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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youtube.com/post/UgkxkhihokQgc0cCZ62MIEkIW1nmrP3bUFZY
반지의 제왕이나 다크소울, 그리고 스카이림 등과 같은 판타지 세계에는 수천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바뀌지 않는 법칙들이 있습니다.
거의 언제나 (마법을 제외하면) 냉병기가 전장을 지배하고, 요충지마다 석벽으로 이루어진 높은 요새가 세워져있다는 것입니다. 즉, 많은 판타지 장르 세계는 기술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현실 역사 속 '중세'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며 '정체'되어있는 모습을 보입니다.
왜 이런걸까요?
사실 판타지 세계관 자체의 '내적 논리'들에 따르면, 이러한 정체 현상은 손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선, 많은 판타지 세계에는 마법이라는 경쟁자가 존재합니다.
역사에서 무언가 급진적인 변화가 벌어질 때, 그 유인은 언제나 절박함이었습니다. 대항해시대가 지중해 무역에서 소외된 서유럽 끄트머리의 아웃사이더들에 의해 펼쳐질 수 있었듯이, 후진성은 때때로 기술 개발과 혁신의 산파가 됩니다. 하지만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굳이 불타는 돌로 물을 끓여서 기계를 돌리지 않아도 많은 것을 이룰 수 있기에, 굳이 그런 복잡한 것들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실제 역사 속 전근대 국가들에서도 신기술 도입이 언제나 환영받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농경사회에서 새로운 기술의 도입은 어쩌면 지배계층의 통치를 위협할만한 불안정한 요소들을 새롭게 추가하는 모험과도 같았기에, 통치자들은 언제나 그 개발 속도를 세심히 조절하려 했습니다. 하물며 마법이라는 선택지가 하나 더 있는 세계에서 기술이 얼마나 더 정체될 수 있을지는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많은 판타지 세계에서 드워프가 기술을, 엘프가 마법을 담당하는 것 또한 우연이 아닐껍니다. 판타지 세계에는 종종 현실의 인간보다 훨씬 더 긴 수명을 지닌 장생종이 등장하곤 합니다. 긴 수명과 느린 세대 교체 주기, 그리고 그에 따른 종족 전체의 외골수적 경향은 또한 기술 발전에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가상의 세계가 '중세'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근래만의 경향은 아닙니다. 중세는 기실 "중세가 끝났다."고 선언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늘상 갈망과 현실도피의 영역이 되어왔습니다.
르네상스의 시인들은 기사 문학에 열광했고,
매너리즘의 시인들은 십자군을 찬양하곤 했습니다.
아예 스페인으로 눈을 돌리면, '요즘 세상과 불화하는 어느 괴짜 중세인'이 주인공인 어느 소설이 근대문학의 시조가 되어버렸죠.
말장난 같지만, 사실 모든 현대인은 또한 한 때의 중세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서구의 역사에서 핵심적인 '근대 문제'들은 대개 중세에 기원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민족주의, 그리고 그리고 만약 이 영상을 보고 있는 당신이 안경을 쓰고 계신다면, 그것도 중세시대에 처음 개발됐습니다. 서구 근대 문명의 세례를 받은 모든 이들에게 중세란 유년기에 다름없고, 어쩌면 판타지와 중세가 친한 이유도 거기에 있는걸지도 모릅니다. 판타지는 또한 유년기의 친구이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모든 이들이 언제나 같은 유년기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며, 또한 그 기억이 종종 왜곡되기도 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서로 다른 판타지 세계의 '중세적 경향'들은 정말로 전부 같은 '중세'라고 할 수 있는걸까요? 역사적 중세란 사실 5세기 말에서 15세기 말에까지 장장 일천년에 이르는 기나긴 기간을 뭉뚱그리는 아주 거대한 개념이며, 또한 매체에 나타나는 여러 범주의 중세들은 더욱이 역사적 중세에 국한되어있는 것만도 아닙니다.
판타지 세계의 중세는 때때로 스파게티 웨스턴의 서부극이나 몬티 파이선의 성배에서처럼 풍자적이기도 하고,
무법자들과 야만인들이 활개치는 원초적 암흑시대로서의 고정관념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하며,
유령들과 지하감옥이 존재하는 폭풍우치는 뱀파이어의 성과 같이 낭만주의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또한 라파엘 전파와 러스킨, 그리고 위스망스와 단눈치오의 작품에서처럼 퇴폐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판타지 세계의 '중세'가 어떤 모습을 하건, 왜 모든 '현대인'들은 그 과거로 돌아가려 하는 걸까요?
막스 베버는 근대화되고, 관료제적이며, 세속화된 서구 사회를 진단하며 '탈주술화(Entzauberung)'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더이상 이 세계를 지배하는 신비하고 예측불가능한 힘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사물은 계산을 통해 다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오늘날의 사람들은 더 이상 마법을 믿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중세인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이 지닌 사물 하나하나에는 중요한 도덕적 의미가 담겨 있었고, 그들이 마주치는 대상은 종종 인간의 이해를 벗어난 존재들이었습니다. 중세인들은 '정말로' 정령이나 요정이나 악마를 볼 수 있다고 굳게 믿었으며, 그런 진술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사실들을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이해해보려 노력해도 우리의 이성은 곧바로 '정신질환'이라는 진단을 내려버리고 맙니다.
현대인들은 '도덕과 의미가 들어있는 마음속'과 '계산 가능하고 예측 가능한 바깥 세상'을 엄격히 구분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우리가 꿈꾸는 것, 그리고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 이를테면 사랑이나 자아실현과 같은 것들은 오로지 '나 스스로', 그리고 '내 안에서' 결정할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많은 중세인들에게 내면과 외부 세계 사이의 경계는 불분명했습니다. 사랑은 종종 묘약이나 마법으로 쟁취할 수 있었고, 천국으로 가는 길은 성혈이 담긴 물병 하나만으로 보장될 수 있었던 겁니다.
또 다른 예인 '우울' 또한 그렇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우울은 영양 결핍 및 호르몬 불균형 문제 등으로 발생하는 신경화학적 질병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측 가능한 부작용 범주를 지닌 약을 계산 가능한 양만큼 먹으면 나아질 것이며, 우울한 상태는 '진정한 자아'와는 상관없는 병걸린 상태로 간주됩니다. 즉, 현대인의 자아는 그 어떤 외부 사물의 의미와도 무관한, 독립된 주체가 스스로 매기는 의미들의 총체쯤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반면 중세인들의 우울은 흑담즙 그 자체였습니다. (멜랑콜리 = 흑담즙) 중세인들의 마음은 외부 세계의 의미있는 사물들과 직결되어 있었고, 단순히 계절이 가을이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근처에 머리를 배고 누워있었던 바위에 저주의 문양이 새겨져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송두리째 바뀔 수 있었다는 겁니다. (아니면 반지를 줍거나...)
그러나 온갖 사물들에 가히 인간 정신을 파괴할만한 무시무시한 의미가 깃들어있던 시대는 이제 지나갔습니다. '탈주술화' 과정을 거치며 현대인들의 자아는 외부 세계와의 사이에 굳건한 완충 지대를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기괴하고, 어리석거나,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외부의 것들은 어릴 때부터 현대인의 내면과 완벽하게 격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지식은 우리에게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거둬갔지만, 분명 공포를 몰아내는 힘도 주었습니다. 그 덕에 현대인들은 어떤 면에서는 강해졌습니다. 우리는 괴물이나 귀신을 보더라도 '내심으로는' 놀라지 않습니다. "분명 몰래카메라일 것"이라거나, 아니면 "병원에 가서 약을 먹어야할 때가 온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겁니다. 실제로 현대인들은 '스크린'이라는 계산된 사물 하나만 놓이면 귀신과 괴물 보는 것을 오히려 즐깁니다. 악마나 귀신을 보면 정말 깜짝 놀랐을 중세인들에겐 상상도 못할 일일겁니다. 중세인들에게 그건 정말로 현실이니까요.
정말로 현대인들은 외부에서 침입해 들어오는 그 어떤 위험이나 비합리적 요소들도 존재하지 않게끔 완벽한 위생상태를 유지하려 노력합니다. TV에서 끔찍한 장면이 나오기 전에는 항상 경고가 앞서 등장해 '트라우마'로부터 심적으로 준비할 기회를 줍니다. 반면, 중세인들에게 세상은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아야할 무시무시한 고통, 이를테면 눈을 두는 곳마다 해골들이 춤을 추며 죽음과 체스를 두곤 하는, 그런 살풍경으로 가득찬 공간이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자아를 자율적으로 꾸려나갈 수 있는 현대인들은, 그 어느 시대의 사람들보다도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거리가 멉니다. 고통으로부터의 결벽적인 위생관념 덕분에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또 그만큼 강해진 현대인들은 역설적으로 조그마한 의미의 상실이나 외부로부터의 사소한 위험 요소로도 무너집니다. 무균실에서 자라 면역력이 약해진 겁니다.
전근대인들은 감당하기 힘든 고통 속에서도 세계와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삶의 고통은 단순한 계산 실수나 불운에서 비롯된 의미없는 무언가가 아니었으며, 대대적인 희생제를 통해 회복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희생제의 핵심은 정교한 제의와 현실 사이의 연동성에 있었는데, 이를 통해 옛 사람들은 동물과 인간, 신과 사제, 삶과 죽음, 그리고 자아와 세계가 일체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겐, 이런 '경이로움'을 느낄만한 이벤트가 없습니다. 대신 이, 멸균된 자아와 외부 세계 사이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현대의 예술, 그리고 그 예술에서 비롯된 판타지 세계입니다. 판타지는 건강하고 위생적인 현대인들의 자아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우리의 마음 외부에서 들어오는 또 다른 도덕과 의미들을 감지하고, 또 내면이 그에 영향을 받아 움직이는 것을 느낍니다. 비록 스크린 속에서 벌어지는 고통과 비극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기꺼이 전율을 느끼고 눈물을 흘립니다. 예술은 한 인간의 내면에서 빚어져 다른 인간에게 연결되는 방식으로 성립하기에, 본질적으로 위험한 냄새를 풍기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판타지 세계에서만큼은 재의 귀인이나 드래곤본이 되어 세상의 영웅이 되거나 파괴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누구나 기꺼이 도덕과 의미를 마음 바깥에 두는 모험을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의 사물들과 달리, 그곳의 사물들에는 의미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낡은 반지 하나에도 세계의 운명이 얽혀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위험천만한 모험을 현대인들은 안전한 장소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건 중세인들은 가지지 못한 현대인들만의 특권입니다. 현대인들은 중세인들과 달리 도덕과 의미를 '잠시' 마음 바깥에 두어도 전원을 끄고 난 뒤에는 금새 회복할 수 있습니다. 중세 이후의 예술가들이 질리지도 않고 계속해서 중세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도 어쩌면 이 때문인지 모릅니다.
물론 전원을 끈 뒤에 현대인들은 마법 따윈 존재하지 않는 따분한 계산의 세계로 돌아와야하겠지만, 언제든 다시 원할 때 마법의 세계로 떠나 중세라는 유년기의 꿈을 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이 두 개 있습니다.
1. 요정의 떠남
먼저 민속학에는 '요정의 떠남'이라는 이야기 유형이 있습니다. 이 유형에서 요정들이 떠나는 이유는 수없이 다양합니다. 숲을 갈아엎는 시끄러운 쟁기질 소리, 울려 퍼지는 교회의 종소리, 혹은 탁발 수도사들의 떠들썩한 기도 소리 등,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세상의 신비로운 것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는 감각은 아주 오래전의 조상들 때부터 공유한 상실감이었습니다.
2. 막스 베버
심지어 '탈주술화'라는 사회학적 용어를 내세우며 마법의 사망선고를 내렸던 막스 베버조차 이러한 상실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 또한 온갖 신비주의자들과 오컬티스트들이 넘쳐났던 '몬테 베리타'를 제집처럼 드나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판타지 세계가 영원히 중세에 머물러 있는걸 유치하게 여길 필요도, 비디오 게임이나 판타지 소설에 몰두해있는 걸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습니다. 요정은 원래 동심을 잃지 않은 사람들의 눈에만 보이는 법이니까요.
*왜 판타지 세계가 중세적인지에 대해 다루는 글은 여기저기 많던데, 그 이상 나가는 글은 못 본 것 같아서 한 번 써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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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월루중이라 자세히 못읽지만 무슨뜻인지는 대충알겠다! 그런의미에서 해리포터가 진짜 대단하다 생각함
22 오 마자
오 그렇구나 흥미돋이야
와 글정성 미쳤다
방법론적으로 보면 판타지세계관의 기틀을 만들어낸 판타지 창조주 톨킨이 중세시대를 가져왔기 때문이기도 하고(물론 톨킨은 중세 기사도문학이랑 이베리아반도 레콩키스타 역사의 영향 받았을것),
한국은 좀 다른데 한국은 최소 르네상스~빅토리아시대나 리젠시시대 (1500~1899)을 중세시대라고 우기는 판타지 세계관을 갖고있음 특히 로판으로 올수록 증기기관 있어야만 하는 양식많이 보여주는데 마법이나 성력같은걸로 대체한다 치고, 외양은 거의 넷플 브리저튼 시대(1800년대)랑 비슷한듯
중세시대는 영화 브레이브하트 정도로 애들이 꼬질꼬질해야 하는데 또 한국사람은 꼬질한거 못참아서ㅋㅋ 그런게 아닐까 중세시대의 신비주의와 신분제는 차용하되, 사람들의 귀족적인 외양은 멀끔하게, 느리고 답답한것도 없이 증기기관대신 마법으로 기차 만들어 이동의 자유 누리며 중세 봉건제 사라지고 중앙집권화된 황제있는 제국에서 관료제 마음껏 펼치는 그런 세계관...
아무튼 한국 로판중에 그나마 찐 중세느낌 나는거는 상수리, 결혼장사 정도고 나머지는 다 퉁쳐서 중세시대라고 하기엔 좀 그래
3 말만 중세시대지, 사실상 조금만 불편하고 할 수 있는건 다 하는 판타지 세계관 그보다 거슬러 올라가면 옷도 제대로 못입고 밥도 제대로 못 먹는 이미지라 그냥 원하는거 다 할 수 있는 환경 설정 후 중세시대라 퉁치는거 아님?ㅋㅋ
판타지 세계관 너무좋아하는데 재밌게 잘읽었어!! 딱 초반부의 기술 발전 부분 정도까지만 스스로 생각할수있었는데 뒷부분 너무 흥미롭다
반지의제왕 진짜 좋아하는데 글 너무 흥미롭다 한번도 생각못해본 관점이야...잘 읽었어!
헐 그러네 너무 흥미롭다
우와 재밌다! ㅋㅋ
헝 넘재밋어ㅠ
오오
흥미돋 재밌어ㅎㅎ
너무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