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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장 기다림의 의미
천산(天山)!
파미르 고원의 북쪽에서 일어나 신강성을 가르며 동서로 길게 누운 거대한 산맥.
수천길 높이의 산들이 첩첩이 늘어선 그 거대함은 그중 제일봉을 일러 등격리(騰格里;하늘)이라고 일컫기에 부족함이 없다.
천산의 요지(瑤池)에는 예로부터 서왕모(西王母)가 살고 있다고 하였으니, 이 산이야말로 곤륜산(崑崙山)과 더불어 신비로 점철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터이다.
먼 하늘은 쨍쨍 소리를 낼 듯 푸르고, 저 멀리 뭉클거리는 흰구름들을 뚫고 솟아오른 산봉들은 흰구름보다 더 흰 눈과 얼음으로 덮혀 선연하다.
가히 말 그대로 고봉삽운(高峰揷雲)이고 수하설령(水河雪嶺)이다.
지천으로 흐드러지던 갖가지 꽃들이 찾아든 세월의 힘에 낙화되기 시작한지 이미 오래.
저 멀리 구름 속에 솟아있는 산봉들의 모습은 언제나처럼 신비스럽다. 여전한 것은 수십 수백년을 두고 푸르른 상록교목들의 울창함.
그리고 산을 깍고 계곡을 훑으며 흐르는 빙하의 의연함 정도라고나 할까.
찬 바람이 볼을 스친다.
산 중의 바람이니 이미 세월의 흐름을 말하듯 칼날같이 날이 섰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그 바람에 흩어지자 운지봉은 머리를 쓸어넘겼다.
아득한 구름바다가 시야를 가로막는다.
흩어지는 구름 사이로 언듯언듯 실뱀처럼 이어지는 길이 보인다.
의선곡(醫仙谷)으로 이르는 길이다.
천산으로 돌아온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그렇게 보고 또 보는 길이지만 오늘도 하루해가 저물어 가지만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았다.
야속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반드시 그가 찾아줄 것이라는 기약을 한 것은 아니다.
아직도 생생했다.
---살아남는다면, 그리고 내가 생각난다면 나를 한번 찾아와주면 그것으로 족해요.---
바보같이 그를 떠나보내면서 한 말이다.
무슨 마음으로 그렇게 말을 했을까.
하루하루가 저무는 것을 보면서 후회로서 지샌 나날들이 어찌 어제 오늘이랴.
"사매! 거기서 뭘하는 거야?"
외침 하나가 그녀를 부른다.
둘째 사형인 합지(哈只)다.
곱슬한 머리에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그는 호리호리한 체구에 한없이 좋은 인간성을 가졌다. 대사형인 전상국(田相國)과는 전혀 다른 성격.
그렇다고 대사형이 나쁜 사람이란 뜻은 아니다. 그는 활발하고 과단성 있어서 의선문을 잇기에 적임자로 손꼽히는 사람이니까.
"왜요?"
"빨리와. 손이 모자라."
합지가 소리쳤다.
"손이 모자라다니? 그게 무슨 소리에요?"
합지의 곁으로 간 운지봉이 물었다.
"부상자들이 몰려들었어. 한두명이 아니야!"
"무슨 사고 났어요?"
"싸움인거 같아. 천산파(天山派) 사람들이야. 어디서 그렇게 당한건지…… 나도 소식듣고 달려가는 길이야."
운지봉의 얼굴이 굳어졌다.
천산파라면 중원에까지 이름이 알려진 이 지역 최강의 문파다. 천산검법(天山劒法)은 웅대한 천산의 기운을 표상하여 그 위력이 막강함을 자랑하여 구대문파중의 한자리를 차지하는 곤륜파(崑崙派)에 조금도 못지 않는 성세를 자랑하는 것이 바로 이 천산파이다.
그런데 그들이 당하다니……
의선이 거처하는 의선곡은 천산의 중턱에 위치한다. 천산이란 거대한 산줄기가 수천리에 걸쳐서 뻗어 있다보니 단순히 중턱이라면 이상하지만 등격리를 저 멀리 바라보는 이곳은 산의 영기(靈氣)가 모이는 곳이라 약초를 재배하고 환자를 치료하기에 좋아 선택된 천혜의 땅이다.
칼바람이 이는 겨울에도 따스한 훈풍이 이는 곳이 바로 의선곡인 까닭이다.
의선곡은 늘 조용했다.
약초를 채집하고 연단(練丹)을 하고 찾아오는 환자들을 치료해주는 정도가 전부인 곳이니 시끄러울 까닭이 없다.
천산의선이 중상을 입고 돌아온 다음, 의선곡의 일 대부분을 대제자인 새성수(賽聖手) 전상국이 맡고 있었지만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의 관행이라 하등 달라진 것이 없었다.
조약선과 함께 돌아온 그가 일체를 전상국에게 맡기고 의선거에 칩거한 것이 조금 달라진 정도일까.
전상국은 의선곡 위쪽 의선거에 은거한 천산의선을 위해서 의선곡 내부에서는 환자를 보지 않았다. 사부의 평안을 위해 찾아오는 환자를 의선곡 앞에다 임시거처를 지어 거기에 안돈시켜 치료를 했기 때문에 의선곡 내부는 늘 조용했었다.
그러나 의선곡으로 들어선 운지봉은 전과는 다른 공기를 직감할 수 있었다.
긴장이 충만하여 어딘지 숨이 막히는 느낌.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경장에 겉에 털옷을 입은 낯선 무인들이 이곳저곳에서 굳은 표정으로 눈을 빛내고 있음이 보였다.
『이 사람들은?』
『천산파의 고수들이라는군』
운지봉이 미간을 찡그렸다.
『천산파…? 그들이 왜 여기서 주인처럼 사방에 늘어서 있는 건가요?』
『죄송하오. 강적이 뒤쫓아 올 가능성이 있어서…』
깍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텁수룩한 모습의 30대 청년 한사람이 그녀의 앞에서 포권해 보이고 있었다. 등에는 보검 한자루를 메고 당당한 체구다. 눈이 빛나고 구레나룻이 무성하여 일견하기에 용맹함이 절로 느껴졌다.
『용대협(龍大俠)…』
운지봉이 그를 발견하자 나직이 중얼거렸다.
천산일룡(天山一龍) 용천주(龍天柱).
천산파의 다음대 장문으로 손꼽히는 걸출한 사람. 그는 나이 스물에 이미 천산파의 진산절예인 천산검법의 진수(眞髓)를 터득했다고 전해지는, 천산 일대에서는 전설과도 같은 인물이다.
운지봉은 의선거를 찾는 그를 몇번 본 적이 있었다.
그는 곰과 같은 기도에 호랑이와 같은 용맹함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그의 주위에는 언제나 그를 따르는 고수들이 있어 천산파의 장문제자(掌門弟子)의 위의(威儀)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전신 여기저기에는 핏자국이 낭자하여 그가 치열한 악전고투 끝에 이곳에 당도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요?』
운지봉의 물음에 천산일룡 용천주는 굳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한마디로 하기 어렵소. 갑자기 이렇게 찾아들어 폐를 끼치게 되었으니 죄송하기 이를데 없구려. 들어가시지요, 의선께서 기다리고 계시오』
천산일룡 용천주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았다.
그의 얼굴에 서린 비분강개한 빛을 운지봉은 읽을 수 있었다.
더 이상 묻는 것은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닐 듯 싶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제세당(濟世堂)으로 들어갔다. 제세당은 의선곡에서 가장 큰 대전으로 큰 일이 있을 때에만 사용하는 곳이다.
하지만 지금 거기에 있는 것은 침상에 누운 환자들 다섯.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
그러나 그들의 얼굴은 납덩이와 같았다. 대사형 전상국뿐만 아니라, 거의 출입을 하지 않는 천산의선까지 내려와 있었다.
『할아버지…』
그녀가 들어섬을 보자 천산의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그녀와 같이 들어서는 천산일룡 용천주를 향해 물었다.
『밖은 어떻소?』
『적의 종적은 보이지 않는 듯합니다만… 어떻습니까?』
『아직 명확하지 않소. 장문인은 가공할 심령술에 정신을 잃어버린 듯한데, 나머지 사람들도 마찬가지요』
『제정신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쉽지 않을 것 같소』
천산의선의 대답에 천산일룡의 안색이 굳어졌다.
『의선께서 직접 손을 쓰셔도 불가능이란 말입니까?』
그때였다.
『네 이놈! 네놈이 감히 외인과 결탁하여 천산파를 팔아넘기려 하다니, 역대조사 영령에 부끄럽지 않으냐? 네 이노옴!』
야수와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그들의 가운데 누운 다섯명 중 백설 같은 수염의 노인이 발버둥을 치면서 소리치고 있었다.
노인이 셋이고 중년인이 두사람인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지금 소리치는 저 노인은 그녀도 아는 사람이었다.
천산파의 장문인인 천산신검(天山神劒) 운중악(雲中岳)이 그다.
그는 거칠게 숨을 헐떡이고 있는데, 전신이 피투성이에다가 팔과 다리까지 포승으로 결박되어 있었고 눈은 찢어질 듯 부릅뜨고 있는 상태였다.
『맙소사! 훈혈(暈穴)을 두군데나 점했는데도 다시 깨어나다니…』
새성수 전상국이 입을 벌렸다.
『무례를 용서하시게』
천산의선이 머리를 저으며 손을 쓰자 미친 듯 전신을 떨면서 입에서 거품까지 게워내던 천산신검 운중악이 머리를 떨어뜨리고는 혼돈상태로 들어갔다.
천산의선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처럼 용맹하던 친구가 이 모양이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것인지 설명을 들어봅시다』
『그게…』
천산일룡이 이를 악물었다.
일이 일어난 것은 한달 전이다.
외출에서 돌아온 천산신검 운중악의 태도가 어딘지 이상한 것을 제자들이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때부터 외인이 빈번히 출입하더니, 종내에는 멀쩡한 천산검파를 이끌고 생전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곳과 손을 잡아 중원으로 진출하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세력을 넓히는 것은 무조건 반대할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그 조건은 다른 사람들을 아연실색케 하기에 족했다.
천산파를 그 이름 모를 방파의 천산분타(天山分陀)로 둔다니….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천산파의 간판을 내린다는 소리가 아닌가.
대사형의 그러한 결정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은 천산일룡 용천주였다.
제자들이 그를 따름은 당연한 일이었다.
참극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천산파의 장문인 운중악이 반대하는 제자들을 모조리 도륙해버린 것이다. 천산일룡조차도 하마터면 죽음을 당할 뻔했다.
대반격.
천산일룡 용천주의 무공은 천산파 제일이라고 알려진 것이라 그가 나서자 상황은 수습되는 듯했다. 하지만 어디선지 괴인들이 나타나 천산신검에게 가세하자 그때부터 상황은 급전직하.
일대 참극이 일어났다. 동문(同門)이 동문을 죽이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 와중에 천산일룡은 장문인이자 대사형인 천산신검을 제압하여 살아남은 제자들과 함께 그들의 기업인 천산파를 떠나 이곳으로 도주해온 길이었다.
그것은 가히 혈로(血路)였다.
『대체 그들이 누굽니까?』
새성수 전상국이 듣다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광명회라고 합니다』
『광명회?』
『아는 곳이냐?』
천산의선이 물었다.
『잘은 모릅니다. 하지만 근자에 중원에서 크게 힘을 떨치고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이 새외(塞外)에까지 힘을 뻗고 있을 줄은…』
제자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천산의선은 침중히 입을 열었다.
『그들에 대해서 좀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소』
『어떤 의미로…』
『노부가 제대로 본 것이라면, 장문인은 전설중에 있는 마법에 의해서 이미 혼백을 앗긴 상태요.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지. 살아있되, 살아있는 것이 아닌 꼭두각시요』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그러니 마법이지』
천산의선이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건 이미 영원히 세상에 나타날 수 없도록 금제된 것으로 아는데…』
밤하늘은 맑고도 차다.
시야를 가릴 것 없는 산중이다.
그것도 하늘을 향해 거대하게 전신을 들이밀고 있는 천산의 산자락. 밤하늘의 별들은 그야말로 찬란한 보석과 같이 빛나고 있었다.
아연 긴장하여 돌아가던 의선곡 내부도 이젠 어느 정도 고요를 되찾고 있는 듯 했다.
운지봉은 의선거에서 빠져나와 길게 숨을 들이키면서 눈아래로 보이는 의선곡을 바라보았다. 의선곡 안쪽에 위치한 의선거는 지대가 높아 의선곡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천산 일대에서 천산파는 유서깊은 명문이다.
자연히 의선문과는 왕래가 있었고 천산파의 당대 장문(掌門)인 천산신검 운중악과는 교분이 있는 처지. 그는 천산의선의 거처인 의선거로 옮겨졌다.
밤이 될 때까지 천산의선은 천산신검등을 돌보았고 대제자인 새성수 전상국은 부상당한 천산파의 제자들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운지봉도 그 바람에 저녁조차 먹지 못했다.
밤이 되자 한숨 돌릴 기회를 얻어 겨우 밖으로 나온 그녀였다. 천산의선은 의선거에 틀어박혀서 천산신검의 상태를 돌보고 있는데, 안색이 침중해서 조약선조차도 말을 붙이지 못할 정도였다.
이런 날은 막내인 그녀가 사람들의 식사를 챙겨야 한다. 사부의 손녀라고 해서 받는 특혜 따위는 없었고, 그런걸 원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찬바람이 휘몰기 시작하면 다시 한해가 저물고 있음을 실감케 되니, 아무것도 하지않고 있으면 멍하니 산 저쪽을 바라보게 됨이 싫어서 갖가지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그녀이기도 했다.
의선거의 뒤쪽에서 눈덮힌 바위에 기대 잠시 숨을 돌린 그녀는 문득 의선거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자작나무의 숲속 바위에 검은그림자 하나가 우뚝 서 있음을 발견하고 놀라 입을 막았다.
『나요, 운고랑(雲姑娘).』
그림자가 굵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니, 여기서 뭘하는거죠?』
그를 확인한 운지봉이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앞에 선 사람은 천산일룡 용천주였다.
『놈들이 혹시 쫓아올까 해서……』
그가 바위처럼 서 있는 곳은 의선곡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요지였다.
『그럼 계속 여기에 있었던 건가요?』
운지봉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한순간의 방심이 자칫 천추의 한을 부를 수 있는 법이라…… 한번 당한 것으로 되었지, 또 다시 놈들에게 당할 수야 없지 않겠소?』
그는 침중히 중얼거렸다.
그의 되물음은 어쩌면 운지봉에게 한 말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처럼 보였다. 그도 그것을 느낀 듯 구렛나루가 덥수룩한 얼굴에 어색한 빛을 떠올리곤 머리를 긁적였다.
『폐를 끼쳐서 미안하오. 이런 일로 이곳을 찾고 싶지는 않았었는데…… 어쩔 수가 없었소.』
용맹스럽기가 범과 같다는 천산일룡 용천주였다. 하지만 그는 운지봉의 앞에만 서면 늘 소년처럼 어색해했다.
『말도 안돼…… 그 상처로 여기에 밤새 서 있을 작정이었단 말인가요?』
천산일룡 용천주는 쓰게 웃었다.
『이까짓 상처나부랭이가 무슨 상관이겠소?』
문득 그는 발을 굴렀다.
그의 발아래에서 일진의 울림이 일며 돌가루가 튀었다.
『역대조사의 숨결이 숨쉬는 본산(本山)을 내버리고 살자고 도주한 마당에 이까짓 상처…… 천산은 내 집! 이 신성한 곳을 침범하는 자는 용서할 수 없소. 이 용천주의 숨이 붙어있는 한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주고야 말겠소.』
그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불끈 움켜쥔 주먹은 거악(巨嶽)이라도 부숴뜨릴 듯 했다. 운지봉의 앞에만 서면 늘 수줍은 소년과 같던 그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
운지봉은 묘한 눈길로 그를 보았다.
천산일룡이라는 이름은 익히 들었으되, 그녀의 앞에 서면 시선을 어디다 둘지 모르던 그였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올 초봄부터 알게 된 그가 과연 천산파 제일의 고수인지조차 실감이 나지 않았었다. 그때 의선거 뒷편의 어둠 속에서 그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눈이 있음은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 눈은 자애스러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눈의 임자는 운지봉의 외할머니였으니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조약선은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물러났다.
두 사람이 알게 된 것은 올 초봄이다.
천산 중턱에서의 초봄이란 것은 새싹이 움트고 샘물에 온기가 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계곡을 깎으며 굼실굼실 흐르는 빙하(氷河)의 흐름은 변함없이 도도하고 적설(積雪)을 흩날리는 바람은 여전히 날세운 칼날과도 같다.
그런 곳에서 운지봉은 실족하여 위기에 처했었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사람이 바로 사냥을 나왔던 천산일룡 용천주였다.
나이 서른이라고는 하지만 그 세월을 오직 무공연마에 바쳤던 그는 여자를 대할 시간이 별로 없었고, 천산일대의 토착 원주민 여인들이 눈에 차지 않았었다. 하지만 다리를 다친 운지봉을 안아 들고서 의선거로 향하면서 그는 그녀에게서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었다.
그러나 왕승고를 잊지 못하는 운지봉은 그에게 마음을 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다시 겨울이 찾아왔다.
가끔 사냥을 나왔다면서 곰도 잡아오고 사슴도 잡아오는 그는 늘 당당하고 의선곡에서 반기는 손님이 되어 있었다.
그런 그가 피투성이가 되어 칠팔십명이나 되는 부상자들을 이끌고 나타난 것은 족히 의선거를 놀라게 하고도 남음이 있는 일이었다.
조약선이 두 사람을 보다가 사라진 것을 알지 못했던 두 사람은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말도 안돼요. 어디 봐요!』
운지봉은 머리를 흔들면서 천산일룡 용천주를 잡아끌었다. 그의 상처는 대소 십여군데나 되어 덧나지 않게 잘 돌봐야 했다. 그런데 그가 고집을 부리며 버티는 것이다.
『글쎄, 그게 괜찮다는…!』
그녀가 무력을 사용하자, 난감해진 용천주는 당황해 붉어진 얼굴로 말을 하다가 갑자기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으며 그녀를 덮쳤다.
『무슨 짓!』
놀란 그녀가 고함을 치고자 했지만 그 크고 두꺼운 손으로 입을 막혔으니, 코까지 막힌 마당에 말이 나올 리가 없다. 귀로 숨이 뿜어져 나올 판이었다.
게다가 그 육중한 몸으로 자신을 끌어안았으니 숨이 막히는 것은 당연했다.
「소리내지 마시오! 누가 있소!」
그러한 그녀의 귓전에 용천주의 전음지성이 다급히 들려왔다.
그럴 리는 없을텐데 그가 갑자기 자신을 덮치자 혼비백산했던 운지봉은 그의 음성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숨을 멈추었다.
그녀의 기색을 본 천산일룡 용천주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내리고는 입에다 손가락을 대고 머리를 저어보였다.
그 부리부리한 눈에는 긴장이 흐른다.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운지봉도 그의 눈길을 따라 그것을 발견했다.
하나가 아니었다.
소리도 없는 움직임으로 검은 그림자들이 의선거의 뒤쪽 절벽으로 이어진 자작나무의 숲으로 올라오고 있는 중이었다.
무림중에 이름은 알려져 있되, 실제로 세상과 별로 접촉이 없는 곳이 의선거이고 또한 무림중의 누구도 굳이 건드리고자 하지 않는 곳이 바로 의선거다.
천산의선의 이름이 드높은 것도 이유중 하나이지만 실제로 건드려서 이득볼 것이 없고 도검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무림인의 속성상, 누구라도 천산의선의 신세를 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하였다.
적이 없는 곳은 늘 평화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 곳에서 저런 움직임을 보이는 자들이라면 답은 하나 뿐일터이다.
천산파를 쫓아온 자들.
「가서 적이 왔다고 전하시오!」
천산일룡은 그녀에게 전음으로 소리침과 동시에 그 자리를 벗어나 검은 그림자를 향해서 덮쳐갔다. 어둠 속에서 대붕(大鵬)이 날아가는 것 같았다.
동시에 흰빛이 서리처럼 일며 그의 앞에서 비명이 일었다. 그가 검을 뽑아든 것이다.
의선곡은 거대한 빙봉이 둘러싸고 있어서 찬바람을 막아준다.
그러나 의선거는 그 의선곡의 끝에 위치하여 산자락으로 올라와 있다. 굳이 말하자면 계곡의 끝을 벗어나 있다는 의미다.
그 뒤는 깎아지른 절벽이다.
그럼에도 그곳으로 올라오는 자들이라면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보아 무방하리라.
천산일룡은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전력을 기울여 용혈(龍血)이라 이름한 자신의 보검을 휘둘렀다. 천산검은 웅장하기로 이름높다. 그것은 시전자의 공력이 웅혼(雄渾)해야 한다는 의미다.
거기에 곁들인 것은 천금신법(天禽身法).
곤륜파의 운룡대팔식과 유사한 것으로서 천산의 새들을 보며 창안해낸 이 신법은 설원(雪原)을 가로지르는 비조와 같이 날렵함이 특징이다.
강력하고도 빠르다는 것은 막강한 파괴력을 의미한다.
하지만 빠르다는 것은 경쾌(輕快), 가볍다라고 하는 말이 늘 따라붙는 법이다. 그것을 무거움 속에서 구현한다는 것은 늘 쉽지 않기에 천산파의 절기는 그 뛰어남을 세상에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었다. 그것을 완성한 사람이 바로 천산일룡 용천주였다.
『크악!』
막 절벽을 올라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던 회의인 하나가 피를 뿌리며 거꾸러졌다.
일검으로 그를 베어버린 용천주가 다시 검을 몰아 그 뒤에 있는 회의인을 공격해갔다.
동료의 죽음을 보고 놀란 회의인은 이미 준비를 하고서 용천주의 공격을 거치도(鉅齒刀)를 들어 막았다.
쨍!
날카로운 금속성이 터지면서 비명이 뒤를 이었다.
『으악…』
검을 막던 거치도가 두동강이 났다.
그리고 용천주의 보검은 거치도와 함께 그를 머리에서부터 두조각을 내고 말았다.
가히 신위(神威)라 불릴만한 검세.
미처 검을 추스리기 전에 순간적으로 용천주는 좌우에서 경풍이 습래(襲來)해옴을 경각했다.
보통이라면 황급히 착지하면서 몸을 돌리고 검을 쓸어내어 방비를 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세찬 바람이 이는 가운데 그의 신형은 회의인을 죽이는 서슬을 그대로 이어서 오히려 허공으로 떠올랐다. 절정의 천금신법이었다.
그가 훌쩍 하늘로 떠오르자 좌우에서 그를 덮쳤던 자들의 공세는 모조리 허탕을 치고 말았다.
그를 공격한 세명의 눈에 놀람의 빛이 드러났다.
그들을 향해서 용천주의 검이 하늘로부터 회오리바람을 몰고서 쏟아져 내렸다. 살기가 이글거리는 검세였다.
왕모수휘(王母手揮)의 일초가 검풍을 일으켰고 뒤이어 천산굉도(天山轟倒)가 뒤를 이었다.
쨍! 쨍…
날카로운 음향과 더불어 비명이 뒤를 이었다.
하나가 피를 쏟아내며 거꾸러졌고 다른 하나는 옆구리가 갈라진 채로 뒤로 물러났다.
하늘에서 떨어지던 용천주는 그 형세를 조금도 멈추지 않고서 몸을 비틀어 옆으로 날았다. 상식을 초월한 그 신법은 천금신법 중에서 가장 연성하기 힘들다는 천금비류(天禽飛流)였다.
그렇게 되자 그를 공격했던 마지막 회의인의 검 또한 허탕을 치고 말았고 그가 검세를 바꾸려 했을 때에는 이미 그의 면전으로 용천주의 검세가 날아들고 있었다.
『으악!』
외마디 비명.
머리가 갈라지면서 터져나온 비명이 제대로 날 리가 없다. 헛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일 뿐.
『크으으…』
용천주의 눈을 마주한 마지막 회의인이 신음을 흘리며 주춤 물러나는 듯하더니 괴성을 지르면서 그를 덮쳐왔다. 중상을 입었음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흥! 너를 살려둔 것이 힘이 모자라서였다고 생각한다면 천만의 말씀이다!』
용천주는 코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눈을 부릅뜨면서 일장을 때려내자 그 일장에 격중된 회의인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거꾸러졌다.
『괜찮아요?』
다급한 물음이 들려왔다. 운지봉이었다.
『괜찮소.』
마지막 회의인을 쓰러뜨린 용천주는 길게 숨을 내쉬면서 신형을 바로잡았다.
『괜찮기는! 피가 터져나오는데요?』
운지봉이 곁으로 다가오면서 놀란 음성으로 말했다.
겨우 멎었던 피가 옷밖으로 다시 스며나오고 있었다. 간신히 응급처치를 해두었던 상처가 터져서 피가 흘러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다섯 명의 회의인을 처리한 것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어디 좀 봐요.』
운지봉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위험하오!』
운지봉이 그의 옷에다 손을 대는 순간 용천주는 고함치면서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으면서 수중의 검을 앞으로 쳐냈다.
쨍그렁!
검기가 돌풍처럼 이는 가운데 금속성과 함께 불똥이 튀었다.
운지봉의 뒤에서 그녀를 습격해온 것은 또 다른 회의인이었고 그는 용천주가 자신의 오구검(吳鉤劒)을 막아내자 괴성과 함께 이내 손을 들어 암기를 쳐냈다.
운지봉을 안은 채 그 일격을 막아낸 용천주는 그것을 보고는 안색이 변해 땅바닥으로 몸을 날려 굴렀다.
파파파--- 방금까지 운지봉과 용천주가 있던 자리에서 섬뜩한 소리가 일었다. 은빛 침이 비오듯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방원 이삼 장여를 뒤덮는 무서운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멈춰랏!』
날카로운 고함.
회의인은 맹렬한 경풍이 뒤에서 엄습해옴을 느끼자 왼발을 축으로 하여 신형을 돌리면서 수중의 오구검을 휘둘러 그것을 막아냈다.
쨍!
날카로운 음향.
회의인을 공격했던 조약선은 무정옥소를 쥔 손이 쩌르르 저려옴을 느끼고는 안색이 대변했다. 상대가 이렇듯 강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다급히 뛰쳐들어온 운지봉의 외침에 놀라 튀어나왔고 그 순간에 쾌도난마와 같은 검세로 회의인들을 쓰러뜨리는 용천주를 보았었다. 그러니, 그들의 수준을 그렇게 높게 보지 않았을 밖에. 한데 자신이 먼저 공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겨우 한걸음 밖에 물러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흥!』
놀랍고 자존심이 상한 그녀는 냉소를 터뜨리면서 손을 휘둘러 음마단혼침을 쓸어냈다.
그녀가 비록 의선거에 들어 전과는 다른 생활을 하고 있긴 하지만 일단 손을 쓰자 지난날의 그 독랄(毒辣)한 손속은 여전했다. 상대가 방비할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파팟!
음마단혼침은 여지없이 회의인의 가슴팍으로 파고들고 말았다.
비명, 그리고 나가떨어지는 회의인.
그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그 회의인은 음마단혼침을 맞자 주춤하곤 오히려 괴성을 지르며 벼락과 같이 오구검을 휘두르면서 그녀를 향해 덮쳐왔다. 마치 누가 등이라도 떠밀어내는듯한 광경이었고 꼬리에 불 붙은 황소와 같은 기세다.
쨍쨍!
맹렬한 음향이 일었다.
고수는 상대와 아주 다급하거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무기를 부딪히는 법이 별로 없다. 무기가 상대에게 부딪기 전에 초식을 변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조약선은 더욱 놀라야 했다.
상대의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뒤로 밀려야 하는데 놀랍게도 상대는 음마단혼침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것처럼 점점 더 무서워지고 있는 것 같았던 까닭이다.
바로 그 순간이다.
『물러나라!』
천둥 같은 고함이 터지면서 산악이 붕괴하는 듯 막강한 검세가 회의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조약선은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보았다.
날개를 단 호랑이와 같이 용천주가 그 회의인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처럼 무섭게 설치던 회의인이 용천주에게는 쩔쩔매고 있었다. 암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는 암기를 사용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연신 뒤로 물러나다가 용천주의 검에 가슴을 찔려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은 불과 삼초가 지나지 않아서이니 거의 찰나간에 벌어진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음』
그를 쓰러뜨린 용천주가 이맛살을 찡그렸다.
옷속에서 피가 스며나오고 있음을 역력히 알아볼 수 있었다.
『치료를 해야겠어요』
운지봉이 말했다.
『운고랑은 안으로 들어가 의선 어르신과 다른 분들을 보살펴주시오. 부탁합니다. 이곳을 맡아주십시오』
용천주는 조약선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걱정마시오. 그런데 상처는…』
『이까짓 상처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적들이 뒤쫓아 왔다면 의선곡에 폐가 될 터이니…』
그는 이를 악물고서 머리를 흔들더니 이내 땅을 박차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가 나는 새와 같이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서 의선곡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고 조약선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천산일룡이 천산의 진전(眞傳)을 이은 유일한 고수라고 하더니 정말 눈으로 보지 않았더라면 믿지 못할 신위(神威)로군. 저 나이에…』
『치료를 하면서 들었는데, 용대협의 힘이 아니었다면 천산파의 사람들은 이곳까지 올 수가 없었을 거라고 하더군요』
『장강의 앞물결이 뒷물결에 밀려난다는 것이 진리하긴 하지만 정말 대단한 청년이다. 강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으니,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 과연 세상은 넓구나, 이 할미는 곽공자만한 사람이 다시 없을 줄 알았더니…』
『할머니, 저들은…』
운지봉이 입을 열어 말머리를 돌렸다.
마치 폭풍우가 달려들어 쓸어버린듯 주변에 쓰러진 회의인들은 모두 피바다에 쓰러져 있었다.
그들은 용천주가 전력을 기울여 상대하였기에 모두 즉사를 했다. 하지만 그중 하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녀의 내심을 알아차린 조약선은 암중에 혀를 차면서 몸을 날려 중상을 입고서 꿈틀거리고 있는 그 회의인의 혈도를 제압하고는 신법을 전개하여 의선거 주위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의선거에는 천산파의 장문인과 장로들이 의식이 혼미한 채로 있었으며, 그들을 돌보고 있는 천산의선은 전과는 달리 무공의 대부분을 산실(散失)한 상태인 까닭이다.
운지봉은 긴장된 표정으로 의선거의 앞에서 의선곡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쪽 절벽으로 저들이 올라왔다면, 의선거도 필경 무사하지 못할 것이 분명할 터이기에.
하지만 어둠에 잠긴 의선곡 쪽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산속은 급격히 어두워진다.
그러나 천산의 어둠은 조금 다르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은 산자락에는 일년 사시사철 녹지 않는 눈이 쌓여 있어 달이 밝은 날이면 달빛이 눈에 반사되어 사물을 분간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천산일룡이 다시 의선거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반시진(한시간) 정도가 지난 다음이었다.
『괜찮은가요?』
『그런 것 같소. 주변을 수색하고 본문의 고수들로 주변을 경계하도록 했는데, 적의 종적은 더 이상 발견하지 못했소…』
『그럼 먼저 치료부터 받도록 하세요. 계속해서 무리를 해서 상처가 덧나면…』
그때였다.
『봉아, 용대협과 함께 같이 들어오도록 해라』
의선거 쪽에서 천산의선의 음성이 들려왔다.
산자락에 의거하여 자리한 의선거는 겉보기는 별로 크지 않다. 하지만 그 내부는 산복(山腹)을 파고들어가 보기보다 의외로 제법 넓었다. 그곳이 약을 보관하고, 약을 만들기[練丹]에 적합한 곳이기에 천산의선이 다년간 힘을 기울인 결과다.
불빛 아래, 천산의선은 혼수상태에 빠져있는 천산신검 일행을 뉘어놓은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렁이는 불빛 아래, 잠자듯 누운 천산신검의 얼굴은 마치 시체처럼 창백했다. 그의 전신은 거의 벌거숭이였고, 국부 부분만 천으로 살짝 가려놓은 상태였는데 전신에는 거의 빈틈이 없다시피 금침이 온통 꽂혀 있었다.
그의 옆으로는 자리가 깔려있고 거기에는 역시 정신이 혼미한 천산파의 장로와 고수 네명이 누워 있음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누운 한 사람은 용천주에게 제압당한 회의인이었다. 그는 이미 회색복면을 벗긴 상태였는데, 의외에도 얼굴 모습이 청수한 편이었다.
『이 자도 반쯤은 제정신이 아니었네』
천산의선은 운지봉과 용천주가 와서 자리를 잡는걸 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이 자도?』
『그런 것 같네. 그 마법에 혼백을 앗긴 것으로 보여… 믿기 힘든 일이야. 밀종(密宗)의 마역(魔域)은 다시는 나타날 수 없다고 들었는데』
천산의선은 침중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정말 장문사형 등이 모두 그 밀종마법에 당한 겁니까?』
『내가 보기론 그렇네』
『그렇다면 광명회라는 자들이, 밀종과 관계가 있다는 걸까…』
용천주가 나직이 신음했다.
『그게 대체 뭐기에 그렇게 무서운 거죠?』
참다 못해서 운지봉이 입을 열었다.
그녀가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밀종이란 불교의 한 유파(類派)다. 라마교 등이 그곳에서 갈라져 나왔고 서장(西藏) 일대의 많은 불교가 그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밀교(密敎)라고 불리는 것이 그것이고 그것은 전혀 겁나는 것이 아니었다.
『전혀 손을 쓸 방법이 없습니까?』
용천주의 물음에 희미한 웃음이 천산의선의 얼굴에 떠올랐다.
『전혀 손을 못댄다면 나의 지난 세월 배움은 너무 허망한 것이 되겠지. 하지만 내 본신의 진력이 전과 같지 않아 성라금침술을 제대로 베풀지 못해서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하겠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을걸세』
용천주의 눈에서 빛이 일었다.
『그럼 장문사형께서 정신을 차릴 수 있습니까?』
『필요하면 지금이라도』
『지금 말씀입니까?』
『그렇네. 하지만 오래 제정신을 유지하지는 못할테니, 묻고 싶은 것만 물어보게. 일단 정신을 차리고 나면 천천히 회복시킬 수가 있을걸세』
말과 함께 천산의선은 조약선에게 눈짓을 했다.
조약선이 손을 쳐들자 옆에 있던 두어치나 되어 보이는 금침이 허공으로 떠올라 천산파의 장문인 천산신검 운중악의 뇌호(腦戶)에 깊숙이 꽂혔다.
『크흑!』
짐승이 헛바람을 토해내는 듯한 소리가 운중악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전신을 마치 벼락을 맞은듯 부르르 떤 그는 잠시 후에 신음을 흘리면서 눈을 떴다.
『장문사형!』
그가 눈을 뜨는 것을 보자 용천주가 소리쳤다.
『너는…』
『천주입니다. 장문사형!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
물끄럼히 그를 바라보던 운중악의 얼굴이 괴이하게 변했다.
『여긴 어디냐? 내가 왜 여기에…』
몸을 일으키려던 그는 자신이 전혀 움직일 수 없음을 알고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게 무슨 짓이냐?』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여기는 천산의선이 계시는 의선거입니다』
『나를 알아보겠나?』
천산의선을 본 운중악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이게 무슨 일인가?』
그는 용천주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네가 말해보아라. 너의 상처며 나의 이 몰골…』
그의 안색이 갑자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서, 설마… 내가 그런 것은? 칠사제(七師弟)와 구사제(九師弟)는 어디 있느냐?』
뭔가가 떠오른 듯 운중악이 떨리는 음성으로 소리쳤다.
『말해!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
천산파의 장문인 천산신검 운중악이 전신을 떨면서 고함쳤다.
눈에는 핏발이 섰다.
이마에서도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장문사형…』
용천주는 신음했다.
그가 말한 칠사제와 구사제는 바로 천산신검의 손에 죽어간 그의 사제들이었다.
용천주보다 더 젊은 그들은 혈기를 참지 못하고 천산신검의 잘못된 처사에 대들었다가 그의 손에 피를 뿌렸다.
『서, 설마? 그들이 정말… 아니다. 그럴 린? 말해봐라. 어떻게 된 것인지. 그들은 어디 있느냐?』
천산신검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면서 용천주를 바라보았다.
점점 기억이 되살아나지만 그는 차마 그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잠시 진정하십시오. 지금 장문사형께서는…』
『나를, 나를 어떻게 한거냐? 빨리! 어서 나를 풀지 못하겠느냐? 천주! 네가 감히 나를 이렇게 묶어 놓을 수가 있단 말이냐?』
갑자기 천산신검 운중악이 악을 썼다.
온건하고 늘 침착하던 그답지 않았다.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그런다고 그가 움직일 수는 없었다.
『명령이다! 장문인으로서 너에게 명령하겠다! 어서 나를 풀어라. 풀지 못하겠느냐?』
천산의선은 마치 잡아놓은 생선과도 같이 푸들푸들 전신을 떨면서 소리치는 천산신검 운중악의 가슴에 손을 올려놓았다.
『나, 나를…』
안간힘을 쓰던 운중악이 천천히 늘어졌다.
『아직 정상이 아니야. 흥분하자 다시 금제(禁制)가 발작을 하려고 했네』
천산의선이 침중히 말했다.
『장문사형께선…』
『정신적으로 충격을 많이 받았지만, 한번 정신을 차린 이상 회복은 별로 어렵지 않을걸세. 시술자가 그리 높은 공력을 가진 사람이 아닌 게 다행이야. 만약 절고(絶高)한 공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정신을 차리는 것은 물론이고 회복시키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을거네』
천산의선은 문득 안색을 굳혔다.
『밖은 어떤가?』
『괴이하게 이 자들을 제외하곤, 더 이상 침입한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사방을 수색했지만… 본파의 제자들에게 사력을 다해 곡을 보호하도록 지시하고 왔습니다만 다시 나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천산의선은 운지봉을 향해 입을 열었다.
『봉아, 가서 네 사형에게 수곡대진(守谷大陣)을 발동시키도록 전하거라』
『수곡대진을? 알겠어요』
『저도 같이 다녀오겠습니다』
『자네는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용천주가 나서자 천산의선이 말했다.
『적이 언제 침입할지 모르는데 그렇게 한가하게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영손녀이신 운고랑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다녀오겠습니다』
『그것도 좋겠지, 그렇게 하게』
천산의선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나가는 것을 보고 있던 조약선은 문득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보면 볼수록 보기드믄 젊은이로군요』
『그 친구의 뒤에 나타났다는 것이 저 친구로서는 재수가 없었다고 해야겠지』
천산의선이 말을 받았다.
『그렇죠. 첫 남자라는 것은 여자에게 큰 의미이니까…』
중얼거리던 조약선이 문득 코웃음을 쳤다.
『그 의미를 남자들이 알지 못하는게 문제지만』
이 마당에 이르면 천산의선은 입을 다물고 눈도 위로 뜨지 않는다.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천산신검 등을 돌보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보면 흡사 어린아이와 같아, 조약선은 문득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새성수 전상국이 사람들을 지휘하여 진세를 발동시키는 것을 보고 있던 천산일룡 용천주는 거대한 안개의 소용돌이가 일어나 의선곡을 가리는 것을 보고 놀라 입을 벌렸다.
『여기에 이런 진세가 있을 줄은…』
『치료를 위해서 오는 사람들의 뒤를 쫓는 사람들이 가끔 있죠. 그들은 목적달성을 위해서 무슨 짓이든지 하는 경우가 있어서 치료가 끝날 때까지 곡을 폐쇄하기 위해서 만든 진세예요. 듣건대 전대(前代)의 기인이 의선곡을 위해서 만들어준 거라 당금 천하에서는 이 수곡대진을 깨뜨릴 사람이 거의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운지봉이 장황하게 설명을 했다.
『……』
용천주는 멀뚱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본 그녀는 늘 우수에 찬 모습으로 저 산너머를 바라보는 묘한 느낌의 여인이었다.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말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긴 그가 지난날의 그녀가 얼마나 수다스러웠는지를 어찌 알 것인가. 그처럼 쾌활했던 산아가씨를 사랑이란 이름의 괴물이 그렇게 변모시켰음은 더더욱.
『뭘 그렇게 봐요?』
그가 홀린 듯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음을 깨닫자 운지봉은 갑자기 어색해져서 소리쳤다. 이렇게 되면 용천주는 어쩔 줄을 몰라서 더듬거리는 것이 순서다. 하지만 오늘의 그는 달랐다.
『전과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해서… 결례가 되었다면 용서하시오. 전의 그 모습보다는 지금의 그 활달한 모습이 운고랑에게는 잘 어울리는 듯 싶소』
부리부리한 눈길로 운지봉을 직시하면서 말한 그는 진세를 발동하고 돌아오고 있는 새성수 전상국에게로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그런…」
운지봉은 자신에게 등을 보인 채 걸어가고 있는 용천주의 넓은 등을 쳐다보면서 문득 말을 잊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사람들과 수다를 떨면서 대화를 나눈 것이 언제인지 기억에 없다. 천산에 돌아온 다음에 그녀가 하기 시작한 일은 중원에서 오는 길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하루하루가 좌절인 그 일.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어쩌면 내일도 기대로 시작해서 해가 넘어감을 보면서 실망으로 무거워진 발길로 돌아와야만 했던 그날들이 하루하루 더해가면서 그녀는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빈껍데기만 남았었는지도 몰랐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녀는 용천주의 뒤를 따랐다.
『맙소사… 이런 상처를 입고도 치료가 필요 없다는 건가요?』
운지봉은 자신의 앞에 상반신을 드러낸 용천주를 보고 입을 딱 벌렸다.
돌로 깎아만든 석실, 촛불 아래 드러난 털로 수북이 뒤덮인 그의 상반신에는 대소 수십여개의 상처가 입을 벌리고 있고 그중 어깨와 가슴, 옆구리의 상처는 상당히 깊어서 보통사람이라면 이미 몸져 누워 꼼짝도 못할 중상이었다.
옷도 이미 피에 절어 혈의(血衣).
그녀의 손에 몸을 맡기고 앉아 있는 용천주는 그녀의 놀람에 희미하게 웃음지었다.
『수련을 하기 위해서 홀로 산으로 들어갔을 때가 12살 때였소. 곰을 만나 뼈가 드러나는 상처를 입기도 하고 용을 만나서 사경을 헤맨 적도 있었소』
『용이오? 정말 용을 봤단 말인가요?』
『날아다니는 용이 아니고 산(山)사람들이 말하는 설룡(雪龍)이었소. 머리에서 꼬리까지가 십장 가량이나 되는 엄청난 놈이었는데, 놈을 잡느라 죽을 뻔 했었소』
문득 그는 피식 웃었다.
『그것에 비하면 이건 상처도 아니오』
『그래서 아프지도 않나요?』
운지봉은 짐짓 그의 상처를 누르면서 말했다.
쓴 웃음이 용천주의 얼굴에 스쳐 지났다.
『살아있다면 아픔을 느끼지 않을 리 없지, 하지만 그 정도의 아픔을 아픔으로 느끼지 않을 수련을 쌓기 위해서 나는 산으로 들어가 십년을 보냈었소』
문득 운지봉은 그의 얼굴이 바위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딘가 모르게 그의 분위기는 왕승고와 비슷했다. 왕승고는 고요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산악과 같이 당당하였다. 무엇이 같은지는 모르겠으되, 이 사람도 다른 사람과는 어딘가 다른 사람임에는 분명한 듯했다. 그녀는 언제인지 모르게 왕승고와 그를 비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소스라쳐 놀라 손을 놀려 그의 상처를 돌보았다.
그날 밤부터 눈보라가 크게 일었다.
그 때문인지 진세가 발동한 것 때문인지는 모르되, 그 다음에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긴장된 가운데, 그런대로 조용한 하루하루가 그렇게 흘러갔다.
피에 절어 실려왔던 천산파의 제자들은 하나하나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되살려가고 있었다. 그들이 밖으로 나돌아다니기 시작하자 의선곡은 흡사 천산파의 새로운 거처라도 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숫자가 의선거에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많았던 까닭이다.
날씨는 더욱 매서워지고 눈보라 또한 그치지 않았지만 의선거 내의 기온은 전과 비슷했다. 쌀쌀하기야 했지만 그렇다고 추워서 꼼짝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옛날에는 상춘곡(常春谷)이란 이름으로 불린 적도 있다는 의선곡이었다.
갑자기 식구가 많아져서 운지봉은 할 일이 많아졌다. 천산파의 제자들이 폐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한다고 하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할 일이 많은 것은 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운지봉의 차지일 수밖에 없다.
그런 운지봉을 용천주가 찾아온 것은 그날로부터 일주일 가량이 흐른 밤이었다.
『뭐라구요?』
운지봉은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아직 당신은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예요. 그 몸으로 천산파로 돌아간다는 건가요?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세요?』
『나의 생은 천산파에서 시작되었소』
용천주가 입을 열었다.
『내일 죽는다 할지라도 나는 그곳을 버릴 수 없고, 그 신성한 곳을 악도들이 점거하고 있음을 용납할 수가 없소. 마법에 당해 혼미했었던 장문사형과 장로들께서 이제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있으니,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오』
온통 세상을 뒤덮은 눈속에 용천주는 백의에 토끼털로 만든 조끼를 입고서 그녀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돌아가기 전에 일단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고 와야 할 필요가 있소』
『그럼 다른 사람들과 같이 가지…』
『천금신법을 나만큼 수련한 사람은 아직 없소. 나는 산을 넘어서 직선으로 우리 천산파의 본거지인 천주궁(天柱宮)으로 갈거요』
그 말대로라면 누구도 그를 따라갈 수가 없다.
『하지만…』
뭔가 말을 하려던 운지봉은 뒤이은 용천주의 음성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운고랑이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운고랑이 좋아할 정도라면 당연히 평범한 사람이 아니겠지』
그는 운지봉의 앞에 태산처럼 선채로 말을 계속했다.
『사랑이 강제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아오. 그렇기에 나는 늘 멀리서 운고랑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소.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렇게 할 수가 없을 것 같소. 왜냐하면 지금부터 나는 목숨을 걸고 광명회와 싸울 것이기 때문이오. 그렇게 되면 언제 다시 이 의선거로 돌아오게 될는지 알 수 없소. 어쩌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될는지도 모르오』
『용대협…』
『강요는 하지 않겠소. 하지만 내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그때 나를 받아줄 수 있을는지 한번 생각해봐 주시오』
『……』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너무도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들은 운지봉은 일시지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처럼 어눌하기만 했던 그가 이런 말을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는 이미 등을 돌려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면서도 운지봉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저만치 앞서가던 용천주가 그녀를 돌아본 것은.
그리고 말.
『나를 기다려주길 바라겠소. 살아있다면 돌아오겠소. 반드시!』
그 말과 함께 그는 나는 새와 같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갔다.
첫댓글 즐감~~
잘~감상~~고맙습니다~~~
즐~감 하고 갑니다.
감사...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