으로 가고

있는 수도자(신부, 수사, 혹은 수녀). 종소리를 울리는

아버지나 크로마 하프처럼 울먹이는 어머니는 풍경

밖에 있는 관찰자 위치의 서정적 자아의 상상일 뿐이다.

수도자의 손에 들린 검은 가방과 발꿈치를 드러나게

하는 샌들. 그는 지금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다.

끝 행의 마지막 부사 '천천히'는 그 이전의 '가고 있는

중일까'에 걸리면서 동시에 첫 행의 '…숲길을 걸어간다'

에도 의미 심장한 관계를 맺고 있다.

흡사 안에서 뻗어나간 길을 주욱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바깥 길로 나서게 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러면서

그 길에서는 희미하게 음악이 들린다.

종소리와 크로마 하프 같은 울먹임, 그리고 화음이 맞지

않는 노래. 극도로 절제된 여백의 표현에서 풍기는

긴장을 이끌고 검은 옷의 수도자가 지금도 천천히

가고 있다. 아, 그는 어쩌면 시인 자신의 내면적 존재의

투영일는지도 모른다.

고성만의 시는 대부분 밝고 부드럽다.

햇살이 밝게 풍경을 빗어 내리는 십구 세기 인상파 화가들

그림처럼 그의 시에서는 고통조차 밝게 형상화된다.

경험적인 대상에 함부로 몰입하지 않고 얼마간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시인의 자세에서 연유된 것일까.

그런 점에서 "훌륭한 문학은 애정 어린 눈길과 동시에

초연한 시선으로 삶을 눈여겨본다.

그것은 경험에 토대하고 있으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경험과 거리를 둔다."고 한 리차드 호가트의 고전적인

말을 떠올리게 한다. 고성만 시인의 개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시들이 이런 유형에 속한다.



낮은 집의 처마가
들썩거린다
흔들리는 대숲을 파고드느라
시끄럽게 우는 새들
햇살이 와서 문지르자
보푸라기처럼 일어나는
개나리 목련
늘그막 아주머니의 손에 들린
털이 복실한 강아지
(저것은 나 아닌가?)


―「초봄, 환각」 부분



이제 그만
나뭇가지는 흔들릴까
명새 울다 날아가면
산은 아주 천천히 물러나서
마을의 입구는 넓어지고
뜰 밭이 있는 집들은 고요하다


―「아침의 뿌리」 부분



거기도 눈이 와요? 아침 일찍 흰 꽃잎을 안고 팔짝팔짝

뛰어 유치원에 간 아이에게 빨간 털장갑을, 여직 귀가

시린 어린 시절의 나에겐 산토끼 귀마개를 선물해주고

싶은 오늘


―「첫눈」 부분



이 밖에도 「여름 꽃밭에서」, 「길 끝의 집」, 「작은 다리」,

「햇살의 꽃」, 「오후의 산책」 등과 같은 많은 작품에서

그의 빛나는 개성을 엿볼 수 있다.

햇빛 아래 드러난 밝고 아름다운 세계를 정감적인 색채로

그린 끌로드 모네나 독특한 점묘법으로 포근하고 아늑한

풍경을 펼쳐내는 쇠라의 그림처럼 고성만의 시들은

부드럽고 평화롭다. 이러한 부드러움은 읽는 이에게 한없는

위안과 잔잔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그의 시에서는 서정적 자아마저도 시 속에서 소품처럼 맑고

앙증스럽게 표현되고 있는 것을, 예로 들어보인

「초봄, 환각」, 「첫눈」에서 찾아보기에 어렵지 않다.

"아주머니의 손에 들린/ 털이 복실한 강아지/ (저것은 나

아닌가?)"라든가 "여직 귀가 시린 어린 시절의 나에겐

산토끼 귀마개를 선물해주고 싶은 오늘"이 바로 서정적

자아마저 대상화한 표현들이다.

"명새 울다 날아가면/ 산은 아주 천천히 물러나서/ 마을의

입구는 넓어지고" 같은 표현은 아무나 쉽게 얻어낼 수 있는

이미지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사랑과 통찰이

결부되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람 자는

저 혼자 무늬 지는 물위로 하교 길 자전거 지나간 후

기억하고 싶은 나를 건너가는" 「작은 다리」혹은

"유모차를 밀거나 손지갑을 든 여인들이 새로 생긴 할인점을

향해 아파트 단지 앞 도로를 지나갔다가 천천히 돌아오는

길"을 보여주는 「오후의 산책」 같은 시들은 점묘법을

구사한 쇠라의 어떤 그림들을 미소 속에 떠오르게 한다.

1980년 광주 민중항쟁 당시 고성만은 고등학교 2학년생

이었다고 한다. 광주에 살면서 열여덟 살의 그가 겪은

광주 민중항쟁은 어쩌면 어린 나이의 그에게 커다란

부채가 되었던 것 같다.

1993년 《광주매일》신춘문예에 당선된 그의 시 「고부에서

보낸 일 년」을 비롯하여 「녹두를 거두며」, 「미성년」,

 「오동꽃」과 같은 시들이 그의 핏속에서 용해되어 빚어진

초기의 작품들이다. 피카소의 유명한 걸작 게르니카를

연상케 하는 광주 민중항쟁은 「고부에서 보낸 일 년」을

볼지라도 그 생체험의 역사는 충분히 발효되어 시적

형상화를 획득하고 있다.

조금 사정이 편안한 집의 노인들은 댕기꼬리 앙증맞은

애새끼들 복 주머니에 쌈짓돈을 채우면 잘 익은 밤이

새하얀 덧니를 드러내고 우물이란 우물은 모조리 덮어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대숲에 일렁이는 강바람은 홀로 떠 있는 나룻배의 돛을

흔들어 스스로 깊어지게 한다 눈은 그쳤다 지붕 위에

바큇살을 내며 얹혀 있던 우마차의 바퀴를 내려 거룩한

아침으로부터 아직은 언 강 깨뜨려 청청 방망이질을

하는 성스러운 손으로 天上의 영롱한 빛살을 푸는

아라크네의 베틀아


― 「고부에서 보낸 일 년」 부분



우리의 전통적 이미지들이 펄펄 나는 듯한 운율에 실려

다채롭게 펼쳐진 이 시는 그러나 세부적인 묘사에도

소홀함이 없다. 마치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들처럼.

대체로 이 시는 그리스 신화 속에 아테나 여신과 베짜기를

겨루다가 거미가 된 여인 아라크네만 달리 표현되었더라면

좋았으리라는 아쉬움이 있으나 대단히 장쾌하고 열정적인

시임에는 틀림없다. 동학 농민운동의 발원지였던 '고부'와

'광주'사이의 상징적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매달려 있으면 덧없는 세상
맛도 소슬한 된장을 끓이는
식탁에 오르면
호구는 지척인가 무청을 엮으며
허투로 엮은 꿈이
색 바랜 누런 겉 이파리
세상의 종말에 오는 것은
새끼줄이 아니냐
짚으로 엮은, 이 짚으로
튼튼하게 엮은 밧줄을 잡고
호구의 뱃전을 기어오르면
세상은 뱃속 편한 사람들만 남아
이리저리 뒹구는 포만이냐
뱃속 불편한 동포들의 입맛을 돋구는
시래기냐
시래기의 죽은 혼이냐


―「무」 부분



시인의 초기 시에 해당하는 이 시 역시 숨가쁜 운율이

넘쳐난다.

겨울철의 저장 무에서 '매달려 있으면 덧없는 세상'의

역사 의식을 풀어내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서두터 일기」,「녹두를 거두며」, 「오동꽃」,

「미성년」 등 초기의 시가 민중적 삶을 힘찬 운율에 담고

있었다면 근년에 이를수록 그의 시는 더욱 담백해지고

'느림'에 열중하면서 감정과 의미를 절제하여 여백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격렬하고 빠른 템포의 운율은 자연히 힘찬 열정의 표현일

것이며 담백하고 느린 운율은 조용한 내면 성찰과 관조의

세계로 몰입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만큼 그의 시의 대지에 더 많은 성숙의 햇살이 스며들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느림'에 곁들여지는 여백의

표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은 읽는 이에게

폭넓은 상상의 공간을 확보하는 기능을 발휘한다

할 것이다.



황금빛 보리 이랑 출렁이는
들녘에 나와
서보는 저녁이 있다
짓다 만 땅도
두고 온 집도 없으면서
도시 근교 들녘에 나와
괜히 서성거려보는 저녁이 있다
자전거를 타고
장화를 신고 돌아가는
사람들 틈에 섞여
여름 다 됐어
모내기는 언제 끝내나
아카시아 숲에선가
밤나무 골짜기에선가
코끝을 스치는 진한 꽃향기
푸르게 퍼지는 어둠 속
하나 둘 별들 데불고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처럼
봄의 지도를 흘러
메마른 들녘으로 들어가는
그런 저녁이 있다


― 「들녘에 흘러 들어가는 물처럼」 전문



이와 같은 시가 최근에 그가 추구하는 '느림'의 세계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예가 될 것 같다.

이 시 속에는 도시 근교의 가난한 사람들―

박한 농민들이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고 있다.

익어 가는 보리 이랑, 자전거를 타고 돌아가거나

들일을 마친 사람들이 장화를 신고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 무렵. 모내기를 걱정하는 그들의 말투에서 하지만

조금도 서두르지 않는 기색이 엿보인다. 

"떠돌이처럼/ 봄의 지도를 흘러/ 메마른 들녘으로

들어가는/ 그런 저녁"의 풍경이 느긋하고도 아름답다.

시에서 하나의 소도구로 쓰여진 자전거(「작은 다리」,

「길 끝의 집」, 「푸른 나무 그늘 밑의 자전거」에서도

'자전거'를 볼 수 있다.)라는 사물만 해도 '느림'의

여유로운 풍경과 아주 잘 어울린다. 허겁지겁 비정한

죽음의 속도로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날쌘 승용차들

대조적으로 자전거는 얼마나 인간적이며 여유로운

삶의 도구인가.

 

늦봄 저녁 무렵 푸르게 퍼져 가는 어둠 속에 코끝을 스치는

아카시아 향기, 밤꽃 향기가 가슴속까지 상큼하게 채워주는

이 시는 단순한 서경을 넘어 천천히 살아가지만 순박한

삶을 참되게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빈혈」에서도 "멀리/ 오래/ 퍼져 가는 종소리// 울타리

에서는 하루 종일/ 탱자 꽃이 지는데/ 흰 블라우스를 입은

선생님이/ 아이들을 끌고 지나가"는 묘사적 정경 역시

애잔한 구도 속에 '느림'의 사색적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고성만의 최근 시들 가운데 설화적 모티브를 지닌 몇 편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설화라는 서사 구조가 시의 형식 속에서 자칫하면 시의

서정성을 파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전혀 위태롭지 않은 균형을 유지한다.

그의 초기 시에 해당할 「초여름 장마」에서 "오늘도

포구엔 배가 들었다 안강망 그물에 걸린 삼십대 남자와

여자는 가매장을 한 후로 가족들이 다시 장례를 치른다며

꽃상여를 사다가 어허 어허 어허야 어허…… 두 번을

죽고"와 같은 설화적 요소가 이미 발아하고 있었지 않나

싶다.


'우리 동네 설화'라는 부제가 붙은 연작시 세 편, 「흉터」,

「벙어리」, 「곱추」와 「겨울」, 「밤비」가 곧 설화적

모티브를 지닌 시들이다.

대패로 밀고 먹줄을 튕기며 장롱을 만드는 목수의 가정을

밀도 있게 그려낸 「흉터」, 제 손등을 물어뜯으며 우는

벙어리의 슬픔을 그린 「벙어리」, 화재와 죽음의 비극적

사건이 내재된 「곱추」 등에서 사뭇 표현의 여백이

강렬한 비장미를 띤다. 하지만 이 연작들은 하나의 정서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여백이 성급한 독자에게는 약간

불편을 줄 수도 있는 흠을 지니고 있다.
읽는 이에게 상상의 공간을 자유롭게 확장시켜주면서

서사 구조의 위험성을 완화하며 서정성을 강하게

발휘하는 시로서 단연 일품은 다음과 같은 시이다.



파란만장한 사내가
방안으로 들어와
머리맡을 밟는다

산목(山木)을 베러 떠났던 지아비
자진모리를 안고 살아가는
아낙의 머리채가 풀어져
진양조로 흘러내린다

기다려도
오지 않던 이

홀로 떠나가선
돌아오지 않던 사내가
아낙의 풀어진 가슴을 쓸어모아
방안으로 들어온다


―「밤비」 전문

처음 읽었을 때는 오래 전에 떠나갔던 지아비가 돌아와

아낙의 머리채를 잡고 못된 난동을 부리는 이야기쯤으로

읽혔다. 그러나 거듭 두 번, 세 번 읽어보니 내가 처음

읽은 것이 잘못 되었음을 깨달았다.

가난하고 불우한 부부가 살았다. 지아비는 돈을 벌러

산중으로 벌채하러 떠나가고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지아비는 함께 살아오면서 때로는 아내의 머리채를

휘어잡기도 하던 못된 사내였다. 그런 지아비이건만

착한 아내는 그를 그리워하며 기다린다.

자진모리 가락의 가파른 삶을 살아가는 아낙의 기다림

끝에 문득 하나의 환상이 피어난다. 장대처럼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밤, 그 빗소리는 어느 순간 아낙의

머리맡을 밟는 지아비의 발자국 소리의 환청으로

들린다. 기다림과 비, 그리고 비극적인 여인의 삶이

눈물겹게 그려진 시이다.

삼십년대 백석(白石)의 시 「여승」에서 맛보았던 감동과

어지간히 비슷하다. '비'와 '사람'을 동일시하는 시인의

감성이 예민하다.
청년기의 격정적인 운율과 전통적인 이미지를 거쳐 고성만은

이제 호수처럼 잔잔한 관조와 표현의 절제를 통한 여백의

아름다움, 그리고 '느림'으로 사람살이의 참다움과 순박함을

보여주는 시 세계에 이르고 있다.

 

앞으로 그의 시가 어떤 변모를 가져올는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다져온 탄탄한 시적 형상화를 토대로 좀더 깊은 삶의 의미를

추구할 것을 기대해 본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