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 7월 29일 목요일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제1독서 : 1요한 4,7-16
복 음 : 요한 11,19-27
그때에
19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전에 한 신문사에서 취재를 왔습니다. 저의 애장 도서를 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을 소개해 달라는 것이었지요.
가장 중요하고 추천하고 싶은 ‘성경’이 있었지만,
이 신문사가 가톨릭계 신문사가 아니어서
감명 깊게 읽었던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를 소개했습니다.
사실 이 책 말고도 추천할 책은 너무나 많았지만,
질문을 받았을 때 생각나는 책이었고 그래서 말을 했던 것이지요.
솔직히 책을 많이 읽고 있다는 것을 아셔서인지 책을 추천해달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그때그때 달라집니다.
내 마음에 따라, 내 환경에 따라, 내 삶의 방향이 되어주는 책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책 추천이 가장 힘듭니다.
내 마음과 상대의 마음이 다르고, 또 내 환경과 상대의 환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매 순간 다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주님을 한 모습으로만 기억하는 것 같습니다.
무조건 내가 청하는 것을 주시는 주님, 무조건 내 죄만 용서해주시는 주님,
무조건 사랑만 주시는 주님 등으로 나한테만 맞는 주님으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내 생각의 틀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내 생각을 뛰어넘는 분,
그래서 어떤 모습이든 모두 받아들이고 굳게 믿어야 할 대상인 것입니다.
성녀 마르타 기념일인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마르타의 굳은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오빠인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지난 뒤에 나타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솔직히 화가 나고 원망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제까지 행하신 기적들을 봤을 때,
예수님께서 계신다면 분명히 오빠인 라자로를 무덤에 묻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라자로와 마르타, 마리아 남매를 얼마나 예뻐하셨습니까?
정말로 예뻐하고 사랑한다면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완전히 죽었다’라고 판정을 하는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 되어서야 찾아오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화를 내고 원망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도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보여줍니다.
자기 생각으로는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지만,
이 역시 하느님 아버지의 뜻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슬픔과 아픔을 주는 상황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주님의 다양한 모습을 받아들이고 있었을까요?
내가 원하는 상황만을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내가 정말로 피하고 싶은 상황 안에서도 주님의 뜻을 볼 수 있는 사람만이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우리는 성녀 마르타와 마리아와 성 라자로를 기념하며,
<복음>을 통해, 부활의 믿음에 대한 초대를 받습니다.
그것은 “나는 안다”에서, “나는 믿는다.”에로의 초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빠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마르타와 마리아에게 찾아오십니다.
마르타가 집밖으로 뛰쳐나와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21)
이 인사말에는 예수님께 대한 마르타의 원망과 섭섭함이 묻어납니다.
마치 오빠가 죽은 이유가 예수님이 여기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럴 법도 할 것입니다.
임종 때에도, 장례식 때에도 오시지 않고
사흘이 지나서 이제야 찾아오시는 예수님이 섭섭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께 대한 확신에 대한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르타는 하느님의 권능을 알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2)
그러나 그분의 권능을 ‘알고 있다’고 고백할 뿐, ‘믿는다.’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압니다.”(οιδα)라고 고백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πιστιω)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요한 11,23)
그러나 마르타는 여전히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3) 하고,
또 다시 “압니다.”라고 고백할 뿐, 여전히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부활에 대한 믿음을 일깨우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6)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내가 부활과 생명을 너에게 준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는 이것을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이는 믿을 때라야, 그 믿음 안에서 부활과 생명이 부여된다는 말씀입니다.
곧 부활과 생명은 믿는 이에게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믿는 이들은 그 믿음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이 땅에서 이미 소유하게 됩니다.
믿는 이들은 비록 이 땅에서는 육체적인 죽음을 겪을지라도, 그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게 됩니다.
마침내 마르타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있는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7)
그렇게 하여, 마르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 역시 주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믿는 고백일 뿐, 부활에 대한 믿음은 아닙니다.
그래서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다시 한 번 믿음에 대한 일깨움을 듣게 됩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
오늘 <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1요한 4,16)
주님!
오늘 저는 당신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알고 믿습니다.”
하오니, 오늘 제가 당신의 생명(부활)을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6)
주님!
부활을 믿게 하소서! 제 생명이 죽고, 당신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제 안에 살아계신 당신 생명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생명을 살게 하소서!
제가 사라지고 당신이 드러나게 하소서! 믿음으로 당신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신부님들이 휴가를 가면서 본당에 장례가 생기면 부탁한다고 하였습니다.
한 성당에서 장례가 났고, 저는 장지에서 하관예절을 함께 하였습니다.
고인은 천주교 신자였지만, 며느리는 불교 신자였습니다.
하지만 고인의 종교를 존중해서 천주교에서 하는 하관 예절을 부탁하였습니다.
며느리는 천주교 예절에 함께 하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고인을 위해서 미사를 부탁하기도 하였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성당에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휴가를 떠난 신부님께서 제게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돌아오니 한 자매님께서 신문사로 오셨습니다.
30년 동안 평화신문을 구독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약국을 운영하면서 틈틈이 모은 돈을 신문사에 기부하러 오셨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말을 자주 하였습니다.
좋은 일을 하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체험한 하루였습니다.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어떤 것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같은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그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율법학자에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까?’
그러자 율법학자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던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었고, 여관에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하시오.”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적선지가 필유여경은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라자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가족을 각별하게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집을 찾아가셨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하였고,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르타의 오빠 라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대화를 나누신 후 죽었던 라자로를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소생이라고 하지, 부활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생명은 ‘생과 사’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은 깨달음의 문제이고, 차원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주는 물은 곧 다시 목이 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물은 단순히 마시는 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도 같은 맥락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 것이고, 또 살아서 믿는 자는 모두 영원히 살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영원한 생명은 생과 사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사랑의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오늘 독서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도 충실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예수님과 각별히 친했던 베타니아의 세 남매,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를 기념하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믿음과 사랑과 일치의 이야기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21)
예수님은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전갈을 받으시고도
계신 곳에 이틀 더 머무르신 후에야 베타니아로 가십니다.
이미 라자로는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지난 상태였지요.
마르타가 예수님을 마중 나와서 안타까움과 상실감 가득한 슬픔을 토로합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요한 11,23)
예수님은 당신이 하실 일을 이미 결정하셨습니다.
라자로의 병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요한 11,4)임을 알고 계셨기에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요한 11,11)고 하셨지요.
마르타 역시 아직 늦지 않았음을 믿습니다.
언제라도 예수님께서 청하시면 아버지께서 라자로의 생명을 돌려주시리라는 걸
마르타는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2 참조)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7)
마르타는 자청하여 예수님을 자기 집에 맞아들여 음식을 대접하고 섬겼습니다.
동생 마리아는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그분 발치를 떠나지 않았고,
라자로 역시 예수님의 친구로 그분과 같은 상에서 음식을 먹는 관계지요.
이처럼 세 남매 모두 예수님을 신뢰했습니다.
유다교의 종교 제도가 배출하지 않은 분, 번듯한 출신도 타이틀도 없는데다
기존 종교기득권자들의 압박과 경계의 대상인 예수님을 환대하고 추종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직관과 끌림에 충실했기 때문일 겁니다. 용기도 있었을 것이고요.
예수님도 기꺼이 그들의 섬김을 받으며 함께 마음을 나누셨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믿음이 사랑이 되고 일치에 이르는 길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에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1요한 4,13-14)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다는 마르타의 신앙고백은
종교제도나 정치와 얽히지 않은, 온전히 성령에 의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영이 아니고서는 이스라엘의 단순하고 소박한 계층이었던 남매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맺은 관계는 어떤 목적이나 의도를 깔지 않은
그저 순수한 신뢰와 사랑의 관계였지요.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1요한 4,15)
예수님을 믿고 그 믿는 바를 고백하는 이에게 하느님께서 오십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건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알아드렸다는 것이 되니까요.
그분은 당신 사랑을 깨달은 영혼 안에 거처를 정하시어 머무르고 쉬십니다.
당신을 알고 믿는 영혼 안에서 그분이 얼마나 편안하실지,
따사롭고 다정다감한 사랑 안에서 얼마나 행복하실지 관상합니다.
이 머무름은 상호적이라 하느님께서 그에게, 그가 하느님께 머무르는 일치로 이어집니다.
믿음이 사랑이 되고, 사랑이 일치로 흘러 하느님과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베타니아의 세 남매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그처럼 맞아들여 서로에게 머무른 것이고,
또 그로써 하느님을 맞아들여 일치로 나아간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 믿고 고백하며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이 믿음과 사랑으로 우리를 이끄신 아버지의 영께 감사드리며,
주님 안에 머물러 그 사랑의 온기를 가득 누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아멘.
오늘 하루 죽음을 걱정했다면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을 잃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본래 마르타 기념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올해부터 동생인 마리아와 오빠인 라자로도 함께 기념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어쨌거나 마르타는 마리아와 라자로와 함께 이해되어야 하는 인물이기에 잘 된 것 같습니다.
마르타는 라자로의 죽음에 대해 예수님께 탓을 돌리는 듯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치유자’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치유자를 넘어서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임을 믿었다면
오빠의 죽음에 그토록 고통 받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슬퍼만 하며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슬퍼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죽음에 잡혀있었던 것이 나쁜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명의 주관자라는 믿음까지 도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전히 생존의 문제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슬퍼하며 시간을 허비한 것입니다.
물론 생존은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돈도 중요합니다.
미국에서 소득에 따른 행복도를 조사한 연구에서
일정 소득 이상이 되면 소득은 더는 행복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다만 소득이 연봉 7만 5000달러, 한화로 약 8500만 원까지는
소득과 함께 행복도도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말은 생존을 위해 어느 정도 기반이 마련되기 전까지는 온 신경이 돈에만 쏠린다는 것이고,
생존에 대한 걱정이 없을 때 돈은 더 이상 행복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난한 사람들도 분명 사랑을 실천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생명에 대한 권한을 자기 자신이 아닌 신에게 돌렸기 때문입니다.
가난하더라도 자기의 생존이 아닌 타인의 생존까지 신경 써 줄 수 있으려면
돈이 아니라도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태석 신부님이 의사로서 생존을 위해 살았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그분의 삶은 의미와 가치를 잃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모기가 피를 빨아 먹기 위해 다니는 삶 안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을 생존을 위해 살지 맙시다. 일단 오늘 죽어도 상관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치 있는 일이 보입니다. 아니 가치 있는 일을 찾는다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는 죽음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백종원 씨는 증조할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어렸을 때부터 장사에 재능을 보였다고 합니다.
대학 1학년 때부터 호프집을 인수해 장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부터 장사의 맛을 조금씩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육군 간부식당 관리 장교로 군 생활을 마치게 되고
1993년 전역한 후 그는 다시 요식업에 뛰어듭니다.
하지만 그때 요식업에 뛰어들어 사업을 잘하고 있던 백종원에게 들어온
또 다른 사업 하나가 있었는데, 바로 한때 인기를 끌었던 목조주택 사업이었습니다.
100% 성공을 확신한 그는 그 사업에 모든 것을 겁니다.
하지만 1997년 IMF가 터질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 했던 것입니다.
그는 17억의 빚을 지게 되고 자살을 하기로 마음먹습니다.
한국에서 자살하면 여러 사람에게 아픔과 피해를 줄 것 같아서 홍콩으로 건너갔습니다.
죽기 전 아무 생각 없이 음식을 먹었는데 아이템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 음식의 ‘맛’ 하나가 죽음에 관한 생각을 몰아냈습니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2년 동안 하루 4시간만 자며 쌈밥집과 포장마차를 함께 운영했습니다.
부를 누려서 행복한 게 아니라 이자를 감당하기 시작하니까 행복했다고 합니다.
이후 1998년 한신포차, 2005년 새마을 식당, 2006년 빽다방과 홍콩반점 등
여러 사업을 성공시키며 빚을 청산하고 지금은 요식업계 최정상에 올라 있습니다.
물론 문어발식으로 주위 소상공인들을 힘들게 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꿈이 있어 보입니다.
아마도 홍콩에서 맛보았던 그 음식 때문에 이런 삶의 가치가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철학은 “맛있는 음식을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자.”입니다.
또 한국의 요식업을 세계화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는 구독자 500만 명이 넘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튜브 채널은 적자라고 합니다.
자신의 요리 비법을 온 세상에 공개하면서도 그것으로 돈을 벌지는 않는 것입니다.
만약 생존만을 위했다면 이런 비법을 공개하지 않고 사업 아이템으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의미와 가치는 ‘나눔’에 의해 실현될 수밖에 없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생존의 문제는 극복되어야 합니다.
생존과 가치, 혹은 의미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생존을 위해 살지 말아야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고,
생존을 위해 살면 가치 있는 삶은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생존과 무관하게 살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를 생명이요, 부활로 믿으면 됩니다.
믿든지 안 믿든지 그것은 자유이지만 일단 믿으면
그분이 존재하시던, 존재하시지 않던 삶은 가치에 집중하게 되고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코끼리에 쫓겨 정신없이 도망을 치다가 나무에 걸려 있는 칡덩굴을 잡고 매달렸습니다.
그 아래에는 깊은 우물이 있었고, 우물 속에는 큰 뱀 세 마리가 입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검은 쥐와 흰쥐는 매달려 있는 이 칡덩굴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는데,
입 주위로 끈적한 액체들이 떨어졌습니다. 맛을 보니 꿀이었습니다.
칡덩굴 사이에 있는 벌집에서 꿀이 한두 방울씩 그 사람의 입속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현재 죽음에 직면한 자신의 처지를 잊고 그 꿀을 받아먹었습니다.
밤낮으로 우리는 생존의 위협을 받습니다.
세속-육신-마귀의 뱀 세 마리는 더욱 나를 두렵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우리 위에서는 성령의 꿀이 떨어집니다.
그 맛을 보면 죽음에 대한 모든 공포를 잊게 됩니다.
생존을 위해 사나, 오늘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사나 사는 것은 똑같습니다.
오히려 내일이 없다고 사는 사람의 삶이 더 물질적으로도 윤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부활이요, 생명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하루는 무엇을 해도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아낌없이 나누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치 있는 삶은 죽음에 대한 걱정이 줄어들수록 커집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