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암 조광조(1482~1519)
조선의 정치가. 교리, 부제학, 대사헌 등을 역임한 사상가이며, 유학자이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菴),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개국공신 조온(趙溫)의 4대 손으로 조육(趙育)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조충손(趙衷孫)이고, 아버지는 감찰 조원강(趙元綱)이다.
어머니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민의(閔誼)의 딸이다.
1482년(성종 13)에 태어나 1519년(중종 14) 38세에 사망했다.
정암 조광조는 1482년 감찰 조원강의 아들로 한성에서 태어났다.
태조 이성계의 생질인 양절공 조온의 4대손으로, 고조부 조온은 조선의 개국공신이다.
그의 가계는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훈구 가문이었으나 김굉필을 만나면서 정암의 인생은 달라진다.
정암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조원강으로부터 엄격한 훈육을 받고 자라났다.
일찍부터 학문에 뜻이 컸으며, 서적과 학문을 좋아하고 세상일을 개탄했다.
정암은 아버지 부임지인 희천의 어천도 찰방에서,
무오사화로 유배 중이던 성리학의 대가인 소학동자 한훤당 김굉필을 만나게 된다.
그의 영특한 재능을 알아본 한훤당은 17세 소년 정암과 사제지간이 되었고, 그의 가르침으로 정암은
한국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했다.
- 정암은 찰방으로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어천에 갔다가 유배된 한훤당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김굉필은 정암에게 자신의 학문을 전한다.
한훤당으로부터 정암은 학문하는 근본 방법을 배웠다.
우리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큰 만남이었다.-
이후로도 정암은 성리학 연구에 힘써 젊은 나이에 사림의 영수로 존경을 받았다.
주자학의 핵심인 도학을 현실 정치에 구현하는 데 전심을 다했고,
자신이 해야할 일에는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정암은 소격서를 폐지하고 현량과를 설치하여 도학정치를 표방하던 소장 사림들을 관직에 진출하도록 했다.
거짓 공훈 삭제를 주장하여 훈구파를 축출하려다 그들의 강한 반발을 야기해,
새로운 정치질서를 이루려던 계획은 좌절되고 기묘사화로 사사되었다.
1750년 국오 정홍래작 조광조 영정
연산조때의 무오.갑자사화로 김종직이 참수를 당하자 유학은 쇠퇴하고 기강도 문란해졌다.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이복동생 중종은 반정 이후 축재와 권력을 남용하는 공신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정암과 신진사류를 등용, 국정을 개혁하고자 대의명분과 오륜의 도를 존중하는 성리학을 장려하였다.
이때 정암 등 젊은 선비들이 조정에 대거 등용되었다.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관직에 천거하려 하자,
1515년(중종 10년)에 성균관 유생 200여명이 연명하여 정암을 천거하였고,
이조판서 안당도 그를 추천하여 바로 정 6품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정암의 거침없는 논리와 열정에 많은 관료들이 탄복하였다.
관직에 오른 뒤에도 그는 사서삼경과 주자학 서적에 대한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과거를 보아 떳떳이 벼슬에 오를 것을 다짐하던 차 마침 알성시 문과에 응시하여 을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을 찾아 친히 주관한 시험에서 중종은 '금일과 같은 어려운 시대를 겪으며 이상적인 정치를 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하였다.
조광조는 '성실하게 도를 밝히고(明道) 항상 삼가는 태도로 나라를 다스리는 마음의 요체로 삼아야
된다'는 답안을 올리니 중종이 그의 답안에 감격하여 그를 선발하였다.
정암은 그해 직제학이 되었는데, 과거 급제 후 30개월도 안돼 당상관으로 파격 발탁되었다.
연산군을 폐한 반정이후 개혁을 꿈꾸던 중종의 특별한 총애가 있어 가능했다.
왕의 두터운 신임으로 정암은 전후 5년에 걸쳐 정계에서 맹 활약하며,
유교로써 정고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삼대의 왕도정치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또한 향약을 널리 보급했다.
지방 향촌의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여씨향약을 조선 8도에 실시할 것을 상소하여 중종이 윤허,
전국에 향약이 실시되었다. 이후 조정 내에서의 정암의 영향력은 더욱 강고해졌다.
향약은 서원과 함께 사림파의 기반을 튼튼히 하여 선조대에 이르러 조선은 사림파의 세상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당시의 학풍은 변화되어갔으며, 뒤에 퇴계 이황·율곡 이이 같은 대학자가 탄생할 수 있었다.
정암집 / 조광조
거칠 것 없는 개혁정책을 진두 지휘한 사림파의 엘리트 정암 조광조.
38세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개혁성향이 짙었고 이를 실천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급진적인 개혁은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야기했다.
조광조의 개혁정치가 적을 만든 계기는 몇 가지 있었다. 먼저 소격서의 폐지이다.
소격서는 도교의 원리에 따라서 해와 별에 제사를 지내는 국가기관이었는데,
정암은 성리학적 이념에 어긋나는 소격서를 미신으로 규정했다.
유학과 문치에 뜻을 둔 중종은,
유학의 원리에 충실한 조광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1518년 소격서를 폐지하였다.
둘째로 현량과 실시다.
1519년 조광조의 건의로 조정은 과거시험이 아니고 천거에 의하여 재능 있는 사람들을 선발하였다.
육조 및 홍문관과 사헌부, 사간원과 지방의 관찰사와 수령들이 인재를 뽑아서 예조에 추천하면 왕이 최종적으로
선발하는 제도이다. 이때 추천된 120명 가운데 중종이 직접 면접을 보고 28명을 최종 선발하였다.
그런데 선발된 인원의 다수가 조광조 등 신진세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기성의 관료들은 위기감을
가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는 위훈삭제다.
중종반정 시 공훈록에 올라간 103명의 정국공신 가운데 78명의 공훈기록이 정확하지 못하거나 연산조에
충성하였다는 등의 이유로 삭훈되고 25명만이 남게 되었다.
이 때문에 조광조는 훈록을 깎인 자들로부터 깊은 원망을 받게 되었다.
훈구파는 국역체제가 붕괴되는 상황을 이용하여 재산 축적을 하였기 때문에,
사림파의 국역체제 복구 주장은 그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또한 노비 증식과 토지를 넓혀 재산을 불리는 수단으로 사용하던 그들에게 개혁은 달갑지 않았다.
정암의 성격이 곧아 인물의 옳고 그름을 철저히 가리고,
세상을 바로잡고 풍속이 변화하는 것으로 자기의 임무를 삼으니, 대소 신료들은 그를 외경하거나,
그에게 반감하거나, 혹은 적대시 하였다.
당시 벽지로 좌천되어 있던 남곤·심정 등은 정암의 지나친 급진성이 오히려 성리학적 이념에 반한다며
정암을 공격했다. 결국 위훈 삭제로 공훈이 박탈된 자들이 조광조 제거에 직접 가담하였다.
중종은 반정 이후 비대해진 훈구파 권신들과 척신들의 전횡에서 벗어나고자 강력한 왕권강화를 원했다.
그래서 공신세력을 견제하려 조광조의 개혁과 도학정치의 실현에 힘을 실어주었다.
중종의 강력한 지지로 정치에 나아간 정암은 사년 만에 대사헌이 되는 등 중종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소격서의 폐지로 인한 민중들의 의구심,
현량과로 인한 기성관료들의 불안감 그리고 위훈삭제로 인한 공신들의 반발이 합쳐지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역량과 믿음이 없었던 중종은 하루 아침에 변심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권신들 힘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왕권 확립을 꾀하던 중종은 훈구파에 대적하기 위해 정암을 키웠으나 정암 등 사림파가
또 다른 세력으로 부상하는 것을 경계했다.
중종은 사림파 역시 새로운 기득권층으로 강력한 왕권의 걸림돌로 인식하여,
조광조를 비롯하여 그와 함께 개혁정책을 추진하던 김식.기준 등 신진세력들을 견제했다.
희빈 홍씨의 아버지 홍경주, 남곤·심정 등은 경빈 박씨 등 후궁을 움직였다.
그들은 훈구세력의 사주를 받고 조광조를 모함했다. ‘주초위왕’ 사건이다.
조씨가 왕이 되려한다는 소문을 내 중종의 귀에 들어가게 했다.
이들은 신무문을 통하여 궁궐에 들어가 중종으로부터 조광조 등 신진세력 제거 승낙을 받았다.
조광조는 새벽 세시경 입궐하라는 전갈을 받고 궐내에 들어갔다가 바로 투옥되었다.
대사헌 조광조와 함께 같은 날 우참찬 이자, 형조판서 이정, 도승지 유인숙, 우부승지 홍언필,
죄부승지 박세희, 동부승지 박훈, 부제학 김구, 대사성 김식 등이 투옥되었는데 이들은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중종의 총애를 받던 신하들이었다.
옥에 갇힌 조광조는 왕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신은 뭇사람 뜻과 어긋나더라도 임금이 계신 것만 믿고 정책을 펴 왔습니다.
친히 심문하신다면 만번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조광조 등을 국문한 책임자는 판중추부사 김전이었고 병조판서 이장곤과 한성부판윤 홍숙이 참여하였다.
그에게 적용된 죄명은 ‘붕당죄’였다.
김정, 김식, 김구 등과 붕당을 맺어 자기들과 가까운 사람들은 요직에 나가게 하고,
서로 의지하여 다른 사람들을 공격함으로써 국론과 조정을 잘못 이끌었다는 것이었다.
처음 내려진 형벌은 참형이었다.
조광조는 사사의 명을 받았으나 영의정 정광필,우의정 안당 등 노대신들이 중종에게 조광조의 선의를
적극 변호하여 목숨을 건지고 1519년 11월 전라도 능주로 유배되었다.
정암이 유배되자, 유배지에도 그의 학문을 배우려는 뜻있는 선비들이 찾아왔다.
화순 능주에 수시로 찾아와 위로가 되어준 이가 바로 이곳에 고향을 둔 학포 양팽손이었다.
양팽손은 일찍이 18세에 경기도 용인에서 정암을 만나 인연을 맺었고,
21세때에는 생원시에 장원급제, 같은 해에 급제한 정암과 더불어 성균관에서 생활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훈구파인 김전.남곤.이유청 등이 각각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이 되면서 정국이 바뀐 후,
조광조를 공격하는 세력은 유배 한달만인 1519년 12월 20일(음) 그에게 사약을 내렸다.
정암은 금부도사가 사약을 들이밀자 한성부를 향해 삼배를 올린 뒤 절명시 한 수를 남겼다.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고(愛君如愛父)
나라 걱정을 내 집 걱정하듯 하였노라(憂國如憂家)
밝은 해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니(白日臨下土)
나의 붉은 마음 환히 비추리(昭昭照丹衷)
자신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자부하는 마지막 시였다.
그리고 한때는 자신을 절대적으로 신임했던 왕 중종이 내린 사약을 마셨다.
그의 나이 38세, 짧지만 굵은 생의 끝이었다.
조광조 평전 - 신병주 지음(2021, 한겨레출판)
조광조는 무오사화로 유배됐던 사림파의 핵심인물 김굉필을 스승으로 삼아 학문에 정진했다.
29세인 1510년(중종 5년)초시에 장원 합격했고, 34세 때 1515년 (중종 10년)에는 알성시문과
을에서 급제한다.
그가 사사되자 양팽손은 은밀히 시신을 수습하여 쌍봉사 골짜기 일명 조대감골에 장사지내고,
서운태 (서원터) 마을에 모옥을 짓고 봄가을로 문인 제자들과 함께 제향하였다.
이 추모옥은 후일 '죽수서원'으로 발전한다.
양팽손에 의해 가매장되었던 그의 시신은 후에,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상현리(현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서원말부락의 선영에 매장되었다.
문정공 조광조의 묘 및 신도비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소재
경기도 기념물 제170호.
조광조의 숙청은 한 개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조광조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던 개혁정책은 1519년 기묘사화의 참극을 불러왔고,
개혁파 세력들은 허망하게 정치권에서 대거 숙청되었다.
김정.김식.김구.윤자임.박세의 등 대부분의 개혁세력은 투옥되어 사약을 받거나 유배되었다.
정암의 개혁을 지지하고 실천했던 많은 젊은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을 가는 등 큰 화를 입었다.
역사는 조선의 사대 사화 중 세 번째인 1519년의 '기묘사화'로 젊고 참신한 정치세력들이 개혁정책을
실천하려 하다가 좌초했다고 평가한다.
유배되어 생활하던 전남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의 적려유허비1677년(현종 8년)
적려유허비는 후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41호로 지정되었다.
조광조에 대해 실패한 개혁자라는 시각도 있는데,
정암 사후 조선이 사림파의 세상이 되었다는 결과만 보더라도 그는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정암은 김종직의 학풍을 이어받은 스승 김굉필이 역설한 명도사상과 근독정신으로,
공자의 가르침대로 하늘의 도를 따라 세상을 밝게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 도학정치 이념을 구현하려고 했다.
관료생활 중에도 정암은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썼다.
성수침, 백인걸, 이연경, 홍섬, 기준, 김명달, 조욱, 양언진, 정환, 나식, 허백기, 홍봉세, 정원, 윤관,
이희민, 이충건, 박세후, 김대유, 윤변, 이기, 안담, 최여주, 홍순복, 민의, 심광언, 박소, 조희윤 등의
문인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정암의 사상은 문하생 백인걸을 통해 율곡 이이에게 전해졌으며,
명종 말엽에 사람파는 훈구파를 몰락시키고 집권에 성공한다.
또한 향약을 널리 보급하고 서원과 함께 사람파의 기반을 다져 선조대에 조선은 사림파의 세상이 되었다.
사림이 다시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제자 백인걸은 교리를 거쳐서 직제학이 되었고,
그의 문하에서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이 배출되었다.
사후에 조광조는 추증되고 남곤은 관직이 삭탈됨으로서 후대는 조광조를 도학정치의 선구자로 재평가하였다.
휴암 백인걸
후일 그는 다시 대학자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문하생으로 길러냈다
조선시대 정치사는 사대부, 훈신, 사림, 외척세도 등의 시기로 구분된다.
조광조의 수난도 훈신세력과 사림의 권력 다툼이었다.
훈구파는 조광조의 개혁에 강력하게 저항해 그들을 좌절시켰다.
기묘사화는 훈구파와 조광조의 사림파 간 국역체제의 복구 추진을 둘러싼 찬반 대립이 빚어낸
파국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조광조가 사사되고 개혁이 좌절되자, 훈구파의 노비급증과 토지확대는 계속되었다.
문정왕후를 둘러싼 윤원형 등의 득세로 삼정의 문란은 극심해지고 백성은 피폐해졌다.
명종 재위 10년대 이후가 되면 국역체제는 회복이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양민이 줄어들고 노비가 증가하는 양소천다 현상,
국가재정의 만성적인 적자에도 조정은 이를 통제하고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그 짧은 사년이 끝나고 조광조 사후 조선왕실에는 이십여년간 그 어떤 진보와 개혁을 위한 노력없이
권간들의 얼굴만 바뀌며 살육이 벌어지는 정치행태만이 횡행했다.
(김성우,「16세기의 사림파,진보세력이었던가?」('한국사 시민강좌'33, 2008).
사후 평가
율곡 이이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등을 가리켜 ‘동방사현’이라 했다.
그의 제자인 홍문관 관원 소쇄 양산보는 기묘사화로 스승인 조광조가 사사되자 '개처럼 사느니 흙이 되겠다'며
모든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으로 내려와 소쇄원을 짓고 은거하며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1544년 인종이 즉위하자 기묘 명현들의 신원을 복원하였으니,
스승 김인후와 퇴계 이황 등의 영향과 그를 평소 동정하던 인종의 뜻에 따라 사면·복권되었다.
또 선조1년(1568)에 조광조는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 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문정(文正)의 시호를 받았다.
조정에서는 정암을 향사 할 서원의 건립을 논의하였고,
1570년 선조 3년 능성현령 조시중의 협조로 능주에 서원을 짓고 '죽수'란 사액을 받았다.
용인 심곡서원
그 뒤로도 정암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는 후학들에 의해 각처에 사당이 세워지고, 서원도 계속 설립되었다.
1576년 희천에 양현사가 세워져 봉안되었으며,
1605년(선조 38)에는 그의 묘소 아래에 있는 심곡서원이 봉안되는 등 전국에 많은 향사가 배향되었다.
1610년(광해 2년)에는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다. 문묘에 종사된 해동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등과 함께 ‘동방 오현’이라 일컫기도 한다.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사전>
정암의 사상은 유학의 정통으로 돌아가 '바른 정치'를 하자는 조선 실천유학의 시조로 평가받는다.
대학자 퇴계 이황. 율곡 이이를 비롯한 후대 학자들이 이를 모범으로 따랐다.
38세의 짧은 생애였지만 당대에는 부패하고 침체된 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열망하였던 젊은 신진 사대부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이념과 실천을 겸비한 개혁의 선구자였다.
또한 후대 사람들에게 정암은 학자요, 정치가로 깊은 영향을 끼친 지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