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7. 빨간 망토
일주일이 지난 토요일.
방학이 시작되는 날. 난 윤주네 집이 있었다.
정식으로 말하자면 그 날부터 공식적인 방학이었지만,
난 이미 3일 전부터 비공식적인 나만의 방학을 시작했다. 윤주와 함께.
난 새로 산 매니큐어를 손톱에 발라보고 있었고
윤주는 빨간 니트를 어깨에 걸쳐 보고 있었다.
며칠 전 윤주가 인터넷으로 산 니트였다.
치수가 작을 거 같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만,
윤주는
“저렇게 색깔 이쁘게 나온 거 또 없을 거야. 그냥 살래”
하면서 고집을 피웠다.
“거봐 내가 작을 거 같다고 했잖아”
“괜찮아. 이렇게 숄처럼 어깨에 걸치고 다니면 되”
“바꿔”
“전화해 봤는데. 어차피 이게 마지막 남은 거였데”
“그럼 환불 받으면 되겠네.”
“싫어. 초가을 이럴 때 걸치고 다니기 딱 좋잖아.
아직 더위 안 가셨는데 은근 좀 썰렁할 때 이럴 때”
“빨간색이 뭐가 좋냐? 촌스럽긴”
“뭘 모른다니까 나처럼 빨간색이 잘 어울리기가
얼마나 힘든 건지 알기나 해?”
“짜증나. 재수100단!”
“어때 정말 이쁘지?”
윤주가 빨간 니트를 숄을 걸치듯
어깨에 걸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기쁘게 말했다.
“예쁘긴 망토 같다 야”
“뭐?”
“망토 말야. 빨간 망토”
그 때, 케이블 방송에선
애니메이션 ‘빨간 망토 차차’가 방영되고 있었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
윤주가 말했다.
빨간 망토가 부럽냐고? 설마.
윤주는 정말 빨간색을 좋아했다.
옷은 말할 것도 없고 핸드백에서 지갑까지
빨간색이거나 그 비슷한 계통의 색깔들이 대부분이었다.
난 빨간색을 싫어했다.
너무 튀는 색깔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나한테 너무 안 어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주는 달랐다.
정말 빨간색이 잘 어울렸다.
마치 빨간색과 어울리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매니큐어를 다 바른 난,
윤주가 옷을 고르는 것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그 날은 윤주가 소개팅을 하는 날이었다.
윤주가 사각형을 떼어 놓겠다며
소개팅을 시켜 달라고 나를 졸라 댄 것이다.
난 은근히 기대에 차 있었다.
누가 상상이라도 하겠는가? 윤주가 소개팅을 하다니…….
3학년 언니가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를 때,
언니의 뺨에서 달랑 달랑 흔들거리던 조각칼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윤주와 소개팅을 연관시키기 힘들 것이다.
내가 소개시켜주기로 한 남자애는 현우였다.
현우는 중학교 2 학년 때,
내가 처음으로 정식으로 사귀었던 남자 친구이다.
현우는 나 보다 한 살이 많았다. 하지만, 학년은 똑같았다.
어렸을 때, 심하게 아팠던 적이 있어서 학교를 늦게 들어 왔다고 했다.
“그러니까 오빠라고 불러”
하면서 현우는 언제나 인상을 썼지만,
이유야 어쨌든 학년이 같았으므로
난 오빠하고 부르진 않았다.
현우는 중학교 때, 농구를 했는데 포지션은 슈팅가드였다.
난 몇 번인가 응원을 하러 간 적이 있었는데,
어디선가 나타나 멋지게 삼 점 슛을 던지는 모습은 너무나 멋있었다.
현우를 만난 것은 동네의 보습학원이었다.
현우는 학원에서 아주 인기가 높았다.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긴데다가 ‘나이키’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나이키’란 한 손으로 땅을 짚고서 몸을 하늘로 솟구쳐 올려
다리로 나이키 자를 그어 보이는 춤 테크닉 중의 하나이다.
그런 현우와 친해지게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 친구 중의 한 명이 현우의 친구와 사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현우와 나는 아는 사이가 되었고
우리 집 앞에서 현우는 내게 “나랑 사겨줄래?”하고 말했다.
유치하게 들릴 줄도 모르지만, 그럴 나이였으니까 뭐. 암튼.
그리고 우리는 반 년 가까이 사귀었다.
현우는 운동을 해서 그런지 성격이 아주 시원시원했다.
그러면서도 말을 쉽게 하거나 성질을 부리는 법이 없었다.
난 어떤 때는 현우와 있으면 꼭 아빠와 같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현우와 난 아침마다 학교에 같이 등교했다.
그리고 주말이면 같이 딱히 살 것도, 돈도 없으면서
아이쇼핑을 한답시고 백화점을 이리 저리 돌아 다녔다.
가끔 그 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얼마나 웃겼을까?
중학생 꼬마 남자애, 여자애 둘이서 쇼핑을 한다고
손을 꼭 붙들고 백화점을 돌아다니는 모습이.
현우는 집이 가난했다.
과일 도매상을 하시던 아버지가 폐암으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가세가 많이 기울었다는 얘기를 나는 친구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현우는 자존심이 무척 세었다.
내가 데이트 비용을 내는 것을 싫어했다.
그렇다고 현우가 데이트 비용을 낼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기에
우리의 데이트 코스는 우리 집 앞 공원이 되었다.
우리는 집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서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니면 가능하면 노선이 길고 운행시간이 긴 버스를 골라 탔다.
그리고 돌아 올 때 까지 버스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만의 버스여행을 한 것이다.
난 중학교 때 반포에 살았는데,
현우와 난 언제나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날마다 새로운 버스를 타보았다.
우리가 찾아 낸 최고로 운행 시간이 긴 버스는 710번이었다.
노선이 어땠냐면은…….
강남에서도 맨 끝에 있는 대치동에서
강북의 끝에 있는 성북동까지
그것도 도대체 목적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빙빙 돌아서…….
(서울 역에선 자그마치 3번이나 빙빙 돌았다)
“뭐야 왜 연락 안 하지?”
두 시간 째 잡지에서 본 일본 배우처럼 화장을 할 거라며
색조화장에 열을 올리며 언제나처럼 영화 ‘미션’의 주제곡을
흥얼거리던 윤주가 거울의 나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나도 거울의 나를 보았다.
거울의 내가 입을 열었다.
“나 관심 없다니까 그냥 따라가 본 거 뿐인데 뭐.
너 내 신경 쓰지 말고 화장이나 잘해 오늘 이쁘게 보여야지”
“아 아 그러시겠지”
윤주는 내 충고는 들은 척 만 척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과장해서 끄덕였다,
“정말이야. 거짓말 같아?”
“그래그래”
“넌 어제 재밌었어?”
어제 윤주는 사각형과 놀이동산을 다녀왔다. 난 그것을 두고 물은 것이다.
“하지 마”
윤주가 거울 속의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한테 잘해주잖아. 난 부럽던데 뭐.
한 시간 마다 전화하지, 어디 갈 때 되면
집 앞에 차가지고 나타나지 얼마나 좋니?”
“짜증나 한지연! 재수100단!”
“하긴 그래도 너 은근히 조심은 하는 게 좋을 거야.
그 사람 그렇게 너한테 잘해주다가도
니가 좀만 잘못하면 어떻게 나올지 모르잖아.
진짜 너 다른 남자 만나기라도 하면
너 몸 조각조각 잘라서 어디 산에다 암매장이라도…….”
윤주가 화장대에 놓여 있던 루돌프 인형을 던졌다.
난 빠른 동작으로 피하지……. 못했다.
얼굴에 정통으로 맞아서 아악하고 비명을 질렀다.
“내가 얼마나 쪽팔렸는데. 사람들 다 쳐다보고. 나 참. 줄 설 필요도 없더라니까
사람들이 다 먼저 타라고 비켜주더라니까. 맙소사 식당가면 어떤지 알아?
알바생들이 허리를 구 십도정도는 구부려서 인사한다니까.”
윤주는 생각 만 해고 분하다는 듯 씩씩거리며 말했다.
“좋겠네 뭐 인사도 받고.
근데 애들도 아니고 놀이동산이 뭐니? 유치하게”
“나도 몰라. 짜증나. 지 평생소원이 여자친구 생기면 놀이동산 가는 거였데.
미친놈. 진짜 짜증나 죽겠어. 이제 진짜 안 만 날거야. 전화번호도 바꿔 버릴 거야.”
윤주는 다부진 각오를 한 듯 말했다.
“그랬다간 집으로 쳐들어올걸?”
나는 진심으로 윤주를 걱정하며 말했다.
“너희 아빠한테 말하면 안 될까?”
윤주가 아빠를 위험에 빠뜨리려 했다.
“너 날 고아로 만 들 샘이니?”
난 아빠를 보호했다.
“그럼 이사 가면 되.”
“너 이사 간 곳 알아보는 건 그런 사람들한테 일도 아닐걸?”
나는 다시 진심으로 윤주를 걱정하며 말했다.
“경찰에 신고 해 버릴 거야. 그런 식으로 괴롭히면”
“너가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경찰이 신경도 안 쓸 걸
아마 괜히 사각형이 알면 너만 죽어날걸?”
“너 자꾸 이럴래?”
내게 짜증을 내는 윤주.
“그 사람 너무 싫어하지 마. 알고 보면 멋진 구석이 있는지도 모르잖아.
너도 남자 한 번 사겨봐야지. 너 다른 애들은 얼마나 남자 많이 사귀는지 알기나 해?”
“루돌프 너도 없잖아. 뭘 그래?”
루돌프.
내 유일한 별명이지만, 몇 몇 겁 없는 선생들을 제외하고는
학교에서는 감히 아무도 못 부르는 별명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코에 큰 여드름이 난 적이 있다.
학교에 도저히 갈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 땐 기말고사 기간이라서 그럴 수도 없었다.
루돌프란 별명은 바로 그 때 붙여진 것이다.
반격을 하려 하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난 여전히 루돌프 인형을 보면서
지연!, 지연! 하며 좋다고 웃고 있는
윤주를 쏘아 보며 주며 전화기를 받았다.
혹시 지수오빠?
난 비련의 영화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여보세요”
“거 한지언씨 핸드폰 입니꺼?”
지언? 지은이겠지…….
내 기대를 구깃구깃 접어서 멀리 던져 버리는 목소리,
전화기 저 편에서 아주 굵직하고 구수한 음성이 들렸다.
“그런데요. 누구세요?”
“내는 빙우라고 윤주씨랑 만나고 있는 사람입니더”
빙우? 설마 병우겠지…….
“근데 왜요?”
“아 다름이 아니라 우리 윤주 전화기가
꺼져 있네에 혹시 같이 안 있습니꺼?”
나름대로 최대한 공손하게 말하려 애쓰는 건 느낄 수 있었지만,
내겐 “윤주 바꿔! 이 년아 죽기 싫으면”하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예?.....”
내가 뭐라고 말을 못하고 있는데,
윤주가 방에서 나와서 루돌프 인형을 보면서
지연! 지연! 하며 나를 놀려댔다.
“예 같이 있어요. 바꿔 드려요?”
“내 그럴 줄 알았다. 빨리 바꿔주소”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윤주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뭐야? 누군데 그래?
내 미소에 불안해하는 윤주.
조심스레 내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의문에 차 있던 윤주의 얼굴은
이내 사색이 되더니 다시 나를 향한 분노로 바뀌었다.
그리고 분노에 찬 윤주의 외침.
“한 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