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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정리를 해보면... 최두환 선생님의 질문에 어느정도는 대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동사록(東槎錄)/ 일본 성씨록(日本姓氏錄)에 제(題)함'' 편을 보게되면, 그대로 일본에는 본래 성씨가 없었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성씨가 생겨나게되는 순서는 등->귤->원->평의 순이라는 것입니다. 즉, 일본의 귀족, 또는 왕으로 볼 수 있는 집단의 성씨가 바로 위와 같다는 의미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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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잡록 4(亂中雜錄四)/ 경자년 상 만력 28년, 선조 33년(1600년)
수길(秀吉)이 신장을 대신하게 되자 수탈은 극도에 달하여 흉년에도 조세는 정액대로 받아들이고 백성은 지푸라기도 차지하지 못하였으므로 왜장의 부유함은 수길에게 비길 만한데 농민은 가난하여 한두 섬의 곡식도 없었습니다. 그 이른바 섭정(攝政)이라는 것도 수길이 다스리기 이전 시대에는 반드시 등(藤)ㆍ귤(橘)ㆍ평(平)ㆍ원(源)의 사대성(四大姓)만이 하여 귀족이 귀족의 뒤를 잇고 천민은 천민의 뒤를 이었으므로, 권력을 맡은 왜도 오히려 그 명의(名義)를 아끼고 중히 여겨, 감히 부도(不道)한 것은 마음대로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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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문헌을 가볍게 살표보면, 위에서 말한 성씨만 지속적으로 높은 지위를 유지하고 있고, 역시 왜에서도 천민의 신분은 지소적적으로 그 지위에서 벋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속설에 일본은 상대적으로 평등하여 능력에 따라서 최고의 지위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라고 이야기 하지만 문헌의 과거기록은 상당히 다르죠...
중요한 부분은 다른 집단과 달리 상대적으로 리더가 많이 존재하였었고, 리더들의 갈등과 경쟁이 심했다라고도 분석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능력에 따라 기회가 균등하였던 것은 가문간의 경쟁이었지, 일반 서민과 더욱이 천민들에게는 해당이 안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잦은 전쟁으로 피해를 보게되었던 계층이 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임진왜란때 왜의 명장으로 이름을 드높혔던 가등청정의 경우는 '등'씨 집안의 후손으로 11대 손이며 성씨를 등보다는 등원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다시 '원'의 성씨가 비롯되었다는 문헌이 존재합니다. 그러니, 가등청청은 '의정'의 11대 손이 되는 것이죠...
동사록에서는 분명히 등씨가 가장 먼저나온 성씨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등->평->원으로 가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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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록(東槎錄)/ 일본 성씨록(日本姓氏錄)에 제(題)함
일본에 원래 성씨가 없었는데 산성주(山城主) 윤공(允恭)때에 이르러 비로소 성씨를 정하였으니, 그때가 중국은 남북조(南北朝) 시대였다. 천지(天智) 때에 이르러 중신(中臣)에게 등원(藤源)이란 성을 주었고, 청화(淸和)에 이르러 평원(平原)이란 성을 주고 원장(元長) 등에게 원(源)이란 성을 주었으니, 등씨가 맨 먼저요, 그 다음이 평, 그 다음이 원이다. 이 세 성이 나라 안의 망족(望族)인데, 지금까지 여러 주(州)의 태수(太守)와 내직(內職)이 된 자는 원씨와 평씨가 절반쯤 되고 산성주의 성도 원씨라 한다.
세 성 중에 원씨가 번성하니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라, 뇌조(賴朝) 이전에도 대신ㆍ관백ㆍ장군이 된 자가 뒤를 이었다. 청화 원씨(淸和源氏)가 있고 태화 원씨(太和源氏)가 있고 본원 원씨(本源源氏)가 있고 겸창 원씨(鎌倉源氏)가 있고 신전 원씨(新田源氏)가 있고 족리 원씨(足利源氏)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정순친왕(貞純親王)의 후예이다.
《병자문견록(丙子聞見錄)》에 의하면 가강은 등원의정(藤原義政)의 11대 손이다.
가강의 사람됨이 고요하며 굳세고 지혜가 많았다. 관원(關源) 싸움에 행장(行長)ㆍ휘원(徽遠)의 군사는 70만이요, 가강의 군사는 겨우 20여 만으로 서로 물을 사이에 두고 진(陣)을 쳤는데 가강이 사람을 보내어 행장 등에게 항복하기를 빌며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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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일본 천황의 역사는 백제왕의 후손이다라는 기본적 개념을 토대로 보았을 때, 아래의 문헌에서 나타나는 성씨의 존재감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를 한 번 분석해 보면, 두가지 내용을 추리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첫번째는 '모'씨를 추종하던 세력이 존재했던 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사라는 책을 보면 백제왕의 성씨에 '모'씨가 존재하였고, 그 후손의 이름까지 비교적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성씨가 신라왕의 그것과도 겹쳐버리는 '아이러니'가 생겨나게됩니다. 그렇다면, 같은 성씨가 서로다른 국가에서 왕을 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의 역사가 후대로 가면서 두국가에 동일하게 인용된 것인가? 하는 것이죠.. 동사강목에서는 결론적으로 신라왕의 성씨가 '모'씨라는 것은 상당히 믿을 수 없다는 의견이 강하게 제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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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부록 상권 상/ 고이(考異)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지을 때에 뭇 책을 참고하여 그 같고 다른 점을 평하고 취사에 뜻을 두어 《고이(考異)》 30권을 지었으니, 전실(典實)하여 법다운 것만 뽑았다. 이것이 역사를 쓰는 자의 절실한 법이 되기에 이제 그를 모방하여 《동사고이(東史考異)》를 짓는다./ 남사(南史)에 말한 백제왕의 모도(牟都)ㆍ모대(牟大)와 신라왕 모진(募秦)
《남사》에,
하였는데, 백제본기(百濟本記)에 의하면,
하였을 뿐, 모도의 명칭은 없다. 이 어찌 중국에서 잘못 듣고 와전한 것이 아니겠는가? 《남제서(南齊書)》에,
하였다. 《남사(南史)》에 의거하면 모도의 아들 모대로 되었고, 《남제서(南齊書)》에 의거하면 모도의 손자 모대로 되었으니, 그 말이 의문이다. 《남사》에,
하였으니, 이는 법흥왕(法興王) 때에 해당된다. 모두 믿을 수 없어 본기(本紀)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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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문헌을 바탕으로 요약을 해보면, 즉, 왕과 귀족이라는 것은 대를 물려가면서 부와 권세를 유지하였던 세력으로 기본적으로 분석해 봅니다. 위의 문헌에서도 제시가 되었었습니다. 그러면, 현재까지도 위의 성씨가 존재하는 지역은 어디가 될까요? 아래의 내용을 보면 보다 쉽게 이해가 되지요...
1) '모'택'동>덩>등'
2) '등>덩''소'평' -> 어제 '남이장군'관련 문헌을 찾아보면서 등=배이고 배달은 등달이라고 기술되었더군요...
즉, 배가 나온 것은 역사에 삼별초 '배중손'이 유일하죠.. 그 외에 몇명 더 있었던 같은데...
즉, 혁명과 역의 사상의 시초는 바로 여기죠... 한국인을 '배달의 민족'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과연 그것이 아주 적합한 표현일까요?... 등달의 민족 ===> 왜의 후손이라는 표현인데...
달이 나오긴 합니다. => 등은 등불을 상징하죠... 등대도 같은 맥락이도리 수 있고..
3) '원'자바오
4) 후'진'타오
즉, 해당역사의 후예들이 대거 거주하는 지역이 바로 그 성씨를 현재까지도 사용하는 지역이 되겠죠. 위의 문헌을 보게되며느, 임진왜란 시절, 가등청정의 군대만 70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인구분포와 경제규모를 감안했을 때, 장정으로만 그 인원이 가능할려면, 상당히 방대한 영토와 재력이 뒷바침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군대가 70만정도 되지 않나요? 과거의 문헌에서조차 20만이 너무나 작은 숫자라고 이야기 하니까요...
그렇다면, 왜의 백제의 전통을 계승한 세력을 한반도의 지형을 바탕으로 분석해 보면 다음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본 카페의 대문에서 백제라는 지명이 China 대륙 어디에서 나타난다고 설명하고 있죠... 누군가의 세력이 해당지역으로 이동했으므로 그것이 가능하겠죠...
즉, 백제라기 보다는 '왜'의 세력의 집단 거주지는 동아시아에 있어서 현재의 China 대륙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왕과 그들의 성씨가 그것을 대변해 주고 있죠.
상당히 많은 이들이 현재의 일본열도의 천황이 백제계의 후손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상대적으로 왜/백제계라기 보다는 신라계일 가능성이 훨씬 더 많고, 만약 일본과 왜의 역사가 공유되는 부분이 있다면, China와 Japan은 거의 형제관계라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죠...
아마도 이것은 1900년대이후에 주입된 역사를 통해서 부각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을 것입니다. Chinese들 조차도 그것에 대한 심각성과 문제성을 잘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단지, 지도자 '모' 또는 '등'으로 알고 있을 뿐이겠죠...
만약 이렇다면, 분명히 여러번의 글들로부터 저의 논리는 1900년대 이후의 역사가 아닌, 1000여년 더 전의 삼국의 무대는 과연어디었을 까라는 화두에, 그것은 분명히 흑해 부근일 것이다라는 논거에 많은 분들이 긍정적인 시각을 보이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크림반도를 기준으로하는 역사에서 백제와 불가는 어디에 위치하고 있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너무도 당연하게 그것은 분명히 흑해의 서북쪽경계를 통해서 이루어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크림반도의 고대역사가 한반도로 넘어오면서 한반도를 중심으로 북서쪽을 기준으로 과거의 백제와 왜의 역사를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지요.. 어떻게 보면, 왜라는 개념은 상당히 포괄적으로 해석이되며 그 범위는 중국을 제외한 기타지역으로 상당히 넓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위의 그림에서 보면 상대적으로 동남쪽에는 이란(일한)이 위치하고 있고, 그것은 분명히 일본의 역사와 공유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며, 상대적으로 백제라기 보다는, 페르시아>신라와 역사가 공유되는 부분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집단적으로 동쪽으로 이동하면 불가리아>헝가리 지역에서 터키반도를 타고 현재의 이란지역으로 백제의 역사가 또 이동하게 되는 것이죠...
즉, 한때 신라의 세력권이었던 지역으로 백제의 역사가 동시에 동쪽으로 넘어오면서 동일한 성시의 인물이 백제왕으로도 기술이되며 동시에 신라왕으로도 기술되게 되었다라는 논리에 보다 더 가깝게 다가서게 되는 것입니다. 반월성의 경우도 그런 것이죠. 누군가가 반드시 이동을 하고 그 지역으로 그에 반하는 세력이 이주해야 설명이 가능한 부분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다른 지역에 비해서 동아시아 역사가 통합이 어렵다고들 합니다. 역사를 분석해 보면 왜? 그런지 보다 정확하게 그 이유를 알 수 있다고 봅니다. 같은 역사를 놓고 서로다른 두세력 또는 세 세력이 다툼을 하고 있는 것이죠. 어떻게 왜의 전통적 귀족 또는 왕의 가문의 성씨가 대륙에서 집단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
그리고, 동남쪽 일본열도는 일본의 후예라고 이야기하고 있고, 그들의 왕은 또 백제계의 후손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의 내용을 토대로보면 왜와 백제의 근본이되는 상당수 세력은 현재의 대륙에 아직도 머물러 있다라고 밖에는 설명이 안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만약 백제의 성지인 온조대왕의 유적이 크림반도에 있었다면, 백제와 왜의 왕의 상징은 동아시아에서 어디에 위치하고 있
겠습니까?... 너무도 간단한 논리가 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은 그대로 대입해 놓은 것입니다.
하나 사라진 것은 동북으로 볼가강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한반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죠---> 아무래도 바다건너 America쪽으로 넘어간 세력의 정체성이 바로 그들의 고대 정체성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봅니다만... 구도적으로 보면 그렇게 밖에는 결론이 안나지요...
그래서, 동아시아 사람들은 그들을 상당히 안좋아 하죠... 과거에도 그랬었던 것 처럼...^^...
<참고: 한국고대사탐구: http://cafe.daum.net/ancientkorean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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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문헌:
연려실기술 제15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임진왜란 임금의 행차가 서도(西道)로 파천(播遷)가다.
○ 일본 국왕 원(源)씨는 홍무(洪武) 초년에 나라를 세우고 우리나라와 국교를 맺은 지 거의 2백 년이 되었다. 우리나라 또한 사신을 보내어 길흉사에 경조(慶吊)를 표했다. 신숙주(申叔舟)가 서장관(書狀官)으로 왕래한 일이 있는데, 그 뒤 신숙주가 죽을 때 성종이, “할 말이 있느냐?”고 물으니 숙주의 말이, “원컨대 국가에서 일본과 화친을 끊지 마소서.” 하였다. 성종은 이 말을 옳게 여겨 부제학 이형원(李亨元)과 서장관 김흔(金訢)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3) 적중 봉소(賊中封疏)/ 록(錄)/ 임진ㆍ정유에 침략해 왔던 모든 왜장의 수효
가강(家康)이라는 사람은 관동(關東)의 대수(大帥)이다. 지금 내부 등원(內府藤原)이라 칭하는데, 원의정(源義定)의 11대 손자다. 의정이 일찍이 관백(關白)의 직을 맡았으므로 그 자손들이 관동에 대대로 사는데, 그의 식읍(食邑)이 8주(州)에 걸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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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본(日本)에서는 경우에 따라서 등(藤), 귤(橘), 평(平), 원(源)과 같은 성씨(姓氏)의 한자(漢字)들을 음독(音讀)하기도 훈독(訓讀)하기도 합니다. 저는 음독(音讀)보다도 훈독(訓讀)의 기원(起源)과 발상지(發祥地)를 조사-연구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자(漢字)의 고유한 발음과 무관하고 순수한 일본(日本) 고유어(固有語)에 해당되기 때문에 연구할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언어(言語)의 기원(起源)과 변천(變遷)으로도 관련 역사(歷史)의 무대(舞臺)를 규명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위의 글을 올린 '동'기는 대륙이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죠... 그들이 만든 미사일을 '동평'이라고 하는데, 그들의 정신세계를 옅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봅니다. 이제는 극복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이것이지요... 대륙이 깨어나야 동아시아 전체가 한단계 더 발전 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들도 그들의 정체성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를 탐구해야하며, 그것은 한국의 역사와 사료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죠... 무작정 그들도 그들의 교과서에 씌여있는대로, '명청 교체기에 어찌어찌 하였다'라는 교과서식의 논리보다는 그본적인 자기 정체성의 확립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류가 좀 있네요.. 가등의 군대가 20만이고, 기타의 군대가 70만이었군요... 그러나, 합이 90만 거의 100만이니까, 이 군대를 가지고 수길이 조선으로 방향을 틀은 것이겠죠... 정신이 없다보니까, 알 수 없는 오류가 납니다.. 알 수 없는 오류를 따라한 오류도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