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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트럼프와 네타냐후의 농간으로 페르시아 만 일대가 불탄지도 어언 한 달이 되었습니다. 호르무즈는 잠겼고, 수천대의 유조선이 그 안에 갇혀있으며, 혁명수비대가 전 세계 경제의 목줄을 쥐게 된 셈이 되었습니다. 당장 휴전이 타결되기는 했지만, 앞으로 추이는 지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반대급부로, 석유와 가스 수출을 먹거리로 하던 페르시아 만 국가들도 비상이 걸려서, 서로 다양한 방식으로 현 상황을 타개하려고 방법을 찾고 있지요.
이번 사태를 통해 페트로 라인을 알게 되면서 하나의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이 파이프라인이 생각보다 만들어진지 오래된 것이었던 것이 시발점이었는데, 그 시점이 이란-이라크 전쟁과 엮여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계기가 되어 이 분야로 파보면서 호르무즈 위협이 지금 처음 있던 문제는 아니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 각 국가들이 위협이 생겼을 때마다 어떠한 전략을 취하였는지 추이를 찾아보면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번 글은 2부로 나뉩니다. 1부는 이란-이라크 전쟁과 호르무즈 위협을 다루고, 이때의 기억이 페르시아 만의 국가들로 하여금 어떤 전략을 취하게 만들었는지를 찾아봅니다. 2부는 이러한 전략이 어떠한 계기로 변모하게 되는지를 다루며, 시간적으로는 2015년부터 10여 년간을 다룹니다.
발단; 이란의 변화와 급변하는 정세
1971년 영국이 페르시아 만에서 철수하면서, 이후 미국의 기본 중동 전략은 간접 통치로서 Two Pillars Strategy였습니다. 소련의 남하를 막는 두 기둥 중 하나는 석유와 금융을 담당하던 사우디아라비아, 다른 하나는 군사력을 담당하던 이란이었죠. 이 구조는 썩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미국은 이란에 다른 어느 나라에도 팔지 않을 정도로 애지중지하던 F-14 톰캣을 팔정도로 이란을 신뢰했고, 페르시아 만의 소국들은 이 기조에 잘 묻어가며 가스를 팔았습니다.
이걸 박살내는 두 사건이 1979년에 일어납니다. 하나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주목할 이란 혁명이었죠. 2월 11일에 팔라비 왕조가 붕괴하고, 연말에 이슬람 공화국으로 재탄생하면서 미국의 중동 전략은 대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호르무즈 해협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석유 공급망이 위협받게 되자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카터는 1980년 1월 23일의 연두 교서에서 “페르시아 만에 대한 외부 세력의 통제 시도는 미국의 핵심 이익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며, 이를 방어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사용할 것”이라고 하는 카터 독트린을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이 혼돈의 시기에 기회를 노리던 자가 있었으니 바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입니다. 그가 보기에 막 이슬람 공화국이 된 이란은 쿠데타 시도와 대규모 숙청으로 혼란스러워 보였고, 이를 틈타 이란을 공격하면 분쟁중이던 영토도 먹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을 것으로 오판했습니다. 수니파 일색이던 아랍연맹 가입국들도 뒤에서 밀어주자, 9월 22일에 이란에 선전포고 없이 침공해나가니 이것이 8년 동안의 팬티레슬링이 되는 이란-이라크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물론 이라크의 침공은 1달도 안되어 혁명수비대에 막힙니다.
이란의 반격이 매서워지고 전쟁이 길어지자, 페르시아 만 국가들은 1981년 반이란 동맹으로서 GCC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페르시아 만 인근에 위치해있다는 사실 이외에도, 수니파 왕정국이었다는 공통점도 있었지요. 이란의 혁명이 수출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고, 그렇기에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의 스폰서로 행동하면서도, 서로 전투력은 미약하고 미군이 전역에 없었기 때문에 공동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6개국-사우디아라비아, UAE, 카타르, 바레인, 쿠웨이트, 오만-이 GCC로 뭉친 것에는 이러한 동기가 있었습니다. 전쟁 내내 이들은 외교무대와 이라크 지원에 단일대오로 뭉치게 됩니다.
한편, 전쟁이 길어지자 전쟁의 양 당사자는 서로의 밥줄을 끊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로 석유 수출을 막아야겠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양자 모두 빈약한 해군에 비해 강력한 육·공군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타겟이 된 것은 석유 정제 및 보관 시설이었습니다. 1980년부터 이라크는 이란의 아바단 정유소와 하르그 섬을 공습했고, 1982년이 되면 이란도 이라크의 바스라와 파우 반도의 유전지대를 공격해 이라크의 숨통을 끊으려 했습니다. 그럼에도 서로의 돈줄을 억제하는 데는 실패하자, 이제 수출 수단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후일 사람들이 유조선 전쟁이라고 부르게 되는 아사리판의 시작은 이랬습니다.
절정; 유조선 전쟁과 미국의 개입
1984년 3월 27일은 이란-이라크 전쟁의 해전에서 기념비적인 시점이었습니다. 이전까지 이라크는 이란의 북부 항만 접근로를 타겟으로 잡고 공격한 바 있습니다. 예로 같은해 3월 1일 15척 규모의 호송선단을 미사일로 공격하여 1대 침몰 2대 대파시켰을 때에도 목적은 이란 항만을 드나드는 화물선들을 노린 것이었고, 실제 공격받은 지점도 부셰르-반다르 호메이니 사이 지점이었습니다.
3월 27일의 공격은 달랐습니다. 그리스 유조선 Filikon L이 대파된 이 공격부터는 하르그 섬 인근을 지나는 유조선을 집중적으로 공격합니다. 정작 이 배는 쿠웨이트에서 원유를 선적한 채 하르그 섬의 남부 항로를 지났을 뿐이었지만, 수차례의 공습에도 하르그 섬의 원유 터미널을 완전히 제압하는데 실패한 이라크군에게 쉬페르 에탕다르 공격기와 엑조세 대함미사일 조합으로 레이더를 통해 원거리에서 하르그 섬의 석유 수출을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는 이러한 공격 방식은 효율적으로 보였고, 이에 4월 18일의 공격부터는 노골적으로 하르그 주변의 대형 선박이면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전략을 잡습니다. 곧, 이 시점부터 공격 목표는 이란의 항만선 접근 거부에서 하르그 섬을 지나는 유조선단에 대한 통상파괴로 바뀐 겁니다.
하르그 섬을 어떻게든 붙잡고 있어도 이라크가 유조선을 공략하며 수출전선에 먹구름이 끼자 이란도 이제는 더 이상 참지 않았습니다. 부족한 해군 전력이었지만, 이란 또한 이라크와 그 뒤의 페르시아 만 국가들에서 석유를 나르는 유조선을 노리기 시작합니다. 5월 13일, 이란은 F-4 팬텀 전폭기의 로켓을 사용하여 쿠웨이트 유조선을 공격, 손상을 입히는 것을 시작으로 ‘유조선 전쟁’의 막이 오르게 됩니다.
이 시점이면 이라크는 남부의 석유 터미널들이 너무 두들겨맞은 나머지 튀르키예나 사우디 방면 파이프라인를 통해 원유를 수출하는 상황이었고, 때문에 된서리는 GCC 국가들이 맞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GCC 국가들은 전쟁에 더 깊숙이 개입할 수밖에 없게 되고, 석유 수급 불안으로 인해 외부 세력들도 페르시아 만의 상황에 주목하게 됩니다. 실제로 이란의 사우디 유조선 공격 이후 사우디아라비아는 방공식별구역으로서 파드 라인을 선포하고 이란의 F-4를 격추하기도 했고, 후일 미 해군은 아예 이 동네에 들어오기도 하죠. 이는 육전에서 이란을 이기기 어려워졌다고 판단하여 전장의 범위를 넓히고자 했던 후세인의 계산과도 맞아떨어지는 부분이었습니다.
개전 이후부터 1986년까지 이라크는 195건, 이란은 77건의 선박에 공격을 가하고, 이 공격의 여파로 1984년 6월 말부터 1986년까지의 UN 자료에 기초하면 사망 75명, 부상 80명, 실종 22명의 인명 피해를 냈습니다. 이라크는 선술했던 쉬페르 에탕다르, 혹은 미라주 F1와 엑조세 조합을 주로 이용하여 대충 레이더에 찍히길 하르그 남쪽 항로를 가는 대형 선박같다 싶으면 무차별적으로 쏴댔고, 이란은 로켓부터 시작해서 고속정, 프랑스제 AS-12 공대지 미사일, 야간 기습, 소형정으로 근접하기 등등을 이용하여 없는 사정에도 착실히 공격했습니다. 이렇게 양측이 두들겨대니, 당장 뛰어오른 것은 보험 운임이었습니다. 미국 정부의 1984년 5월 24일 브리핑에 따르면 동년 3월 30일부터 5월 22일의 불과 50여일 사이에 추가 보험료가 31만 3750달러에서 176만 2500달러로 6배가량 훌쩍 뛰게 됩니다. 6월쯤 되면 3월의 0.75% 대비 선체 가치의 7.5%까지 전쟁할증 보험료가 오르며 피크를 찍게 됩니다. 이후 보험료가 떨어지긴 하나 시기에 따라서 들쭉날쭉한 추가 보험료율을 보이며 꾸준히 위험항로로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1987년은 시작부터 격렬했습니다. 이란은 이라크의 바스라에 수차례 대공세를 펼쳤지만 결국 정복이 좌절되자, 바다에서 이라크의 스폰서를 공격하자는 생각에 유조선 공격에 열을 올리며 개전 이후 최초로 이라크보다 더 많은 유조선을 공격하게 됩니다. 한편 이 공격을 받아내는 이라크나 지켜보던 GCC 국가들도 그 물량공세에 학을 떼게 됩니다. 특히 이라크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고, 실제 유조선 공격도 가장 많이 받았던 쿠웨이트는 이 1월의 대공세를 보고 미국에 직접적인 유조선 호위를 요청합니다. 이에 프로토타입 트럼프 레이건이 미 해군 투입을 결정하니 이것이 바로 Operation Earnest Will입니다. 명목상 호위 임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란의 공격을 무위로 만듦으로서 이라크를 돕기 위한 무브먼트 중 하나였습니다.
문제는 작전 첫날인 1987년 7월 24일부터 시작됩니다. 기세좋게 호르무즈에 진입했는데, 파르시 섬 인근에서 호위 대상인 유조선이 이란 기뢰를 밟은 겁니다. 그뿐 아니라 이란이 유조선에 크고 아름다운 중국제 실크웜 대함미사일을 쏘지를 않나, 탱크에나 쏘는 AGM-65를 탱커에 쏘려고 하지를 않나, 겁도없이 야간에 뽈뽈대고 와서 기뢰를 깔려고 하지 않나.. 결국 각종 화력과 특수부대까지 끌고와서 이란 본토의 A2/AD 자산을 무력화시키게 되니 작전의 스케일이 점점 커집니다. 호위 작전으로 시작한 것이 점차 대이란 직접교전으로 바뀐 것이죠. 1988년 4월 14일 USS Samuel B.Roberts함이 기뢰에 피격되자 이제 대놓고 Operation Praying Mantis라는 대규모 보복작전을 펼치며 이란 해군의 재래식 전력 에 중대한 손실을 입혔고, 이란-이라크 전쟁의 사실상 플레이어로서 기능하게 됩니다. 결국 이란에게 휴전을 하게 강요한 셈이 되었죠.
1988년 8월 20일 종전이 되며 전쟁 이전으로 국경선은 돌아가지만 유조선 전쟁의 폐해는 컸습니다. 유조선 전쟁 기간 동안 UN 집계 기준 340건의 선박 공격이 확인되었고, 사망 116명, 부상 167명, 실종 37명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우리나라 선적도 동기간 5척이 공격받는 위험천만한 일을 겪었죠. 호르무즈 해협은 위협받았고 실제 항로는 기뢰밭이 되었으며, 실크웜과 엑조세의 공격으로 보험료는 폭등했습니다. 이라크는 남부 유전지대 파괴, 이란은 하르그 섬 석유 수출망을 내내 위협받았고, 해군전력도 커다란 손실을 입었습니다. 미군의 경우 이라크군의 엑조세를 얻어맞은 USS Stark함 사건, 이란 기뢰를 밟은 USS Samuel B.Roberts함 사건을 겪었고, 이외 이란 민항기를 격추했던 USS Vincennes함 사건도 이 시기의 일이었습니다.
결말; 역내 전쟁당사자들이 얻은 교훈과 정책적 결말
이제 유조선 전쟁으로 인해 역내 국가들이 어떠한 교훈을 얻었고, 이게 정책적으로는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쟁당사국부터 보고, GCC 국가는 그 이후에 보겠습니다.
이라크는 유조선 전쟁 제1의 가해국으로 기능했습니다. 이들은 자국 해군이 이란의 해상통제와 경쟁할 수 없다는 사실에 기반하여, 쉬페르 에탕다르, 미라주 F1과 엑조세를 이용한 경제전을 벌였습니다. 그럼에도 해상 공격기만으로는 이란의 해상통제 해제라는 큰 그림을 그릴 수는 없었음을 통감하며, 해상전을 결정적 승리의 수단이라기 보단 통상파괴전을 통해 상대 경제를 소모시키는 보조전선으로 격하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만 8년간 전쟁으로 돈도 없었고, 이후 쿠웨이트 침공 때도 다국적군에게 두들겨 맞은 다음에는 해양 쪽으로 뭔가를 할 여력 자체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이란은 유조선 전쟁의 최초 피해국이자 제2의 가해국으로 기능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한적인 교란이 전면 통제보다 더 실용적이라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유조선 전쟁 이전 이라크의 공격 대상이 이란 북부 항만을 향하는 상선이었다는 사실과, 이란 또한 그렇게 하르그 섬이 공습받으면서도 결국 그곳을 통한 석유 수출을 포기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이들이 전쟁의 지속과 일상의 유지를 위해 결코 전면통제를 할 수 없었음을 증명합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유조선 전쟁 당시 A2/AD 전술 또한 교훈으로 남습니다. 기뢰를 깔고, 대함미사일을 날리고, 소형 보트가 떼로 몰려다니며 공격을 함으로서 호르무즈를 언제든 막아버릴 수 있다는 위협을 날리는 방식으로서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키고 외부 해양 세력을 귀찮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이에 대전략으로서 호르무즈를 봉쇄 대신 억지 수단으로 보는 것과, 혁명수비대가 해군을 가지고 산하 A2/AD 전술로서 기뢰전과 소형정 전술을 이용하고 대함미사일에 투자하는 등 비대칭 전력을 통해 언제든 호르무즈를 자신들의 자산으로 써먹을 방법을 연구하게 됩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라크를 지원한 대표적인 GCC 국가였고, 그로인해 유조선 전쟁 당시 이란의 공격을 받았던 나라들 중 하나였습니다. 주요 유전이 동부에 있었고, 이에 따라 페르시아 만의 라스 타누라 항이나 주아이마 항을 주요 수출항으로 이용했던 사우디아라비아는, 전쟁 직후 페르시아 만이 위험해지면서 석유 수출에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이에 1977년부터 짓기 시작하던 페트로 라인East-West Pipeline의 건설을 전쟁 시작 10개월 이후에 마무리지을 정도로 기민하게 대응하고, 유조선 전쟁으로 석유 수출에 차질이 생기자 1987년에는 2단계 확장을 해버립니다. 이렇게 홍해의 얀부 항으로 제2수출통로를 뚫어놓은 사우디는, 종전 이후 미국과는 안보협력을 심화하고, 한편으로는 GCC 안보체제를 주도하며 대이란 강경 축으로 활동합니다.
쿠웨이트역시 이라크의 후방으로서 재정적으로 지원한 GCC 국가였고, 그만큼 이란의 대표적인 표적으로 남았습니다. 급해진 쿠웨이트는 미국 이전에 소련에게도 지원을 요청할 정도였고, 결국 미 해군의 호송 지원을 통해서야 선박 재등록이 가능해질 정도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의 안보협력 심화를 통해 석유수출 지속성 확보를 목표로 하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이란-이라크 전쟁 직후 있었던 이라크의 침공은 더더욱 미국과의 안보 공조를 심하게 만들었고, 현재도 쿠웨이트는 미 육군의 전진기지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바레인은 직접적으로 자산이 공격당한 국가는 아니었지만, 워낙 소국이었던 탓에 독자적인 안보정책이 불가능하기도 했거니와, 인구 구성이 시아파 다수 위에 수니파 왕가가 있던 구조라 1981년의 쿠데타 기도를 비롯한 이란의 공작을 전면으로 맞은 전적이 있는 국가였습니다. 이에 1995년 재창설된 미 5함대를 자국 마나마에 유치하는 등 서방과 안보협력을 심화하고, GCC 집단안보 참여를 확대하는 등 이란 견제 경향을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이게 됩니다.
카타르는 바레인과 비슷한 위치에 있었지만, 이라크를 지원하면서도 이란과 썩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실용주의 노선을 견지한 덕에 호르무즈 내부 국가임에도 상대적으로 평안하게 보낸 국가가 되었습니다. 전후에도 미국과 안보협력을 유지하되, 이란과도 사우스 파르스 가스전을 공유하는 등 다른 GCC 국가들보다 조정자적 위치에 있으면서 해상수송 안정을 우선하는 정책을 주로 펼치게 됩니다.
UAE는 좋게 말하면 유연하고, 나쁘게 말하면 이중적인 면모를 보였던 나라였습니다. 첫째, 호르무즈 바깥에도 항만이 있던 국가였고 둘째, 그러면서 이란과 호르무즈를 두고 맞보던 사이었으며 셋째, 그 와중에 아부다비와 두바이로 대표되는 왕국들 간 노선 차이가 분명 있었던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이라크에 지원하되 이란과 상업적으로 적대하지 않는 이중노선을 채택합니다. 다만 그럼에도 UAE 앞바다가 유조선 전쟁 당시 이란의 킬존으로 활용되고, 1987년에는 아부다비 소유의 가스전이 공격당하는 등 불안한 정세를 보내게 됩니다. 이에 전쟁 이후에는 안보는 미국과 공조, 경제는 이란과 적대하지 않으며, 대신 언제든 위협당할 수 있는 호르무즈를 우회할 수 있는 푸자이라 파이프라인을 2008년에 개통시키는 등 상업국가로서 리스크를 분산시키는 전략을 취합니다.
오만은 애초에 호르무즈 바깥에 있는 국가이면서, 무산담 반도를 통해 해협을 봉쇄하는 효과를 낼 수 있는 국가였습니다. 이들은 수도 무스카트에 비밀 휴전협의의 장을 마련할 만큼 외교적으로 이란에 열려있었으나, 1980년부터 미군과 군사협력 관계를 맺었고 무산담 반도만큼은 상시 전투태세를 유지할 만큼 역내 안보에 무책임한 국가는 아니었습니다. 전후에도 해협 내 안전항행 관리와 이를 위한 중재자적 역할이라는 외교 자산을 키우는 방향으로 전략을 짜게 됩니다.
마무리하며.
우리는 이란-이라크 전쟁과 그 과정에서 있었던 유조선 전쟁의 경과를 보고, 호르무즈의 무해통항이 위협받는 일련의 과정에서 페르시아 만 국가들이 어떠한 교훈과 정책적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보았습니다. 페르시아만 국가들은 호르무즈 해협의 불안정이 자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구조적 위기를 불러온다는 교훈을 얻었고, GCC를 통한 공동 대이란 정책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방과의 안보공조를 그 결과로 택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게 이후 불어닥친 위기에도 유효했냐는 점이죠.
곧 보게 될 2부에서는 이후의 페르시아 만을 둘러싼 상황의 변화가 어떤 정책적 수정을 불러왔는지를 다루게 될 것입니다. 특히 JCPOA부터 현재의 전쟁 이전까지 10여 년간 호르무즈를 둘러싼 GCC 국가들과 이란 사이의 관계에 집중하면서, 몇몇 국가들의 이란-이라크전 전후의 기조가 어떻게 바뀌게 되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