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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창의 <앎엔삶> 중에서
둘. 나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우리가 살면서 늘 집중해야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왜’와 ‘어떻게’입니다. 이 일을, 이 공부를 ‘왜(why)’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이유가 삶의 목표와 목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다면 ‘어떻게(how)’ 해야 하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어떻게’는 방법입니다. ‘어떻게’를 아는(know) 것이, 노하우(knowhow. 비법)입니다. 비법이란 비밀스러운 방법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나만의 비밀스러운 방법을 터득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의 질이 큰 차이가 납니다. 나를 아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공부와 삶이 자욱한 안갯속에 갇혀 방향과 출구가 보이지 않아 답답하고 힘들 때, 좀 더 수월하게 출구를 찾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why. 목적)’와 ‘어떻게(how. 방법)’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왜’와 ‘어떻게’ 사이를 열심히 왕복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왜 하지? 이 공부를 왜 하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지? 철옹성 같은 이 성벽을 어떻게 무너뜨리지? 이 장애물을 어떻게 넘지? 목적이 선명치 않을 때는 분명한 방법과 수단을 찾고, 방법이 선명치 않을 때는 분명한 목적과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하우(how)와 와이(why)’를 ‘하와이(Hawaii)’처럼 여행하다 보면, 짙게 드리워졌던 동해의 해무(바다 안개)가 아침 햇살에 스르르 풀리듯 문제가 저절로 풀릴 것입니다.
1) 기도는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기독인)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을 창조한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나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나를 만드실 때 나름의 이유와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만드신 분께 내가 어떤 존재이고, 어떤 이유와 목적을 갖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간절한 기도로써 여쭈어야 합니다. 분명한 믿음을 갖고 여쭈어야 합니다. 이 기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는 동안에 놓치지 않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나는 어떤 모습을 가졌고 어떤 옷이 몸에 잘 어울리고 어떤 색깔로 살아야 하는지 선명히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 인도하심을 따라가면 우리는 영롱한 무지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신앙(信仰)은 믿고[信] 받드는[仰] 일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은 ‘기독(基督. 예수그리스도)’을 구세주(救世主)로 믿고 받드는 사람입니다. ‘기독(基督)’은 ‘그리스도’를 가차자(假借字)로 쓴 것입니다. 가차자는 뜻글자인 한자가 소리 나는 대로 적기 어려울 때, 억지로 비슷한 음(소리)을 빌려와서 쓰는 한자 표기 방식 가운데 하나입니다. 가차는 “이 놈을 가차 없이 처단하라!” 할 때의 그 가차입니다. 믿고 기도함을 통해 자신의 정체(본모습)를 거울처럼 보여 달라고 예수님께 간구(간절히 바라고 구함)해야 합니다.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산도 옮길 수 있습니다. 중국의 고사(유래가 있는 옛날의 일) ‘우공이산(愚公移山)’은 “어리석은 늙은이가 산을 옮긴다.”는 뜻입니다. “어떠한 어려움도 굳센 의지로 밀고 나가면 극복할 수 있으며, 하고자 하는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지만 그 중심에 ‘믿음’이 있습니다. 산을 옮길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믿음에 하늘이 감동하여 산을 옮겨 주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하나님도 믿어야 하지만, 나 자신도 믿어야 합니다. 내가 나를 믿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태생적으로 믿는 것에 반응합니다. 동물이 우두머리를 따라 낭떠러지라도 가는 것은 우두머리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돈의 힘을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나를 믿지 않으면 남도 나를 잘 믿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본능적으로 압니다. 된다고 믿고 하면 될 가능성이 높고, 안 된다고 믿고 하면 안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기 과신’이 지나치면 안 되겠지만 ‘자기 확신’은 꼭 필요합니다. 역사적으로 ‘자기 과신’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실패하거나 패배했지만, ‘자기 확신’을 갖고 끝까지 행동한 사람들은 때때로 ‘미쳤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대부분 성공했습니다. 내 안의 나는, 내가 술래가 되어 찾아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로써 자신을 찾기 바랍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기도로써 찾고 구하기 바랍니다.
2) 성격과 성향, 나는 어떤 기질을 갖고 있는가?
그러면 어떻게 나만의 특징을 찾아서 끄집어낼 것인가? 우선 나의 성향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조금씩 다른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같거나 비슷한 성향도 있습니다. 성향(性向)이란 ‘성질에 따른 경향’을 말합니다. 성질·기질·성격·성품과 비슷한 말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성격과 성품이 다릅니다. 손가락의 지문처럼 사람은 저마다 구별되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어떤 성향을 지닌 존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격은 “나는 무엇이 남과 다른가?”입니다. 기질(氣質)은 “내 기운(氣運. 힘)의 원천(質) 무엇인가?”입니다. 내 기질에 따른 노력과 공부, 일이 나를 영화롭게 합니다. 나를 복되게 합니다.
기본적으로 나는 경쟁을 즐기고 좋아하는 성향인지, 아니면 경쟁을 꺼리고 싫어하는 성향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대체로 스포츠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경쟁을 즐기는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경쟁을 꺼리고 싫어하는 성향을 지닌 사람이 외판원이나 자동차 딜러, 보험설계사 등을 하면 소위 머리에 쥐(마비)가 납니다. 그런 사람은 그런 직종의 직업에서 일하는 것을 버거워합니다. 심하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나는 외향적인지 내향적인지, 나는 감각형인지 직관형인지, 나는 사고형인지 감정형인지, 나는 판단형인지 인식형인지, 나는 계획형인지 자율형인지, 나는 현실형인지 이상형인지, 나는 꼼꼼이인지 덜렁이인지, 나는 성취 지향형인지 안정 지향형인지, 우뇌형인지 좌뇌형인지 등등 나의 타고난 성격과 기질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성격과 지질은 다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서로 다릅니다. 일란성 쌍둥이라도 성격이 다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다른 것이 반드시 틀린 것도 나쁜 것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나의 성향을 파악하는 것은 남녀가 미팅할 때 어떤 상대를 택할 것인지와 같은 것입니다. 나의 성향을 알아야 나에게 맞는 파트너를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성향을 알아야 내가 장래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성향에 맞는 직업을 택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그 일을 지속적으로 오래도록 할 수 있습니다.
본래 타고난 성격이나 성품(성격)을 천성이라고 합니다. 천성과 비슷한 말이 본성과 근성입니다. 학자들에 따라서 조금씩 견해가 다르지만, 천성은 타고나기(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다)에 좀처럼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주변 여건에 따라서 본인의 의지와 노력으로 조금은 변화될 순 있지만, 근본적인 성향은 그대로 유지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타고난 성격에 맞게 전공과 직업을 찾으면 실패할 가능성을 줄일 수 있습니다.
복잡다단(일이 여러 가지가 얽혀 있거나 어수선하여 갈피를 잡기 어렵다)한 현대와 미래 사회에서, 많은 정보를 기억하고 저장하고 살기는 힘듭니다. 따라서 내가 잘 모르면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아프면 먼저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아야 합니다. 검진 결과에 따른 의사의 처방과 치료를 받을 때 비로소 나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성향, 성격, 타고난 기질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검증이나 검사를 받는 것이 좋습니다. 대표적인 성격 검사 프로그램으로는 MBTI 성격 유형 검사, 에니어그램 검사, DSIC 성격 유형 검사 등이 있습니다. 커리어넷, 워크넷, EBS진단코칭, 서울진로진학정보센터 등에서 이러한 유형의 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늘의 무수히 많은 별들과 바다의 수많은 조개들, 언뜻 보면 서로 비슷해 보이지만 세밀히 관찰하면 모양과 무늬와 색깔이 모두 다 다릅니다. 저마다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나만의 고유한 특성으로 나만의 빛을 낼 때, 여러분의 인생은 아름다운 은하수 천체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나만의 타고난 성격과 특성으로 경쟁하기 바랍니다.
나만의 특성으로 세상에서 남과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나만의 특성으로 남다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미래의 유망한 직업 트렌드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기계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든지, 기계를 만드는 일을 하든지, 기계를 조작 또는 수리하는 일을 하든지입니다. 그 어느 때건 여러분이 기계(로봇)로 대체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순간, 여러분의 미래는 절벽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기계는 로봇, 인공지능(AI) 등으로 이해해도 무방(거리낄 것이 없이 괜찮다)할 것입니다.
자식은?
자식은,
똥 마려운 강아지 마냥
주방을 들락거리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각얼음 둥둥 띄운 찬물을 마셔도
콜라를 들이켜도
사이다를 마셔도
가시지 않는
갈증이다
오아시스가 아득한 사하라다.
3) 흥미,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나를 아는 것은, 나의 흥미를 아는 것입니다. 흥미(興味)라는 ‘흥(興)을 느끼는 재미[滋味]’라는 뜻입니다. 재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흥미입니다. 재미는 “자양분이 많고 맛이 좋다.”는 뜻을 가진 한자어 ‘자미(滋味)’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내 인생을 우뚝 일으켜[興] 세울 만큼 재미있는, 튼실한 나의 몸처럼 내 인생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만큼 맛 좋은 일이, 나의 흥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흥미’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흥미’를 적확히(정확하게 맞아 조금도 틀리지 아니하다) 알 필요가 절실합니다.
흥미는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가?”입니다. 흥미는 나의 입맛에 맞는 음식과 같은 것입니다. 흥미는 나의 인생을 맛깔나게 해줄 수 있는 중요한 식재료입니다. 모든 것은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재미란 ‘아기자기하게 즐거운 기분이나 느낌’을 말합니다. 재미란 즐거운 것입니다. 뭐든 즐거워야 잘하고 오래 할 수 있습니다. 재미를 잃으면, 흥미를 잃으면, 하는 일을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재미있으니까 하는 게임처럼, 엄마가 말려도 기어이 하고야 마는 게임처럼, 여러분은 누가 말려도 막아도 즐겁고 기쁘게 신나게 할 수 있는 일거리를, 직업을 찾아야 합니다. 이젠 일자리보다 일거리입니다. 그런 방향으로 진로를 설정해야 합니다. 대체로 성공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이 하는 일을 재미있게 합니다. 일을 놀이 삼아 합니다. 일 자체는 힘들고 어렵지만, 억지로라도 재미있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것이 현명한 삶의 전략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것들은 그들 나름의 생존전략(생존방식)이 있기 마련입니다.
흥미의 별명은 관심입니다. 관심(關心)이란 마음이 이끌리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을 끌고 가는 그 무엇이 흥미입니다. 무엇이든 흥미가 있어야 그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흥미를 잃으면 그 일을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흥미는 하는 일을 지속시키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진실입니다. 대부분의 전문적인 직업인은 일을 재미있게 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먹고살기 위해서 시작한 일도 많습니다. SBS의 <생활의 달인>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달인(達人. 고수. 명인)들의 공통된 특징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먹고 살려고 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불가피하게 선택하고 시작한 일이지만 “즐겁게 최선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더 잘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나름대로 여러 가지 방법들을 시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공자께서도 좋아하는 것이 즐기는 것을 이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내 인생길에서 일을 재미있게 하려면, 먼저 내가 재미있어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전문적인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내가 관심 있고 미치도록 하고 싶은 일(직업. 일거리)을 찾기 위해서 워크넷과 커리어넷의 직업흥미검사, 가이던스의 홀랜드진로탐색검사, 한국적성연구소의 진로흥미검사 등으로 나의 직업에 대한 흥미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그 밖에 일반흥미검사, 학습흥미검사 등 여러 종류의 흥미도 검사가 있습니다.
다소 비과학적인 방법이지만 필자가 학생들에게 권하는 것이 있습니다. “흥미란 나도 모르게 관심이 가고 즐겁게 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할 경우에 단순명료하게 자신의 흥미를 파악하는 방법으로써, 도서관이나 대형 서점에 가서 게임이나 판타지, 무협지, 만화 등 누구에게나 관심 있는 분야는 제외하고 내 마음이 나도 모르게 끌리는 분야의 책이 꽂혀 있는 곳으로 가보라고 합니다. 가서 걸음이 멈춘 곳에 있는 책을 뽑아 이리저리 뒤적거려 보라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손이 가고, 나도 모르게 저절로 자연스레 눈길이 멈추는 분야의 책이 있을 것이라고요. 그것이 전문서적이든 잡지든 상관이 없습니다. 발길과 눈길이 머문 그곳이 나의 흥미 분야일 수도 있다고, “꼭 가보라!”고 권합니다. 전문가들이 들으면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막연히 그냥 대책 없이 넋 놓은 채 살고 무의미하게 생활하기보다는 꿈쩍이라도 하면 흥미의 대상이 그들에게 반응하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입니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아는 것은 무엇을 즐기고 무엇을 마음으로 거부하는지 아는 것은 ‘자기 이해’의 매우 중요한 과정입니다. ‘마음이 끌리고 재미가 있고 즐거우면’ 그 일은 나에게 흥미가 있는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흥미는 내가 하는 일의 성공 여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돈벌이가 잘되는 일도 흥미가 없으면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반면에 돈벌이가 좀 부실해도 흥미가 있으면 지치지 않고 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일은 싫지만, 돈벌이에 흥미가 있으면 그것도 지속할 수 있습니다. 어찌하든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일 자체든 돈이든 하는 것에 ‘흥미와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속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즐겨야 이긴다.”는 말은 우리가 일평생 살면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즐겁고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이나 직업을 찾는 것은 중요하고 또 중요한 일입니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즐겁다’와 비슷한 말은 ‘흐뭇하다, 유쾌하다, 좋다, 기쁘다, 달다, 흥겹다’ 등입니다. 그리고 반대말은 ‘괴롭다, 슬프다, 지겹다’ 등입니다. 일평생 ‘흥겹게 꿀처럼 달게’ 할 수 있는 일거리와 직업을, 업종을 찾아보기 바랍니다. 일거리를 찾아보기 바랍니다. 정철의『인생의 목적어』에 나오는 말입니다. “멋진 인생이란 의미와 재미를 잘 섞은 인생입니다. 아무리 좋은 의미도 재미가 없으면 오래갈 수 없습니다.” 이처럼 의미(가치) 있고 재미있는 일이어야, 멀리 가고 오래갈 수 있습니다. 지속 가능합니다.
눈물
슬픔이 웅덩이처럼 고여 눈물이 됩니다.
기쁨이 너울처럼 몰려와 눈물을 이룹니다.
미움이 문신처럼 스며 눈물이 됩니다.
사랑이 박처럼 달려 눈물을 이룹니다.
괴로움이 산처럼 쌓여 눈물이 됩니다.
즐거움이 눈처럼 소복이 눈물을 이룹니다.
외로움이 젓갈처럼 절어서 눈물이 됩니다.
서러움이 화산처럼 복받쳐 눈물을 이룹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어느 후미진 한구석에서
기쁘고도 슬프고 미워하며 사랑이 된
괴롭고도 즐겁고 고독이 서러움이 된,
눈물이 울고 있습니다.
덩굴처럼 뒤엉켜 서로를 보듬은
눈물이 남몰래 훌쩍훌쩍 울고 있습니다
눈물이 찔찔 울고 있습니다.
4) 적성, 나는 무엇을 잘하는가?
나의 적성은? 적성(適性)이라는 말은 적합(適合)한 성질(性質)이라는 뜻입니다. “나는 무슨 일을 하기에 적합하게 태어났는가? 나는 무엇을 잘할 수 있는가?”가 적성입니다. 잘할 수 있는 능력이 적성입니다.
오리는 오리로 키워야 합니다. 닭에게 아무리 수영 교육과 훈련을 시킨다고 하여도, 닭이 오리만큼 헤엄을 칠 수 없습니다. 오리에게 아무리 달리기 교육과 훈련을 시킨다고 하여도, 오리가 닭만큼 뛸 수는 없습니다. 물론 오리와 닭을 훈련시키면 조금은 더 잘 헤엄치고 조금은 더 잘 달릴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리를 닭으로 만들고 닭을 오리로 만들려는 것은 현명한 삶의 전략이 아닙니다. 타고난 특성에 적합하게, 타고난 강점지능에 집중하는 것이 돈과 힘을 적게 들이고 원하는 결과를 얻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입니다.
나의 강점과 장점을 찾아서 그 일에 집중하면 나의 미래도 그만큼 밝아집니다. 어떤 일을, 무슨 일이든 누구나 다 잘하는 사람도 없고, 누구나 다 못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내 깜냥(스스로 일을 헤아림 또는 헤아리는 능력)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잘할 수 있는가를 아는 것, 나의 적성을 아는 것이, 나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고, 제대로 보는 것이고, 행복할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좀 엉뚱한(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가수 인순이 씨의 <거위의 꿈>이라는 노래에서, 거위는 하늘을 날고자 하는 꿈을 현실로 만들려면 먼저 몸무게를 빼야 합니다. 둘째는 날개의 근육을 키우는 훈련을 해야 하고, 매번 부리로 깃털을 가볍게 골라야 합니다. 여기서 ‘고르다’라는 것은 “울퉁불퉁한 것을 평평하게 하거나 들쭉날쭉한 것을 가지런하게 하다, 붓이나 악기의 줄 따위가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다듬거나 손질하다.”라는 뜻입니다. 부리로써 늘 날개가 가지런하도록 다듬고 손질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는 하늘을 날 수 있다는 마음가짐(마음의 자세)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마음과 깃털을 함께 가다듬어야 합니다. 마음과 깃털을 다잡아야 합니다. 매번 이 마음의 다잡음을 놓지 않고, 몸무게를 감량하고, 날개의 근육을 끊임없이(쉼 없이, 꾸준히) 키우고 깃털을 가다듬는다면, 거위의 꿈은 현실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꿈은 헛꿈이 되고 말 것입니다. 뭐든 꿈쩍하지 않으면 헛것이 됩니다. 뭐든 이루고자 한다면 꿈쩍이라도 해야 합니다. 꿈쩍도 하지 않은 꿈은 개꿈입니다.
내가 잘하는 것을 아는 것은 나를 나답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꿈은 직업으로 성취됩니다.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직업은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내가 잘하는 것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잘하니까 좋아하게 되고, 좋아하니까 잘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지만, 잘하지만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고, 좋아하지만 잘 못할 수도 있습니다. 직업의 금상첨화(좋은 일 위에 또 좋은 일이 더하여짐)는, 직업의 최선은 좋아하면서 잘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두 번째는 좋아하지는 않지만 잘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잘하지는 못하는 데 좋아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절대 가지 않았으면 하는 길, 잘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길은 만류하고 싶은 길입니다. 이 길은 막아서고 싶은 길입니다. 살아 있는 것은 그들 나름의 삶의 전략이 있습니다. 올바른 전략이 지혜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잘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을 혼동(구별하지 못하고 뒤섞어서 생각함)하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엄연히 구별된 존재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노래 부르고 듣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내가 노래를 잘 부르는 것으로 착각하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착각은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것은 오른쪽 다리가 가려운데 왼쪽 다리를 벅벅 긁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세상에는 열심히 해도 잘되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인생을 열심히 사는데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데도, 최선을 다하는데도, 결실이 뜻대로 잘 여물지 않는 일이 있다면, 위의 경우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상을 현명하게 살려면 분별력(서로 다른 일이나 사물을 구별하여 가르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흔히 ‘지혜’라고도 합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내가 노래를 좋아하는데 잘 부르지 못한다면, 나는 노래 부르는 것은 취미로 하고 더 잘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 승부를 걸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나와 내 사랑하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힘들지 않게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적성을 안다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좋아하는지 만이 아니라 무엇을 끔찍이 싫어하고 무엇을 참기 어려워하며, 무엇은 힘들더라도 인내하며 할 수 있는지 아는 것입니다.
너무나 이성적인 말인지 모르겠지만, 살면서 감성은 매우 중요한 기능과 역할을 합니다. 요즘은 감성 시대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감성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감성과 이성의 조화는 이상적이고 아름답습니다. 때로 치우친(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쏠린) 감성이나 치우친 이성은 종종 문제를 불러일으킵니다. 행복은 감성에 가깝습니다. 하고 싶은 것도 감성입니다. 느끼는 것은 감성입니다. 되게 하는 것은 이성입니다. 행복한 감성을 느끼고 싶으면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성이 필요합니다. 거위의 꿈은 감성입니다. 거위가 살을 빼고 날개의 근육을 키우고 깃털을 고르는 것은 이성입니다. 새는 날기 위해 뼛속까지 비웁니다. 감성과 이성의 조화와 균형이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할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의 분별이, 우리의 인생을 수월(까다롭거나 힘들지 않아 하기 쉬움)하게 할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것과 되는 것을 잘 분별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고달프지 않게 할 것입니다. 살아 있는 것은 그들 나름의 삶의 전략이 있습니다. 최선은 끝까지 하는 것입니다.
나의 적성을 아는 것은, 내가 세상을 버벅거리지(자연스럽게 하지 못하고 자꾸 틀리거나 머뭇거리다) 않고 사는 데 필요한 귀중한 도구로서 무사의 창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진로와 직업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성적보다 적성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처럼 “성적에 집착하지 말고 적성에 집중하라.”고 필자도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가장 현명한 삶의 전략(생존방식)입니다. 그것이 가장 명료한 공부의 전략입니다. 성적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적성에 집중하면,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분명히 알면, 내가 가야 할 길이 선명해지기 때문에 그 과녁(진로와 직업)에 집중하다 보면 성적은 덩달아 저절로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집착과 집중은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여러분이 성적에 집착하면 할수록 적성은 나와 더욱 사이가 멀어질 수 있습니다.
『맹자』의 「대학」에 나오는 말입니다. ‘심성구지 수부중불원의(心誠求之 雖不中不遠矣)’, 풀이하자면 “마음으로 간절히 바라고 구하면 비록 적중(명중)은 못 할지라도 크게 과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적에 대한 집착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적성에 집중하면 성적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습니다.
홍성훈은 『다중지능혁명』에서 “직업 분야에서의 성공이 곧 인생의 성공과 행복으로 연결됨은 물론이다. 소질과 적성은 학습 속도를 빠르게 하는데, 이는 그것이 흥미와 호기심을 증진시키기 때문이다. 소질과 적성을 찾고 그 분야에 맞는 학습을 시킬 때, 학습 속도와 성과는 엄청나게 커진다. 또한, 소질과 적성에 맞는 전공과 직업을 선택할 때 비로소 몰입과 자아실현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드디어 인생의 진정한 성공과 행복이 가능해진다.”고 했습니다. ‘소질과 적성 파악, 그 분야에 맞는 학습 → 흥미와 호기심 증진 → 학습 속도와 성과 향상 → 소질과 적성에 맞는 전공과 직업 선택 → 몰입과 자아실현 가능 → 진정한 성공과 행복 가능’으로 연결되는 연결고리의 출발점에 ‘소질과 적성’을 아는 것이 있음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대학교나 직업 현장에서, 적성을 고려하지 않은 학과와 직종의 선택으로 인해 학교를 중퇴하거나 전공학과를 바꾸거나 전직(직업이나 직무를 바꾸어 옮기다)과 퇴사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나와 잘 맞지 않는다.”입니다. 이와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는 비결이 자신의 적성 파악입니다. 적성의 파악과 집중은 현명한 생존전략입니다.
어떤 일을 잘하기에 알맞은(적합한) 능력인, 적성을 알아보는 검사(직업적성검사)는 커리어넷(https://www.career.go.kr)의 ‘진로심리검사’, ‘직업적성검사’에서 무료로 받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고용노동부의 워크넷(http://www.work.go.kr)에서도 무료로 검사를 받아볼 수 있습니다. 그 밖에 ‘다중지능적성검사’ 등도 받아 보면 나의 적성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다음의 글은 한상복의 『필요한 사람인가』에서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타고난 적성을 모른 채 뚝심으로만 밀고 나가다 결국 어느 분야에서도 평범한 사람이 되고 만다. 재능이 없는 일에 열정만으로 매달리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다른 적성을 찾는 것이야말로 가장 안타까운 일이다. 자신의 소질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 있다.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용기가 남다른 사람도 있다. 순발력이 좋은 사람도 있고, 체력이 강한 사람도 있다. 지능이 우수한 사람도 있다. 감성이 풍부한 사람도 있다.”
“신중한 자세란 자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즉, 자신의 기질을 파악하고 나아가 타고난 능력과 후천적 노력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자신의 드러나지 않은 부분까지 살피는 것을 말한다. 자신을 아는 것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된다.” 이러한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충분하다고 봅니다. 또한, 이 책에서 한상복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노력이 성공과 반드시 직결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이제 안다. 꿈과 성취도 별개라는 점을 인식하기에 섣부르게 기대했다가 상처받을 일도 적다. 그러니 내게 맞는 인생 과목을 선택해 집중한다면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만족스러운 일상 정도는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충분히 귀담아들을 만한 이야기입니다.
“당신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함으로써 스스로 과소평가하지 마라. 왜냐하면, 우리 각자는 모두 다르고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목표를 다른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두지 마라. 자기에게 무엇이 제일 잘 맞는지는 자신만이 안다.”
― 랜시 포시의 『마지막 강의』에서 ―
연탄 배달
칼바람 등지고
늙은 아비의 구부정한 등줄기같이
고달픈 골목길을
구공탄 바리바리 실은 리어카가
애벌레 나뭇가지 기어오르듯
꾸역꾸역 오르고 있다
땀에 절어 연탄 결만큼 검고 반질한 목도리에
겨울을 파묻은 늙은 어미는
말없이 밀고
구공탄 가슴속같이 구멍 숭숭한 목장갑에
가난을 숨긴 목쉰 아비는
맥없이 끌며
매캐한 막장 속 같은 삶을 나르고 있다
비바람에 내둘린 먹구름처럼 쓸렸고
미루나무 우듬지 끝에 뎅그렁 걸려
오가도 못한 방패연 같은 신세였지만
내 가족에게
검은 몸 불살라 엄동설한 막아서는
한 장의 연탄이었기에
리어카에 무동 타고 올망졸망 붙어 앉은
저 녀석들이 오늘따라 더 정겹다.
5) 가치관, 나는 무엇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가?
나의 가치관(價値觀)은? 가치관이란 ‘가치(價値)에 대한 관점(觀點)’이라는 뜻입니다. 가치는 값어치를 말합니다. 가격을 말합니다. 나는 내 삶에서 무엇에 가치(값어치. 가격. 의미)를 매기고 살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가? 돈에 가치를 높게 매기는 사람은 돈에 얽매여 삽니다. 행복에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은 행복에, 건강에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은 건강에, 얼굴에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은 얼굴에, 목숨을 걸기도 합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람은 누구나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에 가치를 부여하기 바랍니다.
인간은 누구든 가치를 높게 매기는 일이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삽니다. 나의 가치관은? “나는 내 삶에서 무엇에 어떤 일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살 것인가?”를 아는 것은 매우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같은 의사라도 돈에만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돈보다는 희생과 헌신과 봉사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성취나 성공, 명예에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관에 맞는 일을 할 때,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할 때 보람과 행복을 느낍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치 지향적입니다. ‘가치교환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얻기 위하여 ‘시간과 에너지(힘)’를 열정적으로 쏟아 붓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가치의 아이콘이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나만의 가치는 자력(磁力. 서로 끌어당기거나 밀어냄으로써 서로에게 미치는 힘)을 갖고 있어서 나를 자석처럼 끌고 갑니다. 그것을 흔히 사람들은 ‘끌린다.’라고 합니다. 나를 자석처럼 끌고 가는 ‘그 무엇’이 나를 나답게 하고, 나스럽게 하며, 나되게 하는 것입니다. 가치는 쇠를 끄는 자석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존재 목적(이유)이 되려고 애씁니다. 올챙이는 개구리가 되려 하고 번데기는 나비가 되려 하듯, 모든 미생(未生)은 늘 완생(完生)을 꿈꿉니다. 완생을 꿈꾸지 않는 올챙이는 개구리가 될 수 없습니다. 완생을 꿈꾸지 않는 번데기는 나비와 나방이 될 수 없습니다. 청소년기와 청년은 완생을 꿈꾸는 시기입니다. 개구리가 번데기가 되려고 애쓰듯 애면글면(몹시 힘에 겨운 일을 이루려고 갖은 애를 쓰는 모양)하는 때입니다. 건강한 완생을 꿈꾸는 미생은 그 자체만으로도 한 송이의 백합입니다. 미생이 완생이 되는 데 꼭 필요한 것이 나만의 일정한 직업을 갖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꿈은 직업으로 성취됩니다.
따라서 착한 가치관에 따른 직업을 갖는 것은 완생의 중요한 요건(필요한 조건)입니다. 사람들의 판단과 선택을 가르는 기준은 대체로 두 가지입니다. 시비곡직(是非曲直. 옳고 그르고 굽고 곧음)과 이해득실(利害得失. 이로움과 해로움과 얻음과 잃음)입니다. ‘나의 가치’는 내가(자신이), 이 두 가지 가운데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나의 가치관은 내 삶과 삶 속에서 접하는 어떤 대상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직업(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한 기간 동안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을 선택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이나 우선순위를 ‘직업 가치관’이라고 합니다.
『프레임』의 저자 최인철 교수는 이 책에서 지혜로운 사람의 11가지 프레임을 말합니다. 그 첫째가 “의미 중심의 프레임을 가져라.”입니다. 최인철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의 배우자감이 어떤 사람인지, 혹은 신입사원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당장 내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막연한 먼 미래가 아닌 내일 당장의 삶을 ‘의미 중심’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부모가 원하는 자녀의 배우자감이고, 회사의 인재인 것이다. 여기서 의미 중심은 가치 중심을 말합니다. 가치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은 비바람이 불어도 비바람을 탓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갑니다. 그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무의미한 삶을 사는 사람은 무가치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존재 이유와 목적을 모르기에 사소한 일에도 크게 흔들립니다. 의미와 가치가 지혜를 호출합니다.
직업가치관검사는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커리어넷의 ‘진로심리검사’, ‘직업가치관검사’에서 무료로 받아볼 수 있다. 또한, 고용노동부의 워크넷에서도 무료로 검사를 받아볼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여러 경로를 통해서 개인적으로 받으면 됩니다.
스마트폰
오랜 젓가락질로
잘 숙달된 엄지와 검지를 써서
내리고 또 올리고
오므리고 또 벌리며
물안경으로 바닷속 보듯
세상을 속속들이 본다
세상과 소통에 혹여나 밑질까
족대로 물고기 잡듯 샅샅이 훑고 훑는다
뭐든 막힌 것은 고통이기에
말을 거두고 숨소리도 죽인 채
눈길 멈춘 그곳은, 스마트폰
눈빛이 샛별처럼 초롱초롱하다
벌써 앞과 옆은 잊은 지 오래
나도 잊은 지 오래
세상만 독도처럼 우뚝하다
잔별
땅속 나무뿌리처럼
정말로 소중한 것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사랑하는 마음처럼
너무나 귀중한 것은
자라목처럼 감추고
잘 보여주지 않는다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은
밤하늘 은하수 잔별처럼
보일 듯 말 듯
항상 가물가물한다
찔레꽃
창밖의 나팔꽃처럼 얼굴을 들이밀고
나 보란 듯 뽐낼 것이 어느 하나 없어
늘 중심에서 멀찍이 물러나
오솔한 산기슭이나 시냇가에 뒤뜰에
새색시처럼 수굿이 핀
하얀 찔레꽃은
장미처럼 곱고 세련된 꽃잎도
라일락같이 관능적인 향내도 없습니다
가시의 날카로운 공포 무릅쓰고
애써 한 걸음 다가가 킁킁대야
분내처럼 은은히 전해오는 자잘한 향기는
찔레만의 미학(美學)입니다
부족한 듯 가득한 것이 찔레의 매력입니다
도시의 울창한 빌딩 숲 속에서
찔레꽃 한 다발 가득 엮어
오월이 다 가기 전에
친구에게 선물하고 싶습니다
6) 재능,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
천부적(天賦的. 하나님께서 우리 개개인에게 거저 주신)인 성질이 ‘재능(탤런트. 달란트)’입니다. 스위스의 철학자 아미엘은 “남이 하기 어렵다고 하는 것을 쉽게 하는 것, 그것이 재능이다.”라고 했습니다. 재능은 하늘로부터 선물처럼 거저 주어진 것이기에, 조금만 건드려도 이내 반응하며, 적은 노력에도 쉽게 꽃이 피고 잘 열매를 맺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천부적 재능을 제대로 알고 그 재능의 계발에 몰두(어떤 일에 온 정신을 다 기울여 열중함)하면, ‘돈과 힘(노력)’을 적게 들이고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될 수 있습니다. 나의 인생을 내가 뜻하고 간절히 소망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자존감은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행복할 가능성이 큽니다.
“사슴은 맹훈련시켜도 결코 사자를 만들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사슴은 사슴에 맞게 키우고, 사자는 사자에 맞게 키워야지, 사자를 키워서 사슴을 만들 수도 없고, 사슴을 키워서 사자를 만들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자는 사자로서 태어난 것이고 사슴은 사슴으로서 태어난 것입니다. 이 점을 되도록 명확하고 빨리 아는 것은, 삶을 술 취한 듯 비틀거리지 않고 살 수 있는 비결입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는 속담처럼 아무런 재주가 없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도 반드시 ‘한 가지 재주’는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한 가지 이상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위에서 말한 성격검사, 흥미검사, 적성검사, 가치관검사 등 통해 ‘나’를 조금이나마 객관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나만의 색깔을 선명히 아는 것입니다. 나에게 어떤 옷이 잘 어울리는지, 나에게 어떤 옷이 잘 맞는지 아는 것입니다.
결혼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원하는 사람과 만나서 결혼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내가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사람은 나보다 여러 가지 여건이나 조건이 나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여건과 조건과 기준이 차이가 나니까 서로가 잘 맞지 않는 것입니다. 행복한 결혼의 핵심은, 내가 바라고 원하는 사람을 만나려 애쓰기보다 나와 얼마나 잘 어울리고(서로 잘 조화되어 자연스럽게 보이다) 잘 맞는 사람인가의 여부(그러함과 그러하지 아니함)라고 봅니다. 결혼은 서로의 생각과 가치관과 여건과 조건이 다른 두 사람이, 보폭을 맞추어 걷듯 ‘조심조심 맞추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으로 자박자박 걸어가는 발걸음입니다.
행복한 성취를 이룬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재능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내어, 그 재능을 집중적으로 계발하는 데 힘을 다 쏟은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은 각자 고유한 기능(재능. 재주. 탤런트)이 있고 그 기능을 잘 실현할 때 최선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학당에서 말했습니다. 최재천 교수는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에서 ‘알고 나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 심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알면 내가 나를 사랑하게 됩니다. 나의 재능을 알면 ‘나의 재능’을 ‘나 스스로’를 애지중지하면서, 어미가 새끼를 보듬고 키우듯 키웁니다. 충분한 사랑을 먹고 자란 생명체는 건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천부적으로 선물처럼 받은 재능을 알려고 노력하고, 그 재능을 잘 키우려고(실현. 성취. 이루어짐) 발버둥을 하고 몸부림칠 때, 재능은 새벽의 햇살로 내게 다가올 것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며 내 고유의 기능(재능)을 잘 발현해(속에 있거나 숨은 것이 밖으로 나타나거나 그렇게 나타나게 함) 나갈 때, 비로소 나는 세상의 온갖 벽을 넘고 별이 되는 것입니다. 앞이 캄캄한 벽을 넘어야 세상에 빛나는 별이 됩니다.
재능을 찾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검사 방법으로는 다중지능적성검사 등이 많이 활용됩니다. 하버드대학교의 교육심리학과 교수인 하워드 가드너는 ‘다중지능이론’이라는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다중지능(MI)이란, “한 가지 혹은 그 이상의 문화권에서 가치 있는 산물(일정한 곳에서 생산되어 나오는 물건)을 생산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으로서, 일상생활에서 직면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해결해야 할 문제를 발견하는 능력, 문화 속에서 가치 있다고 인정되는 것을 만드는 능력 등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결국, 다중지능이란, 현실 속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거나 가치가 있다고 인정할 만한 뭔가(산물)를 만드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홍성훈은 『다중지능혁명』에서 “다중지능은 누구든 각자 갖고 있는 잠재능력을 최대한 계발하여 자아실현을 이룸으로써 모두가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지능이다.”고 하며 “다중지능을 알면 아이의 미래가 달라진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다중지능이론에서 ‘지능’은 IQ(지능지수. Intelligence Quotient)의 의미보다, ‘재능’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그래서 가드너는 ‘재능이 곧 지능’이라고 했습니다. “각자 갖고 있는 다양한 재능이 바로 지능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저마다에게 선물로 거저(그냥) 주신 ‘재능(탤런트. 달란트. 끼. 지능)’이 있습니다. 천부적인 재능(지능)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그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나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지능)이 있습니다. 하워드 가드너 교수는 이러한 재능을 ‘지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 지능은 8~9가지 정도 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가운데서 2~3개 정도가 뛰어나다고 합니다. 그 뛰어난 지능을 강점지능(강점재능)이라고 합니다. 강점지능에 대한 집중이 자신을 영화롭게(몸이 귀하게 되어 이름이 세상에 빛날 만하다) 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거저 주신 것 재능(탤런트. 달란트. 끼)을 잘 계발하고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무엇보다 ‘돈과 힘’을 적게 들이고 공부하고, 또한 하고자 하는 일에서 성취와 성공을 이루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마다에게 재능을 주신 이유는 저마다에게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을 소명(召命. 부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로 소명이란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서 맡기신 일이 소명입니다. 그 소명을 이루는 방편(수단과 방법)이 재능(탤런트. 달란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의 소명은 ‘남을 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듯 네 이웃(세상)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 저마다에게 주신 재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든, 남을 위하는 일을 하든, 그렇게 사는 것이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이 될 것입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배우기를 좋아합니다. 저의 삶의 기준 가운데 하나가 “배워서 남 주자.”입니다. 저와 친한 분은 “벌어서 남 주자.”입니다. 저는 배우려고 애쓰고, 그분은 벌려고 애씁니다. 배우든 벌든 그 방향과 도달점은 ‘남’입니다. 재능을 찾고 그 찾은 재능으로 직업과 직종에서 일정한 성취와 성공을 이루고, 그 성취로 소명을 감당하는 삶은 가을 사과처럼 맛과 향이 상큼합니다.
숲
초목이 우거져 어둑한 숲에도
손금처럼 길이 있다
누가 만든 길인지
길 이름이 뭔지
알 길 없지만
이유 없이 만든 길은 없습니다
그 이유를 따라 타박타박 걷다 보면
산과 시내를 만나고
자연과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만나고
낭떠러지와 꼭대기도 만나고
하나님도 만난다
누구든
숲에 가면 손금 보듯 골골샅샅이
길을 낸 이유를 생각하며 걸을 일이다
5월
5월은
비 갠 하늘의 햇살처럼
멋모르고 와작 베어 문 풋살구처럼
싱그럽습니다
5월은
갓 잡은 제주 은갈치처럼
기장 멸치 털 때처럼
파닥거립니다
5월은
수줍은 많은 소녀의 말간 웃음처럼
연초록 떡갈나무잎의 가는 떨림처럼
풋풋합니다
5월은
들판의 파릇한 보리처럼
텃밭의 푸릇한 쑥갓처럼
상큼합니다
풋내 물씬한
5월이
뒷산의 산꽃 같습니다.
7) 강점지능, 다윗은 돌팔매질의 명수
강점은 ‘남보다 우세하거나 더 뛰어난 점’입니다. 장점 또는 주특기라고도 합니다. 주특기는 주된 특기(남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기술이나 기능)입니다. 남보다 우세하고 뛰어나며 남이 갖지 못한 것, 그것이 강점(장점)입니다.
성경 속의 다윗은 어린 시절 목동(양치기)이었습니다. 목동의 주된 임무는 양이나 염소 등과 같은 가축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가축을 먹이고, 우리(울타리의 안쪽)에서 풀밭으로 풀밭에서 우리로 몰고 다니고, 또한 늑대나 여우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휘파람 소리를 내어 가축에게 신호를 보낼 수 있어야 하고, 항상 손에는 막대기나 지팡이를 들고 다녀야 하고, 더 멀리 있는 가축을 필요한 장소로 인도하기 위해서 주변의 돌멩이를 던지거나 새총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골리앗)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고대사회에서 돌멩이로 적을 공격할 때에 돌을 장전하는 데 사용하던 가죽이나 천으로 된 도구)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개역개정판 성경의 사무엘상 17:48~49)”,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돌을 하나 꺼낸 다음, 그 돌을 무릿매로 던져서, 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맞히었다. 골리앗이 이마에 돌을 맞고 땅바닥에 쓰러졌다(표준새번역 성경의 사무엘상 17:49).”
이러한 근거로 볼 때,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손에 칼이 없었습니다. 골리앗을 블레셋의 싸움 돋우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소설『삼국지』의 여포나 장비처럼 선봉장이라는 말이겠지요. 이스라엘과 블레셋(팔레스타인)의 전투에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선봉장으로, 골리앗은 블레셋의 선봉장으로 나섰던 것입니다. 골리앗은 큰 덩치에 칼, 단창(짧은 창), 장창(긴 창)에 갑옷까지 입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칼도 없이 손에 막대기(유목민은 막대기와 지팡이가 필수품) 하나 달랑 들고 있었고, 물매와 주머니에는 매끄러운 돌멩이 다섯 개가 있었습니다.
물매는 ‘슬링(sling)’이라고도 합니다. 네이버의 지식백과사전에 의하면, “슬링은 투석(投石) 끈이라고도 불리는 무기로서, 끈 가운데에 탄환을 싸는 가죽이나 천이 있고 그 끝에 끈이 붙어 있는데 마치 안대 같은 모양이다. 구조는 매우 간단해서 전체 길이는 1m가량이고 무게는 0.3㎏이 채 안 된다. 슬링은 기다란 가죽이나 천에 돌을 놓고 한 손으로 받쳐 든 뒤 다른 한 손으로는 끈의 양쪽 끝 중 한쪽을 둘째 손가락에 건다. 그리고 이 손에 또 다른 한쪽을 쥔 뒤에 돌받침의 역할을 했던 손을 떼고 머리 위에서 휘둘러 돌이 가속하게 되면 손을 놓는다. 그러면 가속이 붙은 돌이 표적을 향해 날아간다. 이렇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훈련이 필요하지만, 돌을 날리는 정도라면 비교적 간단하게 습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정확하게 상대를 맞히려면 상당한 숙달이 필요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물매(슬링)는 가운데에 돌과 같은 탄환을 싸는 가죽과 천이 있고 그 양쪽으로 줄을 늘여서 그것을 잡고 머리 위에서 돌리다가 그 관성력과 가속성이 붙은 상태에서 한쪽 끈을 놓아서 그대로 돌을 날리는 무기였습니다. 물매를 다루는 기술은 양 떼를 몰거나 사자, 늑대 등과 같은 맹수들을 물리쳐야 했던 다윗과 같은 양치기들에게 꼭 필요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싸움을 할 때는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그가 믿던 ‘하나님’의 이름으로, 골리앗은 블레셋 신들의 이름으로 싸웠습니다. 그리고 고대사회에서 싸움할 때는 욕을 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상대의 가장 소중한 존재를 모멸하는 것입니다. 욕은 상대방을 흥분시켜 판단력이 흐려지게 하여 싸움에서 유리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의 내용에 의하면,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사람은 골리앗이었다. 골리앗이 먼저 흥분한 것입니다. 먼저 흥분했다는 것은 싸움에서 질 가능성이 높은 것이겠지요. 이때 다윗은 잡고 있던 막대기를 놓고, 골리앗을 향해 뛰어나가면서 주머니에 몰래 감추어 두었던 돌멩이(짱돌?)를 물매로 미간(급소에 해당)을 정확하게 타격(때려 침)했습니다. 돌멩이가 이마에 박힌 골리앗은 혼절했고, 그 틈에 골리앗의 칼을 빼내어 그 칼로 골리앗을 죽였습니다.
필자가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 이유는 일이든 경쟁이든 싸움이든 경기든 나의 강점지능(장점)으로 해야 승리하고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성공에는 결정적 계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블레셋 군대와의 싸움에서 전사한 사울 왕(고대 이스라엘 민족의 초대 왕)이, 한때 죽이려고까지 했던 다윗에게 왕위를 계승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역사적으로만 볼 때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수였던 블레셋 사람들(골리앗을 포함하여)을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망이 두터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강점은 ‘남보다 우세하거나 더 뛰어난 점’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강점으로 골리앗과 싸웠습니다. 다윗이 골리앗보다 뛰어난 점은 ‘빠르기(속도)’입니다. 싸움에서 ‘속도와 정확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윗은 ‘말단비대증’이라는 질병으로 거인이 된, 골리앗의 단점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먼저, 속도가 느리다는 것이고, 시력이 나쁘다는 것과 이마(미간)가 불쑥 튀어나왔다는 점 등입니다. 투구 및 갑옷으로 무장한 골리앗과 붙어서 싸우는 접근전으로는 승산(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었습니다.
다윗은 원래 목동이었습니다. 검도를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칼로써 전투를 할 정도가 되려면 오랜 숙련 기간이 필요합니다. 칼과 창은 목동 다윗이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니었습니다. 투구와 갑옷은 방어에는 유리하지만, 공격에는 불편한 장비입니다. 목동으로서 양 떼를 모는 과정에서 잘 단련된 체력과 돌팔매질(물매질)은 다윗의 가장 큰 강점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강점으로써 골리앗의 단점을 빠른 속도로 파고들어 정확히 급소를 타격함으로써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의 마음의 중심에는 그가 믿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올바른 마음의 중심이 그가 이스라엘 최고의 왕이 되게 했을 것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삶이 간절한 사람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나의 강점과 약점을, 장점과 단점을 압니다. 현재의 위치가 어딘지 분명하면 가야 할 방향도 선명해집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강점과 장점을 알면, 내가 진학해야 할 학과와 가져야 할 직업과 직종이 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소 비과학적이긴 하지만, 나만의 주파수를 찾기 위해 안테나를 이리저리 돌려보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다음에서 말하는 내용들이 나의 내면(속. 심층)에서 기웃거리면 나의 강점지능일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한다. 중심이 있다. 하는 것을 즐긴다. 도무지 오래 한다. 이상하게 재미있다. 발전적이다. 불끈불끈 도전적이다. 나도 모르게 끌린다. 하면 힘이 난다. 방향이 분명하다. 목표가 구체적이고 선명하다. 간절하다. 모르면 스스로 배운다.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의욕이 생긴다.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다. 그냥 열심히 한다. 하면 행복하다. 누구에게 그것에 대해 막 이야기하고 싶다. 나도 모르게 관심과 눈길이 간다. 자석처럼 당긴다. 깊숙한 진정성(진실성)이 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한다. 모르면 알려고 노력한다. 궁금해서 못 견딜 지경이다. 성실히 한다. 꾸준히 한다. 쉼 없이 한다. 호기심이 간다. 궁금하다. 꿈틀거린다. 심장이 벌렁벌렁 뛴다. 피가 끓는다. 느낄 수 있다. 갈증을 느낀다. 설렌다. 그립다. 누가 뭐래도 묵묵히 한다. 타인의 말에 아랑곳(참견. 개입)하지 않는다. 올인(all in)하고 싶다. 의욕이 철철 넘친다. 생기(싱싱하고 힘찬 기운)가 돈다. 생기가 발랄하다. 활기가 넘친다. 눈빛이 다르다.” 이와 같은 단어들이 공통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재능, 적성, 흥미, 강점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런 일을 하면 가슴이 뛰고 쉽게 지치지 않으며, 어려움과 걸림이 있어도 뛰어넘고 이겨낼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하는 일이 오래갑니다. 또한,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인내하고 이겨냅니다. 실수와 실패를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자신의 약점을 보완해 봐야 평균밖에 되지 않는다. 차라리 그 시간에 자신의 강점을 발견해 이를 특화(特化. 전문화)시켜 나가는 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지혜다. 약점을 보완하는 것이 강점을 더욱 강화하는 것보다 더 많은 기회비용이 든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약점(단점)을 보완하는 것보다 강점(장점)을 키우는 것이 더 현명한 삶의 전략이다.”라고 말합니다.
다만 한 가지 꼭 주의해야 하는 것은 나의 약점과 단점이, 강점과 장점이 가는 길에 태클을 걸 정도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강점과 기질에 맞는 직업이 나에게 가장 유망한 직종입니다. 분명한 것은 나의 약점만 쳐다보고 남의 강점만 동경하면 결코 방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씨앗 속에는 생명이 있지만, 육안(맨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내 속에 있는 나만의 씨앗(강점)이 웅크리고 있습니다. 그것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사람은 나 자신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재능(강점)에 열정을 더하라. 재능이 깃든 곳에 열정이 알을 품는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거나 성공하거나 승리하거나 그래서 행복해진 사람들은 한결같이(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꼭 같이) 자신이 타고난 재능과 강점을 분명히 알고, 그것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열정(열성), 정열(가슴속에서 맹렬하게 일어나는 적극적인 감정)을 다 바쳤던 소박한 인간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생존방식이었습니다.
반면에,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나의 내면에서 서성대고 있으면 그것은 나의 취약점 또는 단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 못하게 된 이유와 변명을 잘한다. 핑계를 댄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머리에서 쥐가 난다. 가슴이 답답하다. 멀미가 난다. 어지럽다. 자주 ‘아몰랑(아, 나도 모르겠어의 줄임말로 주로 곤란한 처지, 변명거리나 이유, 팩트가 없을 때 사용됨)’한다. 쉽게 포기한다. 별로 관심이 없다. 시큰둥하게(달갑지 아니하거나 못마땅하여 시들하다) 반응한다. 나도 모르게 몸과 머리에서 자꾸 밀어낸다. 할수록 힘들다. 짜증이 난다. 지겹다(넌더리가 날 정도로 지루하고 싫다). 에너지의 소진이 빠른 것 같다. 유심히 보지 않는다. 건성(진지한 자세나 성의 없이 대충하는 태도)으로 대한다. 회피하고 싶다. 외면하고 싶다. 정면으로 맞서기 싫다. 오래 하기 어렵다. 용기가 나지 않는다. 자신(自信.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다거나 어떤 일이 꼭 그렇게 되리라는 데 대하여 스스로 굳게 믿음. 또는 그런 믿음)이 없다. 여러 구실을 대며 변명한다.’’
세상은 스스로 하는 것을 원합니다. 일은 누가 시켜서 하기보다 스스로 알아서 할 때 힘이 납니다. 힘이 나니까 힘이 적게 드는 것입니다. 뭐든 스스로 할 때 즐겁습니다. 대체로 강점지능으로 일을 하면 스스로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강점지능으로 일하면 자신감 있게 할 수 있고 일이 재미가 있습니다. 강점지능으로 스스로 일을 알아서 그리고 찾아서 하니까 직장에서 인정받기 쉽습니다. 인정을 받으니 더 열심히 하게 되고, 일에 선순환(좋은 현상이 끊임없이 되풀이됨)이 일어나서 나도 모르게 내가 잘되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약점과 단점으로 일을 하면, 한마디로 그 일이 싫습니다. 그러니 자발적으로 하지 않게 되고, 누가 억지로 강압적으로 시켜서 하는 일은 항상 힘보다 짜증이 먼저 나기 마련입니다. 일과 공부가 즐겁지 않습니다. 즐겁지 않고 짜증이 나니 일을 강압적으로(?) 시킨 ‘그 누구’를 탓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되면 일로 인해 사람들과의 관계가 불편하게 되거나 나빠지게 됩니다. 관계가 불편하고 나빠지니 도와주는 이가 별로 없게 됩니다. 도와주는 이가 별로 없어 혼자서 전전긍긍해야 하니, 일(업무)이 더욱 힘들고, 일이 힘드니 관계는 더욱 악화되는 일과 관계의 악순환(나쁜 현상이 끊임없이 되풀이됨)이 생깁니다.
목동이었던 다윗은 물매에 장전한 돌멩이로 골리앗과 싸워서 이겼습니다. 물매질(돌팔매질)은 늘 하던 것이었고, 그래서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던 강점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나의 강점과 장점으로 승부수(판국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수)를 던져야 합니다. 나의 인생은 나의 것입니다. 누구나 한 번만 살다 갑니다. 이렇게 소중한 나의 인생을 부화뇌동(附和雷同. 자신의 뚜렷한 소신 없이 그저 남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을 의미함)하며 남이 한다고 남이 잘된다고 그러니 나도 잘될 것 같다고 착각하고 사는 것은, 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선택은 나의 몫입니다. 부화뇌동하는 것도 내가 선택한 것입니다. 태어난 것을 제외하고, 내가 선택하지 않은 나의 인생은 별로 없습니다. 선택은 반드시 결과를 동반합니다. 나에게 맞는 진정한 길을 찾고 끈질기게 그 길을 가라고 권합니다. 스스로 생각해서 판단하고 결정하여 자신의 책임 아래 행동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꿈을 성취하고 성공한 사람의 대부분은 자신의 강점으로 승부를 걸었습니다. 내가 잘하는 것이 나의 경쟁력이고, 나의 홈그라운드이고, 나만의 스펙입니다.
8) 인성, 인간 됨됨이
인성이란 무엇인가?
인성은 인간만이 가진 속성입니다. 인성은 인간다움입니다. 인성(人性)이란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품성입니다. 품성은 성품이라고도 합니다. 즉, 인성이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본래부터 타고난 성품, 본성을 말합니다. 인간만이 가진 속성이 인성입니다. 인성은 인간다움을 말합니다. 인간다움은 덕(德)을 나누는(分) 것입니다. 덕은 보탬을 말합니다. 덕을 나누는 것을, 보탬을 나누는 것을 덕분(德分)이라고 합니다. ‘~덕분에’는 나의 잘됨이 너로 말미암는다는 뜻입니다. ‘~때문에’는 나의 잘못됨이 너로 말미암는다는 뜻입니다. 인성은 사람이 동물과 구별되는 사람만이 가진 것입니다. 동물에게는 없는 것이 인성입니다.
인성의 기본은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또한, 자기 자신이 소중한 만큼 또 다른 나인, 남도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내가 소중한 만큼 남도 소중하다고 여기는 마음가짐이 인성입니다. 나와 너를 모두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가짐과 그에 상응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 인성입니다. 인성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지만, 그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을 교육을 통하여 끄집어내야 합니다. 끄집어내어 육성시켜야 합니다. 길러야 합니다. 가르침과 육성에는 말과 행위가 필요합니다.
‘~덕분에’를 말하는 사람에게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고 원만합니다. ‘~때문에’를 남발하는 사람에게는 모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불편합니다. 그런 사람은 피합니다. 본능적으로 꺼립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덕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에게서 내가 된다.”는 말처럼 타인을 무시하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 삶으로는 나도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인성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새는 두 날개가 있어야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동전은 양면이 있어야 돈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인성(품성)과 지성(지식과 지혜, 창의성)은 새의 두 날개나 동전의 양면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새의 두 날개처럼 인성과 지성을 겸할 때, 비로소 사람다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인성과 지성이 풍요로운 사람은 관계가 원만합니다. 인성과 지성을 제대로 갖춘 사람은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행복하게 삶을 영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행복한 삶을, 그리고 건강한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것이 올바른 인성과 남다른 지성입니다. 우리는 2016년을 보내면서, 남다른 법률 지식만을 가진 자가 얼마만큼 괴물이 되고, 국가와 국민에 해악(해로움과 악함)을 끼치는가를 캄캄한 밤하늘의 촛불처럼 명확히 보았습니다. 올바른 인성은 없고 뛰어난 지성만 가진 자는 쉽게 괴물이 됩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세상과 나라를 무너뜨리는 자는 항상 그릇된 인성과 남다른 지성을 가진 자였음을 일제강점기의 이완용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인성과 지성을 결속시켜 균형감 있는 비행이 가능하게 하는 연결고리가 감성입니다. 인성 못지않게, 지성과 감성의 발달도 병행해야 합니다. 감성은 공감 능력입니다.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공동체와 연합하기 어렵습니다. 남과 화합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건강한 개인의 삶과 건강한 사회의 유지 및 발전에 필요한 것이 인성과 지성, 감성의 고양(북돋워서 높임)입니다. 행복한 개개인의 삶과 건강한 사회의 유지에 필요한 것이 인성 함양(능력이나 품성 따위를 길러 쌓거나 갖춤)입니다.
어떻게 인성교육을 할 것인가?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본보기입니다. 좋은 본보기는 좋은 결과를 낳습니다. 나쁜 본보기는 나쁜 결과를 낳습니다. 모든 동물은 본보기를 통해서 교육합니다. 모든 동물은 본뜨기(붕어빵틀처럼)를 통해서 생존 훈련을 시킵니다. 인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성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님의 역할입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욕을 하고, 남을 무시하고 경멸하고, 약한 자를 멸시하고, 아내와 자식을 구타하고, 집기를 부수면서 좋은 인성을 가진 자식이 나오길 바란다면, 그것은 고욤나무를 심으면서 대봉감이 달리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인성교육과 올바른 인성의 육성에 부모의 역할은 절대적입니다. 대봉감나무에 대봉감이 달립니다. 고욤나무에는 고욤이 달립니다.
부모의 메마른 말보다 영혼이 깃든 부모의 언행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종두득두(種豆得豆), 즉 콩 심은 데 콩이 열립니다. 학교가 부모의 언행을 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부모의 인성은 인과응보(因果應報. 원인과 결과는 서로 물고 물린다)로 연결됨을 부모가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복인복과(福因福果. 좋은 일이 원인이 되어 좋은 결과를 얻음)로 연결됨을 깊이 인식하게 해야 합니다.
부모는 선은 선을 낳고 악은 악을 잉태함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님의 역할은 학교나 사회보다 더 중요합니다. 어려서 길들여진 입맛이 어른이 되어서도 지속되는 것처럼 인성은 어릴 때 가정에서 어떻게 습관화되는가에 따라 자녀의 평생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뿌리고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이 자연과 세상의 이치입니다. 잘 뿌리고 잘 심어야 잘 거둡니다.
아울러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은 인간을 소중하게 여길 가능성이 높습니다. 동물과 식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때때로 동물은 사랑하나,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은 사랑의 본질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입니다. 나와 남은 다른 존재가 아니라, 나와 남이 서로 보이지 않는 여러 가지의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음을 아는 사람은, 내가 소중한 만큼 남도 소중하게 여깁니다.
올바른 인성은 내가 소중한 만큼 남도 소중하게 여기고, 나를 사랑하는 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남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자연을 가까이하고, 동물과 식물을 가까이하고, 시집이나 수필집 등을 가까이하고 그 속에서 인간의 소중함을 깨닫도록 배우고 교육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공부로 인한 부담을 경감시키는 것입니다. 몸이 무거운 새인 타조와 거위는 날기를 포기했습니다. 새는 날기 위해 깃을 고르고, 뼛속까지 비웁니다. 여유와 겨를을 갖게 해야 합니다. 여유와 겨를 속에서 부모님은 자녀들과 대화해야 합니다. 때론 책이나 신문도 같이 읽어야 합니다. 책을 읽고, 신문을 읽고, 세상을 읽고, 자연을 읽고, 사람을 읽고, 그 읽고 배운 것을 자녀들과 나눌 겨를이 있을 때, 인성과 지성(창의성), 감성(공감력)은 저절로 육성됩니다. 부모님과 자녀의 진심 어린 대화, 교사와 학생의 진심 어린 대화와 소통에서 인성은, 인간다움은 시루의 콩나물처럼 무럭무럭 자라는 것입니다. 인성의 함양은 탁월한 생존의 전략입니다.
인생에 여백미가 없으면 그것은 독창적인 그림이 아니라 판박이 사진입니다. 세상은 인성(인간다움)과 지성(지식과 지혜, 창의성)과 감성(공감력)을 두루 갖춘 사람을, 인재를 찾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키우는 부모님은 명문가를 만들 것이고, 그런 사람을 키우는 학교는 명문교가 될 것입니다.
9) 목적과 목표는, 명중과 과녁의 차이
활과 화살은 명중(표적의 한가운데를 맞춤)이 목적과 존재 이유입니다. 궁사(활잡이. 활을 쏘는 사람. 활을 만드는 사람)도 명중이 목적입니다. 따라서 궁사, 활, 화살은 늘 명중을 위해 표적(과녁)에 집중(몰두)합니다. 목적(目的)은 목표(目標)가 정한 과녁[的]입니다.
이처럼 활과 화살은 과녁을 맞히는 일이 목적입니다. 명중(적중)이 있으려면 표적이 있어야 합니다. 과녁이 없으면 적중(的中. 과녁에 맞음)도 없습니다. 과녁은 목표이고 적중은 목적입니다.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은 목적입니다. 무엇이 ‘되고자’ 하는 것은 목표입니다. 목적이 목표보다 상위의 개념입니다.
의사가 되는 것은 목표이고, 질병을 치료하는 것은 목적입니다. 잘 치료의 과정에서 수입이 생기고 생계도 유지되고 명성도 납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환자를 치료하고자 하면 의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일은 대체로 무엇을 하고자 하면 무엇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이 되는 것은 합당하고 합법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 편히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의사가 되는 것과 수입(돈)만이 목적이고 목표의 전부인 사람은, 본인 물론이고 환자와 그 가족 모두를 불행하게 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람의 의료 행위는 사회에 해악(해로움이 되는 나쁜 일)을 끼칠 가능성이 큽니다.
“서울대학교의 어떤 학과에 입학한다.”는 것은 목표입니다. 목표는 구체적이고 단순명료하며 세밀할수록 좋습니다. 목표는 선명하고 분명하고 선이 굵을수록(성격이나 행동 따위가 대범하거나 통이 크다) 좋습니다. 그래야 흔들림이 적고 지속적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는 것 자체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의 삶은 그리 밝지 않습니다.
뭔가를 이루려면, 이루고자 하는 생각(뜻. 마음.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흔히 ‘의식’이라고 합니다. 의식이란 감각(느낌)하거나 인식(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앎)하는 모든 정신 작용을 말합니다. 목적을 이루고 싶으면 ‘목적의식’이 있어야 하고, 목표를 달성하고 싶으면 ‘목표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가짐(인식)이 목적의식입니다. 목적을, 하고자 하는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 목적의식입니다. 목적의 찌(물고기가 낚시를 물면 이를 곧 알 수 있도록 낚싯줄에 매달아 물에 뜨게 한 물건)를 한순간이라도 놓치지 않는 것이, 목적의식이 분명한 삶입니다.
선한 목적의식이 분명한 사람의 삶은, 길든 짧든 아름답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처럼, 이태석 신부님처럼, 법정 스님처럼, 선한 목적의식으로만, 분명하고 선명하게 사셨던 분들의 삶은 한 송이 장미입니다. 장미는 언제 시들까(꽃이나 풀 따위가 말라 생기가 없어지다) 염려하지 않습니다. 오직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목적인 아름다움과 향기를 주기 위해 집중합니다. 장미는 그렇게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고 있기에 소멸되지 않고 인간들의 사랑을 받으며 생존하고 번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장미의 생존전략(생존방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산과 들판의 흐드러진 잡초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목적의식을 놓는 일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이 땅에 씨 뿌려진 이유를 분명히 압니다. 그러기에 땅 위에 떨어지는 순간부터 새벽이슬 한 방울도 마다치 않고 다디달게 먹으며, 작열하는 태양에도 악착같이 뿌리를 뻗어 토양을 지킵니다. 잡초는 아무리 밟혀도 다시 살아납니다. 그래서 인생을 잡초에 비유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잡초가 살아야 토양이 살고, 그 토양에 더부살이(남에게 얹혀사는 일)하는 미생물과 생물도 살고, 인간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잡초처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각각의 쓰임새와 의미로 자연과 세상을 조화롭게 빛내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 모습이 어떻든 저마다의 내면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저마다의 내면에는 보이지 않는 가치를 알처럼 품고 삽니다. 그 목적과 가치를 부화(알까기)시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내는가는 온전히 여러분 자신의 몫입니다.
병원에서 수술한 환자가 의식이 돌아오느냐 마느냐는 매우 중요한 사항입니다. “의식(정신)이 돌아오다.”는 깨어 살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목적의식이 있다는 것은 목적에 대한 생각(뜻)이 늘 살아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가(一家. 여러 분야에서 독자적인 경지나 체계를 이룬 상태)를 이룬 사람들의 대부분은 목적의식이 분명한 사람들입니다.
명중(표적의 한가운데를 맞춤)시키고자 하는 목적의식이 분명한 사람은 아무리 과녁(표적)이 흔들려도 좌절하지 않고 집중합니다. 목표만 있는 삶은 헛헛(채워지지 아니한 허전한 느낌이 있다)합니다. 목적만 있는 삶은 공허(실속이 없이 헛됨)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목적과 목표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목적과 목표의 균형이 있는 삶은 방향성이 있고, 속도의 적절한 조절도 가능합니다. 목표의 존재 이유가 목적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과녁의 존재 이유는 적중에 있습니다.
목적은 전략이고, 목표는 전술입니다. 목적과 전략은 상위개념이고, 목표와 전술은 하위개념입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헌신적인 의사가 되는 것은 목적이고, 의대에 진학하는 것은 목표입니다. 전략은 목적을 위한 ‘방향’ 설정이고, 전술은 목적과 목표에 필요한 ‘수단과 방법’입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전략과 전술이 모두 필요합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때로는 전투에서 일부러 질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때때로 목표는 바꿀 수도 있습니다. 또한, 목적이 분명하면 목표도 선명해집니다. 목적과 목표가 분명하고 선명할 때 삶은 방향성과 일정한 속도가 있습니다.
10) 실존지능,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다
‘다중지능이론’이란 하버드대학교의 교육심리학자인 하워드 가드너 교수가 주장한 교육 이론입니다. 이에 의하면, 사람의 지능(재능)은 크게 8가지의 영역(언어지능, 시각공간지능, 논리수학지능, 자연친화지능, 신체운동지능, 대인관계지능, 개인이해지능, 음악지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선천적인 영향 혹은 후천적인 노력의 결과로 강한 지능(강점지능)이 있는가 하면, 상대적으로 약한 지능(약점지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워드 가드너 교수는 타고난 강점지능은 더욱 계발하고 부족한 약점지능은 보완하려고 노력하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이의 강점지능을 계발하고 약점지능을 보완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의 관심과 관찰이라는 것입니다. 관심은 사랑의 별명입니다. 사랑하면 관심을 갖고 관찰하게 됩니다. 집착과 구별되는 관심이 사랑입니다.
8가지 다중지능이론 이후, 하워드 가드너가 ‘실존지능’이라 이름을 붙여서 추가적으로 제안한 지능이 ‘9번째 지능’입니다. 이소윤·이진주는 『9번째 지능』에서 다중지능이론의 9번째 지능이 ‘실존지능’이라고 했습니다. 실존지능(‘영성지능’이라고도 함)이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타인과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내가 이 세상에 왜 존재해야 하는지,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등을 말해줄 수 있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이처럼 9번째 지능이 잘 계발된 사람들은 보는 시각과 삶의 초점이 다르다. 문제만을 보지 않고,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도리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우리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는 참된 인간성이 살아나게 하며, 자신도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살도록 만드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9번째 지능’의 역할은 다른 8가지 지능을 가장 선하고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8가지 다중지능과 함께하지 않는 9번째 지능이란 사실상 있을 수 없습니다. 즉, 다른 8가지 지능들을 완성시키는 지능이 9번째 지능입니다. 이것은 8가지 다중지능 중 어떤 사람이 몇 가지 지능과 9번째 지능이 만나면 자기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이 될 뿐만 아니라 시대와 역사를 이끌어가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고 했습니다.
정리를 하자면, 가드너의 다중지능이론 가운데 ‘9번째 지능’을 실존지능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지능이란 IQ가 아니라 재능이라는 뜻입니다. 가드너 교수는 인간은 누구나 8가지 정도의 재능을 갖고 있는데, 그 가운데 사람에 따라서 두세 가지 이상의 강점지능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강점지능을 제대로 알고 전공과 직업에 연결시키면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실존지능’은 저마다 가지고 있는 두세 가지 정도의 강점지능을 더욱 강화하고, 약점지능을 보완하며 남과 세상에 ‘덕이 되게’ 할 수 있는 지능(재능)입니다.
남과 세상에 선한 영향을 끼치겠다는 마음씨, 즉 이타적(利他的)인 마음을 갖고 사는 사람은 자신이 선천적, 후천적으로 가진 나머지 8가지 지능을 최대한 발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9번째 지능(실존지능 또는 영성지능)은 인간 존재의 이유나 참 행복의 의미 등 삶의 근원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인간은 왜 사는가? 인간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인간은 왜 싸움을 하는가? 인간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등의 질문은 논리·수학적 지능이나 언어지능이 높다고 해서 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이타성은 내 삶을 성공적이고 행복하게 이끌 수 있는 수준 높은 생존전략입니다. 살아 있는 것들은 나름의 생존전략(생존방식)이 있습니다. 실존지능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실존지능이 높은 사람들은 대부분 정서적 안정감이 높다고 합니다. 따라서 실존지능이 높은 사람과 함께 있는 사람들도 편안함을 느낀다고 합니다. 실존지능이 높은 사람은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나며 사회정의를 추구한다고 합니다. 프랑수아 드 라 로슈푸코라는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이란 ‘남의 이익을 자기 이익처럼 여기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실존지능이 높은 사람은 성공보다 행복을, 성취보다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삽니다. 실존지능이 높은 사람은 ‘나와 남을’ 동일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실존지능이 높은 사람은 승자독식보다 패자부활에 관심이 많습니다. 실존지능이 높은 사람은 나와 남의 강점지능을 본능적으로 간파하고, 그것을 계발하고, 그것에 집중하며, 그것을 잘 활용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실존지능이 높은 사람에게 사람이 모이고, 그런 사람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공동체의 리더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실존지능이 높은 인물들로 인해 발전해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결국, 성공과 성취, 행복이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능력(강점지능)을, 가장 가치(의미) 있는 일(실존지능)에 사용하며 기쁨을 느끼며 사는 것이 아닐는지요.
우리는 아이의 다중지능을 어떻게 키워주는가도 중요하지만, 아이가 그 지능(재능)을 가지고 앞으로 세상에서 어떻게 자신의 자리를 찾으며 가치 있는 일을 할지 가르치는 것도 중요합니다. 결국, 남과 세상에 선한 영향을 끼치겠다는 마음씨, 즉 이타적(자기의 이익보다는 다른 이의 이익을 더 꾀하는) 마음을 갖고 사는 사람은 자신이 선천적, 후천적으로 가진 나머지 8가지 지능을 최대한 발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설혹 어떤 사람이 8가지 모두를 강점지능으로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실존지능이 없거나 부족하면 그 강점지능을 다 이루고 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나만 살아가는 곳이 아닙니다. 남도 함께 살아갑니다. 인간은 왜 더불어 살아야 하는가? 이유는 간단합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군집생활(무리생활)을 하는 모든 생명체는 더불어 사는 것이 가장 지혜롭고, 생존과 종족 보존에 유리하다는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 유전자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실존지능의 핵심은 “내가 있으니 네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네가 있으니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소윤·이진주는 『9번째 지능』에서 “아이의 9번째 지능은 부모가 이끈다.”고 했습니다. 또한, 조세핀 김 교수의 말을 인용하여, “영성교육은 전적으로 부모가 씨를 뿌려야 하는 교육이다. 어렸을 때부터 세상과 자연, 인간과 삶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아이가 자신의 삶을 넘어 이웃과 세상,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부모의 언행과 삶의 모습을 보고 자녀는 그대로 따릅니다. 부모의 이타적인 삶을 보고 자녀도 닮아가는 것입니다. 립싱크하듯 입으로만, 말로만 하는 교육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이타적 삶의 중심에 공감이 있습니다. 공감이란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공감능력은 타인의 감정과 상황, 입장, 처지 등을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나와 남을 동일시하는 능력입니다. 공감능력은 관계의 핵심입니다.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인간관계가 좋습니다. 어쩌면 사람은 실력보다 관계력이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장례식장에서 가장 공감을 잘하는 방법은 돌아가신 분을 생각하며 상주(喪主)보다 더 서글피 우는 것입니다. 결혼식장에서 가장 공감을 잘하는 방법은 혼주(婚主)보다 더 많이 축복하고 축하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직장생활에서 많은 사람들이 업무보다 인간관계 때문에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관계력이 뛰어난 사람은 적응력도 뛰어납니다. 관계, 적응, 생활, 생존의 중심에 바로 ‘공감’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소윤·이진주는 『9번째 지능』에서 ‘9번째 지능은 공감능력이라는 말을 타고 달리는 경주’라고 했습니다. 한상복의 『필요한 사람인가』에서 관계란 엄밀하게 보면 ‘주고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이를 위해서 나의 가치(값어치 있는 것) 중의 일부를 희생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실존지능(영성지능)’은 기본적으로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나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집착이 아닌 소소한 관심이 너와 나를 덕되게 합니다.
아프리카 반투족의 말 중에 ‘우분트(UBUNTU)’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I am because you are.”, 즉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실존지능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아니다
바다는
고래와 상어만 사는 곳이 아니다
고래와 상어만이 물 만난 곳은 바다가 아니다
그래서 새우도 멸치도 산다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은
사자와 표범만 사는 곳이 아니다
사자와 표범만이 으르렁대는 곳은 세렝게티가 아니다
그래서 개미도 개미핥기도 산다
몽골 초원은
늑대와 독수리만 사는 곳이 아니다
송곳니와 발톱만 난무하는 곳은 초원이 아니다
그래서 토끼도 풀도 산다
북극은
북극곰만 사는 곳이 아니다
북극곰만 어슬렁대는 곳은 북극이 아니다
그래서 북극제비도 산다
남극은
펭귄만이 사는 곳이 아니다
펭귄만 오종종 모인 곳은 남극이 아니다
그래서, 바다표범도 산다
첫댓글 님 데받!!
정말 돌삐같은 글이네요!!
너무 맘에 와닿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