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속(代贖) 신앙은 잉여의 사랑입니다
에페 4,32-5,6; 루카 13,10-17 /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2020.10.26.; 이기우 신부
오늘은 복음화를 묵상하고 다짐하는 이 전교성월의 남은 과제로서,
냉담자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신앙생활을 쉬고 있는
교우를 냉담자라고 부르는데, 비율이 무려 80%를 웃돕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사태 이후에는 그 비율이 훨씬 더 높아졌습니다.
그나마 주일미사에 나오던 20% 가량의 신자들마저도 반토막났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교적상 신자의 10% 정도만 주일미사에 나오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상적인 조직에서라면 초비상사태라고 부를 만한 일입니다.
자발적으로 세례받은 사람들 중에 열에 아홉 정도가
그 세례의 뜻을 스스로 거두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는 정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열심히 전교를 해서 신자들을 모았다 하더라도 열에 아홉이라는
이 비율로 냉담하는 추세가 지속된다면 쉬운 말로 전교하나마나가 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대량 냉담 사태의 원인은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시작하거나, 입교하기 전에 그저 막연한 호감에서
가톨릭교회를 바라보던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체험하도록 행동하지 못하는 교회와
기성 신자들의 소극적인 증거 자세 때문이기도 하고, 이 소극적인 증거 자세가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이 대속(代贖) 신앙임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기도 합니다.
예비자 교리 시간에 써 내는 신상명세서에는 입교동기난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예비자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천주교 신자가 되려 한다고 써냅니다.
그리고 예비자 교리를 듣고 세례를 받은 후에도 겨우겨우
주일미사만 다니는 정도로는 이 동기가 성숙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형성하는 신앙 분위기에 있어서도 가장 큰 신앙의 동기는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죄를 짓지 않고 착하게 살다가 죽어서 천당가기 위해서입니다.
이렇다 보니, 주일미사 참례를 넘어서 무언가 희생을 하고 봉사를 해야 하는
사도직 활동에 나서는 데에는 매우 소극적인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반장이나 구역장, 레지오 마리애나 다른 신심단체의 책임자로 나서는 것도 극히 꺼립니다.
그런 직책을 맡으면 신자들 간의 갈등에 휘말리는 일들도 생길텐데 굳이
그런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죄 짓지 않고 착하게 살 자신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주변에 아직 믿지 않는 이들의 삶을 둘러보아도
신앙이 없을 뿐이지 대개는 죄를 짓지 않으려 하고 착하게 살려하는 이들이 태반입니다.
성당에 다니지 않아도 양심적으로 살고자 애를 씁니다.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면 다 그렇습니다.
어쩌다가 냉담하게 된 교우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저런 핑계로 주일미사를 거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커다란 마음의 짐을 안고 살지 않습니다.
비록 미사를 드리지는 못해도 죄는 안 짓고 살 수 있다고 자신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고 안 믿고, 다니고 안 다니는 차이가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기준이 비슷합니다, 죄 안 짓고 착하게 살면서 마음의 평화를 누리자는.
한 마디로, 열심히 성당에 다니는 신자들에게서나 냉담하는
신자들에게서나 심지어 믿기를 미루고 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예수님의 자리가 없습니다.
믿으나 안 믿으나 다 착하게 사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도 읽어보고,
강론을 듣기도 하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만 보더라도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보여주신 행적은
그저 착하게 사는 정도를 훨씬 넘어서서, 다른 이들이 죄를 지어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인을 고쳐주신 것이었습니다.
또 오늘 독서의 내용도 사도 바오로가 권고하는 바는 일반적으로
착하게 사는 정도를 훨씬 넘어섭니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셨기 때문이라고 가르치고 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대목이 사도 바오로가 가르치는 바, 예수님의 정체성이 달려있는 대속 신앙입니다.
당신 자신은 아무 죄가 없지만, 다른 이들이 지은 죄를, 그 때문에 세상이 어지럽고
그 죄의 악한 결과를 짊어지고 희생당하는 이들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대신 죄의 대가를 치루어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과 제물이 되는 것이 대속 신앙입니다.
물론 교리의 내용에서나 신자들의 일상 대화에서조차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신 공로로 우리 죄가 용서받았으며 그래서
천국 문이 열리게 되었다고 말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도 자기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라와야 한다고 강조하신 대목은 별로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입니다. 무언가 잘못해서 짊어지게 된 십자가야 당연한 것이지만,
굳이 자기자신의 탓이 없더라도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수락하고 짊어질 수 있는 자세가 바로 대속 신앙인데, 이게 어렵습니다.
그리고 무지무지하게 우울하게만 받아들입니다.
우리 한국 천주교회의 일반 신자들 사이의 신앙 분위기가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권고 중에,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라거나,
“여러분은 감사의 말만 해야 합니다.” 하는 말이나,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하는 말 등은 착하게 사는 정도를 훨씬 넘어서는,
대속 신앙에 입각한 잉여의 사랑을 권고하는 내용입니다.
이 잉여의 사랑을 증거하는 신자들에 의해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신자들이 늘어나야 냉담 사태가 비로소 진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