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首都)’라는 단어 하나에 사람들은 각자 제멋대로 생각하고 있다. 나는 오랫동안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수도, 서울’에 대한 이미지를 일방적으로 만들어 왔다. 서울역 후문에서 공덕동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여기도 서울?”
지금까지 나는 몇 번 서울을 찾아 왔을까.
그 때마다 내 멋대로 가지고 있었던 '수도(首都)'의 이미지와 대구에서 온 경상도 시골 사람의 정체성으로 이 땅과 만나지 못하고 그냥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6·25전쟁 때 대구는 낙동강 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수많은 국군을 비롯한 유엔군과 호국 영령들에 의해서 지켜진 땅이다.
서울은 엎치락뒤치락 빠른 속도로 주권이 바뀐 곳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3일 후에 서울은 함락되고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의 거의 3개월 만에 탈환. 북진한 유엔군에 대한 10월 25일 중국군의 참전으로 1951년 1월 4일 서울 함락.
그 후에도 서울은 탈환, 함락을 몇 번이나 반복한다. 같은 한국에서도 대구와 서울에는 지방 도시와 수도라는 표면적인 차이만이 아니라 토지 자체가 가진 ‘상처’가 다르다.
초등학교 시절 미술 시간에 환경 문제 교육의 일환으로, 지구 오염에 대한 포스터 '지구의 아픔'을 그리면서 고민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처럼 만약 이 서울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이 탈환과 함락을 몇 번 반복한 서울의 아픔을 도대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한국은 크다. 내가 살아왔던 범위 내에만 한국이라고 생각했다가는 이 땅에 실례를 범하는 것이다. 나에게 수도 서울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새로운 한국과의 만남을 만들어 주었다. 마침내 서울 사무실을 차리고, 서울에 거점을 가지게 된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다.
사무실 정리를 할 겸 겸사겸사 서울에 간다는 전날 어떤 계기로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를 듣게 됐다. 그러고 보니 이 노래는 유학 당시에 유행했던 곡이다. 그 때는 의미도 모르고 그저 멜로디에만 맞추어 흥얼거리고 있었다.
“이젠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해 갔지만 ―”
시대 흐름의 따라 모든 것은 변화한다. 그것도 흔적을 남기지 않고.
20년간 서울에 몇 번 다녀왔어도 변화를 거듭해 온 서울 자체를 나는 알려고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의 있는 '변화의 결과'만 봐도 그런 과정과 실재 자체의 진실은 보지 못 하는 것처럼. 나는 서울을 몰랐다.
그러나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의 가사 속에서는 변하지 않는 곳이 있다고 한다. 덕수궁 옆에 있는 돌담길과 정동의 길 광화문 네거리. 그리고 여기를 지나가는 연인들과, 옆에 있는 교회당. 이 노래에 매혹되어 이곳을 걷고 싶어졌다.
다음 날 그곳에 가봤다. 먼저 덕수궁을 걷는다. 여기도 세 번 정도 찾아왔을까. 전에 왔을 때는 못 느꼈지만, 덕수궁에 있는 건물에는 모두 개성이 있었다.
한국 전통 가옥인 중화전·석어당 등과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이 있고 동양 건축 같지만 러시아인이 건축 설계한 저택인 정관헌도 있다. 특히 이 정관헌은 당시 고종에게는 '조용히 세상을 바라보는 공간'라고 전해진다. 입구에서 받은 팸플릿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조선 말기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개화 이후 쏟아지듯 들어온 서양 열강의 조선에 대한 이권 다툼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그 조선 말기에 열강이라 불리는 영국·프랑스·러시아·미국 등의 공사관이 이 덕수궁을 감싸고 있었다. 그래서 덕수궁은 서양식 건물을 만들고 열강들 못지않은 모습을 마음껏 보여 줘야 했다. 그리고 이 열강들은 조선에 대한 이권 다툼을 했고, 그것이 치열했기 때문에 조선왕조 말기는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제보다 앞선 시기에 이 나라가 열강들의 치열한 압력을 받고 이미 혼란스러운 상태였다는 것인가.
또 팸플릿에는 이런 내용도 적혀 있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와서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환구단을 짓고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대한제국 선포는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대외에 확실히 전달하고 정국을 주도하려 한 고종의 선택이고, 강한 의지였다.”
고종은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를 잃고 1896년 2월부터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 가셨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알고 있었지만 그 후에 이런 일이 있었을 줄은…
그리고 1897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종주국 중국으로부터 자주 독립을 대외에 나타내기 위해서.
'독립'은 일제시대 때의 '독립'뿐만 아니라 중국으로부터 '독립'이라는 뜻도 있었다니. 실제로 '독립문'은 그 때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세계정세는 제국주의 시대의 한복판, 조선 왕조는 일본은 물론 중국·러시아와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미국 등의 간섭을 받고 있었다. 당시 고종은 가족 간 갈등부터 시작해 꼼짝도 못하는 이 나라의 현황과 미래에, 견디기 어려운 심정으로 항상 압박과 고통에 시달렸음에 틀림없다.
주위를 둘러보니 바로 지금도 영국 대사관, 러시아 대사관 그리고 옛 미국 공사관 등이 보인다. 그 외 프랑스 공사관 흔적과 네덜란드 대사관, 캐나다 대사관, 뉴질랜드 대사관도 가까이에 있는 것 같다. 정관헌에서 이 대사관들을 보았을 때 결코 마음을 조용히 하고 보지 못할 것이다. 만약 내가 당시 고종이었다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한단 말인가. 거기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한때 일국의 왕으로 태어나게 된 고종의 괴로움을 생각한다.
그런 고종을 가슴에 안으며 다음은 돌담길에서부터 정동을 걷는다. 정면에 교회가 보인다. 가사 속에 있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을 떠올려 본다. 예쁘다. 한국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1631년 조공사절단에 의해서 기독교에 관한 서적 ‘천주실의’ 등이 수입된 것부터 시작된다. 당시 기독교를 '서학'라고 부르며 책을 연구하던 사람들의 일부가 사제의 선교 없이 사적으로 신앙하고 있었다.
1866년에는 흥선 대원군 정권 하에서 밀입국하던 프랑스인 사제 9명과 천주교 신자 약 8000명이 포박·처형되는 병인박해가 일어났다.
1884년 개신교의 선교는,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에 의해서 시작했다. 장로교는 1885년에 청소년용 배재학당을, 감리교는 1886년에 소녀용 이화학당을 고종으로부터 학교명을 받아 창립했다. (위키피디아 ‘한국 기독교’에서 인용)
이렇게 서양열강들은 한국에 개국을 강요하고 협약을 맺으면서 왕의 인정하에 치외법권 상에서 기독교를 지키며 포교했다. 그때까지 유교 중심의 조선에게 자유와 평등이라는 교육과, 첨단 기술을 따른 의료 등을 과시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못했다. 틀림없이 아주 놀랐을 것이다. 이 환경에서는 당연히 기독교가 널리 단숨에 이 나라에 침투할 수밖에 없었구나.
“과연 그렇구나”
20년 전부터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던 하나의 수수께끼가 풀렸다. 그 수수께끼는 밤에 한국 상공에서 마을을 보면 십자가 네온사인이 도처에 존재하는 이유였다.
가까이 있는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에 들어가 봤다. 1층에는 당시의 교실이 재현되고 있다.
“그때 아이들에게 교육장은 서당이 전부였다. 그것도 어려운 선비 선생님이 막대기를 휘두르면서 암기 위주의 공부를 강요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집에 돌아오면 가족이나 친족의 기대를 뿌리치는 것 없이 고스란히 온몸으로 받았겠지. 이를 견딜 수 있는 유연한 지능과 튼튼한 체력이 있는 아이 외에는 배움의 기쁨이라는 것이 있었을까. 그 반대로, 선교사 아펜젤러 선생님은 사랑과 봉사의 정신에 의해서, 양반부터 천민까지 신분의 차별 없이 어떤 사람이든 평등하게 대하며 가난한 사람에게는 음식을 주면서 배우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시대에 배우는 기쁨을 주셨다.”
그 교실 의자에 앉아 이런 것을 생각했다.
무엇을 보든 무엇을 듣든 모든 것이 신선하고, 배우는 기쁨이 넘치고 견딜 수 없을 만큼 두근두근거리는, 당시의 아이들은 그랬을 것이다. 그 생동감이 극에 달했다. 또 다른 방에서 홍보영상을 봤다.
'아펜젤러는 말했다. 당시의 양반들에게 '하인을 데리고 오지 않는 것부터가 공부의 시작입니다.'
자율교육을 기초로 평등교육·전인교육에서 자유주의 교육에 이르기까지 교회·학교·국가에 기여하는 글로벌 인재를 여기서 육성했다.
그리고 거기서 배출된 이승만 대통령과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님, 시인 김소월 선생님 등은 한국근대사에서 큰 영향을 끼친 사람들이었다.
“바로 이곳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왔다.”
한국의 근대사가 여기 서울에 있었다.
이렇게 열강과 근대화의 물결에 밀리면서 정동을 지나서, 서울 역사박물관에 향한다. 하늘에는 잿빛 구름이 흐르고 무겁게 서울을 덮는다. 10월인데, 세밀하고 차가운 비가 마치 눈 같다.
멀리 바라보이는 서울 역사박물관 입구에는 오렌지색의 배경에 짙은 녹색 빛이 퍼지는 큰 현수막이 있었다. '남산의 힘'이라는 광복 70주년기념 특별기획전이 내 마음을 끌어들였다.
“시대마다 지배세력은 남산의 경관과 공간 이미지를 나름대로의 가치에 따라 다르게 빚고 사용해왔습니다. 왕조의 번영, 충렬, 내선일체, 항일, 반공, 민족중흥, 정권안보, 근대화, 국제화 등의 가치가 개발시대까지 남산에 덧씌워졌다면, 탈권위주의 시대인 지금까지는 아마도 자연, 역사, 시민 인권과 평화의 화두가 새로운 권력이 된 자본과 경합을 벌리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특별 기획전의 처음에 있는 박물관장 강홍빈 씨의 인사가 너무 멋지다. 특히 '왕조의 번영, 충렬, 내선일체, 항일, 반공 민족중흥, 정권안보, 근대화, 국제화'라고 조선시대 이후 시대의 흐름을 단어 하나의 주제로 표현하고 있어서 너무 알기 쉬웠다. 이 주제는 전시회를 관람하는 사람들의 지도가 되고 정중히 안내해준다.
“이번 전시에서 우리는 장소와 시대정신의 상관관계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남산의 변화를 통해 우리가 겪어 온 역사의 의미와 작용을 반추해 보려는 것입니다.”
남산만이 아니다. 이처럼 하나하나 반추하면서 서울은 물론 모든 한국과 만나서 '사랑하고 싶다'라고 생각했던 나를 위한 기획전이 이미 준비되고 있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서로 만난 것이다.
“장소를 읽는 것은 바로 우리의 역사를 읽는 것이며, 장소를 가꾸는 것은 바로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만드는 것에 직결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놀랐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강홍빈 씨를 만나고 싶다.
설레는 마음을 억제하며 우선 전시 Ⅰ'한양의 안산'을 본다. 거기에서는 국가의 안녕과 백성의 복을 추구하는 국가의 수호산으로써 '왕조의 번영과 충렬'을 표현하고 있었다.
남산의 녹색을 축복하며 문인들은 시간과 노닐며 시를 쓴다. 동양의 정서 있는 아름다운 한국을 사랑한다.
그리고 Ⅱ'식민 통치의 현장'에서는 식민지배의 핵심 통치기구나 일본인의 거주지 조선 신궁이 남산에 세워지고 식민권력의 상징으로 '내선 일체와 항일'을 표현하고 있다.
남산에 이런 것이 있었다고는 생각도 못했다. 당시 일본은 미쳐가고 있었다. 신사 참배까지 강제로 시키는 것은 너무나 폭력적이다. 존엄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기존의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를 지배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일본은 저질렀다.
뇌리에 강한 충격을 느끼며 한동안 그 자리에 한참 서있었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직시하는 것뿐이다. 제대로 봐야지 하는 마음. (내가 걷는 이 한 걸음 한 걸음이 이 나라에게 속죄가 된다면 고맙다.)
무거운 마음을 이끌고 전시 Ⅲ으로 향한다.
“광복 그 후 남산'에서는 전후의 혼란기 속에서 우익과 좌익의 대립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고 해방촌이 형성되어 신생국가의 상징으로 만들려고 하는 의지들의 혼란과 대립·꿈과 좌절이 교차하는 공간인 남산의 시대를 나타냈다. 온 국민이 함께 경축해야 할 해방 후 첫 3·1절 기념식을 좌익은 남산에서, 우익은 서울 운동장에서 따로 치렀다. 심지어 1947년 3·1절에는 남대문에서 유혈 충돌까지 일어나기도 했다.”
이것도 일제강점기 36년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음으로 전시 Ⅳ에 향한다.
“민족중흥의 국민 교육장”에서는, 국시를 구현하는 반공교육장과 애국 애족 정신을 고취하는 동상, 국가와 정권 수호의 방패인 중앙정보부와 수도방위사령부 등이 남산에 자리를 잡았다.
'반공, 민족중흥, 정권안보'를 표현하면서 동시에 정부의 경제 발전 드라이브 속에서 외인아파트나 재벌기업들의 고급호텔의 건설로 남산의 자연과 역사가 훼손된 '근대화'를 표현하고 있었다.
인류는 보다 더 좋게 살고 싶고, 철학과 종교 등에서 진리를 추구하면서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과학을 발전시켰다. 그 뒤에 유린당하고 고립된 자연들의 애원의 절규도 모른 채 지나친다. 정말 한국의 기념관, 박물관 견학은 정신력을 요구한다.
다음에 전시 Ⅴ에 향한다.
‘돌아온 남산’은 지난 백여 년간 권력이 집중적으로 투영된 장소에서 권위주의 정치체제의 한계와 과도한 개발·도시화가 부른 자연환경 문제로 남산은 이데올로기의 옷을 벗고, 자연과 인간, 역사의 공간으로 변화하는 '국제화'를 표현하고 있다.
“다양한 진통을 겪으며 남산은 그 『힘』을 회복하는 중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