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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red>울산광역매일</font>≫ <시가 흐르는 아침> 땅콩 까는 남자
흙의뿌리들이사라진지오래다 한소쿠리땅콩을앞에두고등구부린중년남자,동물의왕국속으로어슬렁어슬렁발걸음을옮긴다TV에시선을고정한채남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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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뿌리들이 사라진 지 오래다
한 소쿠리 땅콩을 앞에 두고 등 구부린 중년남자, 동물의 왕국 속으로 어슬렁어슬렁 발걸음을 옮긴다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남자는 딱, 딱, 딱, 리듬에 맞춰 손가락을 놀린다
나무 그늘에 늘어져 있는 수사자
측은한 눈빛으로 남자를 내다본다
남자는 신문지에 땅콩을 수북이 까놓고, 방바닥의 벼룩시장 구인광고를 곁눈질한다 잠깐씩 눈을 감고 포효하는 밀림의 왕인 양 입을 벌린다
4050세대 된바람에 휩쓸린 남자
목덜미 늘어뜨린 수사자가 화면 밖으로 뛰쳐나와 남자를 덮칠 것 같다 노란 땅콩꽃이 형광등 불빛에 파르르 떤다
땅에 맞닿듯 허리 굽힌 암사자, 가젤 목덜미를 물고 클로즈업된다 새끼 사자들이 앞다투어 풀숲을 헤치고 나온다
언덕 위의 수사자, 지평선에 저무는 노을빛을 바라본다
<시작노트>
"젖은 낙엽"이란 말이 있다. 퇴직 후 중년 남자들이 "비에 젖은 낙엽이 빗자루에 달라붙은 듯 아내에게 붙어 다닌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가정 경제를 책임지고 평생 일해왔는데, 경제적 능력이 없어졌다고 젖은 낙엽으로 간주하다니 기분이 씁쓸하다.
갈 곳도 없고, 오라는 곳도 없는 중년 남자들의 설 자리가 어디인가. 땅콩을 묵묵히 까고 있는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내의 마음은 또 어떠할까. 큰소리 떵떵 치며 "나, 이래 봬도 돈 벌어오는 사람이야"라고 유세 부리던 시절이 그립다.
이복희
2010년 문학시대 수필 신인상, 2022년 계간『시에』 시 신인상
선주문학상, 매일신문사백일장 장원, 에세이문예사 작품상
K문화타임즈 시 연재중
시집『오래된 거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