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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성 4.19백서에 게재할 글 입니다. 의견을 주시면 반영하겠습니다.
또 체험담을 직접 쓰신다면 제게 보내 주세요*
내 마음속 가슴에 번쩍이고 있는 ‘나라사랑 국민훈장’
박 영 호 (고 39회 : 당시 중2)
1960년 4월19일 -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된지 불과 19일만이었다. 고등학생 선배들을 따라 민주혁명에 참가했다. 그때의 일들이 눈에 선하다. 동성중・고등학교 학생1천여 명은 대학생들을 제치고 제일 먼저 경무대 앞까지 진출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민주주의 사수하자!’는 현수막을 앞세우고 가슴이 터지도록 한껏 울부짖었다.
아침에 등교하자마자부터 교정은 뒤숭숭했다. 여기 저기 대학생들이 시가행진에 나섰다는 소문이 돌고 더구나 가까이에 위치해 있는 서울대학교 학생들도 나섰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리고 고등학교로서는 대광고등학교가 나섰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수업이 제대로 될 수 없었다. 모두가 운동장 여기저기에서 서성거리며 혜화동 로터리 쪽 담 너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교장선생님이 경찰서인가 파출소인가에 호출당하고 ‘학생들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다.’는 죄(?)로 순경한테 따귀까지 맞았다는 얘기가 삽시간에 확 돌았다. 이제 와서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소문이 돌았고 그때는 그만큼 경찰의 위세가 등등 할 때였다.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며 드디어 시가행진에 나섰다.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고3 선배들을 중심으로 이미 현수막 두 개가 마련되어 있었고, 결의문도 낭독 되었다.
처음에는 고등학생들만 참가하기로 했는데 “중학생은 대한민국국민 아니냐?” “중학생들이 남아 있다고 해서 수업이 이루어지겠느냐?”며 항의하여 처음에는 중3들이 허락을 받았다. 그러다가 결국 우리 중2도 함께 하도록 허락받았다. 선배들은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책가방과 모자를 교실에 놔두고 나왔지만 우리 중2는 집으로 귀가하려다 갑자기 뒤따르도록 허락받았기에 들고 나온 책가방이 사실 큰 짐이 되었다.
그때는 키 작은 학생 1번부터 키 큰 순서대로 각반마다 학생들의 식별 고유번호를 매길 때였다. 나는 2학년3반 60번으로 총 68명이었던 우리 반에서 덩치가 큰 편에 속했다. 키가 작은 친구 김용중한테 책가방을 맡기고, 두 손 불끈 쥐고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치며 데모행렬에 함께 했다. 1학년은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인 된 어린아이들이라 처음부터 참가하지 못하게 말리고 귀가토록 했다. 내 책가방을 맡은 용중이는 종로5가 정도까지만 같이 행동하고 바로 인현동 자기 집으로 간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 일행은 서울대 앞을 지나고 이화동을 지나 종로5가를 거쳐 갔다. “민주주의 사수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차도를 장악한 채 질서정연하게 행진했다. 대열 옆에는 선생님들이 함께 하시며 학생들을 격려하는 한편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지도하셨다.
중앙청(현 광화문) 앞을 지나 막 경무대(현 청와대) 쪽 오른편으로 꺾어지는 모서리부분 쯤 왔을 때 외국인들이 울면서 서 있었다. 남의 나라이지만 학생들이 데모할 정도이니 안타까움에 울고 있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그건 오해였다. 체류탄 가스 때문이었던 것이다. 눈물 콧물 재채기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체류탄 가스는 정말 지독했다.
저 멀리 중앙청 안쪽에 있던 경찰 백차를 벌렁 뒤집어 버리는 청년 일행이 보였고, 효자동(통의동) 길모퉁이에 위치한 파출소는 이미 불에 타고 있었다. 그리고 온갖 종이서류들이 길바닥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행렬 옆에서 학생들을 인솔하시는 선생님들의 말씀으로는 “아마도 깡패들 짓일 것”이라고 하셨다.
경무대 쪽으로 완전히 우회전 하자 빈 전차 한 대가 정차해 있었다. 전차가 다니던 시절이었다. 효자동이 종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누군가가 전차에 큰 돌을 던졌는데 그게 전차 몸체에 맞고 튕겨져 내 허벅다리를 때렸다. 아플 새도 없었다. 여럿이 전차를 밀어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차도의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상수도 공사를 위한 철관들이 놓여있었다. 그걸 굴리면서 전진하려고 했지만 워낙 무거워 역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끔적도 안했다.
그쯤에서 “너희들은 뒤에 남아 있어라!”며 대학생들이 우리를 앞질러 갔다. 동국대 학생들로 기억이 된다. 그러나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었다. 앞에서 불자동차로 물을 쏟아 붇는다는 것이다. 빨간색 물을 뿌려서 몸이나 옷에 빨간색이 묻어있으면 ‘빨갱이’로 무조건 검거한다는 말도 돌았다. 사실 맨 앞쪽은 보이지 않았고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없었다. 그때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군에 다녀온 선생님들이 안심 시켰다. 그건 공포탄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누군가가 “엎드려!” 하고 소리를 질렀다. 공포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차도 가운데서 바짝 엎드려 긴장하고 있었다. 나는 엎드린 채 모자를 벗어 손으로 치켜들고는 혹시 총알이 모자를 뚫고 지나갈지도 모르겠다는 농담으로 긴장을 풀기도 했다. 그런데 한 5분쯤 뒤 이번엔 “왼쪽 골목으로 피신하라”는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엎드려 있다가 일어서 보니 앞쪽에 있던 대학생들이 어디 갔는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도 진명여고 쪽으로 냅다 줄행랑을 쳤다. “아니, 대한민국 경찰이 대한민국국민을, 그것도 어린 학생들에게 실탄 발사를 해?”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혼비백산했다.
이미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들려온 후였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려 진명여고 뒤쪽 골목에서 대오를 다시 갖춘 후 우리 동성은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순경들이 쫓아오지는 않았다.
이쪽으로 올 때는 그렇지도 않았는데 도로에는 많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피 묻은 사체를 실은 트럭이 지나가고 구루마도 동원되어 벌겋게 피가 흐르는 부상자들을 올라타게 했다. 우리는 엉엉 울면서 나아갔다. 올 때는 없었던 사람들이 어느새 어디서들 몰려왔는지 차도까지 입추의 여지없이 꽉 들어차 있었다. 이들 시민들은 격려의 박수를 치면서 우리가 지나가도록 길을 내어주었다.
우리 동성의 주력 부대(?)가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경찰청을 지날 때쯤에 10여 명의 순경들이 대오를 지어 지나갔다. 과격한 청년 일당이 맨 뒤에 지나가는 순경을 붙잡아 두들겨 팼다. 앞선 순경들은 의식을 했는지 모르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시민들은 온통 흥분해 있었고 말리는 사람들도 없었다. 차도 길가에는 달랑 순경 운전사 한 명만이 타고 있는 백차도 한 대 있었는데, 뒤에 붙어 있는 기다란 쇠줄 안테나를 빼내어 그 순경을 강타하는 청년도 있었다. 전엔 기세가 등등하던 순경들이었지만 이제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측은하고 불쌍해 보였다. 물론 우리 동성 일행은 선생님들의 선도 아래 끝까지 흥분하지 않고 질서를 지켰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우리 일행은 학교를 향하여 되돌아갈 준비를 하며 다시 대열을 정돈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한 30명은 죽은 줄로 알고 있었다. 엉엉 울며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어둠이 채 가시기 전에 학교에 도착했다. 학교까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중2학생들은 많이 보이지 않았다. 선배들은 당초 책가방을 학교 교실에 놓아두고 왔기에 학교로 왔을 터이나 우리 중2는 책가방을 들고 데모에 참가했었기에 대개 학교로 오는 도중 집으로 향했고, 나는 그때 집이 성북동이어서 자연스럽게 학교로 되돌아오는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학교에는 어느새 학부형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교정에 모여 데모행렬 해산식(?)을 했다. 매도 먼저 맞으라 했지 않은가. 제일 먼저 경무대 앞까지 갔던 우리 학교 학생들은 다행히 사망자가 없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만 부상자들은 몇 명 있는데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교장선생님의 말씀도 계셨다. 모두 이곳저곳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받고 있다는 얘기도 하셨다. 그리고 모두 조심해서 집에 돌아가라는 당부 말씀도 있었다. 선생님의 말씀이 있은 후 우리는 해산하여 귀가했다. 모두가 허탈했다. 이게 뭔가 싶기도 했다. 전쟁에서 지고 돌아온 패잔병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 날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나는 열여섯 살 밑의 남동생이 하나있다. 만 열네 살 이었던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부모님에게 나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었다는 얘기다. 이 녀석 언제나 들어오나 걱정하셨던 부모님은 내가 집에 들어가자 가슴을 쓸어내셨다. 무슨 일이라도 당하지 않았는가 걱정이 태산 같으셨다고 하신다. 일단 안심하셨지만 그 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이 발표된 4월26일 이후까지도 며칠 동안 학교는커녕 집밖에는 전혀 나가지 못하게 붙잡아 두셨다. 친구에게 맡겼던 책가방은 3일 뒤 어머니가 학교에 가셔 주소를 알아내고 김용중이네 집(중구 인현동 1가 45)을 방문하여 찾아오셨다. 그때 용중이는 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 키가 작은 꼬마였는데 나중에 대학가서 훌쩍 크더니 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큰 키로 자랐고, 태권도에다 합기도 등 통틀어 몇 단인가 되는 건강한 체격이 되었으며 한미연합사에서 근무하다 소령으로 예편했다.
중학교 2학년생이 경험했던 4・19학생혁명의 단편이지만 동시대 사람들이라고 해서 누구든 경험했던 일은 아니라고 생각되기에 그때 상황을 지금까지 귀중하게 기억하고 있다.
사실 4・19 혁명데모에 참가했던 얘기는 지금까지도 우리 동기동창들이 모일 때면 자연스럽게 나온다. 공동 화제로서 좋기 때문이다. 같은 경험을 했고, 기억도 비슷하다. 그렇다고 정확히 똑 같은 것은 아니다. 조금씩 차이가 나는 부분도 있다. 그게 오히려 옳은 얘기다.
사실 그때 경무대 앞에서 전혀 예기치 않은 발포가 시작되어 전쟁터와도 같은 아수라장이 되고부터는 우리 동성 일행 중 상당수가 흩어지게 되었다. 나의 동기들 중 강춘근(전 오리엔트시계 회장)은 총 소리가 나고 “엎드려!”하는 외침 이후에 도망하기 시작했는데, 데모대열의 오른쪽 민간인 집 담을 넘어 들어갔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다시 그 집 담을 넘어 중앙청 쪽으로 가려했더니 “그쪽으로 가면 순경들이 지켜 서있을 것”이라는 집 주인의 말을 듣고서는 뒤쪽으로 빠져나왔고 그 후부터는 혼자서 자기 집(중구 남산동 2가 32)으로 갔다고 한다. 춘근이는 데모 주력 대열에서 이탈된 것이었다. 집에 가서는 “이 난리 통에 어딜 갔다 왔냐?”고 부모님으로부터 야단도 맞았다는 얘기다.
서동규(전 건축사협회 사무국장) 역시 “가방을 든 채 오른 쪽 민가의 담을 넘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아마도 데모 대열의 오른쪽 부문에 있던 학생들은 왼쪽 진명여고 쪽보다는 오른 쪽 민가가 피하기 훨씬 수월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북주(전 숭문고 교사), 이승방, 윤덕기(전 고대의대 교수), 김현식(전 포스코 축구단장), 윤주화(전 한국은행 이사) 등은 모두 왼쪽 진명여고 쪽 골목으로 몰려갔다며 그때 겪은 경험들을 언성 높여 얘기한다. 김봉수(전 노스페이스 중국 총사장)는 데모 대열 앞쪽에 있었는데 순경들이 앞줄은 ‘무릎 쏴’ 뒷줄은 ‘서서 쏴’ 자세로 두 줄로 정렬하여 발포했다고 증언한다. 김봉수도 역시 경무대 앞 이후에는 집(용산구 청파동 1가 91-33)으로 혼자서 갔다고 한다. 박혁주(당시 성동구 신당동 305-35, 현 미국 워싱턴 거주)는 같은 동네에 사는 양리훈(당시 성동구 신당동 304-171)에게 책가방을 맡기고 데모에 참여했다며 나의 경험과 비슷한 얘기를 한다. 박혁주는 컸고 양리훈이는 키가 작았다.
나는 서울 삼선동에 있는 삼선국민학교를 졸업했다. 내가 입학하던 해에 개교했기에 나는 제6회 졸업생이다. 6・25전쟁이 끝나고 막 생긴 학교라 시설이 엉망이었다. 사실 나는 피난 갔던 곳에서 국민학교를 입학했고, 한 학기를 다니다가 1학년 2학기에 맞추어 서울로 올라와 전학하게 되었다. 학교 시설이 시골학교보다 훨씬 못했다. 제대로 된 교실 하나도 없었다. 군대용 대형 천막을 치고 그 안에서 수업을 했다. 겨울의 추위도 막을 길이 없었고 여름이면 천막 속 열기에 무슨 공부가 되었겠는가. 공동 화장실은 쌀가마니를 연결해 문으로 사용하던 것도 기억에 남아 있다.
남학생이 네반 여학생이 네반 이었다. 각 반에서 제일 공부 잘했던 한 명씩 경기중학교와 경기여자중학교에 각각 입학시험을 치렀다. 결과는 추풍낙엽같이 몽땅 낙방.
덕수, 수송, 혜화 등 전통 있는 초등학교는 한 반 60명 중에 절반 정도가 경기중학교에 들어갔다. 우리는 단 한명도 경기중학에 들어가지 못했으니, 열악한 환경에서 제대로 공부시키지 못한 학교 탓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가슴에 못을 박았다. 부모님들도 실망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원망한들 어쩌겠는가.
그때는 소위 ‘2차 중학교’라는 게 있었다. 1차 전기로 학생을 뽑는 학교에서 낙방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후기 학교 중 ‘동성중학교’가 그중에서 가장 인기가 좋았다. 우리 때엔 국민(초등)학교 성적만 보고 뽑는 무시험 선정기준을 발표했었는데, 워낙 성적 좋은 학생들이 전국에서 대거 몰려들자 선별력이 떨어진다며 갑자기 산수시험을 치게 했다. 경기중학교에서 떨어진 우리 삼선초등학교 출신 네 명은 다행히 모두 합격했다.
지금 100년의 역사를 훌쩍 넘은 동성은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으며, 얌전하고 착실한 학생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때 그 어린 나이에 1차 낙방이라는 ‘쓴물’을 마신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부모님들도 마찬가지 심정이셨으리라 여겨지지만, 주변의 동네 사람들로부터도 실망스러운 눈초리를 느껴야 했다. 워낙 기대가 컸기 때문이었다.
좋은 학교에 합격한 학생들이야 좋을 수 있겠지만 떨어진 학생들이 훨씬 많지 않은가? 고등학교쯤이야 당연히 경쟁이 필요하겠지만 국민(초등)학교 6학년 어린나이의 아이들 가슴을 아프게 하고 쓰라리게 했던 그때의 입시방법은 잘못된 것이었다.
비록 2차에 합격하기는 했지만 기가 팍 죽은 상태였다. 창피한 마음으로 머리조차 쳐들고 다니지 못했다. 다행히 동성의 선생님들이 많이 다독거려주시고 격려도 많이 해주셨다. 같은 심정, 동류의 친구들이 모여 있는 학교생활에 점차 익숙해져 갔다.
바로 그때에 4・19 학생혁명에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지금 칠십 다 된 나이에 중학교 2학년 아이들을 보면 어리기 짝이 없다. 무슨 의식이 있겠느냐 싶다. 그렇지만 6・25전쟁 중에 피난살이를 하며 고생이란 게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 나였다.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당시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캐치프레이즈는 내 가슴에 무언가 꿈틀거리게 했고, 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 선생의 갑작스러운 서거는 슬프게 했다. 이어 3・15 부정선거는 어린 나이의 나에게도 화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결국 맨주먹으로 싸운 전투(?)에서의 승리는 정의만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배우게 했다. 정의 편에 서면 무서울 것이 없다는 자신감도 생기게 했다.
경기중학교에 못 갔던 수치심이 온전히 극복되었다. 경기중고는 혁명대열에 합류하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경기고 학생 한명은 데모 구경하다가 총에 맞아 죽어 영웅이 되었고, 동상까지 만들어져 있다고 했다. 웃기는 얘기다. 헛소문이기만 바랄 뿐이다.
불과 1년 후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이후부터 4・19혁명은 의도적으로 그 의미가 축소되어 왔고 천대를 받아왔다. 이후에도 정치적 목적에 따른 정치인들의 판단에 의해 5・18 광주사태에도 못 미치는 푸대접을 받아왔다. 다행히 최근에 4・19혁명을 정부차원에서 되돌아보게 된 것은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나는 그때 2학년3반 반장이었다. 이 반장 경력은 이후 고등학교 2학년까지 매 학기마다 계속되었고,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총학생회장으로 학생자치활동을 주도하면서 4・19혁명 정신은 내가 세상 살아가는 데 기본적인 정신의 근저를 이루어왔다.
지금도 매년 4월19일이 되면 그때를 되돌아보게 된다. 기억이 점차 사라져 가기에 아쉽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크게 앞장섰던 것도 아니고 단지 앞장 선 선배들을 뒤따라갔던 일이었지만 4・19혁명의 정신은 내 평생을 통해 내 마음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내 마음속 가슴에는 ‘나라사랑 국민훈장’이 번쩍이고 있다.
첫댓글 내 경우에는, 영호가 말했드시 비슷한 경험이었는데, 사실 누구에게 가방을 부탁했는지는 잘 기억이 안난다. 그 당시 우리 집 근처에는 이 성안이도 살았는데, 이훈인지 성안인지, 아니면 또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렇게 누군가가 집으로 곧장 간다기에 내 책가방을 맡기고는 중앙청앞에서 광화문쪽으로 걸으며 총상으로 피흘리며 죽어가는 젊은사람이 택시에 실려있느것을 보며 얼이 빠져있었지. 모든 사람들이 길거리로 밀려 나와 있고, 어수선한 속에서 터벅 터벅 걸어 집을 향했는데,집 근처에 와 보니 우리동네 한 젊은사람의 시신도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손수레에 실려있던 것을 보았다. 그런 와중에 집에 들어서니.
우리 어머니의 반응은 상상을 할 수 있겠지. 밖은 어수선한 상태에서 아들놈은 어디있는지 모르고 걱정하고 있는판에 학교친구가 가방을 집으로 가져다 주었으니, 난리가 났었다.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욕을 한바가지 뒤집어썼다. (내가 누구에게 가방을 맡겼는지 기억하는 본인은 저에게 알려주면 고맙겠습니다.)
역시 박영호, 기억력과 관찰력, 통찰력 대단하다. 앞에서 기술된 내용이 대체로 실체적사실과 부합하다고 본다.이런저런 곡절끝에 책가방을 들고 대열에 합류하여 전차종점이었던 효자동 경무대 입구까지 갔다가 오후 1시5분부터 갑짜기 콩볶는듯한 총성에 놀라 인근 민가로 피신(진명여고쪽은 아님)했었는데 어떤 대학생이 담을 넘다가 총을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것을 보았으나 키가 작아 담을 넘을 수도 없고 하여 굴뚝 밑에 몸을 숨겼다가 얼마후 총소리가 멎자마자 북아현동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역사의 현장에는 동국대생들이 맨선두, 그리고 우리학교, 다음에 서을대의대생들이 까운을 입고 참가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혜화동을 출발, 동숭동, 이화동, 종로5가를 거쳐 중앙청까지 가는 동안 뿌듯하고 자랑스러우며 신기하기까지 했다. 학림다방 앞을 지날때는 주민들이 힘내라고 하면서 물동이에다가 물을 떠다 주며 격려하기도 했다. 대열을 따르며 [민주주의 사수하자] [부정선거 다시하자] 이런 플래카드들을 우럴어보았는데 부정선거 다음에 ,가 없어서 부정선거 또 하자는 말인가 하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는데 우리학교 플래카드는 아녔구나.서대문쪽으로 오는데 적선동파출소가 박살이 나고 서울신문사가 불타서 여러명이 죽고 하였다. 서대문 이기붕씨집도 데모대들이 완전히 벌집을 만들어 놓았는데 금송아지 여러마리나왔다는 둥 흉훙하였더라.
박혁주님, 윤주화님! 감사합니다. 대표집필자의 끗발(?)로 두 분 체험담도 꼭 반영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서동규님! 말씀하신대로 귀하의 전직명을 설계사협회 사무국장에서 > 건축사혐회 사무국장으로 정정했습니다. '깊은' 관심에 '더 깊은' 감사말씀 드립니다.
기억이 까마득히 멀리서 가물거리는 중 2 시절에 있었던 일을 이글을 읽으며 되집어보는 일도 쉽지가 않네.
나도 그시절 휩쓸려 중앙청앞까지 가서 옆에 있던 서울대생들이 "업드려" 하는 소리와 콩볶듯 들리는 총소리에 납작 업드렸다가 어찌 어데로 해서 집에 왔는 지 기억도 잘 나지않지만 그 때 신당동에 살았고 혁주가 가방을 줬는 지? 가지고 왔더라도 전해줬는 지 경황이 없던 시절에 무심히 받았다면 준 사람은 기억나도 받은 사람은 ??? 어쨋든 글을 읽으며 그 시절
떠올릴 수있어서 영호, 혁주, 주화 모두 고맙다.
참으로 기억력이 좋구만. 나는 그때 재동(당시는 창덕여중 현재는 현법쟤판소) 에 살고 있었기에 아무것도 모른 채 집에 가려고 그냥 따라갔였지. 진명여고 삼일당 앞을 지나서 가고 있는데 갑자기 경무대 쪽에서 무슨 소리기 들려왔다. 누군기 "총이다" 라고 외첬다. 그러자 잠시 웅성거리뎐 시위대는 나뉘어저 반은 계속 앞으로 전진하고 냐며지는 잠시 후퇴하기로 한 모양이다. 나는 겁이 많아 되돌아 왔다. 효자동쪽에서 중앙청으로, 그리고 광화문(지금의 세종로) 방향으로 도망치면서 보니 하얀 상복을 (한복이았을지도 ) 입은 사람들이 땅에 머리를 댄 체 업드려 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