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유구국)
‘가와야 뒷동산 언덕 위에 올라,
남녘을 바라보면 멀리 고향마을이 보이는데,
그리운 임의 모습은 보이지 않네.’
‘임과 함께 지샌 밤도 날이 밝아서,
동녘 하늘에는 구름이 드리운다.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는데,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 없구나.’
오키나와(유구국:琉球國) 고유의 오페라 가와야부시(瓦屋節) 노래와 시내에 있는 시비(詩碑) 내용이다. 조선왕조실록 등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장일육, 안일관, 안심간 세 도공이 유구국 상녕왕(尙寧王)의 초청을 받아 그곳에 간다. 그러나 이들은 도자기 원료인 백토를 찾지 못했다. 안씨 두 형제는 돌아오고, 장일육만 잔류한다. 그가 첫눈에 반한 마우시와 결혼까지 시켜주며 왕이 붙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우시는 이미 결혼한 몸. 남편과 생이별한 그녀는 매달 보름날이면 뒷동산에 올라 전 남편이 있는 마을을 바라보며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시내에 세워져 있는 시비 역시 마우시가 전 남편과 이별을 하면서 부른 노래다. 오키나와 도자기‘흑도’는 장일육이 개발한 것이다. 그의 후손들은 나카지레이(中地麗)라 하여 대대로 양반대우를 받았다. 지금도 그들은 고려의 려(麗)자를 넣어 이름을 짓고, 매년 한식날 묘와 고국을 향해 절하는 풍습이 있다.
우리가 유구국과 공식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고려 창왕 때다. 그 전부터 교류가 활발했음은 물론이다. 지금도 오키나와에서는 ‘누구’가 우리와 똑같고, 엄마를 ‘암마’로 부른다. 각 섬에 있는 수리성 역시 우리말 ‘수리 떡 ’에서 비롯됐다 한다.
유구국의 멸망 역시 조선과 관련이 깊다. 1609년 임진왜란 직후 조선이 약해진 틈을 타 일본이 유구국을 침공, 속국으로 삼는다. 임진왜란 때 조선침공을 돕지 않았다는 것이 침략 이유였다. 얼마 후 유구국 왕자는 볼모로 잡혀간 왕을 구하기 위해 보물을 싣고 규슈로 향했다. 그러나 풍랑을 만나 제주에 표류했다. 이때 제주 목사가 보물이 탐나 모두 빼앗은 뒤 되돌려보냈다. 그 사건 이후 유구국과 국교가 단절된다. 그리고 1879년 일본은 유구국 왕 쇼타이를 도쿄로 압송하고, 왕정체제를 폐지한 뒤 합병했다.
첫댓글 헌이는 모리는게없다~~~한 수 배웠다!!!
나도 또 하나 배웠다 ..
나도 사실은 쥐뿔도 모르는데, 생각나는거는 대가리에서 빼끼고, 눈에 보이는 거는 책에서 빼끼고, 모르는 거는 너들 한테 물어보마 다알고, 월매나 쉽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