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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과 맹세에 신실하신 하나님 6:13~18
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15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튼튼하고 견고한 소망 6:19~20
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20 그리로 앞서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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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아브라함은 오래 참아 하나님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맹세는 변하지 않고,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시다는 사실은 소망의 피난처를 찾는 우리에게 큰 위로입니다. 이 소망은 영혼의 닻과 같아서 우리를 휘장 안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그곳에 앞서 들어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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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과 맹세에 신실하신 하나님 6:13~18
하나님은 약속하신 바를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증언하기 위해 ‘맹세’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맹세는 유대 사회에서 법적 효력을 갖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맹세로 그 약속을 보증하셨습니다(창 22:16~17). 맹세가 필요 없으신 하나님이 ‘그분 이름으로’ 맹세하심으로써 그분 뜻이 변치 않음을 나타내셨고, 그분이 정하신 때에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기에 그분의 약속은 반드시 실현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거짓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 성도가 보일 태도는 신뢰와 오래 참음입니다.
● 더 깊은 묵상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시며 ‘맹세’로 보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신실하신 하나님을 본받아 내가 신실하게 지킬 약속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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튼튼하고 견고한 소망 6:19~20
성도의 소망은 ‘영혼의 닻’과도 같습니다. ‘닻’은 배를 고정시켜 파도에 휩쓸리지 않게 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품을 때, 우리는 잘못된 교훈에 떠내려가는 영적 표류를 막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약속의 성취로, 우리를 위해 휘장 안에 들어가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피를 희생 제물 삼아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지성소 휘장을 찢어 버리셨습니다(막 15:38).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소망은 튼튼하고 견고합니다. 이 소망을 소유한 성도는 지성소(휘장 안)까지 들어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왕 같은 제사장’의 특권을 누립니다(벧전 2:9).
● 더 깊은 묵상
성도의 소망이 ‘영혼의 닻’과 같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나를 붙들어 주는 견고한 소망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하나님, 인생의 환난 중에도 신실하신 하나님이 피난처 되시니 큰 위로를 얻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붙들고 오늘도 믿음의 한 걸음을 내딛게 하소서. 영원하고 완전한 천국을 소망하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앞서 들어가신 길을 기쁘게 따르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267 주의 확실한 약속의 말씀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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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증거해 주신 하나님(13-20절)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을 예로 들면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성경의 많은 인물들을 통하여
그분의 행하심을 보여 주심은 우리가 혹시 의심하여 하나님의 길에서 떨어질까 염려하심입니다.
더욱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앞서 영원한 자리에 나아가게 하심으로
우리 역시 그분의 뒤를 이어서 영원한 하늘 지성소로 나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에 흔들림 없이 담대함을 가지고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믿음의 선진들을 통하여 약속의 말씀을 더 확고하게 붙들고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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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세로 약속하신 말씀을 소망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3~15절).
하나님은 자기보다 높은 자가 없었기에 아브라함과 약속하시면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셨습니다(13절).
아브라함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은 없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했습니다.
그리고 오래 참아약속을 받았습니다(15절).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한 약속이 이뤄지기까지 적어도 25년을 기다려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만들어지기까지 430년의 기간이 걸렸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그것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방식대로, 우리가 생각하고 계획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약속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이 지금 당장은 이루어질 것처럼 보이지 않더라도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약속한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약속하신 말씀을 소망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영생을 약속받은 자답게 승리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6~20절).
사람들도 자신의 말이 사실임을 입증하기 위해 자기보다 더 위대한 사람의 이름을 대며 맹세합니다(16절).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맹세 자체가 필요가 없으심에도 자신의 약속이 사실임을 증명하고 싶으셔서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시고자 자기의 이름으로 맹세하셨습니다(17절).
하나님은 거짓말 할 수 없는 두 가지 사실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이 하신 맹세입니다.
이것 때문에 약속과 맹세는 반드시 이루시므로 하나님께 피난처를 구하는 우리들에게 용기를 주며,
우리가 받은 소망을 붙들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18절).
이러한 소망이 우리에게 있으니 이는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영혼의 닻과 같습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으로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으므로 우리 역시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19~20절).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으로 인해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 소망은 ‘영혼의 닻’과 같습니다. 배가 닻을 내림으로 큰 물결에도 흔들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로 보장된 구원에 대한 소망은 내 자신에게 환난과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고 견고히 믿음을 붙드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삶을 견고하게 하시는 우리 주님께 영혼을 닻을 내려 맹세로 보증한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의심 없이 약속의 성취를 인내와 기쁨으로 기다리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금방 사라지고 마는 것들을 붙잡지 말고,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하늘 소망을 붙잡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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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와 본문이해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오래 참아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듯이, 그런 소망을 굳게 잡는 자는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휘장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상속자들에게 그 뜻의 불변을 맹세로 보증하십니다. 이는 피난처를 찾는 자들에게 큰 위로를 주기 위함이며, 그 소망은 영혼의 닻과 같아서 성도를 휘장 안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대제사장인 그리스도는 믿는 자를 위해 그곳에 앞서 들어가셨습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아브라함의 약속과 성취, 맹세의 요건과 역할,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 소망으로 들어가는 휘장 등입니다.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 아브라함이 인내하며 견딘 후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이삭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증표로 이삭을 주시지만, 어느 날 자녀를 바치라고 합니다. 약속의 성취는 그 자녀로 실현될 수 있는데 그를 바치라고 한 것입니다. 얼마든지 배척할 수 있었지만 그는 순종합니다. 그것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즉 이삭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사건으로 인해 약속이 성취되어, 모든 약속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본이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 맹세는 모든 것의 끝판왕이라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맹세는 대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합니다. 왜냐하면, 맹세는 말하는 이의 결정적인 구속력이 있는 최종 수단이므로, 그보다 큰 자의 권위에 기대어 호소하는 법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이상 권위가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래서 만일 맹세를 하고 그것을 어기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곧 제3계명을 어겨 여호와의 거룩하신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맹세는 더는 변개할 수 없다는 것의 선언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기에 그분이 하신 말씀은 절대로 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앞에 있는 희망을 붙들려고 피난처를 향해 가는 우리는 큰 용기를 얻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입니다. 그것이 소망이 되어 당시 박해를 피해 다니는 성도들에게 큰 안위를 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온전히 예수께서 대제사장이 되셔 먼저 지성소로 들어가셨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께서 자신의 대속적인 희생을 통해 먼저 하나님께 나아갔기에 그 구속을 통해 성도들도 피난처 되신 하나님께 나아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묵상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
하나님께서 맹세까지 하면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며 번성하게 할 것이라는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복과 번성을 반복하여 말씀하시고, ‘반드시’라는 말씀으로 강조에 강조를 거듭하십니다.
그러나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때와 방법과 장소입니다. ‘
누가’, ‘무엇을’, ‘왜’는 말씀하셨지만 ‘언제’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는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지요.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아브라함을 복 받을 그릇으로 만들기 위함으로,
그가 교만하거나 경거망동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자격을 주기 위한 훈련임과 동시에 모든 것은 때와 시기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변하기 쉽습니다. 말 타면 종두고 싶듯이, 갈증이 해결되면 커피 생각이 나는 것은 그 까닭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때와 장소와 방법까지 만약 다 알았다면?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받을 복을 하나님께서 1서부터 100까지 한눈에 모두 보여주었다면 아마도 그는 그런 삶을 살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의 삶은 평탄한 대로가 아닙니다. 아내도 잃어버릴 뻔하고, 일개 족장이 다섯 왕이 동맹한 연합군과도 전쟁을 치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럴수록 강해집니다. 일찍이 약속의 말씀을 받았고, 비록 그것이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참고 기다립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후손들이 약 200만이 되어 애굽에서 나오는 광경을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의 믿음은 그 이상이었을는지 모릅니다. 내다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굳게 믿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네 씨가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 적어도 그 정도 병력이 되려면 200만은 넘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을 얻고 약 20년 뒤 테스트를 받습니다. 독생자 이삭을 바치고는 그제서야 그는 하나님의 확고한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 이후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 말씀이 성경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은 하나님의 마음에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비록 현실적으로 성취된 것은 아니지만 그분 편에서 보면 이미 이루어진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사실을 아브라함도 믿었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은 이삭 달랑 한 명뿐이었지만,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알 같은 후손들을 믿음의 눈으로 본 것이지요. 놀랍게도 그 불가능한 약속이 아브라함의 마음에도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의 나이로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약속을 받습니다. 그 약속이 이삭을 바치는 것으로 확정될 때는 약 110~120살 정도가 됩니다. 약속을 받은 후부터 물경 약 50년의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50년을 참은 것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50년 뒤에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그가 명실공히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믿음과 오래 참음의 결실입니다. 믿음과 참고 기다리는 것은 동의어 같습니다. 그의 능력은 믿음과 오래참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에 ‘오래 참음’이 있습니다. 또한, 사랑은 ‘오래 참고’로 시작하여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으로 끝납니다. 약속을 받은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약속해 주신 분을 믿으며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비결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청사진을 보는 영적 비법이 있습니다. 오래 참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전수받아 기어이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면 좋겠습니다. 기다림과 오래 참음은 능력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반드시 주시는 하나님의 복과 각자에게 주어진 약속을 이루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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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소망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욥조차도 소망이 없을 때에는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욥13:15)
그래서 심지어 악인들도 나름대로 소망을 가집니다
그러나악인의 악한 소망은 진노를 이룰 뿐이라 반드시 끊어질 것입니다
"악인의 소망은 진노를 이루느니라",(잠11:23)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루어도 악인의 소망은 끊어지느니라"(잠10:28)
그러므로 우리는 의인의 소망 곧 우리 주만 바라는 소망을 품기 원합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9:7)
그리하면 소망을 얻으려는 우리에게 큰 안위를 주실 줄 믿습니다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6:18)
그래서 영혼의 닻 같은 이 소망으로 인해 우리를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반드시 하늘의 휘장 안에 들어가서 주를 뵙게 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히6:19)
또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15:13)
그러나 이 소망은 반드시 인내로 이루는 것입니다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4)
그래서 오직 시험을 참고 인내하는 자만이 소망을 이루고 약속하신 것들을 얻는 것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1:12)
아브라함도 오직 인내함으로 소망을 이루었습니다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히6:15)
그러므로 우리가 오직 끝까지 인내함으로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기 원하며,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히6:11)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찬송하기 원합니다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시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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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대제사장'
매년 모든 백성들의 죄악의 대속을 위해 정해진 날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했던 대제사장은
그 해의 연수가 지나면 죽고 다른 이에게 그 권한과 의무를 넘겨주어야 했습니다.
그 속죄의 시간은 포기할 수도, 포기 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으므로
반복적,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했고 많은 짐승들은 제물로 희생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어떠한 제물로도 그 역시 죄인이었던 대제사장부터 모든 이들의 반복적인 죄를 완전하고 변치 않게 해결해 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반복적으로 신실하게 선포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이며 변치 않는 그분의 약속의 확증입니다.
그 어떤 율법이나 세상의 지식과 판단도 폐할 수 없고 혈통과 육신이나 사람의 뜻으로 뒤집거나 대신할 수 없는 굳건한 것으로 영원한 구원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날마다 그 놀라운 건지심의 비밀을 깨달아가고 더 누리며 나아가는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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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맹세(13~20절)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환난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곤고가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하나님이 나와 상관이 없이 느껴지고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내가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가 밀려올 때입니다. 왜요? 이러다가 헛수고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회의 때문입니다. 때로는 사단이 우리의 감정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말씀보다 감정에 더 많은 영향을 받게 하고 그로 인해서 절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근본적으로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데서 오는 부작용일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러한 사람들에 대한 처방을 내려 주고 있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약 5:11절에서 이렇게 역설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보라! 우리가 인내하는 자를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니라” 야고보 장로는 욥을 예로 들면서 성도의 삶에 인내가 필요함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욥의 결말을 축복해 주신 사실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은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너희 흩어져 있는 열두지파는 인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욥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는 것이 다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미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게 하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12절).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의 예로 아브라함이 채택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도대체 성취되기에는 너무도 이상하고 불가능해 보이고 그러한 약속을 자신의 나이 75세 아내의 나이 65세에 받았습니다. 그리고 25년이라고 하는 긴 혼란의 시간을 인내함으로 통과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신앙을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롬 4:18)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시므로 약속을 확고히 하셨습니다(창 22:15~16).
하나님께서 맹세하신다는 사실이 이상해 보입니다.
구약적인 상황에서 맹세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하는 것이었고 그러한 맹세는 인간들에게서나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죄로 말미암아 신뢰할 수 없는 대상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16절) 들어서 맹세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맹세란 어떠한 분쟁이나 의심이 일어났을 때 자신의 결백에 대한 최종 확정을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맹세란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정직성과 결백을 증명하는 최고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은 맹세하실 적에 자기보다 더 큰이가 없기에 자신을 들어서 맹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맹세의 내용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까지 하셔야 할 당위성은 없습니다. 참고 견디는 것은 아브라함의 몫이었고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키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을 드린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맹세로 보증까지 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는 하나님께서 인간 편까지 낮아지신 하나님의 비하인 동시에 은혜였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실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뜻이 변치 않음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맹세로 보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맹세라는 약속을 가진 아브라함의 25년 동안이 그렇게 평탄하기만 했습니까? 아닙니다. 애굽으로 내려가기도 하고, 욥을 구출하러 가면서 힘들어하고 하갈을 취해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어떻게 해보려고도 하고 아주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신앙을 특정 지우는 말은 ‘오래 참아’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해석처럼 기다리는 동안에도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롬 4:20)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중요한 원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회의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없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신앙생활을 진지하게 하지 않았거나 안일한 사람일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회의가 우리를 공격해 올 때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을 거론하면서 우리가 이 어려운 시기를 잘 참아주기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현재적인 삶에서 어려움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오래 참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시선을 아브라함에게서 수신자들에게로 돌려 갑니다. 17절의 하나님께서 맹세로 보증하신 사실을 다시 언급하면서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 즉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께서 거짓이 없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입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는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들, 이 편지를 받고있는 당신들에게 소망을 확고히 잡게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는 하늘의 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피하여 간다는 말이 거슬리지만 여기서 “피하여 간다”라는 말은 신앙의 타협을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순례자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원한 피난처이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면서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것을 “피하여 간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얻으려는 소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침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요 14:3; 요일 3:2).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궁극적인 즐거움을 맛보는 것입니다(요 17:24).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즐거움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썩지 아니할 기업을 유업으로 받는 것입니다(고전 2:9; 벧전 1:3하). 이 소망을 가지고 나아가는 우리가 때로는 실의에 빠지고 수신자들처럼 시험에 들기도 하며 흘러 떠내려가기도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 하나님의 맹세와 약속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소망은 “영적인 닻”에 비유되었습니다. 닻이라고 하는 것은 배가 움직이거나 흘러 떠내려가지 못하도록 고정시키는 도구를 말합니다. 즉 우리가 가진 소망의 닻은 변치 않으시고 움직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휘장 안에 있는 것은 하늘의 지성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하늘의 지성소에는 히 1:3절에서 이미 언급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입니다.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앉아 계시기 때문에 소망이 있습니다. 따라서 튼튼하고 견고한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앞서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계보를 좇는 대제사장, 즉 우리의 죄를 단번에 해결해 주시는 중보자로서 먼저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셨는데 그것이 바로 이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을 포함한 우리, 즉 오고 오는 세대를 위한 것이었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시대의 우리, 그리고 우리 시대의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맹세하셨다는 것입니다. 오고 오는 세대에게 소망의 닻으로 존재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약속의 맹세를 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7장에서부터는 5장에서 너희가 아직 어리기 때문에 해석하기 어렵다고 했던 멜기세덱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본문이 우리에게 확실하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맹세를 하셨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 맹세의 약속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을 변치 아니하려고 하셨다는 설명이 필요했습니까?
첫째는 오래 참아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을 기억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의 자손인 이삭을 선물로 받았던 것처럼 비록 당신들의 현재가 힘들고 어렵지만 이겨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우리의 소망의 근거는 하나님 맹세의 약속, 아브라함과 체결하셨을 뿐만 아니라 오고 오는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위한 약속은 우리의 소망의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흐릿하고 불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튼튼하고 견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약속을 알고 있는 우리는 큰 안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던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리고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기를 원하는 히브리서 기자의 마음을 가슴에 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본받아야 합니다.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을 받았던 바로 그 사람 아브라함입니다. 그래서 오늘 묵상의 핵심은 끝까지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영혼의 닻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끝까지 오래참는 믿음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매일 부지런히 말씀을 묵상하고 배우고 순종하는 삶이 계속되기를 기도합니다
-----------------반복 복습------------
구원의 위험성(1-8)
신앙생활은 계속적으로 전진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교리를 다 알았다고 멈추면 안됩니다. 교리는 신앙의 초보에 불과합니다. 교리의 기초가 잡히고 성령의 역사들을 체험했다고 안심하면 안됩니다. 방심하면 사탄의 속임수에 걸려들어 서서히 주님을 멀리하고 심지어는 주님을 배신하게 됩니다. 완전히 영혼이 죽기전이라면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하지만 양심이 화인맞아 주님을 버리면 다시는 화개하지도 못하는 마음이 되어 버립니다.(6절) 때문에 우리는 마음의 밭에 말씀의 씨가 뿌려질 때 기쁘게 받아들이고 성령의 단비가 내릴 때에 잘 흡수하여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만일 열매가 아닌 엉겅퀴와 가시만 가득하다면 저주함에 가까워 마직막은 불살라 질 것입니다.(7,8)
확실한 구원의 자리(9-20)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지만 많은 신실한 사람들은 끝까지 믿음안에 거하여 구원을 받을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구원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일까요? 구원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성도를 섬겼고 현재도 섬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10) 이들은 깨어 주님을 섬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계속 부지런하게 순종하여 끝까지 소망의 자리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어떤 어려움이 와도 오래 참음으로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가는 사람들입니다.(12)아브라함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오래참아서 구원의 약속을 받았습니다.(15)
우리는 승리의 자리로 가기 위해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되신 예수님이 죽기까지 순종하여 자신을 온전한 제물로 드린 것처럼 우리도 끝까지 그렇게 순종해야 합니다.(20) 주님을 이렇게 따르는 사람들은 확실한 구원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멸망의 자리에는 결코 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요한사도는 사망에 이르는 죄도 있다고 했습니다.
요일5: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5: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사망에 이르는 죄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을 부인하는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항상 깨어서 주님께 순종하여 성도를 섬기고 오래참아 안식의 약속을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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튼튼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 소망
히브리서 저자는 수신자들이 보인 사랑을
근거로 그들의 구원을 확신하며,
그들이 믿음과 인내를 견지하도록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스도인의
확실한 소망을 설명합니다.
13,14,16-18절 :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자신의 강력한 맹세로 붙드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미 복을 약속하셨지만(창 12:1-3; 17:1-22) 맹세로 그 약속을 다시 한번 보증하셨습니다(창 22:16-18). 거짓말을 하실 수 없기에 약속만으로 충분했지만, 그런 하나님이 맹세까지 하신 데는 고향을 떠나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은 아브라함을 안심시키고 위로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소망을 향해 가는 동안 흔들릴 수 있음을 아시고 약속과 맹세의 말씀으로 우리를 붙드십니다.
출처 : 매일성경 7/8월호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주님께서 약속하신다.
오늘은 이 약속을 붙들기 원한다.
성경의 복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고난을 견뎠다.
인내의 과정도 중요한 것이다.
분명한 것은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오늘 하루도 이 복을 누리기 원한다.
19,20절 :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예수님은 소망의 닻이십니다. 스스로 닻이 되셔서 결코 끊어지지 않는 견고한 사랑의 줄로 우리와 자신을 묶으셨고, 하나님이 계신 하늘 성소(9:24) 로 들어가셔서 우리를 하나님께 고정하셨습니다. 예수님 덕에 우리는 어떤 세파에도 하나님을 벗어나 표류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세파가 그치는 날, 우리는 예수님께 묶여서 하나님 앞에 안전하게 정박해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출처 : 매일성경 7/8월호
예수님으로 인해 소망을 갖게 되었다.
예수님이 곧 소망의 닻이시다.
우리를 단단하게 묶어 주신다.
풍파가 와도 떠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사랑의 닻줄로 우리를 꽁꽁 싸매고 계시기 때문이다.
오늘이라는 날의 항해에도 그 안전함을 맛보기 원한다.
참된 평안은 오직 예수님만 주실 수 있음을 고백한다.
주님!
주님의 인도하심을 온전히 따르기 원합니다.
인내가 부족합니다.
믿음이 연약합니다.
쓰러지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용서하소서.
다시 말씀으로 새롭게 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하루도 인내할 수 있게 하소서.
약속 믿고 굳게 서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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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야 할 길로서의 믿음의 길
교회에 다니는 우리가 가야 하는 인생의 길은 믿음의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수없이 많은 길이 우리 앞에 있지만 그 길중에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은 믿음의 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존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임을 알기에 우리는 믿음의 길을 갑니다. 이 땅에 우리는 무의미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목적을 주신 것을 알기에 우리는 믿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이 땅에서 삶을 마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믿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믿음의 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길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길을 선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라고 하시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복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야 하는 믿음의 길을 잘 가고 있습니까? 때로는 우리가 너무 행복해서 그 길을 못가고 있을 때도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너무 행복하다’라는 말을 들으면 조금 의아하지요? “행복하면 됐지 너무 행복한게 어디있습니까? 행복이 넘칠 수도 있습니까? 행복이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지 너무 큰 행복은 없는 것 아닙니까? 라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행복이라는 것은 우리의 일시적인 감정적인 행복이기 때문에 넘치는 것이 잘못된 행복입니다. 언제 너무 행복한 것입니까?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너무 행복하다’는 것의 기준은 우리가 좋아서 그 일에 정신이 팔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정도의 행복입니다.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좋은 일에 정신이 팔리면 그 일은 분명히 너무 좋은 것입니다. 너무 좋아서 믿음의 길을 생각하지 않고 그 일에 빠져있는 것은 너무 행복한 것입니다.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 있는 잘못된 길이지요.
우리는 우리가 가야 하는 믿음의 길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길을 잊어 버리는 순간 우리는 벗어나는 것입니다. 혹 그 순간이 아무리 행복하다 하여도 그 길은 잘못된 길입니다.
9월9일 인천부평역 앞 퀴어축제 반대 "거룩한 방파제"
믿음의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
땅 뺏어먹기 놀이를 아십니까? 큰 네모를 땅에 그리고 서로 자기 손바닥만큼 자기 집을 그린 후 그 집에서부터 땅을 정복해 가는 놀이입니다. 돌을 한 번 튕겨서 밖으로 나가고 두 번째 튕겨서 자기 집에 돌아오면 그 지나간 흔적이 자기 땅이 됩니다. 어렸을적 저는 땅 뺏어먹기 놀이를 많이 했습니다. 땅 뺏어먹기를 하면서 땅을 많이 획득할 때 참 기뻤습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직장에 나가셨던 어머니께서 돌아오셔서 밥을 해놓고 밥 먹으라고 소리를 지르십니다.
그러면 두 종류의 반응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잽싸게 일어나서 달려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잠시만요’하면서 늦장을 부리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아이들은 주로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잽싸게 일어나 갑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 아이들은 하루종일 엄마를 기다리며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엄마도 그립고, 엄마가 주시는 밥도 그립습니다. 하루종일 배가 고파 배를 움켜잡고 기다리다가 드디어 엄마 목소리가 들렸는데 왜 주저하겠습니까?
욺켜잡은 배는 인내입니다. 그리고 엄마가 오시면 그리운 엄마를 볼 수 있고, 배를 채울 수 있다는 것은 소망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인내를 하며 지금까지 왔는데 왜 엄마 목소리에 주저하겠습니까? 땅뺏어 먹기 놀이는 큰 네모를 다 내가 먹으면 끝이 납니다. 천하통일입니다. 천하통일을 하면 참 기쁩니다. 진짜 그 땅이 내 땅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천하통일의 그 기쁨이 어찌 어머니를 기다리는 마음을 앞설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를 기다리는 마음, 어머니가 주시는 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11-12절) 오늘 본문은 계속 이 인내와 소망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믿음의 길을 가고 있습니까? 그것을 알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오늘 내가 믿음의 길을 갈 때 인내하고 있는지. 오늘 내가 소망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가고 있다면 우리는 인내하고 있어야 합니다. 인내하는 것은 부지런히 사는 것입니다. 인내한다는 것은 힘들다는 것입니다. 힘들기에 인내가 필요합니다. 힘들어도 소망이 있기에 인내합니다.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 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10절) 하나님은 불의치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그 백성이 이 땅에서 사랑하며 수고한 것을 잊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마치 공적 곧 인간이 이룬 업적으로 생각하여 보상 받는 것에 대해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늘의 상급을 바라는 것은 믿음입니다. 천국에서 받을 상급을 생각하는 것은 믿음으로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성경은 우리가 하늘에서 받을 상급을 소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받을 상급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늘에서 받을 상급을 소망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인내하지 않고 수고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소망의 약속을 붙잡았습니다. “가라사대 내가 너를 복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라는 약속을 붙잡았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소망을 붙잡아야합니다.
믿음 때문에 인내하고, 믿음이 주는 하늘의 복을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사람만이 이 땅에서 사랑이라는 힘들고 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믿음의 길을 가십시오. 그 길은 참으로 우리가 가야 하는 길입니다. 그 길은 바로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이 길은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세상의 모든 곳에서 항상 그 사람 앞에도 있는 길입니다. 믿음의 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입니다. 그 사람이 지금 어느곳에 있건 믿음의 길은 열려 있습니다
혹 그 사람이 사형수가 되었다 하여도 그 사람에게 믿음의 길은 열려 있습니다. 그 사람 앞에도 믿음의 길은 있습니다. 사형수들이 때로는 감옥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들은 마지막 길목에서 믿음의 길로 돌아선 것입니다. 그들은 마지막이라도 믿음의 길을 선택함으로 복된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믿음을 가진 우리 앞에도 항상 믿음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모든 사람이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의 길을 가지 않고 있습니다. 믿음의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가 오늘 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한다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인내와 소망입니다. 그 사람이 믿음의 길을 가며 더 깊이 그 길을 들어설 때 그 사람은 인내해야 하며 천국을 소망해야 합니다. 소망은 ‘영혼의 닻’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소망하는 마음이 없으면 진리를 행하고자 하는 영혼은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소망할 때 앞으로 힘차게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믿음의 삶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서 왔다갔다 합니다. ‘사랑은 오래참고’라고 말합니다. 인내하는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의 길을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어슬렁 거립니다. 그래서 믿음의 풍성함을 알지 못한채 살고 있습니다. 믿음의 초보로 머물러 있습니다. 오늘 우리 앞에 믿음의 길이 열려 있습니다. 이 길은 이 세상의 모든 길보다 더 복된 길입니다. 우리가 그 믿음의 길로 들어서기를 바랍니다. 믿
음의 길을 가는 길은 인내와 소망을 갖고 가는 길입니다. 그 인내와 소망을 느끼지 못하였다면 그 길을 아직도 깊이 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믿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 길을 깊이 따라가야 합니다. 그 믿음의 길은 하늘의 길이고. 하늘의 보상이 있습니다. 그 믿음의 길을 가십시오. 천하가 부럽지 않은 그 믿음의 길을 가기를 기도합니다.
9월9일 부평역 퀴어축제 반대 "거룩한 방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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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위하여
그 아들을 내어주신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감사드리며
결코 흔들리지 않는 손길을 온전히 의지하는
인생의 걸음걸이가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날마다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롭게 구원을 더 깊이 경험하고
그 소중한 보혈의 능력을 거하는 곳마다
담대하게 전하는 성령의 사람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하늘의 창고를 열어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치유와 회복의 손길을 뻗어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오직 아버지를 기뻐하는 거룩한 백성으로 나아가도록 지켜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