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 (외 1편)
송은숙
그가 아프리카봉선화 화분을 주었다
아프리카봉선화꽃은 열두 가지 색이 있다
어떤 꽃이 필지 모른다
열기 전엔 알 수 없는 상자 같다
나는 선물 상자처럼 아프리카봉선화 화분을 안고 다닌다
화분을 안고 버스를 타고
화분을 안고 밥을 먹고
화분을 안고 공원에 간다
백합나무 그늘에 앉아 그림책을 읽어 준다
너는 무슨 색 꽃이니? 가끔 속삭이고
보라색 꽃을 찧어 붙이면 손톱에 보라색 물이 들까? 가끔 갸우뚱거린다
선물 상자 안엔 다시 상자가, 그 상자 안에 다른 상자가, 그 상자 안에 또 다른 상자가 있다
그럴 수 있다
열두 번째 상자를 꺼내다 잠이 든다
화분 안에 아프리카봉선화가 심겨 있다
아프리카봉선화꽃은 열두 가지 색이다
열두 가지 색 안에는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
백합나무 가지에 작은 새가, 작은 새 안에 연둣빛 벌레가, 벌레 안에 가느다란 노래가 숨어 있는 것처럼
무
팔꿈치 안쪽에 실핏줄이 터지듯 천천히 멍이 드는 저녁이다
무의 발자국이 밭두둑을 넘어왔다
무의 발자국은 서걱서걱 얼음 갈리는 소리를 낸다
무를 깎는 소리가 그랬다
매끄러운 얼음을 지치듯 껍질 밑으로 칼이 들어갈 때
부엌문으로 무심코 하늘을 보다 낮달에 손을 베일 때
껍질과 칼의 경계에 돋는 소름
껍질 밑으로 무의 실핏줄이 드러났다
오래 동여맨 손가락처럼 하얗게 질려 있다
집요한 서걱거림에 무가 제 몸을 열어 보인다
빈집의 들창처럼 숭숭 바람구멍이 나 있다
—시집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 202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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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숙/ 1963년 대전 출생. 2004년《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등단. 시집 『돌 속의 물고기』 『얼음의 역사』 『만 개의 손을 흔든다』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 산문집 『골목은 둥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