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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생명 말씀(2018.8.12.) 말씀 /히브리서 10:38-39
앞으로만 나아가는 믿음
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이 세상을 똑같이 살아가는 것 같아도 일반 사람들과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다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믿음으로 살지 않는 것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무엇인가 정의를 내린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지만 오늘은 히브리서 말씀을 통해서 믿음의 특성 하나를 배우고자 합니다. 믿음은 소극적 태도가 아니라 적극적 태도라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나지 않고 늘 앞으로 나아가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과 저와 여러분들 모두 가지실 수 있기를 기도 합니다.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사이렌이란 요정 이야기가 있습니다. 상반신은 여자, 몸통은 새, 하반신은 물고기의 모습을 한 요정입니다. 사이렌은 시칠리아 섬 근처의 작은 섬에 살면서 고혹적인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선원들을 유혹해서 파멸시켰습니다. 일단 노래를 들으며 누구나 다 빨려 들어갔고, 모두가 사이렌의 유혹에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오디세이와 오르페우스는 이 사이렌의 노래를 이겨냅니다. 다만 두 사람의 이겨낸 방법이 아주 대조적이라는 것입니다. 트로이 전쟁 후 귀국 길에 오디세이의 배가 그 섬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는 사이렌의 노래 소리가 너무 듣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코 들어서는 안 되기에 노를 젓는 부하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고, 자신은 배의 돛대에 묶어놓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사이렌이 살고 있는 섬 근처에 이르자 사이렌의 노래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습니다. 참 듣고 싶은 노래였습니다. 아주 유혹적이었습니다. 노래 소리를 들은 오디세이는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배를 돌려 노래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러나 밀랍으로 귀를 막은 선원들은 오디세이의 명령이 들리지 않았고 계속 고향을 향해 배를 저어갔습니다. “명령을 어기느냐?”고 소리를 쳤지만 돛대에 묶여 있는 그는 어쩔 수 없었고, 그렇게 해서 그 섬을 무사히 지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오르페우스 방법은 달랐습니다. 배가 그 섬 근처에 이르렀을 때에 그는 아름다운 수금을 타서 사이렌의 노래 소리에 대항하였습니다. 노를 젓는 선원들은 오르페우스의 아름다운 수금 선율에 감동을 해 사이렌의 노래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둘 다 통과는 했지만 방법은 달랐습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합니다. 세상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율법적으로 꽁꽁 묶어 가두는 오디세이 방법도 있고, 적극 선을 행하여 악을 이기는 은혜의 방법도 있습니다. 그런데 억지 강제적 율법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의 힘이 아니라 타에 의한 힘이라서 언제던지 강제적인 힘이 사라지만 다시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이렌의 유혹적인 노래 소리보다도 더 아름답고 큰 은혜의 수금을 타는 것으로 법을 배워서 적극 대항 하는 것이 복음 적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8:5-6은 이렇게 말 합니다. “육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의 소욕을 이기기 위해서 육에 집중하게 되면 오히려 육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영의 일을 생각하며 성령을 적극 좇는 일을 하면 자연스레 육신의 일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 권투가 유행 했을 때에 fighting sprit을 배운다고 권투를 재미있게 본적이 있습니다. 그 때는 목자님들이 다 권투를 잘 보았습니다. 한 가지 배우고 기억나는 것은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것입니다. 탁구도 그렇고 어떤 경기도 마찬가지 이지만 수비 위주는 결국 한계에 이르러 결정적인 한방에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수성을 강조하기보다 적극성과 공격성과 전진의 성격을 강조 한다는 것을 성경을 읽을 때마다 배울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은 악한 세상에서 악을 악으로 맞 받아 치거나 피하는 방법을 가르치기보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합니다. 악으로 악을 대하면 악이 계속 번지고, 악을 소극적으로 피하게 되면 결국 악한 세상에 무너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방법은 현재적으로는 악이 득세하지만 계속 인내로 선을 심고 가꾸면서 선을 강성 화 시켜나간다는 것입니다. 이는 곡식밭에 채소를 가꾸는 원리와 같습니다. 농부가 밭에 채소를 씨를 뿌리고 가꾸다 보면 심지 않은 가라지가 어디서 날라 왔는지 채소밭 고랑과 사이사이 자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 해라도 게을리 채소를 가꾸지 않으면 밭은 온통 잡풀로 덮히게 됩니다. 풀을 제거하는 방법은 계속 풀만 뽑는 것이 아니라 정성것 채소를 가꾸어서 강성화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풀은 자연히 세력을 잃게 됩니다. 마태복음 5정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마 39-44)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산상 수훈의 어떤 말씀에도 주님은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악을 행할지라도 적극 선으로 상대하라고 하십니다. 이유 없이 뺨 한 대를 때리는 자에게 두 대를 맞아주고, 속옷을 빼앗으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어주고, 억지로 오리를 가게하려는 자에게 십리를 동행해주고, 원수까지 미워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으로 적극 대처 하는 것이 악한 세상을 이기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열치열이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열을 열로 다스린다는 뜻으로 힘에는 힘으로 추위에는 찬 것으로 대응하는 것 따위를 비유하기도 합니다. 아주 적극적인 용어입니다. 대학시절 교련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군대 생활 6개월 면제를 받았습니다. 운동장에서 점심 먹고 집총 훈련을 하는데 얼마나 나근나근 하고 힘이 쭉 풀리는지 도저히 그늘 아래서 잠만 자고 싶지 의욕이 나지 않고 짜증만 났습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오후 시간을 보낸다는 것도 고역이고...그 때 오기가 생겨서 대충 하려던 마음을 떨쳐버리고 스스로 적극적 자세로 훈련에 임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몸에 근육이 나근한 것이 없어지고, 힘이 생기더니 아에 총검술이 재미있기까지 한 것을 체험을 한적이 있습니다. 깨달은 것은 힘들고 어렵다고 짜증난다고 그런 감정에 끌려가서는 안 되고 오히려 적극 대항해야 오히려 힘든 상황들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올 여름도 얼마나 더운 날들의 연속 입니까? 서울이 39도까지 올라가고 이렇게 더운 것이 전체적으로 역대 4위라고 합니다. 사람들 전기 누진세 때문에 걱정이 많고 불만이 많습니다. 그 문제 잘 처리 안 해줬다고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 하락하고, 이런 날이면 저도 자칫 늘어지기 쉽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열치열로 여름을 대체적으로 잘 보냈습니다. 그것은 영어 성경 읽기와 혼불 읽기였습니다. 그렇게 무더위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성경 말씀을 더 깊이 은혜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출애굽기로 들어갔습니다. 히브리서저자는 10장 38-39절에서 이렇게 말 합니다. 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이 말씀은 우리 신앙의 특성을 핵심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고 앞으로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전진성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지 못하면 대게 이핑게 저핑게로 뒤로 물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믿으면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믿음은 문제 해결책도 뒤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찾도록 합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뒤로 물러나면 침륜에 빠지지만 앞으로 나아가면 영혼의 구원함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제가 독서를 권장 할 때 임원희 자매 이야기를 가끔 합니다. 서울대 병원 간호사로서 3교대 근무, 은급실의 악몽 같은 밤 근무, 2009년은 신종 인풀루엔자 유행할 때는 간호사 2명과 당직 의사 한명이 200명의 이 넘는 환자를 돌봤다고 합니다. 신규 간호사 생활에는 세 달 안에 몸무게 7kg이 빠지고 한 달에 3일을 빼고 하루도 빠짐 없이 울었다고 합니다. 그 때 왜 자살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용기로 살지 했는데 이제는 이해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죽음까지 생각했던 그 위기 순간에 오히려 취했던 행동이 바로 뒤로 물러나지 않고 책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순간 순간 견디기도 힘든 시간들인데 어떻게 독서를? 거기서 나온 것이 10분 몰입독서법 입니다. 바쁘고 힘들어도 10만 몰입해서 독서를 하라 그게 사는 길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위기를 극복하고 책도 출판하게 되고, 강연도 하게 되었는데 이제는 백의 천사로, 강사로, 작가로 세상에 좋은 변화를 주는 사람으로 꿈도 야물 찹니다. 저도 영어 성경 읽기에 그런 방법을 썼습니다. 1800페이지 영어 성경을 완독하기 위해서 제질 먼저 집에 들어오면 우선 영어 성경 몇 구절 해석, 커피마시기 전에도 몇 구절 해석, 색소폰 불기 전에도 몇 구절 해석...어던 때는 한 구절 앞에 한참 머물러야 하지만 이렇게 하다 보니 앞으로 계속 나가고 목적지에 이르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믿음이란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뒤로 물러가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합니다. 믿는 자들은 오직 앞으로 나아감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제가 출애굽기를 읽으면 다시 출애굽사건을 돌아옵니다. 그냥 간단히 홍해를 건넌 것이 아닙니다. 막상 출애굽을 했지만 뒤에는 추격하는 바로 군대의 말 발굽소리와 병거소리 앞에는 검푸른 홍해가 가로 놓여 있습니다. 진퇴 양란입니다. 뒤로 가도 죽고 앞으로 가도 죽습니다. 그 때 일반적인 백성들은 뒤돌아서 항복하고 살자는 것을 생각 합니다. 그러나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방법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홍해가 가로막혀 있어도 믿음으로 홍해를 가르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도자 모세는 백성들로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하였고, 지팡이를 들어 바다를 갈랐습니다. 힘들어도 앞으로 나아가는 자만이 하나님의 하시는 기적을 체험한다는 믿음이 예를 보여주었습니다. 두렵다고 뒤로 가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살아도 평생 노예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믿음 없는 백성들은 강을 마른땅 밟듯이 건넌 후에도 광야생활에서 목 마르고 배고프고 힘들 때마다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불평불만을 합니다. 불신과 죄의 원심력이 그렇습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옛날로 뒤돌아가려는 육신의 속성입니다. 안일한 속성, 게으른 속성, 불신... 누구나 다 있습니다. 제자들도 주님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는 실망과 근심과 두려움 속에서 다시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을 보면 뒤 돌아보거나 한 걸음도 물러선 적이 없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하실 때에도 ‘조금 나아가사(마태26:39),기도 마치신 후에도 자기를 잡으러 오는 자들을 향해 ’일어나 함께 가자‘(마태 26:46), 빌라도는 재판정에서 예수를 놓아주고자 하였지만 예수님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으시고 변명 한마디 않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내려오라고 조롱 하였지만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 모든 것을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루셨습니다(요한 19:30).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고 앞으로만 나아가셔서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다 다음 주 제가 한고운 수련회에 말씀을 맡았습니다. 처음에는 군산이라서 가보려는 마음을 가졌는데 장소가 강릉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고민이 되었습니다. 목포에서 강릉이 어디 입니까? 지난 cmi 봄 수양회도 못 갔지 않습니까? 기차로 갈아타며 가는 것도 무리이고, 차를 몰고 직접 가는 것도 무리이고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라는 생각에 카톡을 보냈습니다. “박목사님 아무래도 이번 수양회는 무리라서 ...다음번 서쪽에서 할 때나..” 그랬더니 한참 있다 다시 카톡이 왔습니다. “이해 해요. 그래도 해영 목사님 팬들과 말씀 연주 듣고 싶은 이들 가득 합니다. 부디 오시기 바랍니다. 누가 말씀을 전하리이까 ‘해외 아닌 국내이오니 고정하시고 오시옵소서. 순서 다 만들었습니다. 통일 되면 신의주 백두산은 아니 가시겠습니까? “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다가 지원군 김효주 선교사님께 카톡을 보내드렸더니 너무 멀면 가지 마시지요 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같이 가지요 합니다. 결국 멀다는 핑계로 물러설 수는 없겠구나 하며 생각을 돌이켰습니다. 기다리는 팬들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거리 문제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습니다. 어떻게 무리 없이 지혜롭게 유익하게 김효주 선교사님과 다녀올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은 힘들면 상황이 어려우면 뒤로 물러나려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뒤로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앞으로만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힘들어도 앞으로 나아가며 도전하고 싸우는 적극적 자세를 취하는 것이고, 이런 믿음이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믿음인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앞으로만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들 되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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