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야사] "서울의 바람둥이"
연산군은 19세 때인 12월에 성종이 병사하자, 그 이듬해 1월 29일 창덕궁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이때 인수대비와 인혜대비 (예종 왕비)를 대왕대비로, 대행왕비 윤씨를 왕대비, 세자빈 신씨를 왕비로 승격시켰다. 왕위에 등극한 연산군은 조선 10대 임금이다. 연산군은 왕세자 시절 생모가 있었지만 자신만은 그것을 모른 채 성장했다. 그 후 자신의 어머니가 사약으로 죽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즉 인수대비가 생존해 있을 때 대궐 안의 그 누구도 왕세자 (연산군)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만약 그 말을 발설하면 남녀를 막론하고 목을 베겠다며 감시 했기 때문이다.
왕세자는 고집불통으로 자기의 견해와 맞지 않으면 듣지 않았다. 하지만 부왕 성종에게는 그렇지 않았는데, 그것은 복종이 아니라 겉으로만 순종했던 것이다. 성종이 사슴을 잡아와 대궐에서 기르고 있었다.이 사슴은 영리해 사람을 잘 따랐다. 어느 날 왕세자가 부왕 성종에게 문안오자 항상 그랬던 것처럼 사슴은 뛰쳐나가 왕세자의 손과 얼굴을 핥았다.그러나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왕세자는사슴의배를 발로 걷어찼다. 일격에 사슴은 나뒹굴었다. 왕세자의 이런 행동에 성종뿐만 아니라 옆에 있던 중신들까지 놀랐다. 그것은 사슴의 부상이 염려스러워서가 아니라 왕세자의 포악한 행동 때문이었다. 성종은 진노한 표정으로 와세자를 꾸짖었다.
"동궁! 짐승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그렇게 했느냐?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두 덕을 주고받는 게 인지상정이니라. 그런 것을 아는 네가 짐승을 발로 차다니! 이런 포악성은 네가 성장해 보위에 오른다면 틀림없이 백성들을 천대 하게 될 것이야! 그렇게 되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느뇨." 성종의 책망을 가슴 아프게 여겨왔던 연산군은 보위에 오른 이튿날 가장 먼저 사슴을 죽였다. 연산의 포악성을 이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왕세자의 스승으로 조지서와 허침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성격이 정 반대였다. 조지서는 강직한 성격으로 포용력이 없었는데, 공부를 하지 않는 왕세자를 매번 닥달하고 구짖기만 했다. 허침은 부드럽고 포용력이 있었는데 왕세자가 공부에는 마음이 없음을 책망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어느 날 조지서는 수업시간이 되어 왕세자 방으로 갔다. 왕세자는 없고 벽에 '대성인은 허침이요, 대소인은 조지서다'라고 적힌 글씨를 보았다. 불같은 성격의 조지서는 사표를 내려고 했지만 왕세자의 허물이 세상에 알려질 까봐 참았다.
왕세자가 보위에 오르자 조지서는 자진하여 창원군수로 갔지만 얼마 후 사직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지족정이란 정자를 짓고 여생을 즐겼다. 그러나 연산군 10년 갑자사화에 걸려 극형을 당해 강물에 버려졌다. 허침은 우의정과 좌의정까지 벼슬하면서 일생을마쳤다. 왕세자는 어려서부터 글보다 여색을 밝혔는데, 열세 살에 세자빈을 맞았지만 젊은 궁녀들을유호했다. 더구나열여섯 살 때에는 곽린의 딸을 세자궁으로 맞이했다. 황음 (荒淫)의 싹은 이미 이때부터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