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지나가던 개도 웃을만한 논리구만...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고 해가 없다고 할 수는 없는 일.....국민 모두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를 없다고 할 순 없는거 초등학교 안나와도 아는 거 아닌가....어디 개떡 같은 논리로...저승에 계신 분들이 일본군 앞잡이 변절자 색마에게 훈장 받았다고 기뻐하시겠다..
지금 이 땅에서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사회적 관심과 존경과 그만한 대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내노라 하는 재벌가와 사회 지도층 중 친일 앞잡이 부지기수인데(현재 인기가도 달리고 있는 김무성 의원도 부친 김용주(전방(구 전남방직) 설립자)가 '2차대전 당시 황군에게 위문편지를 보내자'는 운동을 펼쳤고, 해방후 주일공사를 역임함) 독립유공자와 운동가의 후손들은 어떤한가....그 후손들은 조상의 독립 운동덕에 철저히 견제와 외면을 받으며 오히려 역차별을 당하며 살고 있다...그래서 조상들의 자랑스러운 이름 석자를 감추고자 하고 성공을 위해 변절 조차 서슴치 않고 있는데....
http://orbi.kr/bbs/board.php?bo_table=united&wr_id=2817930
친일파 후손
특징: 학계, 재계, 관료, 문화예술계 인사가 많으며 정계 진출자는 적음 (친일경력 부담 때문일 것으로 짐작)
정계진출자
이회창(전 한나라당), 정두언(한나라당),박근혜(한나라당),김무성(한나라당) 등등
민영휘(조선왕족/ 조선병합지지/ 자작/ 매국공채 5만원/ 부정축재- 조선최대갑부 반열)
손 민병도 : 제일은행장, 한국은행총재 지냄
증손 민웅기 : 남이섬 소유
증손 민인기 : (대치동) 휘문고교 이사장(현/ 교정에 민영휘 동상
세워져 있음)
현손 민경현 : (인사동) 풍문여고 이사장(현)
이완용
을사오적. 한일합병 공로로 백작작위 및 은사금 15만원 받음.
손자 이병길(귀족작위 및 재산 승계), 증손 이윤형(광복후 숨어지내다 60년대말 대한사격연맹 사무국장 역임, 17년간 캐나다 생활후 80년대말 귀국, 이후 땅찾기 소송 승소로 수십억원 챙김)
손자 이병주(62년 일본 밀항, 일본정부가 귀화시키고 환대), 증손 이석형(79년 이완용 부부 묘를 파내어 화장)
이병도: 실증사학으로 유명한 친일사학자. 이완용의 친척으로 알려짐. 화장 후 관 뚜껑 태워버림.
송병준
을사오적. 일진회 총재. 한일합병 공로로 백작작위 받음.
아들 송종헌(작위 및 재산 승계, 중추원 참의, 조선농업주식회사 설립), 손자 송재구(홋카이도에서 조선목장 경영)
증손 송돈호(역삼동 건설회사 운영, 90년대 중반 이후 송병준 명의 토지 상속소송 주도. 사기 혐의로 07년 4월 구속. 최근 친일재산 특별법 위헌소송 냈으나 기각)
이근택
을사오적. 형 이근호, 동생 이근상 등 총 6명의 일제 귀족을 배출한 대표적 친일집안.
아들 이창훈(자작작위 승계), 증손자 이상우(전 공주대 총장), 이춘우(공주대 물리학과 명예교수)
2005년까지 선대의 친일재산을 돌려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총 9건의 소송.
민영휘
한일합병 공로로 자작작위 받음. 관직자리에서 모은 재물로 일제시대 최대 갑부가 됨.
휘문고교 상속. 증손 민덕기(풍문여고 설립), 민인기(휘문의숙 이사장), 고손 민경현(풍문학원 이사장)
손자 민병도(제일은행장, 한국은행 총재), 증손 민웅기(남이섬 소유)
이병무
정미칠적. 해산된 군대가 일으킨 의병 진압. 한일합병 공로로 자작작위 수여받음.
아들 이홍묵(자작작위 승계), 증손 이진(12대 국회의원, 현 웅진그룹 환경경영담당 부회장)
민병석
경술국적. 한일합병 공로로 자작작위 받음. 총독부 중추원 고문 다섯 차례 역임.
아들 민홍기(자작작위 승계), 민복기(일제시대 사법부 근무, 5~6대 대법원장)
손자 민경성(일본계 기업체 사장), 민경택(서울지법 판사, 서울지검 검사), 민경삼(기업인)
박제순
을사오적. 한일합병 공로로 자작작위 받음. 중추원 고문 역임.
아들 박부양(중추원 서기관), 손자 박승유(성악가, 강원대 음대 교수)
이해승
김연수
호남지방 대지주. 친일 기업인. 중추원 참의. 61년 전경련 전신인 전경협 회장 역임.
장남 김상준(삼양염업 명예회장), 차남 김상협(16대 국무총리), 3남 김상홍(삼양사 명예회장), 5남 김상하(삼양사 회장)
최남선
3.1 운동 후 변절. 어용단체 조선사편수회 참여. 중추원 참의.
장남 최한웅(서울대 의대 소아감염학 권위자), 손자 최국주(피부과 전문의), 최득주(경기대 경영학부 교수)
문명기
제지업, 수산업, 금광개발로 부 축적. 태평양전쟁 당시 본인소유 광산을 일제에 기부. 중추원 참의.
맏손자 문태준(7~10대 국회의원, 보건복지부 장관 역임)
최준집
강릉 갑부. 중추원 참의 역임. 37년 중일전쟁 발발하자 회갑연 취소후 국방헌금 1000원 납부.
아들 최돈웅(8, 14, 16대 국회의원. 02년 대선 당시 이회창후보 불법선거자금 연루돼 징역1년 선고)
현준호
박정희
만주군관학교 졸업, 만주군 장교로 근무. 창씨명: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친일경력 논란. 5~9대 대통령
장녀 박근혜(전 한나라당 대표), 차녀 박근령(육영재단 이사장)
홍진기
일제시대 판사로 근무. 창씨명: 德山進一. 법무부, 내무부 장관 역임. 전 중앙일보사 회장.
중추원 참의를 역임한 김신석의 사위
장녀 홍라희(이건희 부인, 리움 관장), 장남 홍석현(전 중앙일보 회장, 전 주미대사), 차남 홍석조(전 광주고검장)
방응모
일어 상용운동 주창. 친일잡지 <조광> 발행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9대 조선일보 사주.
손자 방우영, 방일영(전 조선일보 회장), 증손자 방상훈(조선일보 사장)
김성수
이병도
백붕제
윤치영
박희도
이갑성
독립운동가 후손
독립유공자 유족 6283명 가운데 직업이 없는 사람이 60%를 넘고, 봉급생활자는 10% 남짓이며, 중졸 이하 학력이 55% 이상이다. 이들은 대부분 비참하게 산다. 일부는 친일파 후손에 밀려 외국으로 피했다.
특징: 대다수가 가난을 대물림하거나 국내에 적응 못하고 해외로 이주. 사회주의 계열은 독립운동가로 인정조차 받지 못함. 봉급생활자 중에 경비원 다수.
안중근
독립운동 최고명가. 40명 넘게 독립운동에 투신, 11명 서훈 받음.
부인 김아려(중국 상하이에서 별세), 맏아들 안우생(안분도. 여섯살 때 일제 밀정에게 독살)
사촌동생 안경근(4.19혁명후 '민주구국동지회' 설립, 5.16 군사정권 하에 7년간 투옥)
조카 안민생(평화통일 운동에 매진 중 5.16 군사정권 하에 10년간 징역), 안진생(80년 전두환정권 하에 강제해직 당한 후 8년간 투병 뒤 별세)
이후 후손들 해외로 이주: 손자 안웅호(미국 심장병 전문의), 손녀 안선호(LA), 안연호(시애틀), 외손녀 황은주(미국에서 살다가 귀국), 황은실(미국), 동생 안공근 가족(북한), 조카 안연생 가족(파나마), 사촌 안봉근 가족(독일)
안창호
임시정부 지도자. 흥사단 창립한 민족계몽운동가
자녀 모두 도미 후 성공했으나 한국과 왕래 전무: 장남 안필립(헐리웃 영화배우), 차남 안필선(하워드 휴즈 항공 부사장), 장녀 안수산(미해군 최초 여성 포격장교, 미국 안전보장국 비밀정보 분석가), 차녀 안수라(미국), 3남 안필영(미국)
김구
사회적으로 대접받은 유일한 독립운동가 집안
아들 김인(안중근 조카 안미생과 결혼, 광복직전 요절)
아들 김신(공군참모총장, 교통부장관 역임)
손자 김진(참여정부 주택공사 사장, 금품수수 혐의로 구속), 김양(상하이 총영사, 국가보훈처장), 김휘(광고대행사 에에블리 대표), 김미(김호연 빙그레 회장 부인)
신채호
1912년 망명 후 지금까지 국적 회복되지 못함. 호적이 없다는 이유로 땅과 집 소유권도 인정받지 못함.
아들 신수범(일제하 은행 근무, 광복 후 실직. 신채호가 이승만 정책에 반대하자 자유당 정권에게 신변위협. 넝마주이, 부두노동자로 생활하다 이승만 하야 후 은행 복직)
며느리 이덕남曰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쳤던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이 땅에서 자부심을 갖는 것은 사치다"
차리석
장병준
호남 갑부 출신. 임시정부 외무장관 역임. 4형제 모두 독립운동.
장남 장경식(제대로 교육받지 못함), 손자 장하정(경기도 용인 시골마을에서 양자로 입적한 스리랑카 노동자 오산다의 보살핌을 받으며 말년을 보내는 중. 오산다曰 "스리랑카도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기 때문인지 한국에 와서 독립운동 자손이 어렵게 사는 모습을 보니 안쓰러웠다")
조카 장재식(전 산업자원부 장관), 손자 장하준(캠브리지대 교수), 장하석(런던대 교수)
조카 장충식(한국후지필름 사장), 손자 장하성(고려대 교수), 손녀 장하진(전 여성가족부 장관)
김성숙
조선의열단 선전부장, 조선의용대 정치부장, 임시정부 내무차장, 국무위원 역임. 이승만 독재 반대로 궁핍한 생활.
아들 김정봉(일제 때 징용, 귀국 후 정신이상으로 경제활동 중단), 손자 김덕천(아내 위암, 본인 구강암 진단받았으나 독립유공자 혜택없어 치료 못받음)
이원근
1919년 4대문 사건 주동자로 옥고 치름
손자 이승봉(경비원으로 근무)
방한민
조선총독 암살계획으로 옥고 치름
손자 방병건(최근까지 경비원으로 근무)
홍병기
민족대표 33인. 천도교 장로, 독립선언서 서명
손자 홍재웅(노모 치매와 중풍으로 사망, 본인 사업실패 후 당뇨와 치매 환자, 아내 동사무소 공공근로. 보상금 혜택대상 제외)
이승훈
유여대
신흥식
박준승
나인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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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키 마사오의 충성맹세혈서

박근혜의 아버지 忠日군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처음 개명한 이름이 조선식이라 마음에 들지않는다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의 이름으로 다시개명] '오까모토 미노루'가 일왕에게 충성을 다 하겠다'는 박정희가 바친 '충성맹세혈서' 내용은 이렇습니다.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모든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아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스러운줄 아오나 무리가 있더라도 반드시 국군(왜군)에 채용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이며.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로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일본(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고, 멸사봉공,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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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egye.com/content/html/2006/08/09/20060809000886.html
박정희의 일본식이름은 왜 두개였나
''다까기 마사오''와 ''오카모토 미노루''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제시대 창씨개명 이름들, 어떤 뜻인가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와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 해방 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식 이름이다. 몇몇 재중동포들이 기억하는 ‘마쯔모도’도 있지만 이는 사실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앞의 두 이름은 시기와 성격에서 차이가 있다. ‘다카키 마사오’는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한 다음해인 1941년에 바꾼 것이다. 언론인 조갑제는 저서 ‘박정희’에서 “군관학교에서 한국인 생도들에게 1주일씩 휴가를 주며 ‘고향에 가서 창씨개명을 해오라’고 시킨 것이다. 퇴교 등 명시적 협박은 없었으나 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고 동기생들은 말한다”고 밝혔다.
이 이름엔 원래 박정희 이름의 흔적이 남아 있다. 목(木)은 박(朴)에서, 정은 정희에서 따온 것이라서다. 이처럼 강압적 분위기에서 원래 이름의 흔적을 남기며 창씨개명하는 게 그 시대엔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오카모토 미노루’는 다르다. 우선 조선 이름 ‘박정희’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재일 언론인 문명자씨는 1999년 발간한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서 “만주군관학교 시절 박정희의 창씨명은 다카기 마사오. 그 곳을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했을 때 박정희는 창씨명을 완전히 일본사람 이름처럼 보이는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꾼다”고 기술했다. 일본 백과 사전엔 박정희의 창씨명이 오카모토 미노루로 기록돼 있다.
이와 관련 김병태(79) 건국대 명예 교수는 “박정희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관동군 23사단 72연대에 배속됐는데 거기 연대장의 이름이 오카모토였다”며 일본군 고급장교와의 관련성을 시사했다.
특별취재팀=류순열·김태훈 기자 ryoos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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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kamui527/110128450938
채홍사, 박정희, 김재규 그리고 박근혜
>>> 위 글은 펌이 안되니 직접 링크를 확인하시길...
사족 : 박정희, 김삼화 를 키워드로 검색해 보면 그의 엽기행각에 대한 내용도 나옵니다
첫댓글 대부분의 독립운동가출신들이 박정희를 따른걸알고있습니다 그중 김구의아들 김신이 군인출신으로서 박정희의 516의 오른팔역할을했지요 그리고 박정희의 친일혈서는 말이안됩니다 박정희는 39년2월29일 이전에 벌써 군관학교에 합격된상태였는대 합격후 3월31에 왜혈서를쓸까요?
대부분의 독립운동가 출신이 박정희를 따랐다고? 누구 누구요?
그러니깐 잘못 행동하면 조상 욕 보이는 거지요...
다까끼 마사오가 왜 혈서를 썼을까라고 물어보면 ...출세하고 싶은 반역의 피가 흐르는 종자라서....
@주방장 김구선생의 아들 김신은 박정희와 함께 5.16혁명에 동참하였고 공군참모총장 역임. 손자 김양은 이명박 정부에서 국가보훈처장 역임. 손녀 김미는 전 새누리당 의원 김호연의 부인.
윤봉길 의사의 손녀인 윤주경은 새누리당 국민대통합위원회 부위원장 역임.
@puritan 그래서 변절의 이유를 위에 댔는데여....이재오 김문수....,다 같은 맥락이어요....김신 장군 말고 대부분이라 했는데 또 누구 누구인지...
거기다 노무현정권때 대통령직속기관인 친일진상규명위 에서 몇년간 박정희에대해 저명한학자들이조사를해보았지만 결국 친일로볼수없다고 결과가나왔죠
끝까지 읽어보셔야죠~~~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01&newsid=20091106160904535&p=ohmynews
핵심관계자는 "지금까지 많은 논의를 했지만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위를 입증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며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위를 입증할 자료가 없어서 심의를 보류한 것이지, '박 전 대통령은 영원히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못 박은 건 아니다"며 이같이 말했다.
또한 이 관계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이번에 공개한 자료를 우리는 그동안 입수하지 못했다"며 "새로운 자료가 나왔으니 후대의 역사가들이 다시 평가해주길 바란다"고 판단을 유보했다.
@주방장 노무현정권 당시 친일조사때 자신들 쪽에서 친일인사가 더 많아서 유야무야된 것은 알고 그러시나요? 동학혁명 당시 탐관오리였던 고부군수의 손녀도 그쪽 사람이었죠. 님이 제시한 것만큼이나 그쪽에도 친일인사가 많으니까 검색해보세요.
@주방장 저기 주방장님 일딴 저게말이안되는게 먼저 진상규명위는 노무현시절 직속기관으로 이른바 좌파쪽학자들이 주를이뤘습니다. 박정희를 친일로몰고싶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국가기관인대 누구나 객관적으로 납득할만한 증거가 있어야지 친일파로 결론내릴수있겠죠? 그래서 학자들은 5년간 만주군사학교는물론이고 일본국회도서관 만주신보등 제가알기로는 할수있는 최선을다한걸로알고있습니다 그런데
@주방장 그런데 결국 증거를못찾고 5년간의 조사결과가 친일로볼수없다라고나온거지요. 자여기서 질문드릴게요 친일증거를 조사해보니깐 증거가안나왔다 하지만 미래에는 무조건나올것이니 일딴 친일파로하자 이게 좌파님들 논리아닌가요? 친일파짓을안했으니 당연히 친일증거가 안나오는거다 이게 더 논리적이지않을까요? 그리고 혈서는 97년 조갑제씨가 제시한건대 그게 조사에빠졌다는건 전혀말이안되는겁니다
@주방장 님말처럼 미래에 정말명확한 증거가나와서 친일로결론난다면 친일인것이지만 아직 그증거가 제대로나오지도않았는대 벌써 친일파라고할수있을까요? 이건 박정희와 그의 친인척등 을 명예를훼손하는겁니다
다 니같이 등신이어서
말이 새우젓같이 하는구나...
노무현정권에서 그렇게 파헤치고도 박정희의 친일에 대한 증거를 못찾았습니다. 좌파정권에서도 친일로 판명내지 못한 사안임에도 이적단체로 판결받은 남민전을 전신으로 하는 민족문화연구소의 출처 불분명한 자료 및 인터넷 자료만을 근거로 박정희를 친일로 낙인찍는 것이 온당한 처사입니까? 님이 퍼온? 자료는 신빙성이 없습니다. 하나만 지적하자면 좌파에서는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로 두번째 창씨개명을 했다고 날조하는데 찾아보면 알겠지만 박정희 학창시절 선생 이름이 오카모토 미노루이고 졸업앨범 자료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선생 이름이 와전을 거쳐 박정희 두번째 창씨개명으로 날조된 것입니다.
거참,,,위에 글이 짤려서 이쪽에다 이어붙입니다...
관계자는 "새로운 자료가 나왔으니 다시 평가할 수 있지 않냐"는 질문에 "위원회의 보고서는 벌써 인쇄가 들어갔고, 지금 와서 새롭게 연구하고 추가할 수는 없다"고 답했다. 결국 대통령 직속 위원회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해 '후대의 평가에 맡긴다'는 애매모호한 결론을 내린 셈이다.
@주방장 님 주장이 그렇게 신빙성 있는 것이라면 국가에 건의하든 자료를 제출하든 해서 박정희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하세요. 그러면 믿어드릴게요. 그렇게 하지도 못하면서 인터넷에서 백날 선동해봤자 무슨 소용입니까?
@dptmEpfm 이 자슥은 뭐라는 작자가 말싸가지가 개떡같기 그지없구만...
좌파세력들은 자신들의 자료가 출처가 분명한지 정확한 것인지부터 살펴야 마땅합니다. 사실관계를 잘 모르는 국민들 상대로 날조된 자료라도 선동부터 하자는 못된 습관은 시간이 지나면 받드시 밝혀질 것입니다. 이미 광우병 선동등으로 국민들도 어느 정도 선동에 대한 학습효과가 있어서 예전처럼 쉽게 선동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친일이 욕먹는 것은 결국 국가에 해악을 끼치기 때문인 것인데 박정희의 과를 인정하더라도 가난해소, 경제발전이라는 공이 그 과를 덮고도 남습니다. 좌파가 끊임없이 박정희를 친일로 흠집내려는 것은 남한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북한의 정통성을 내세우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는 것을 통찰해야 합니다.
좌파.,...그넘의 색깔론....지역감정과 더불어 수구세력들이 써먹는 프레임...님도 좀 깨셔요....
80년대 중반 학번입니다,,,그 격동의 시기에 불온서적 한번 본 적도 없고 데모가 불러본 적도 없어요...시위는 더더구나...사회 물 먹다 보니 내가 모르는 세상과 역사에 대해 조금씩 알게되면서 안타까워 그런겁니다..
(졸려여 그만 잘랍니다...내일 또 일찍 일어나야 해요)
@주방장 님이 접하는 대부분의 자료가 편향적인 소스에서 나온 자료인가 보네요. 저도 맹목적으로 박정희 옹호하는 것 아닙니다. 양쪽 자료 비교해 보면서 판단한 겁니다. 님이 가져온 자료들만 봐도 지극히 날조된 자료인데 님께서 비판없이 무분별하게 수용한 결과 왜곡된 프레임에 갖힌 걸로 보이네요. 저보고 안타깝다고 하기 전에 본인이 잘못된 틀에 갖혀서 판단착오 중인건 아닌지부터 철저하게 검증해보세요. 그러려면 반대쪽 주장이나 근거등은 스스로 찾아보셔야겠지요. 그쪽 자료만 읽으면 님처럼 되는게 당연합니다.
@dptmEpfm 벌레처럼 달라 붙었군...
삭제된 댓글 입니다.
자려 누웠는데 띵똥 소리나서 일어났네요...뭐가 막무가내식 자료라는 겁니까? 봅시다...소위 수구쪽에서는 얘기하는 근거 있는 자료를 얻을 수 있나요? 공중파 일간지에서 내보내주지도 않습니다..껏해야 한겨레나 경향 정도구요...많은 글들이 그래서 인터넷 정도에서나 머무르는거죠...저 위의 사진들이 가짜인가요? 저도 일본어 좀 압니다만...
아 즌짜 어제 늦게 자서 졸립네요...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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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장 일본국회도서관 자료는 원본이 아니라 사본입니다. 사본은 위조 가능성이 커서 증거력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저 자료만 놓고 생각해도 모순이 많습니다. 일단 저 페이지만 보관되고 있는 점. 당시에 쓰이지 않은 현대 일본어로 작성된 점. 민문연에서 처음에 만주일보자료라고 주장하였으나 1935년 폐간되었다는 것이 알려져서 부랴부랴 만주신문이라고 정정한 점. 만주신문은 중국어와 만주어로 발간되었고 널리 읽히던 신문이 아니라는 점. 혈서제출시기가 합격자발표 이후라는 점. 박정희는 하사관 자격이 있어서 혈서없이도 나이제한에 걸리지 않는다는 점. 당시 채용은 치안부 군형과에서 담당하나 있지도 않은 징모과라고 되어있는 점.
@주방장 이처럼 사료로 삼기에는 조잡한 점이 많아서 사학자들 사이에 사실상 사료로서 폐기가 된 것입니다. 노무현 정권 당시에 혈서주장도 검토하였고 이러한 모순점때문에 박정희를 친일로 규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유리한 자료만 사실인양 호도하는 좌익세력들의 불순한 선동으로 무지한 사람들이 잘못된 지식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1950년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우리나라가 그 당시 우리보다 잘 살던 필리핀을 앞질러서 경제대국이 된 것만 봐도 좌익세력들의 억지주장에 선동될 수 없는 것입니다. 박정희가 사리사욕이나 챙기는 친일파였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의 번영은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puritan 그 확신이 무섭네요...이승만 박정희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더 좋은 나라가 되었을거라는데요 베팅합니다
@주방장 해방후 국내에 이승만처럼 국제정세를 제대로 통찰하고 있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승만은 프린스턴 대학교 국제법 박사 출신이고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김구 선생조차도 공산주의자들의 간교함을 간파하지 못하고 김일성에게 휘둘렸습니다.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고 제헌국회가 하나님께 대한 기도로 시작한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물론 이승만에게도 과오는 많지만 공산주의의 물결을 막아내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건국한 공로는 잊혀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승만이 없었다면 박정희까지 갈 것도 없이 한반도가 김씨왕조 아래에 놓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puritan 세상에나 이승만이까지....학창시절 왜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이 이승만이 되었을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들 무척이나 많이 배웠는데 그들이 아닌 이승만이 왜? 단지 미주에서 독립운동했다...뭐 이게 다였지요..나중에 궁금증이 해소되었지요..학벌을 배경으로 한 사기 모사꾼이란걸...해방 후 미국 입장에선 딱 부려먹기 좋은 인물이었으니....전쟁나서 구라치고 튄거 보세요...
민족주의자들은 매세들이 제일 싫어합니다...민족주의자들치고 잘 된 사람들 있나요?
지나가다가 한마디 적습니다. 위에 댓글 쓰신 분들은 예수님 외에 죽은 박정희도 주로 섬기는것처럼 보이네요.
박정희도 부족한 인간일 뿐입니다. 다만 북한 김씨왕조의 남조선분열정책의 일환으로 박정희 흠집내기가 시작된 것도 모르면서, 민주주의, 인권 타령하며 자신도 모르게 혹은 알면서도 북한 김씨왕조 우상화 정책에 일조하고 있는 좌익세력들의 행태가 이 나라에 큰 해악을 끼치기에 거짓선동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거짓을 지적하며 진실을 밝히는데 우상숭배로 규정짓는 것은 사실상 거짓을 편드는 행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