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354년 누미디아의 타가스테(현재 알제리의 수크아라스)에서 모니카 성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하게 생활하며 마니교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 성녀의 끊임없는 기도와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영향으로 회개하여 387년에 세례를 받았다. 391년에 사제가 된 그는 5년 뒤 히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아우구스티노 주교는 이단을 물리치며 교회를 수호하는 데 일생을 바치면서 참회의 자서전인 「고백록」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430년 세상을 떠난 그는 중세 초기부터 ‘교회 학자’로 존경받고 있다.
본기도
주님,
일찍이 복된 아우구스티노 주교에게 부어 주신 그 정신을
주님의 교회 안에서 새롭게 일깨우시어
저희도 그 정신을 따라 참된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을 그리워하고
영원한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을 찾게 하소서.
제1독서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2서 말씀입니다.3,6-10.16-18
6 형제 여러분,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지시합니다.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을 따르지 않는 형제는
누구든지 멀리하십시오.
7 우리를 어떻게 본받아야 하는지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8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9 우리에게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0 사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16 평화의 주님께서 친히 온갖 방식으로
여러분에게 언제나 평화를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 빕니다.
17 이 인사말은 나 바오로가 직접 씁니다.
이것이 내 모든 편지의 표지입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편지를 씁니다.
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복음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3,27-32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7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28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29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30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31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32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왜 자녀는 미운 부모의 잘못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여자 주인공 테레자는 어머니를 극도로 싫어하면서도 어머니와 닮은 남자를 사귑니다. 어머니는 외도 하는 것을 딸에게 자랑할 정도였고 테레자를 무시하였습니다. 테레자는 어머니와 같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어머니와 비슷한 바람기가 있는 의사 토마시와 사귑니다. 토마시도 자기 내연녀인 사비나에게 테레자를 소개할 정도로 사랑을 가볍게 여깁니다. 어쩌면 테레자가 토마시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을 수 있습니다. 결국 둘이 반씩 양보하는 상황이 됩니다. 토마시는 결혼을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테레자는 자신도 외도하면서 토마시에게 미안함을 갖습니다. 이런 사례는 너무도 많습니다.
부모를 원망했지만, 결국 부모를 닮아있는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부모를 싫어하면서도 부모를 닮거나 자기가 싫어하는 부모와 같은 배우자를 만나는 이유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모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태도에서는 분명히 부모 중 한 명과 경쟁을 하게 됩니다. 테레자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으며 자신이 어머니보다 우월해질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술주정뱅이 아버지에 대해 그 책임이 어머니에게 있다고 믿는 딸은 자신도 술주정뱅이와 결혼해 어머니보다 잘사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누군가를 심판하면 이제 나는 그 누군가와 경쟁 관계가 될 수밖에 없고 그러면 그 관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십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속이 썩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를 그들이 조상들을 비난하며 여전히 그들의 조상을 자기 조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조상들을 비난하며 자신들은 조상들처럼 살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조상들의 전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부모를 비난하며 부모처럼 되는 경우와 같습니다. 아예 그 족보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족보를 주러 오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에게는 ‘새로 태어남’이 새로운 족보에 들어옴과 같습니다.
영화 ‘오블리비언’(2013)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지구인을 위해 외계인과 싸운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를 만든 것이 외계인이고 그는 지구인을 죽이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겉은 지구인이지만 조상은 외계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우리 안의 조상을 모시고 삽니다. 그리고 그 조상이 산 대로 삽니다. 만약 ‘진화론’을 믿는다면 우리 조상은 누가 되겠습니까? 원숭이가 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원숭이를 비웃지만, 실상 사는 것은 원숭이와 다름없이 비윤리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개구리가 되고 싶은 전갈이 있었습니다. 겉으로 참으로 착했지만, 소풍 가는 날 개울을 건널 때는 자신이 개구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영을 할 수 없는 전갈은 자기를 태우고 가는 개구리를 독침으로 찔러 개구리도 죽고 자신도 죽습니다. 자기 조상이 전갈이라고 믿으면 아무리 자기가 전갈의 조상들을 비난하더라도 그 본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개구리처럼 온순하여지려면 그냥 개구리가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와 맞서서 이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래봐야 그 부모의 수준밖에 안 됩니다. 인간의 수준을 넘어서려면 인간을 비판하며 그 비판하는 인간들처럼 살지 않을 것이라 결심해도 소용없습니다. 여전히 인간의 다른 부족한 면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조상으로 여기면 그들을 비난해도 그들의 습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새로 태어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와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온 갈비뼈로 탄생했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물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냥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면서 신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을 비난할 이유도 없습니다. 자신이 신처럼 살지 못하는 것만 보이며 인간의 죄의 습성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비난하는 것으로는 절대 그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이 따로 있을까요? 따로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따로 있지 않습니다. 굳이 나눈다면 행복이라 여기는 사람과 불행이라 여기는 사람만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것, 또 형체를 확인할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습니다. 각자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행복이라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하고, 불행이라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불행한 것입니다.
엄청난 부와 명예를 가지고 있지만 불행이라는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불행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것 같은데도 행복이라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 행복은 자기만 꺼낼 수가 있습니다. ‘누구 때문에’라면서 사람과 환경 때문에 불행하다고 말하지만, 외적인 것이 행복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행복은 내가 마음 안에 만들고 보관해서 밖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그게 행복이다.”
행복을 멀리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또 세상의 것에서만 찾는 것도 안 됩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우리는 행복을 자기 마음 안에 차곡차곡 쌓을 수 있으며, 이로써 언제든지 행복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을 위선자라고 부르면서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입으로 하느님을 끊임없이 외치고 있지만, 실상 하느님의 것을 찾지 않고 세상의 것만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만 아름답게 보이려고 하지만, 실상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했습니다. 위선과 불법은 하느님의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에게 “너희는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이다.”라고 꾸짖으십니다. 무덤의 겉은 아주 깨끗하고 아름답게 단장된 것 같지만, 무덤 속은 시신이 부패하면서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처럼 그들의 마음이 더럽고 추한 것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위선의 끝은 생명이 아니라 죽음임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진정한 행복을 마음에 품고 살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또 받아주시기에 더 큰 행복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을 찾아 나서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의 불안은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미래를 통제하길 원하는 데서 시작된다(칼릴 지브란).
사진설명: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