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여인천하
월탄 박종화의 역사소설 '여인천하'를 극화한 대하사극이다.
미천한 신분에서 정경부인으로, 천하를 쥐고 흔든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의 부인이 된 정난정과 정난정의
도움으로 권력을 잡은 조선 제11대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그렸다.
여인천하는 조선 중종~명종 시대를 배경으로, 후궁들의 음모와 암투 그리고 문정왕후의 정권 쟁탈과정을
치밀하게 묘사했다.
정치개혁을 미완으로 남긴채 정적의 모함으로 서른여덟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조광조,
중종을 사로잡은 미모와 계략으로 자신의 아들 복성군을 왕위에 올리려는 후궁 경빈 박씨,
몰락한 선비의 딸로 왕비에 간택되어 정권을 향해 야망을 키워가는 문정왕후,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의 본실자리를 빼앗고 문정왕후의 야망을 충동질하는 정난정 등
조선조 역사인물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중종의 뒤를 이어 나이 서른에 왕위에 오른 인종은 스승 어질고 효성스러웠으나,
대비 윤씨와의 갈등 끝에 재위 8개월만에 후사없이 숨을 거뒀다.
문정왕후는 12살의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오른 명종의 뒤에서 수렴청정하며 20년간 조정을 좌지우지하였다.
드라마 ‘여인천하’ 정난정역(강수연씨). 문정왕후역(전인화씨)
미천한 신분에서 정경부인으로, 천하를 쥐고 흔든 윤원형의 부인이 된 정난정과
그녀의 도움으로 천하를 호령하게 된 문정왕후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그렸다
문정왕후가 권력을 휘두르던 명종대에 정치적 혼란은 극심했고, 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했다.
권력은 부패하고 백성은 피폐했다.
굶주린 백성들은 크고 작은 도적떼가 되었는데, 그 중 유명한 도적이 임꺽정이다.
임꺽정은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곡식들을 빈민에게 나눠주며 의적 행각을
벌였다. 그들은 1559년(명종 14)에 개성까지 쳐들어가기도 했다.
명종실록을 기록한 사관들은 이렇게 썼다.
'국가에 선정이 없고 재상들의 횡포와 수령들의 포학이 백성들의 살과 뼈를 깎고 기름과 피를 말려 손발을
둘 곳이 없고 호소할 곳도 없으며 기한(飢寒)이 절박하여 하루도 살기가 어려워 잠시라도 연명하려고
도적이 되었다면, 도적이 된 원인은 정치를 잘못하였기 때문이요 그들의 죄가 아니다. 어찌 불쌍하지 않은가.'
경빈박씨, 희빈홍씨. 창빈안씨
내명부란 궁중내 거주하는 품계를 받은 여인을 지칭하는 단어다.
왕의 여인들로 빈, 귀인, 소의, 숙의, 소용, 숙용, 소원, 숙원, 상궁(정5품) 그리고 나인 순이다
사극 ‘여인천하’에서 “뭬이야?”란 대사의 경빈 박씨(배우 도지원씨)는 원래 연산군이 끌어 모은 여성 예인
‘흥청’ 출신이다. 경빈은 아들 복성군을 중종의 후계자로 만들려고 권신. 심정과 결탁하여 장경왕후 소생인
세자를 흔들었다.
그러나 1527년에 터진 양재역 ‘작서의 변’으로 경빈 모자는 궁궐에서 쫓겨나 목숨을 잃었다.
복성군의 어머니 경빈박씨 역의 배우 도지원
희빈 홍씨도 궁중암투에 가담했다.
그녀는 아버지 홍경주와 권신 남곤의 사주를 받고 개혁정치가 조광조를 모함했다. ‘주초위왕’ 사건이다.
야사에 따르면 희빈은 궁궐 후원의 나뭇잎에다 달콤한 즙으로 ‘走肖爲王’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 벌레가
갉아먹도록 했다.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다.
반정세력 중 공이없는 훈구파의 위훈 삭제를 주장하고 관철시킨 조광조를 모함한 것이다.
의심에 사로잡힌 중종은 1519년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김정.김식.김구.윤자임.박세의 등 사림파들을
정계에서 대거 축출한다. 이 사화에 앞장선 인물이 훈구파인 홍경주와 남곤이다.
봉성군의 어머니 희빈홍씨역의 김민희
조선왕조실록에 그 아름다움이 깊어 미모가 꽃피었다고 기록된 이가 셋있다.
첫번째가 중종의 후궁 희빈홍씨, 두번째가 장희빈 그리고 세번째가 선의왕후 어씨(경종의 비)다.
희빈 홍씨의 삶은 여러 굵직한 사건에 연루되는데, 먼저 정국공신이자 훈구파 홍경주의 딸로 사림파와 조광조를
탄핵하는 일에 앞장 섰다.
중종 39년(1544) 5월 29일 성균관 생원 신백령이 조광조의 신원을 요청하는 상소에서 기묘사화 당시의
조정 상황을 비판하면서 말한 '다만 그럴 틈이 없어서, 연분을 찾고 반연을 찾아 궁중에 길을 터'라는 부분에
'홍경주의 딸 홍빈을 통하여 길을 튼 것을 말한다.'라고 사관이 설명해 놓는 등 이미 당대에도 홍씨가 조광조
축출에 관여했다는 사실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사림을 피바다에 던졌던 희빈 홍씨는 중종 사후 문정왕후의 아들 경원대군이 보위(명종)에
오르자 윤여해와 유희령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았다.
또한 그녀의 막내 아들 봉성군 완은 중종의 왕자들 중 가장 총명하여 역모의 추대자로 자주 언급되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 등은 봉성군이 명망있는 종친이라는 이유로 역모죄를 씌워 을사년에 울진에 유배했다가
자살하라는 명을 내렸다. 봉성군의 나이 열아홉 살이었다.
- 창빈안씨
소용 안씨는 품행이 단정하고 중전인 문정왕후와 사이가 돈독하여 중종 사후에도 궁에 머물렀다.
(선왕이 승하하면 선왕의 살아있는 후궁들의 품계를 1단계 진봉하는 것이 관례였다.)
중종과의 슬하에 영양군과 정신옹주를 생산한데 이어, 후대 조선 왕통을 이끌어갈 덕흥군을 낳았다.
후계자 문제로 정치가 불안정하던 중종시절, 안씨는 궁궐 생활에 조신하여 중종의 정실인 문정왕후와도
잘지냈다.
창빈안씨역의 최정원씨
영양군, 정신옹주,덕흥군(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어머니이며 선조의 친할머니)
중종 사후 문정왕후의 만류로 안씨는 궁궐에 머물렀다.
또한 안씨가 죽은 후에도 문정왕후는 안씨의 세 자녀를 잘 돌봐주었다.
그런 인연 덕분인지 문정왕후의 외아들 명종이 후사없이 세상을 떠나자,
명종의 정실 인순왕후는 안씨 아들인 덕흥군의 아들 즉 손자 하성군을 즉위시켰다.
조선의 제 14대왕 선조다. 선조와 이후의 모든 조선의 국왕은 안씨 후손들이다.
안씨 생전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지만,
손자인 하성군이 왕위에 오르자 소용 안씨는 내명부 정1품 빈으로 추존되어 창빈의 칭호를 받았다.
1549년(명종 4년) 그녀가 사망했을 때는 경기도 양주 장흥에 매장되었으나, 풍수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1550년 과천현 동작리로 이장했다.
그런데 무덤을 이장한 후 손자 하성군이 왕으로 즉위하자 이곳이 명당이라는 세간의 인식으로 창빈묘를
'동작능'이라 높여 불렀다.
이후 그녀의 능 주위로 국립현충원이 세워지면서 능주변에 대한민국 대통령 4인이 묻히는영광을 더했다.
그녀의 묘는 현재 국립현충원 경내 후방에 있다.
원래 후궁의 묘지에는 신도비가 없지만, 조선왕조의 맥을 인정받아 창빈의 묘에는 신도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창빈묘 주변에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김영삼 등 대통령 묘가 있어 대한민국 대통령들 4인을
거느리고 잠들어 있는 셈이 되었다(!).
창빈의 묘를 가려면 현충원 김대중 대통령 묘소 쪽으로 가면 찾기 쉬운데, 창빈 묘는 네 대통령 무덤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
창빈안씨 신도비
국립현충원 내 창빈안씨 묘역
유형문화재 제 54호
여인천하에서 마지막까지 궁궐에서 살아남은 후궁은 창빈 안씨다. 중종의 후궁 중 유일하게 천수를 누렸다.
극 중에서 내내 '창빈'으로 나오지만, '창빈'으로 책봉받은 것은 사후에 손자인 선조가 즉위한 후였다.
중종의 후궁이었지만 덕흥대원군의 생모이자 선조의 친할머니로 선조부터 순종까지 조선 중.후기 국왕들은
모두 그녀의 후손들이다. 드라마 말미에서도 여인천하의 진정한 승자는 창빈이라고 소개한다.
경빈과 복성군은 사사되었고, 희빈의 아들 봉성군은 자결, 본인은 탄핵되었다.
문정왕후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들 명종을 수렴청정하며 권세를 누렸지만 명종이 후사없이 죽으면서,
창빈의 둘째 아들인 덕흥군의 아들, 즉 창빈의 손자인 '하성군'이 선조 임금에 오른다.
선조 이후부터는 모두 창빈의 자손이니 조선후기의 역사를 결정짓는 진정한 승자라 할것이다 .
첫댓글 고귀한 역사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