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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계
잉어
신선도(병풍 그림)
경주의 화가 智弘 박봉수
이동민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었던 이경성 선생이 지홍을 소개하는 글에서 ‘경주 사람이다. 패기에 찬 묵식(墨式)의 세계로서 당시의 한국 화단에는 드물게 보이는 독특한 미(美)의 경지에 도달한 화가’라고 하였다.
이 말대로 그는 1916년에 경주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의 소질이 뛰어났다. 스스로 미술의 길을 걸어가기를 결심하였다. 지홍은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에 소질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증언들이 많다. 그도 자신의 소질을 알고 장차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 것으로 보인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그림공부를 하겠다면서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크게 실망하고 되돌아온 일이 있었다. 1935년에 다시 미술 공부를 하러 일본으로 갔으나 1937년에 돌아와버렸다. 이것은 그가 섬세하고, 산듯하게 그리는 일본화풍에 별다른 흥미를 가지지 못하였다는 뜻이다. 지홍이 탁한 먹색으로 그린 그림에는 일본 화풍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그림에서 간간이 보이는 산수화에서 험한 산세를 그린 것이 있다. 1937년에 일본에서 귀국한 그가 금강산에 들어가서 보고, 느끼고, 체득한 산세이리라. 이것은 그가 몸으로 체험하여 느낀 우리의 산세일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일제 강점기에도 일본풍이 아닌 우리 양식의 그림을 그린 화가이다.
1941년에는 다시 일본과 중국을 돌아다녔다. 일본과 중국의 미술을 정식으로 배운 것이 아니고 몸으로 익혔으리라. 지홍의 그림에는 일본풍도 그렇다고 중국풍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미술을 공부한 방식은 전통적인 방식이 아니었다. 스승을 모시고 도제제도에 의하여 미술의 기법을 전수받은 것이 아니다. 왜냐면 그는 스승을 모시고 배운 일이 없다. 그가 활발하게 활동하였던 6-70년 대의 한국화 화단은 미술대학의 동양화과 교수들이 제자들과 무리를 저어서 문화권력을 행사하던 시기였다. 그는 대학과도 인연의 끈이 없었다. 미술의 권력이 중앙(서울)에 몰려 있던 시기에 그는 한적한 시골인 경주에서 활동했다. 모든 면에서 그는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아웃사이더이다. 그의 미술을 평가하려면, 이런 점들을 유의해야 한다.
경주라는 궁벽한 지방 고을에서 태어나서, 고독하게 작품 활동을 한 탓에 미술계의 중심으로 진입하지 못하였다. 대중들에게는 그의 이름이 거의 알져지지 않은 화가로 살았지만, 이 눈치, 저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의 작품세계를 가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오리려 다행인지도 모른다. 유명한 소설가 스탕달은 이렇게 말했다. 자기는 작품을 자기를 위하여 쓴다. 또는 100년 뒤의 독자를 위하여 쓴다. 지홍 화백에게 이 말을 가져오면, 화가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의 의도에 따라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펼쳐낸다. 이런저런 사회와 인간들의 관계망에서 벗어나 있는 100년 뒤의 관람자가 나의 그림을 평가해주기를 바란다고 생각하면, 다행이 아닐까.
소위 동양화단의 거장이라는 6대가의 작품에서 자기의 작품 세계를 펼쳐내지 못한 작가는 없을까. 냉정히 생각해 보자.
나는 지홍 화백의 고희를 기념하기 위해서 1985년에 발간한 그의 화집을 구할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장조카인 박준용 군과는 고등학교 동기이면서 아주 가까운 절친이다. 그를 통해서 화집을 비롯한 지홍 회백의 자료를 구하였다.
지홍 화백은 어릴 때부터 그림에 푹 빠져서 먹물이 묻은 붓을 쥐고 살았다고 하였다. 스승을 찾아가지 않고 혼자서 독학으로 그림 그리기를 공부하였다. 그는 동물 그리기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새며, 멧돼지며 ------, 그가 그린 그림은 아주 사실적이고, 힘이 넘친다. 그 중에도 잉어 그림은 아주 뛰어났다. 그래서 더러는 잉어 화가라고 알려지기도 하였다. 그는 잉어만을 그린 화가가 아니고, 동물을 모두 잘 그렸고, 아주 힘이 넘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그 중에도 잉어 그림이 뛰어났던 것이다. 잉어라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힘이다. 솟구치는 힘이다. 잉어를 통하여 힘의 표현을 아주 잘 하였다. 이것은 스스로 터득하여 구축해낸 자신의 작품 세계이다.
도제 제도에서 스승에게 그림을 배우면 그리기의 기법을 습득하는데는 빠르다. 그러나 스승에게서 배운 기법에서 빠져나오기란 아주 어렵다. 자신의 작품 세계를 펼쳐내지 못하고, 아류로 흘러가버리는 회가가 되기 쉽다. 그러나 독학으로 공부하면 기법을 익히는데 많은 노력과 긴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버텨내는 일이 쉽지 않다. 이처럼 어려운 터널을 잘 빠져 나오면 어느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았으므로 아류가 아닌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기 쉽다. 지홍이 바로 그런 화가이다.
또 하나는 광복이 되고 난 이후에, 미술 대학이 생겨나면서, 이름이 알려진 화가들이 대학으로 들어가서 교수가 되었다. 이들은 자기의 제자를 추종 세력으로 하여 그들과 더불어 화가들의 패거리를 만들어서 화단에 권력을 행사한다. 우리의 미술사는 이처럼 화가들의 패거리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이들 세력이 얼키고 설킨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패거리에 끼어 있어야 개개인의 화가들이 힘을 얻는다. 미술상도 받고, 메스컴에서도 주목한다. 미디어들은 이런 화가들을 쫓아다녀야 독자들의 시선을 끌어서 판매 부수를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막말로 하자면 이름이 알려진 유명화가는 그림으로 평가받기보다는 이와 같은 그림 밖의 요소들이 작용하여 화가를 화가가 아닌 상품으로 만들어 왔다 .그런 면에서 지홍 화백은 상품이 될 수 없는 화가이다. 이 말은 메스컴의 주목을 받지 못한 화가라는 뜻이다.
제도권에서 벗어나 있는 화가 박봉수에 대한 이야기를 이경성 관장을 통해서 좀 더 들어보기로 하자.
“지홍은 경상도 기질의 화가이다. 이 말은 지홍의 작품에는 토착적 요소외 패기에 찬 표현으로 나타났다. 그는 남처럼(다른 화가들처럼?) 권위에 아첨하지 않고, 상업주의와도 타협하지 않는다. 그는 국전의 권위에 초연하고, 자연 속에서 생의 의미를 찾아나선 격조높은 야인이다.”
지홍의 미술 수업의 경력이나, 예술계에서의 경력은 내세울만한 것이 없다. 미술학교에는 다닌 일이 없으니까 학력은 있을 수 없다. 미술계의 경력이란 것도 그가 살고 있는 경주시에서 개최하는 신라 문화제에 관여하는 정도이다.
청도 출신 화가로서 경주의 남산 자락에(삼능의 바로 옆에) 자리잡은 박대성 화백이 자기의 작품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경주시와 경주 문화 재단에서 보문단지의 맞은 편인 천군동에 솔거 미술관을 지어서 박대성 화백의 그림을 대량으로 수장하고, 때때로 그의 전시회도 열곤 한다. 솔거 미술관이라면 박대성 화백이 떠오를만큼 연계되어 있다. 지홍 이야기에 박대성 화백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라면, 지홍은 자기가 살고 있는 경주 땅에서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1976년의 월간미술 창간호부터(그때는 계간미술이었다.) 2023년까지 구독하면서 월간미술 수 백 권을 소장하고 있다. 국전이 한국 미술계를 장악하고 있을 때, 중앙일보사에서 국전에 대한하는 민간 주도의 미술대전을 열었다. 박대성 화백이 대상을 받았다. 이로서 중앙일보사와 중앙일보사에서 발간하는 미술잡지 월간미술에서 박대성을 대대적으로 홍보해주었다. 박대성 화백은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이 때문에 겅주의 남산 자락에 터잡고 있는 박대성 화백의 화실을 나도 몇 번이나 찾아갔다. 여기서 왜 박대성 화백의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박대성 화백이 유명해질수록 지홍의 이름은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져갔기 때문이다. 자기가 터 잡고 살았던 고향 땅 경주에서조차 잊혀지고 있었다.
요즘의 문화이론에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말을 한다. 미디어에서 조명받지 못하는 확가는 메시지를 주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미디어에서 조명해주면 화가가 살아난다. 미디어가 조명하려면 경주의 시민이, 아니 경주의 미술인이 지홍을 기억하는 행사를 하는 등등으로 매스컴의 관심을 끌어야 하리라.
박대성이 대구의 매일신문사가 대재적인 전시회를 후원하고, 홍보해 줌으로 대구-경북에서 그의 인기는 하늘을 뚫었다. 그런 만큼 지홍의 이름은 잊혀 갔다. 이제는 지홍이 누구인지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나는 경주 출신으로서, 경주 사람들이 소산(박대성)을 기리는 만큼 지홍도 기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경주 출신으로 경주에서 평생 동안 붓을 잡고 산 향토 화가를 경주에서, 그리고 대구에서 잊혀지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경주는 쟁쟁한 미술가들이 맥을 잇는 고장이다. 항술조-손일봉-손동진-박봉수- 그리고 박대성으로 이어지는 화가 모두를 우리가 기억하고 기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홍을 기리면서 쓴 글을 보면, 지홍은 많은 기행을 하였다고 하였다. 소문도 없이 갑자기 사라져서 나타나지 않는다든지, 남과는 거의 타협을 할 줄 모르는 고집줄통이라든지------, 물론 화가로서의 기행이기는 하지만 기성의 화단에서 소외당하는 울분을 이런 식으로 풀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가 돈을 버는 직업이라고는 교사직을 2년 동안 봉직한 것이 전부라고 한다. 그는 생애 대부분의 시간을 미술작품을 제작하는 작업으로 보냈다. 그가 경주에 머물면서 작품 제작을 했다고 하여 풍토적 작가라고 부른다. 풍토적이라든지, 지방 작가라든지 라는 말에는 무언가 낮추어 보려는 낌새가 보인다. 그러나 이 말은 시대의 아류에 휘블리지 않고 자기의 작품 세계를 그려냈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진주에서 활동한 화가 박생광이 좋은 본보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홍은 자기의 색깔이 박생광만큼 강하지 않아서일까.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는 화가가 되지 못하고, 그냥 경주에 머문 지방화가였고, 그것조차 우리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나는 왜관의 시인 구상이 지홍을 평하는 글이 미술평론가의 말보다 더 가슴에 와닿는다. 구상은 지홍을 불화를 그리는 화가로 소개받았다고 하였다. 뒤에 지홍이 그린 그림 한 점을 손에 넣어서 낙동강변에 있는 자기의 집 관수제(觀水齊)에 25년이나 걸어두고 감상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지홍을 이중섭과 동격으로 본다는 말로서 지홍에 대한 평가를 하였다.
나는 그 보다는 박대성을 띄우는 글에서는 삼성 회장 이병철이 박대성의 그림을 그의 사무실에 걸어두었다고 하였다. 구상은 지홍의 그림을 자기의 거처지에 25년 동안 걸어두었다고 하였으니, 나는 나도 모르게 구상과 이병철을 비교하게 되었디.. 그림의 평가에 미술에 대한 이병철의 안목으로 평가한 것이 아니고,(물론 이병철은 안목이 있었음에도) 재벌이라는 명성을 내세웠고, 구상은 돈이 없는 문화예술인이기에 지홍의 미술을 미술의 관점에서 평가했다. 재미있는 비유가 아닌가 싶었다. 이병철이 미술을 소장하였다는 것으로, 박대성이 지홍에게 판정승을 한 사실이 재미 있지 않는가.
나는 지홍만이 아니고 경주에 머문 미술가라면 거의가 신라의 미를 말하였다. 신라의 미란 어떤 것일까. 경주는 불상을 조상한 석조가 수없이 많이 흩어져 있다. 신라의 미를 이야기할 때 대부분의 작가는(반드시 미술가만이 아니고, 예술가라면 일반적으로) 불교 미술을 이야기 하였다. 조용하면서 사색적인 분위기를 자야낸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지홍의 미술에도 불상을 그린 그림이 많았다. 나의 고등학교 선배인 한국화가 이재건님도 경주에서 미술작업을 하면서 그의 작품에 많은 불상을 그렸다. 미술가는 자기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부처님 상을 그린다. 오윤도 신라의 불상을 자기의 작품에 살리려 경주에 머물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왜냐면 신라의 불상에서 한국 사람을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제 그의 그림에 대한 몇 분의 평글을 요약하면서 마무리 해야겠다.
서양화가 김환기는 이렇게 말했다.
“지홍의 작품 세계는 동양의 노장세계와 결부시켜서 말하지만 그 근본은 향토의 특질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지홍의 작품은 동양의 명상적인 사상이 바탕이다. 표현 방법은 독자적이다.”
동양화가 김영기는 이렇게 말했다.
“지홍을 한 마디로 평가하지면 ‘밥 먹는 부처(食佛)가 밥을 먹지 않는 부처(無食佛)를 그린 것이다. ”
이 말도 불교적인 사상을 표현한 말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대구에서 친숙한 이름인 죽농의 평도 들어보자.
“대체로 동양적인 자연관을 바탕으로 깔고 있으며, 신라적인 풍토성과 신라 정신을 결합하여 작품들은 독자적인 체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약간은 부정적인 시선도 보여준다. 기법이 너무 다양하여 지홍 지산의 것이라고 말하기는 ------, 이라면서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어쩌면, 도제 제도에서 스승의 기법만을 따랐던 시절의 작가들에게는 다양한 기법은 어지러운 난맥상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싶다.
그러나 여러 감상자들이 지홍에 대해서 일관되게 하는 말은 신라적이고, 향토적이고, 불교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1985년에 고희 기념으로 발간힌 이 화집은 그가 일생 동안 펼쳐낸 작품 세계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담아냈다. 1930년 대의 작품부터 화집을 발간할 그때까지의 작품을 실으므로 지홍의 작품 세계를 아는데는 가장 적합한 자료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지홍 선생을 잉어만을 전문으로 그리는 미술가로만 알고 있었다. 잉어는 토속적이고, 주술적인 종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물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힘은 ’등용‘이라 하여 좋은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상징하였다. 이런 이유로 지홍을 민화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이해하려 했고, 대중들이 좋아하는 주술적인 의미를 그림에 담아내는 화가로 이해하려 했다. 그래서 지홍을 서민을 위하여 민화적이고 주술적 종교화를 그리는 화가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일생 동안 작업해온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화집에서 잉어 그림은 극히 일부분일 뿐이었고, 그것도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서 민화적인 그림이라기보다는 세필 화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민화적 내용을 그리는 민화풍의 화가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문학평론가이고, 한성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신 원형갑 선생님의 평을 마지막으로 들어보자.
원형갑 선생은 지홍의 작품 전체를 총평한 것이 아니고, 작품의 한 점, 한 점을 대상으로하여 평을 하였다. 전체적인 평의 내용은 앞의 감상자들이 평한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특히 작품 ’열반과 나한들‘에서 받은 충격을 이야기 하였다. 원형갑 선생은 60년 대에 경주에서 몇 년을 머물면서 지홍 선생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는 사이였다. 그때 그가 한 말들을 기억하면서, 한 마디로 ’침묵의 미학‘이라고 하였다. ’열반과 나한들‘은 석가가 열반에 들 때, 나한들은 어린애처럼 입을 벌리고 울부짖는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나한들의 꾸밈없는 표정들이야말로 오히려 인간적이라고 하였다. 울부짖음은 불교의 정적과는 오히려 반대인데도, 침묵이라고 한 것은 설명이 불가능한 영혼의 표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영천의 백신애 문학관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여류 문인이 드물던 시절의 여류 문학인이긴 하여도, 문학적 성취도가 높은 작가는 아니었다. 그래서 백신애는 문학사에서도 거의 잊혀진 작가였다, 영천의 지역 문인들이 문학비도 건립하고, 문학관도 만들어서 그녀를 떠받들므로, 백신애를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재탄생시켰다. 내가 경주의 화가들을 훑어보면서, 경주의 미술인이 지홍에 대하여 너무 무관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술평론가들이 향토적인 미술가라고 하면서 지방의 무명 미술가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평으로 약간은 폄하할 때도 경주의 미술인들은 침묵하고 있었다.
솔거미술관이 박대성 화백을 기리는 미술관으로 태어나면서 지홍을 향토의 미술인으로 살려내서 향토의 특성을 가지는 작가의 계보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망각의 늪으로 밀어넣어 버렸다. 영천의 여류 문인 백신애처럼 경주의 미술인이 지홍을 기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게 함으로 경주에 거주하는 화가들이 빚어내는 미술이 경주의 특성을 잘 살려냄으로, 경주의 특성을 그려내는 화가들을 하나의 화파로 삼았으면 어떨가 싶다. 경주의 지세는 충분히 그럴 힘을 가지고 있는 역사의 땅이다. 바르비종 화파처럼, 경주 화파 또는 신라 화파라고 할 수는 없을까. 신라적이고, 불교적이고, 나아가서 침묵의 미학이라는 미의 세계를 향토색이라 하여 경주의 미술인들이 하나의 특성으로 살려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경주 화파의 미술이 바르비종 화파처럼 한국 미술사에서 우뚝 서는 미술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내 글이 지홍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24. 12. 24
대구의 영남문화회에서 글을 독촉하여 불야불야 쓴 글입니다.
대구에 문화 전반을 공부하는 단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