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지 못한 山頂의 꿈, 삭풍에 흩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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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겨울 밤
모스크바에서
상트 페테르브르크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기차는 밤새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시커먼 어둠을 뚫고
끝없는 시간의 흐름 속을
달려가고 있었다.
어디쯤일까
작은 별들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하늘 끝자락에서
천사들이 푸른 날개를 펼치고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누군가 허공 속에서
붉고, 노오란 꽃가루를
흩뿌리고 있었다
검은 말 몇 마리
입에 흰 재갈을 물고 서 있는
샤갈의 마을 입구에선
눈이 내리고 있었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에는
색깔이 있다
나무에 내리는 눈에는 나무색
풀잎에는 풀잎색
지붕에는 지붕색
눈이 내린다
크레파스 한 갑의 색깔로
눈이 내린다
.....
샤갈의 마을에는 지금쯤 눈이 많이 쌓여 있겠지...
내가 사는 이곳 울산은 겨우내내 눈이 거의 오지 않고 강엔 얼음도 얼지 않는다.
어딜가야 예전처럼 눈 다운 눈을 볼 수 있을까.
기약 없는 기다림과 근원을 알 수 없는 그리움은 막연한 것이다.
일심(一心)으로 설경(雪景)이라는 '화두'를 참구(參究)하다 보니
이마엔 어느새 열꽃이 돋아나는 듯하다.
이 정서적 결핍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눈 쌓인 겨울산행 외에 달리 방도가 없을 것이다.
울산역
2007년 12월 28일 밤 11시 29분,
세상 살아가는 이치를 다 알고도 가슴 한 구석에 허허로움이 남을 때,
끝내 오도 가도 못하는 망서림으로 살지만 나는 먼 산을 꿈꾼다.
저무는 한해의 끝자락에서 서성이다가 배낭 속에 일용한 양식과
야영장비를 주섬주섬 챙겨 넣고 제천으로 향하는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2박 3일 일정으로 울산을 떠나 강원도 백운산~두위봉 종주산행을 하기로 했다.
고한역
기차는 밤새 어둠을 가르며 달려와 고한역 플렛폼에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부시시 선잠 깬 이방인을 내려 놓는다.
그러고는 다시 엉덩이를 실룩이며 산모퉁이를 느릿느릿 에워돌아
시야 바깥으로 벗어나 버린다.
조촐한 출발, 그리고 뒤에 남은 완벽한 정적...
이번 산행에 처음부터 끝까지 앞장서서 눈길을 러셀한 산들뫼님
싸락눈이 흩뿌린다.
건너편 산등성이에 낮게 드리워진 잿빛 하늘, 을씨년스런 겨울 아침이다.
낯선 풍경에 차가운 겨울바람이 어설프게 여민 옷깃을 파고든다.
역사(驛舍) 밖으로 나가 근처 해장국집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한 후
커다란 배낭을 힘겹게 멘다.
그래, 이제 나는 또 어디로 가야하나?
백운산 들머리
12월 29일 오전 10시,조금은 늦은 산행 출발이다.
노루꼬리 만큼 짧은 해인지라 늦어도 오후 4시 30분까지는 운행을 중단한 후 적당한 야영지를 찾아야한다.
시간 단축을 위해서 백운산을 생략하고 화절령까지는 남쪽 사면의 운탄로(運炭路)를 선택한다.
산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두위지맥의 등줄기,
이 산들은 영월군과 정선군이 남북으로 서로 마주하고 있다.
두위지맥은 백두대간 태백 만항재에서 줄기를 갈래쳐서
백운산(1426m)을 솟구치고, 다시 서쪽으로 뻗어 두위봉(1466m)을 만들고
영월 계족산(890m)에 이르러 맥(脈)을 가라앉히는 산줄기를 말한다.
북으로는 정선지맥과 함께 지장천으로 물을 모아주고,
남으로는 옥동천을 만들어 물길은 다시 남한강에서 아우러져 만난다.
상동 장산 마루금
어떤 이는 강원랜드가 있는 백운산을‘사람 죽이는 산’이라고 한다.
오래 전 탄광시대에 숱한 광부가 막장에서 매몰되었으며,
80년 사북사태가 일어나 한꺼번에 여러 사람이 죽어나가기도 했다.
이제 생각지도 않았던 카지노가 들어서면서 많을 때는 일주일에도 몇 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다고 전한다.
지금은 겨울철이라 흰눈으로 덮여 있으나 아직까지도 검기만 한 백운산
운탄로는 예전에 꽃을 꺾으며 넘었다는 화절령(花折嶺)으로 이어진다.
탄광이 문을 닫아 무연탄을 운반하던 운탄로도 이젠 쓸모를 잃은 지금,
누가 또 이 고개를 넘어가면서 눈꽃을 꺾는가.
아무리 막대한 이익이 보장된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어떤 사람의
삶이 파괴된다면 분명 나라가 할 짓이 아니다.
돈이 된다면 매춘과 같은 향락사업까지도 경쟁력 있는 산업으로 키워나갈 것인가.
경마에, 경륜에, 경정에, 로또에, 심지어 개나 지렁이 경주까지라도 시켜서
내기를 걸려는 도박공화국에선 그저 공허한 이야기일 뿐일지도 모르겠지만...
산에서 피는 꽃들이 아무리 어여뻐도
하늘에서 내리는 눈 만큼 산을 사랑하지는 못한다.
봄 여름 가을 산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겨울의 산 만큼은 장대하지는 못하다.
찾아온 오랜 친구를 위하여 깊이 숨겨 두었던 술을 꺼내어
아무리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어도
나의 가슴을 이 겨울산처럼 품어 주지는 못한다.
아름다움은 늘상 사물의 안쪽에 갇혀 있다.
눈 덮인 산길 위에 마음 놓을 자리 하나 없을까.
예정된 듯 이내 발길을 멈추게 하는 설원의 눈꽃들.
흔들림도 이곳에서 잠시나마 멈춤에 붙잡힌다.
바람부는 겨울 산 능선에 서 보았는가.
소리쳐 부를 이름 조차 없는 만큼 삶이 혼탁할 때 얼어붙은 산골짜기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그리움을 향해 흐느껴 본 일이 있는가.
삶이란 어쩌면 겨울 철새의 가벼운 날개짓으로
메아리 없는 산허리를 돌아 나가는 아련한 것인지도 모른다.
도롱이 못이다.
백운산 능선 해발1100m 높이에 땅 속 탄광이 함몰되어 자연적으로 생겨난
폭이 약 100m 정도가 되는 축구장 크기의 못(池)이다.
지금은 겨울철이라 얼음이 얼고 눈이 덮여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지만
봄부터 가을까지 주변 경관은 마치 영화에서나 보았던 캐나다 록키산맥의 풍경을 연상 시킨다.
정이란 마음의 한복판을 차지하지 않아도 서로의 부분을 나누며
비탈진 삶의 한구석을 채워주는 것.
때론 모든 것을 내 주는 사랑보다 소박한 정이 더 단단하고 깊기도 하다.
화절령 고개 마루
화절령(花折嶺)이나 화절치(花折峙),그리고 꽃꺼끼(꽃꺾기)재는 동의어다.
그런데도 이곳에선 구분하여 불리우고 지도에도 그렇게 표기되고 있다.
두위지맥 주능선 상의 꽃꺼끼재 기준으로 정선군 북쪽 아래에 화절령이 자리하고 있으며,
중동면 직동리에서 상동으로 넘어가는 남쪽 지능선 자락에 화절치가 둥지를 틀고 엎드려 있다.
지금까지 3 시간을 걸어왔다.
이곳에서 부터 운탄로를 버리고 길 없는 오른쪽 능선으로 붙는다.
허리까지 차오르는 산죽을 헤치며 1439m봉으로 오른다.
짙은 박무로 조망이 나빠 카메라 파인드를 들여다봐도 좋은 사진 얻기가 어렵다는 느낌이다.
하얀 눈이 내리는 날엔 한동안 넋을 잃는다.
까마득하게 잊었던 향수에 젖는다.
눈이 소리 없이 쌓이는 날엔 큰 눈을 뜨고 산을 바라본다.
백운산 마루금
산이 사람을 끌어안고, 사람이 산에 기대어 함께 해온 역사.
가는 길 멈추고 걸어온 길 뒤돌아본다.
삶은 어차피 예정된 곳으로 흘러가는 것.
홍역처럼 번지는 그리움도 마다한 채 도대체 어디까지 걸어온 걸까.
또 어디까지 걸어갈 것인가.
얼마나 많은 세월의 이야기를 품고 있기에 산은 저리도 눈부신가.
흐르지 않았다면 모든 게 그대로 일까.
머물렀다면 더욱 애틋하고 눈물겨웠을까.
굽이치던 마음도 애닯았던 꿈도 무심히 눈 덮인 능선을 타고 넘어간다.
그리고 나는 다시 눈 내리는 겨울산에서 내 남은 시간들과 마주한다.
1439봉 오름길
눈 쌓인 산길은 바람이 먼저 걸어본다.
바람의 발자국을 따라 사람도 걷는다.
나도 걷는다.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바람이 거세지고 눈보라가 몰아친다.
산길은 눈보라 속에 있었고 흐르는 구름 속에 있었다.
기실, 인간의 본성은 허공 같은 것일까.
하이원 스키장 마운틴 탑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넘치는 곳에서 모자라는 곳으로
산도 물도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언제나 그렇게 흐른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더 높은 곳으로,
발길은 더 풍족한 곳으로 돈과 명예와 권력을 따라 몰려간다.
삶의 희노애락은 한줄기 바람 같은 것이거늘
백년도 못사는 사람, 천년을 걱정하며 산다고 했던가.
다 가지고도 가난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게 지금 우리네의 마음이다.
나는 물들기 쉬운 사람,
너무 많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나 흰색 앞에선 곧 창백해지고 만다.
삶이 도저히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생각될 때마다 어김 없이 눈이 내렸다.
겨울 산에서 나는 다시 하얗게 물든다.
사위어가는 정해년 섣달 그믐날 밤,
두위지맥 산마루금에서 조촐한 송년파티가 열린다.
어렵게 운반해 온 소주 세 병에 삼겹살 한 두점 넣은 잡탕찌개의 빈약한 차림상이지만
가진 마음 만큼은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은 푸짐한 만찬이었다.
강원도 오지 산중의 겨울밤은 속절 없이 깊어간다.
이제 그만 누에고치 마냥 침낭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해야 겠다.
눈 속에 묻힌 돌을 찾지 못해 텐트팩을 고정하지 못했다.
좁은 텐트 안의 렌턴 마저 끄고나면 불빛 하나 없는 칠흑의 세계로 떨어진다.
밖엔 연신 나뭇가지를 뒤흔드는 세찬 바람소리만 귓전에 와 닿는다.
소리는 빛깔과 모양이 사라진 무정형의 세계에서 홀로 자유롭게 헤엄치며 노닐 즈음
얼큰한 술기운에 그만 스르르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든다.
자고 일어나 산정에서 허리 굽혀 등산화 끈을 매는 이 아침,
아!
나다.
살다가
때론
하얀 눈 속에
창백한 바람이 되어 울어보고 싶은 것이다.
수령 1400년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주목(朱木)
무엇이 그리 두려웠을까.
산길이 꽁꽁 얼어 붙었다.
갈피를 못잡던 마음을 추스리며 뒤로 물러나니 그제야 눈이 맑아진다.
세상은 가까이 다가서기보다 한 발 물러났을 때 더 많은 것이 보인다.
굽이굽이 먼길은 차라리 아픔이 된다.
눈길은 하늘과 땅의 경계를 지우고 가야 할 길을 지운다.
어제는 예정된 백운산(1426m)은 안 올라갔지만 오늘 역시 두위봉(1466m)에도 못 올라섰다.
산길이 없고 러셀이 되어있지 않는,
길 없는 눈 덮인 겨울산을 헤쳐 나가면서 예정된 시간을 가늠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화절령 부터는 아예 산길이 없었다.
산길은 눈보라 속에 있었고 흐르는 구름 속에 있었다.
몇 발자국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잡목은 배낭을 붙잡고 통사정을 하면서 늘어진다.
한 번씩 휘청일 때마다 무거운 배낭으로 인해 온 몸에 힘이 쭉 빠진다.
쌓인 눈이 없다면 5 분이면 지나갈 너덜지대를 20 여분을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다.
무척 조심을 했는데도 일행이 눈 쌓인 바위에 미끌어져 해안 방파제 데트라폿트 같은 허방에 빠져 버렸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가지고 있던 스틱이 그만 부러지고 찰과상을 입었다.
1 km 전진하는데 1 시간 이상 지체되었다.
초입에 오래된 주목(朱木)이 서있는 곳에서 도사곡으로 하산을 시도한다.
끝까지 두위봉을 오름을 고집한다면 아무래도 증산역에서 시간 맞춰
태백으로 떠나는 열차를 타기 어려울 것 같다.
산길을 내려와서 자연 휴양림 관리소 앞에 다다르니 마침 택시 한 대가 와서 선다.
어제 6 시간 30 분, 오늘 3시간 30 분, 비록 짧게 걸었지만 이건 산행이 아니라 악전고투였다.
도사곡 하산길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 정호승의 '미안하다' 전문 -
하지만 산이 있어도 사람의 길은 끝나지 않는다.
가랑비에 속옷 젖어들어 오듯 산 속 백운산 깊은 곳까지, 높은 곳까지
파고 들어온 포장도로엔 오늘도 오고가는 차량들의 행렬로 분주하다.
사람들은 산 아래 길로도 모자라 하늘 높은 곳에도 새로운 길(케이블카)을 잇고 싶어한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산이 끝나는 곳에서 되뇌인다.
"미안하다. 내 멋대로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라고...
첫댓글 좋은음악과 좋은사진 그리고 그보다 더 좋은 님의 글속에서 산을 사랑하는 마음을 느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산행하시기를 그리고 같이 느낄수 있도록 자주 올려주시기를.^^*
짧은 영화 한편을 본듯합니다... 스틸 사진에서 작은 독립영화 한편을 보는 기분이네요~~ 잘 감상하고 갑니다 ^^
좋은사진과 느낌이 전해지는 음악 그리고 멎진 글 ..... 감사 합니다.
너무 아름답고 멋지십니다......
차가운 겨울밤 짧지만 애틋한 단편집을 감상한거같습니다. 너무나 아름답군요.
우울한 마음이 확 날아가네요..옛날 생각이 너무 나네요. 산에 빠져잇을때 감사합니다.
참으로 깊고 아늑한 수필을 만족히 읽은 듯, 평안해집니다. 감사드립니다.
퍼 왔어요
겨울산을 사랑하시는 마음이 글속에 사진과 음악과 함께 듬뿍 묻어나네요 정신이 맑아지네요 감사합니다
햐 ** 정말,, 멋지십니다,, 너무,, 감동적이고 마음 뭉클하네요 새해부터,, 산에 빠지게 만드시구 사람을 사랑하게 마음을 흔드시는군요...
열린 마음과, 사랑이 베어나와 평온합니다. 건강하십시오.
하얀나라에서 멋진소망담고 오셨나요?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