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 7월 28일 연중 제17주간 수요일
제1독서 : 탈출 34,29-35
복 음 : 마태 13,44-46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4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45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46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장군이 전쟁터에서 상처를 입어 황급히 야전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의사는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면서 수술 준비를 서둘렀지요.
그런데 옆에 있던 간호사가 갑자기 의사를 향해 총을 쏘는 것입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은 깜짝 놀랐고 몇몇 간호사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총을 쏜 간호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죽어가는 의사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죄송해요. 선생님.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지만 저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저는 스파이로서 장군을 죽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장군을 살리게 그냥 놔둘 수가 없어서 이렇게 총을 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힘들어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장군을 쏘면 되지, 왜 나를 쐈습니까?”
장군을 죽이기 위해 의사를 쐈다고 하지만,
사실은 곧바로 장군을 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애꿎은 의사만 총에 맞아 죽게 된 것이었습니다.
간호사는 최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최악의 선택이었습니다.
잘못된 자신의 판단으로 빚게 된 결과였던 것이지요.
과거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 역시
예수님을 향해 최악의 선택을 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하느님만을 바라보면서 살았던 사람도
잘못된 최악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은 어떤가요?
우리 역시 최고의 선택을 한다고 하면서도 최악의 선택을 할 때가 참 많습니다.
주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세속적으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속적인 기준만을 생각해서일까요?
주님께서는 세속적인 기준에 맞춰서 보물과 진주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이 잦은 곳이라 몰래 보물을 단지에 넣어
밭에다 묻어 두고 피난을 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주인이 불귀의 객이 되어
못 돌아오는 일도 종종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우연히 그 밭을 갈다가 보물을 발견하기도 했었지요.
또한 당시는 인조 진주가 없던 시절이라
천연 진주를 지금보다 훨씬 더 비싼 값으로 거래했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걸쳤던 진주 목걸이가 최고가였다고 하더군요.
하느님 나라가 이 보물과 진주와 같다고 하십니다.
이 나라는 하느님의 선한 통치, 보살핌,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매우 귀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귀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으십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밭을 사고 진주를 사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서 ‘사랑’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만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선택입니다.
“밭에 묻혀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요?
절대 최고의 가치를 지닌, 내 목숨을 내어주고서라도 얻고 싶은 것, 그것은 무엇일까요?
참된 행복, 참된 기쁨, 참된 보물,
그것은 무엇이며, 대체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우선 그 보물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밭에 묻혀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44)
이는 그 ‘보물’이 멀리 하늘 위에 높이 매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땅에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나의 일터인 내 직장, 내 가정, 내 공동체가 바로 보물이 묻혀있는 “밭”이라는 말씀입니다.
“보물”은 내가 있는 이곳에 ‘이미 묻혀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가 17,21)
그렇지만, 그 보물은 누구나 발견하는 것은 아닙니다.
밭을 충실히 일구고 가꾸는 자만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습니다.”(마태 13,45).
우리의 머리속, 관념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진주를 찾아다니는” 행동 안에 깃들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길을 찾는 발길 그 안에, 진리를 더듬는 손길 그 안에, 사랑을 찾아나서는
우리의 행위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하느님을 찾아나서는 신앙의 여정, 신앙의 행위
그 안에 깃들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그 진주는 누구나 발견하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찾아다니는 자만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는 이 “하늘나라”를 어떻게 얻을 수가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샀다.”(마태 13,44.46)
이는 “하늘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곧 우리가 비록 보물을 발견하고 찾았다 해도,
그것이 곧바로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진정 그 보물을 차지하려면, “먼저” “가진 것을 다 파는 일”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목숨가지 내놓으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비우지 않고는 채워지지 않는 법인가 봅니다.
그러나 비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는” 일입니다.
사는 일이 본질이지, 비우는 일이 본질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그 보물이 더 값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그것을 “사는” 일입니다.
비록 보물을 발견했다 해도, 또 가진 것을 다 팔았다 해도,
그 보물을 실제로 사들이기 전에는
아직 그 보물은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살 때라야, 그것은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됩니다.
하지만 보물이 없다면, 결코 그것을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분명한 것은 그 보물이 “먼저”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먼저 있는 그 보물이 우리를 먼저 이끈 것입니다.
이미 우리 가운데 있으면서(루카 17,21)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보물을 차지하는 자가 참으로 복된 자입니다.
그 보물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 그리스도요, 그분의 나라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44)
주님!
밭을 일구는 제 손길이 당신의 나라를 찾아 발견하게 하소서.
발견하고서 가진 것을 다 팔아 사게 하소서.
그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더 값진,
모든 것을 합해도 그것 보다 낳을 수 없는,
도저히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최상의 것,
그것을 가지면 모든 것을 가진 것이기에
목숨을 내어주고서라도 얻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미겔 베이조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1960년 쿠바에서 미국으로 넘어온 난민입니다.
당시 미국 정부와 가톨릭교회는 ‘피터 팬’ 운동을 펼쳤습니다.
공산화되는 쿠바에서 미국으로 넘어 오려는 사람들 중에
미성년자들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이는 운동입니다.
당시에 미국으로 넘어온 미성년자는 14,000여 명이었다고 합니다.
미겔 베이조스는 살레시안 고등학교엘 다닐 수 있었고,
제임스 바인 교장 신부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미국에서 성공한 미겔 베이조스는 지난 6월 16일
모교인 살레시안 고등학교에 1,200만 불(135억)을 기부하였습니다.
미국 가톨릭교회는 쿠바라는 밭에 묻혀있던
미성년자라는 보물을 발견해서 미국으로 올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당시의 미성년자들은 열심히 공부하였고, 미국사회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중에 1명이 세계적인 기업 아마존의 창립자
제프 베이조스의 아버지인 미겔 베이조스입니다.
제프 베이조스는 아버지의 도움이 없었다면
자신은 지금의 성공을 이룰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 미겔 베이조스는 아들 제프 베이조스 안에 있는 보물을 알아보았고,
성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에는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라는 지면이 있습니다.
미주 지역에 있는 분들이 사연을 읽고 도움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모인 성금은 2만 불이 넘었습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은 서울의 본사로 성금을 전달하였습니다.
저는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 실린 사연은 안타깝고, 불쌍한 내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난해서 아픈데도 치료받지 못하는 이야기,
남편의 폭력에 쫓겨나 갈 곳 없는 외국인 아내의 이야기,
감당하기 버거운 짐을 지고 하루하루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사연입니다.
그런데 도움을 주는 분들은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그 보물에 정성을 주는 것 같습니다.
1년이 지나면 안타까운 사연들이 희망을 주는 이야기로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집이 없어서 거리를 헤매야 했던 사람은 작은 집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돈이 없어서 수술을 받지 못했던 아이는 수술을 받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의 폭력에 집을 나와야 했던 외국인 아내는
사랑하는 자녀와 함께 보금자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은 작은 가게를 차릴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보물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희의 희망이신 하느님,
하느님이 아니시면 굳셈도 거룩함도 있을 수 없고
하느님만이 저희를 지켜 주시니 풍성한 자비로 저희를 보살피시고 이끄시어
저희가 지금 현세의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하며 영원한 세상을 그리워하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내 형제들 중에 가장 작은이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보물’입니다.
그 보물을 발견했으면 가진 것을 팔아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늘나라를 지금 이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와 하늘 나라의 만남을 보여 주십니다.
제1독서에서는 모세가 두 번째로 십계명 판을 들고 시나이 산에서 내려온 장면을 보여 줍니다.
"모세는 주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였다."(탈출 34,32)
모세는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 뜻의 전달자이고 중개자입니다.
그의 역할은 백성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이 하느님 백성답게 살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성조 때부터 하느님에게 선택되었으면서도 그분 소유의 하느님 백성이 되는 길을
이제 막 시작하려는 이스라엘에게 그 가치를 보여주고 증명하는 존재입니다.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들이 보니, 그 얼굴의 살갗이 빛나고 있었다."(탈출 34,30)
하느님과 마주한 모세는 그 얼굴에 빛이 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시는 덕이나 영적 자질들이 대개 감추어져 있는 반면
모세 얼굴의 빛은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실제적입니다.
백성이 가까이 하기 두려울 정도로 물리적이면서도 초자연적인 빛입니다.
긴 광야 여정에서 모세를 오해하기도 하고 공격하기도 할 백성이지만
이 빛은 그들이 하느님을 감지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증거입니다.
복음은 하늘 나라와 우리 상호간의 극적인 발견과 소유 과정을 간결히 보여 줍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이 그 밭을 산다."(마태 13,44)
하늘 나라는 숨겨져 있습니다.
아무에게나 눈에 띄지 않지요. 모세가 빛나는 얼굴을 너울로 가렸다는 것도
보물이 함부로 노출되지 않고 감추어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밭과 관련이 없는 이는 보물을 발견할 확률이 적고,
주인이라면 다시 밭을 살 필요가 없으니,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아마 밭 주변을 맴돌며 뭔가를 찾고 탐색하고 뒤지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보물만 몰래 챙겨서 떠나지 않고 제자리에 다시 숨겨둔 뒤 밭 전체를 삽니다.
그렇게 하려니 가진 재산을 다 팔 수밖에 없지요.
하늘 나라는 딱 그것만 도려내듯 소유할 수 없고,
그것을 품고 있는 밭 전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비록 거칠고 메마른 박토여도 그래야 합니다.
아마 흥정할 때에 보물을 발견했다는 말은 빼고 밭에 매겨진 시세를 치렀을 겁니다.
어쩌면 보물에 대해 밭 임자에게 말을 했어도
결국 그 밭을 얻었을 것이니 크게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이기도 하지요.
그 보물이 누구에게나 보물이 아닐 수 있으니까요.
하늘 나라는 이를 간절하고 열렬히 추구하는 이에게나 전 재산과 맞바꿀 보물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마태 13,45)
밭에 묻힌 보물로 비유한 하늘 나라는 수동적입니다.
발견되길 기다리며 감추어져 있기에 존재적이고 신비적이지요.
그런데 두 번째 비유는 하늘 나라를 최상의 값진 진주를 찾는 상인에 비견합니다.
상인은 뚜렷한 목표의식 아래 부단히 찾아다니며 흥정하고 쟁취합니다.
여기서 하늘 나라는 매우 역동적이고 진취적이며 적극적입니다.
하늘 나라는 자신의 가치를 아는 이가 자기를 찾아주길 기다리며 인내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그를 찾아다닙니다.
또 하늘 나라를 추구하는 이도 부단한 노력으로 하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동시에,
그 자신이 하늘 나라에 의해 발견되고 지명되어 소유됩니다.
이 과정에는 과감한 배팅이 요구됩니다. 버림과 투신이 뒤따르지요.
하늘 나라를 발견한 이나, 가치를 아는 이는 발견한 하늘 나라나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다 버려야 보물을 쟁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는 세상 것을 다 움켜쥔 채로 곁들여 소유할 수 있는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우리도 역시 그렇게 하늘 나라에 소유되었지요. 주님께서 큰 희생을 치르고 우리를 얻으셨으니까요.
그렇다면 하늘 나라와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물론 하늘 나라는 우리를 어렵지 않게 알아 봅니다.
그리고 기꺼이 값을 치러 우리를 소유하지요.
창조 때부터 우리를 선택하신 하느님께서 하늘 나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늘 나라를 알아보고 그 가치를 추구할 수 있을까요?
그 답은 복음 환호송에 들어 있습니다.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으니,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부른다."(복음 환호송)
성자 예수님은 아버지와 우리 사이의 중개자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를 알아 보고 그분 뜻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자신을 다 내놓아 아버지를 보여 주신 분이십니다.
아버지 역시 우리에 대한 성자의 보증과 대속으로 우리와 화해하십니다.
우리가 아드님의 친구니까요. 값진 진주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우리를 얻기 위해
하느님(하늘 나라)은 당신 자신을 죽음에 넘기시는 어마어마한 값을 치르셨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숨겨진 보물, 하늘 나라를 찾기 위해 각자에게 허락하신
삶의 여정과 지금 지나고 있는 광야를 주의깊게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거칠고 황량한 박토까지 떠안아야 할지라도 그 깊이에 하늘 나라가 감추어져 있다면
모든 것을 걸 이유는 충분합니다.
하늘 나라를 찾고 있는 여러분, 또 하늘 나라에 의해 발견된 값진 진주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물을 어디에 부어야 할지 모를 때 깨진 독이라도 찾게 된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도 역시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습니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그 밭을 삽니다.
이는 하늘 나라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모든 에너지를 그것을 얻는데 쓸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의 비유도 말씀하십니다.
값진 진주를 발견하자 그도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삽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오늘도 팔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간도 있고, 건강한 몸도 있고, 각자의 재능이나 능력이 있으며, 물론 재산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어디에 사용하나요?
어차피 인생은 내가 지닌 에너지를 무언가 얻기 위해 소진하다 가는 삶입니다.
예쁜 여자를 얻기 위해 소진할 수도 있고, 명예를 얻기 위해, 혹은 부자가 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쓸 수도 있습니다.
사실 모든 에너지를 무언가 얻기 위해 쓴다면 그것을 얻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러나 우리 옆에 ‘깨진 독’도 많습니다.
그래서 버는 것보다 쓰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연예계를 보면 돈 잘 버는 자녀들을 이용해 부모가 그 모든 것을 챙기다
결국엔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가 끊어지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배우 김혜수 씨의 예도 있었습니다.
김혜수 씨가 2012년까지 벌어들인 돈의 액수는 약 170억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2012년 당시 김혜수 씨는 월세에 살아야 했다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어머니가 여기저기 투자하다 진 빚을 갚아주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결국,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어머니와 관계를 끊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어머니는 딸의 이름을 대며 많은 빚을 졌고 이것이 언론에 나오자
김혜수 씨는 자신은 어머니와 8년간 만난 적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 어머니와 관계를 끊기 그나마 잘했던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은 연예인들에 장윤정 씨나 박수홍 씨도 있을 것입니다.
부모와의 인연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부모가 가진 재산을 무엇을 위해 써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것으로부터 부모를 의심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물론 부모도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렇게 하겠지만,
부모가 이미 성장하여 어른이 된 자녀의 것까지 빼앗을 권리는 없습니다.
부모의 가장 큰 역할은 자녀를 독립시키는 것이지 자기에게 종속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가 독립적인 성인이 되었을 때
가진 재산과 에너지를 어떻게 쓰고 살아야 하는지 먼저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와 자녀들을 위해 밭에 묻힌 보물이 무엇인지,
엄청난 가치의 진주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재물과 에너지를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지 알고
자녀가 어른이 되었을 때 쓸데없이 깨진 항아리에 물을 붓게 만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밭에 묻힌 보물은 ‘하늘 나라의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을 느끼게 해 주는 ‘성령님’입니다.
이를 위해 가진 것의 100%를 사용할 줄 알게 가르쳐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땅을 사기 전까지는
그 보물이 나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당신을 받기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할 용기가 있는 사람의 것이 되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삼구를 이기고 기도할 때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그러니 돈이나 시간을 어디에 사용해야겠습니까?
일단 ‘세속’에서 멀어지기 위해 가난한 사람을 돕고,
‘육욕’에서 멀어지기 위해 운동하며,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 겸손을 위해 에너지를 소진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위한 시간, 곧 미사나 피정 같은 것을 가고
아침기도나 저녁기도 시간을 벌기 위해 돈을 써야 합니다.
그 시간까지 바쳐가며 돈을 벌겠다고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물을 어디에 부어야 하는지 몰라
어쩔 수 없이 가까이 있는 깨진 독에라도 붓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목마르면 먼저 내가 마시고 다른 사람이 마시게 하고
또 그 물을 더 얻기 위해 투자해야 하는 것을 안다면
굳이 옆에 있는 깨진 독에 물을 붓는 어리석은 삶은 살지 않을 것입니다.
오랜 무명생활로 간신히 월세살이하며 군고구마라도 팔아야 했던 ‘임영웅’ 씨.
그가 ‘미스터 트롯’을 통해 받은 상금 1억 원은 어머니에게도 드리고
그동안 여기저기 갚아야 할 곳에 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동차 첫 단독 광고를 찍고는 그 모든 수익을 전액 기부하였습니다.
자신도 월세를 살면서 첫 광고수익 전액을 기부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에너지를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아동복지 재단에 1억 원이라는 거액을 통 크게 기부하고
코로나 여파로 행사가 많이 줄었음에도 알게 모르게 기부의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그의 선행은 사실 유명해지기 전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예를 들면 2017년 아침마당에서 5연승을 하며 받은 상금 100만 원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전액 기부하였습니다.
그 당시 임영웅 씨는 군고구마를 팔며 월세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수입이 없던 시기에도 연탄 나누기 봉사활동을 다니며 묵묵하게 봉사활동을 해왔습니다.
이렇게 어디에 에너지를 써야 하는지 명확히 안다는 것은
부모로부터 올바른 교육을 받았음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부모는 재산을 쓸 때, 하느님 나라 곧 마음의 떳떳함,
그리고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목적으로 쓰도록 교육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감정을 모르는 사람, 그래서 그 감정을 위해 에너지를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은
그것들을 깨진 독에라도 붓게 되고 결국 인생을 헛살았다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어떤 부자는 자녀에게 어렸을 때부터 용돈을 주며
10%는 십일조를 내고, 10%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쓰며, 30%는 저축을 하고 나서
나머지를 원하는 대로 사용하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야 돈을 사용할 때 얻게 되는
마음의 떳떳함과 기쁨과 평화를 알게 먼저 알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교육을 통해 아이는 자신의 에너지를 잘 사용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깨진 독에 물을 부으며 느끼는 감정이 싫어서
에너지를 잘못 사용하며 사는 일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녀들을 교육할 때,
어떻게 벌어야 하는지가 아니라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지
명확히 먼저 깨닫게 해야 할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