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사용자가 만들어내는 '희망선' (상)
사람들 이동할 땐 최단거리 동선 선호
'직각 동선' 시간·에너지 낭비라고 판단
문화마다 '염소길' '코끼리길' 등 표현
인류사회도 길을 중심으로 마을 만들어
계획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연결된 도로
도시가 거대지면서 기능 상실 불가피
사용자가 만들낸 '희망선' 역기능 존재
우리가 일상 속에서 무심코 지나치는 사물과 환경에는 미처 생각지 못한 맥락과 배경, 정치·사회적 의미가 숨겨져 있다. 익숙한 일상 풍경에서 미술사적 의미를 발굴해 온 박상현 작가가 새 연재물 ‘일상 속 문화사’로 돌아왔다. 인종과 젠더, 소수자 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30회에 걸쳐 짚어본다.
희망선의 대표적인 예. 사람들이 걸어다닌 지점의 잔디가 죽어 있다. 이 공원을 설계한 회사는 사람들이 기역(ㄱ)자로 이동하도록 길을 냈지만, 보행자들은 최단거리를 찾아낸 것이다
몇년 전, 내가 살던 동두천의 한 아파트 단지 내에 자그마한 싸움이 벌어진 적이 있다. 소리를 지르거나 물리적인 충돌이 벌어지는 그런 싸움이 아니었다. 서로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는 채 싸웠던, 신경전에 가까운 일이었다.
발단은 이랬다. 아파트 주민들이 단지를 나와 지하철 역으로 향할 때 정해진 보도를 사용해 기역(ㄱ)자로 이동하지 않고, 작은 잔디밭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지름길을 낸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지점의 잔디가 죽고 흙이 드러났다. 아마 비슷한 일이 한국의 수많은 아파트 단지에서 일어나고 있을 터. 사람들은 대부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그걸 못마땅하게 생각한 주민이 있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출근길에 보니 나무 한 그루에 “잔디밭으로 다니지 말고 보도를 이용합시다”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관리사무소의 공식안내문 양식이 아니라 개인이 손으로 쓴 글이었다. 그걸 본 사람들 중 일부는 잔디를 밟지 않고 돌아갔지만, 대부분은 무시하고 잔디를 밟고 지나갔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싸움은 며칠 뒤에 시작되었다. 누군가 잔디를 밟고 지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종이를 찢은 뒤 보란듯 바닥에 놔둔 것이다. 그냥 말을 듣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나에게 잔소리를 하지 말라는 태도가 분명했다. 분명한 도발행위였다. 그리고 그 호소문을 붙인 사람은 그 도발을 분명하게 인지했다.
바로 다음날 단단한 포장끈을 동원해 주변 나무들을 겹겹이 연결해서 잔디밭 지름길을 막아선 ‘장벽’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호소문은 없었지만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말로 해서 안 들으니 막아버리겠다’는 거다. 이제는 모두가 꼼짝없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상태로 며칠이 지났고, 모두들 사태가 그렇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출근하면서 보니 누군가 커터칼로 잔디밭을 막고 있던 포장끈을 잘라낸 게 아닌가. 관리사무소가 한 일이 아닌 건 분명해 보였다. 그랬다면 포장끈을 깨끗하게 없앴을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나무를 연결한 끈장벽을 보란듯 반토막 내버렸기 때문이다. 끈들은 다음날 아침 다시 묶여 장벽으로 복구되었으나 그 이튿날 다시 잘려나갔다. 그로부터 몇주 동안 끈이 잘리고 묶이는 일이 반복되더니 마침내 끈은 사라지고 잔디밭을 가로막는 허리 높이의 나무 울타리가 생겼다.
우리는 이 문제를 흔히 ‘공중도덕’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공중도덕의 대명사는 잔디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의 발단은 잔디를 밟고 다닌 주민들이 아니다. 이 모든 일의 책임은 그 아파트 단지를 설계한 건축회사에 있다.
그 아파트 주민의 상당수는 출근 때 도보로 약 15분 정도 떨어진 1호선 지하철 역을 이용한다. 그런데 동두천은 서울처럼 열차가 3, 4분마다 오는 게 아니라서 한 번 놓치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곳이다. 따라서 출근길은 항상 마음이 조급하다. 단 몇초 차이로 회사에 20분 이상 지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파트 단지는 불필요한 화단, 물도 나오지 않는 분수대 등 온갖 장애물을 길 한복판에 설치해 주민들을 지하철역까지 빙 돌아가게 만들었다.
출·퇴근자들의 장애물 통과는 아파트 단지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단지에서 대각선 방향에 위치한 지하철역에 도착하면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 다시 기역(ㄱ), 니은(ㄴ)자로 막아둔 화단을 넘어서 통과해야 한다. 지하철역 앞 광장을 설계하면서 근처 주거지역이 어디에 있고, 사람들은 어느 방향에서 역으로 들어오는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저 보기만 좋게 화단으로 장벽을 만들어둔 것이다.
사람들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할 때 최단거리의 동선을 찾는다. 직각으로 꺾어야 하는 동선, 커다란 장애물이 있어서 돌아가야 하는 동선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모든 것들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을 찾아낸다. 설계한 사람들의 의도와 다르게 사람들이 찾아내고 만들어낸 동선을 ‘희망선(希望線, desire path)’이라 부른다.
희망선의 대표적인 예가 등산로다. 포장을 했거나 설계를 하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주 다니다 보니 생긴 길이 등산로다. 물론 사람들이 몰리면 관리차원에서 길을 보강하는 나무판을 깔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미 희망선이 분명하게 만들어진 후에 일어나는 일이다.
희망선을 만들어내는 것은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동물들이 숲속에 만든 이동통로는 사냥꾼들이 덫을 놓는 장소가 되고, 훗날 등산로로 발전하기도 한다
희망선은 인간만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장애물을 피해 시간과 에너지가 최소화되는 동선으로 이동하려는 바람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각 문화마다 이런 희망선을 ‘염소길(goat trail)’, ‘코끼리길(elephant path)’처럼 동물들이 다니는 길로 묘사하는 일이 흔하다.
사실 많은 등산로들이 원래는 야생동물들이 다니는 길에서 시작한다. 빽빽하게 자란 수풀 밑으로 작은 동물들이 다니다가 수풀이 죽거나 줄어들면 그리로 좀더 큰 짐승이 이동하면서 이동이 편리한 지점이 생겨나는데, 사람들이 숲으로 다닐 때는 그렇게 동물이 만든 길을 따라가게 되기 때문이다.
인류사회는 애초에 이렇게 오랜 세월에 걸쳐 동물과 사람들이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길을 중심으로 마을을 만들고 도시를 발전시켰다. 서울의 강북지역이나 유럽 도시들의 구시가를 보면 길들이 구불구불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길이 제대로 만들어지기 전에 사람들이 자주 들르는 (가령 주막 같은) 곳들이 먼저 생겨났을 테고, 사람들은 그렇게 자주 가게 되는 지점들을 최단거리로 이동하는 동선을 만들어가다가 자연스럽게 길을 내게 된 거다.
하지만 그런 길이 반드시 편리한 길은 아니다. 왕래가 잦은 곳의 숫자가 적을 때는 직선거리를 내는 게 편하겠지만,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계획 없이 연결된 도로들로만 만들어진 도시가 거대해지면 사람들은 그 안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뻔히 보이는 거리에 있는 도착지로 가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서 운전해야 하는 일이 발생한다. 서울의 한강 이남 지역에서만 운전하다가 강북지역에 들어오면 헤매게 되는 게 그런 이유에서다.
미국에서는 그런 대표적인 예가 뉴욕의 맨해튼과 보스턴이다. 맨해튼은 남북을 연결하는 애비뉴(avenue)와 동서를 연결하는 스트리트(street)가 바둑판처럼 촘촘하게 깔린 곳이다. 곳곳에 일방통행 도로가 있어서 돌아가야 할 일이 생기기는 하지만, 처음 운전하는 사람도 길을 잃지 않는 도로다. 숫자로 된 도로 이름만 봐도 내비게이션 없이 스스로의 위치가 짐작이 되기 때문이다.
반면 같은 북동부에 있는 도시라도 보스턴은 전혀 다르다. 맨해튼과 같은 체계적인 도시계획이 없이 자연스럽게 발전한 길을 따라 도로를 냈기 때문에 그곳에 오랜 살던 사람이 아니면 내비게이션 없이 돌아다니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용자들이 만들어내는 희망선이라고 무조건 정답은 아닌 셈이다.
박상현 작가 / 세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