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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
수행-3학 |
정신 수양 - 공(空)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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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 연구 - 원(圓)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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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취사 - 정(正) |
일원상은 내 마음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고 진리라고 해도 맞습니다.
일원상의 내용, 즉, 내 마음이라는 것은 어떻게 생겼는가?
첫째는 비었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번뇌와 욕심과 습관이 많은 것이
아니라, 나의 참나는 원래 텅 빈 것입니다. 공(空).. 그리고 그 자리에
가도록 하는 것이 정신 수양입니다. 수양을 하다 보면 그 빈 자기와
힙일 할 때 극치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기의 본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수양을 하지 않으면 본래자리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머리가 너무
복잡해져서 정신이 산란해지고 머리가 아프고 우울증이 오게 됩니다.
그래서 정신 수양이 현대 사회에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둘째는 내 마음을 비우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리 연구요, 원(圓)이라고
표현합니다. 즉, 내 참마음은 비어 있으면서도 밝은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반야지를 이미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뇌는 몇 % 쓴다고 합니까? 뇌의 3%만 쓰고 죽는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똘똘한 사람인지 저는 알아요. 그런데 여러분은 그것을
잘 모른 것 같습니다. 사람은 한계 상황이 오거나 급하면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저도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모두들 대단한 능력들이
있는데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까닭은 능력을 개발하지 않고,
다듬지도 않고, 믿지도 않고, 간절하게 해보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웃기는 사실은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 중의 하나는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해보고
안 된다고 하면 괜찮은데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98%입니다. 그 중의 5%는 조금 해보고는 안 된다고 합니다.
우리의 능력은 본래 원만구족 해서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정(正)입니다. 바를 정입니다. 우리는 본래 바르다는 것입니다.
본래 순리자연 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습관과 욕심이 들어서 그렇게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일원상 진리의 생활을 하는 것이 가장 복이 있는 생활이고 지혜
있는 생활이요 가장 행복한 생활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신앙과 수행이
필요합니다. 수행은 3학 8조라고 합니다. 8조 중에서 권장하는 4가지는
신•분•의•성입니다. 정신 수양을 신•분•의•성으로 하느냐? 사리 연구를
신•분•의•성으로 하느냐? 작업 취사를 신•분•의•성으로 하느냐? 입니다.
그런데 그 작업 취사가 다시 사은, 사요와 연결이 되어야 하고 그것이
또다시 신•분•의•성으로 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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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
수행-3학 |
정신 수양 - 공(空)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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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 연구 - 원(圓) | |
4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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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취사 - 정(正)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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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요 |
---------------à 8조 |
신 분 의 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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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 탐욕 나 우 |
일상 수행의 요법을 외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까지 하려면,
즉, 신•분•의•성에서 삼학, 사은, 사요 다시 신•분•의•성까지 한 바퀴
돌려면 훈련을 해야 합니다. 생각으로 관념으로 알자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을 한다는 것은 반복해서 익힌다는 것입니다.
아까 법준 교우가 자신의 마음은 자야 한다고 하지만 눈은 TV에 있다고
했죠?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그 시간에 잡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우리 동네에 TV가 딱 3대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TV를 사왔는데 아침에 ‘동해물과~’에서
- ㅎㅎㅎ
타잔도 있고 마린보이도 있고 축구도 있고.. 얼마나 재미가 있던지..?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TV를 도로 팔아버렸죠.
그러던 제가 저녁에 잡니다. 왜 잘까요? 공부심으로 잡니다. 저는 자는
것이 훈련이 되었습니다. 훈련이 되지 않으면 TV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부심이 함께해야 합니다. 이 시간에 자는 것을 계율 같이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밤늦게 다음카페에
참 고맙다. 안 쓴 것보다는 낫겠지…?
- ㅎㅎㅎ
대종사님이
유무를 반조해서 일기를 기재하고 염불과 참회 반성을 통해서 수양을
하다가 잠들어야 하는데 TV를 보다가 자니까 꿈도 복잡하고 아침에
눈을 뜨면 전날의 드라마가 이어집니다.
현대인들은 저녁시간이 참 중요합니다. 저녁에 안 자는데 어떻게 아침에
일어나고 수양을 할 수 있겠어요? 밥도 굶고 출근하기도 바쁜데… 밥도
제때 못 먹는 사람이 어떻게 항마위로 올라갈 수 있겠어요?
나는 원불교학과에 다닐 때 한끼도 안 굶었습니다. 그랬더니 나에게
어떤 동기가 ‘자네는 밥 먹으러 왔는가?’ 라고 묻길래
‘어떻게 알았는가? 많이 알면 안 되는데..?’ 라고 답했습니다.
밥 먹는 것이 공부이고 그것이 훈련입니다.
제가 TV를 그렇게 좋아하는데도 지금은
내려옵니다. 집에서 TV를 끝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낮에 열심히
일하면 저녁에 왜 잠이 안 오겠습니까? 아침 시간을 생각해 보면
저녁에 왜 안 자겠습니까?
원불교의 훈련은 첫째, 스스로 훈련입니다. 내가 훈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서로 훈련입니다. 사람들은 훈련이라고 하면 누가 나에게
주는 규정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불교의 훈련은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 내가 스스로 하는 훈련입니다. 내가 이 법으로 반드시 서원을
세우는 것입니다.
‘나는 반드시 이생을 마감할 때 관속에 누워서
미소 짓는 사람이 되겠다.’ 또는
‘나는 몹시 싫고 괴로운 이생을 업그레이드upgrade하고
내생에는 확실하게 바꾸겠다.’
이와 같이 매우 지극하고 간절한 원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힘이 됩니다.
그 서원이 자기를 훈련하게끔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런 서원이 없으니까 훈련을 가자고 하면 핑계 대면서 안 가고
훈련을 피동적으로 생각하고 부담된다고 합니다.
훈련은 스스로 훈련.. 따라서 해봐요? 스스로 훈련.
- 스스로 훈련
서로서로 훈련.
- 서로서로 훈련
스스로 훈련은 내가 간절한 원력과 확신을 가지고 내가 주체가 되어서
하는 것입니다. 또 서로서로 훈련은 혼자서만 하다 보면 독단과 독선에
빠지기 쉬운데 서로서로 하다 보면 일은 반만 해도 공은 배가 됩니다.
사반공배事半功倍라고 하는데 일은 반만 하는데 공은 두 배니까
네 배가됩니다. 네 배만 되겠습니까? 그래서 스스로 훈련과 서로서로
훈련입니다.
내가 스스로 훈련이 되려면 원력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상시 훈련이
되려면 저녁 시간에 자야 합니다. 그것이 스스로 훈련입니다.
그렇게 하면 내가 봐도 내 자신이 예뻐집니다. 생각이 달라집니다.
신선한 생각 새로운 태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생각이 먼저 신선해야
합니다. 신선하다는 것은 내가 이생에 정말 적당히 살다 가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한 번 멋지게 살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생각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태로란? 저녁에 자는 것입니다. 행동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머리 스타일이 달라지고 옷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
안 왔는데 8년 전에 처음 보았는데 머리는 빨간 물을 들이고 청바지는
너덜너덜해서 넓은 끝자락이 땅을 끌고 허리띠는 축 쳐진 모습으로
‘교무님 저 왔어요.’ 라고 말하는데, 그때 저는 속으로
‘골치 아픈 놈 하나 왔구나 저걸 어떻게 해야 하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교무만 아니면 잘라버리는데…’
지금 바뀌었잖아요? 머리도 깔끔해지고 옷도 말쑥해졌습니다.
내가 보니까 그 교우가 마사지에 역량이 있어서 앞으로 그것만 하라고
시켰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네트워크를 만들던가 학원을 차리라고
했습니다.
제가 어저께 만났는데 이 녀석이 나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교우가 하는 말이 요즘 지정 손님이 많이 늘어 났답니다. 그래서
제가 지정 손님을 많이 만들어서 개업을 해봐라 라고 했습니다.
그 교우는 저를 만나러 올 때 샤워를 한답니다. 그리고 예약 손님이
오기 전에 먼저 샤워를 하고 마음 속으로 이렇게 기도를 한답니다.
‘사은님! 이 손님을 부처님 대하듯이 하겠습니다.’
그 기운과 태도가 다르니까 손님들이 감동을 하고 얼마 전에 손님의
초청으로 일본까지 갔다 왔답니다. 그 손님이 제발 우리 어머니를
해달라고 사정을 해서 일본까지 갔다 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태도가 달라진 것입니다. 빨간 머리하고 어슬렁거리던 놈이
달라진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훈련을 통해서.. 먼저 생각이 신선한
생각으로 바뀐 것입니다.
오늘 비가 오는데도 여기와 오셨다는 것은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시간이 한가하고 할 일이 없어서 여기에 오신 분은 한 명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말하자면 신선한 생각 그것은 간절한
서원입니다. ‘내 스스로 정말 인간답게 살고 싶다. 맑게 살고 싶다.
내 영혼을 정말 깨끗하게 하고 이 세상의 이치를 알고 제대로 살고
싶다.’는 그런 신선한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그 신선한 생각은 훈련을
통해서 됩니다. 그 신선한 생각을 놓지 않고 태도가 훈련을 통해서
바뀌는 것입니다.
명균 교우가 8년 동안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사람을 얼마나 열 받게
하든지 그 녀석은 나에게 많이 맞았습니다. 그래서 그 교우 엄마가
나에게 전화를 하면 ‘교무님 미안해요’ 라고 합니다. 그 아이 엄마는
자기 자식 때문에 내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잘 압니다. 그래서
교무님 볼 낯이 없다면서 항상 나에게 미안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맨날 저에게 여수 갓김치를 보냅니다.
지난 주에는 염불과 좌선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일주일 동안 좀
해보셨습니까? 새로운 태도는 해보는 것입니다. 과거에 묶이고 욕심에
찌들고 굳어지고 현실에 억매여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신선한 생각도
새로운 태도도 아닙니다. 그것은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 자신이 새로운 태도를 가지고 살고 싶어도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태도에 관심이 없습니다. 설사 생각이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훈련하지 않으면 그 태도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염불과 좌선을
통해서 번뇌를 녹이고 텅 빈 고요한 마음을 내가 회복해 나가려는데
어떻게 하라고 어디에 나와 있어요? 경전에 나와 있습니다.
염불과 좌선은 마음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경전은 생각입니다.
강연은 그 생각을 말로 하는 것입니다.
회화도 말로 합니다.
의두는 그 생각을 깊이 있게 합니다.
성리는 이것도 생각입니다.
정기일기는 그 생각을 글로 쓰는 것입니다.
염불과 좌선으로 마음의 번뇌를 떼고
경전을 통해서 생각을 하고
의두와 성리를 통해서 생각을 갈고 닦아서
정기일기를 통해서 그 생각을 글로 써서
다시 말로 표현하는 것이 강연과 회화입니다.
구인 제자 중에 일산 선생님이 계시는데 아주 잘 생겼습니다.
이분이 외무를 담당했었는데 워낙 인물이 좋고 키도 크고 언변도 좋아서
사람들이 만나면 다 들어줍니다. 그런데 이 분은 평생 연단에 서지
못했습니다. 이 분은 염불, 좌선 하셨습니다. 정기일기도 하셨습니다.
의두, 성리 하셨습니다. 회화 아주 잘 합니다.
그런데 이 분은 강연을 안 하셨습니다.
이청춘이라는 선진님이 계십니다. 이 분도 회화를 아주 잘하십니다.
앉아서 좌담을 하면 말을 얼마나 잘했으면 청산유수라고 합니다. 이야기
보따리를 풀면 사람들이 둘러 앉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양반이 젊을
때는 강연이 부담스러워서 강연 주제를 정해주면 아프다고 밥을 굶기
시작합니다. 그때는 얼마나 배가 고프던 시절입니까? 강연이
부담스러우니 차라리 굶고 말겠다며 강연을 피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나이를 먹고는 후진들에게 ‘너희들은 강연을 피하지
말아라. 결국에는 내가 손해를 보았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신선한 생각, 그 생각이 정기 일기에 표현됩니다. 경전은 이치와
일을 밝혀 놓은 것입니다. 이치는 대소유무라고 하고 일은 시비이해라고
합니다. 경전에는 이치의 대소유무와 일의 시비이해를 밝혀 놓았습니다.
그래서 경전을 읽으면 이치에 밝아지고 일에 밝아지는 것입니다. 이치에
밝다는 것은 지혜가 밝다는 것이고 시비이해가 밝다는 것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경전< |
이치- 대소유무 (大小有無) -> 지혜 |
일 - 시비이해(是非利害) -> 복 |
제가 군대를 가기 전에 사은의 부모은을 배웠습니다. 대학을 다니다가
군대 가지 전에 집에서 놀고 있으니까 우리 아버지가 총부 상주선원에
가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시킨 심부름을 한 번도 어겨 본
적이 없었고 아버지의 말도 잘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가라고
해서 그냥 갔습니다.
그때 제가 스물 두어 살 때였는데 그곳에서 사은의 부모은 강의를 듣고
보니 그럴 듯 하였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때 제가 그 경전을
공부하고 그 이후로 부모님 마음을 어그러뜨려 본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에게 어리광 비슷하게 하면서 안 도와주거나
편안하다고 하면서 성질 나게 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그것을
끊었습니다. 제가 경전에 있는 사은의 부모 조항을 공부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출가를 한 것도 여기에 다 있습니다. 제가 상주선원에 가서
염불하고 나서 저녁에 좌선을 했습니다. 그때 제가 야! 이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마음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 후로 제가 출가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출가 고민을 4년 했습니다. 그리고
날새기를 3일 하고 출가를 결정 했습니다.
제가 욕심이 많아서 출가를 고민하면서 계산을 할 때 좌선을 통해서
극치의 맛을 보고는 ‘이렇게 좋은 것을 내가 왜 포기해?’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군에서 철원에 자대 배치를 받았다고 아버지에게 편지를 띄웠는데
즉시 소포로 작은 전서가 날아 왔습니다. 그 전서를 군대에서 하루도 안
빼고 보았습니다. 제가 부대에서 너무 힘들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제가 수색 소대여서 날마다 맞았습니다. 자다가도
맞았습니다. 그래서 전서를 보면서 위로를 삼았던 것입니다.
전서를 한 번 다 읽고 난 감상은 ‘좋은 말 많이 써져 있구먼…’
이었습니다. 두 번째 보고 세 번째 보고 네 번째 보니까 ‘참 좋네..?’
라는 생각이 들고, 다섯 번째 보니까 ‘내가 우리 아버지에게 성질 나게
많이 달라 들었는데 인과가 그렇겠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섯 번째
보니까 ‘이것 참 좋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우리 아버지에게 교전을 보았더니 참 좋다고 편지를 썼습니다.
아버지는 나는 너를 위해서 천일 기도를 하고 있다 전과를 해서
편입해서 원불교 학과를 가라고 답장을 하였습니다. 저는 좋기는 좋은데
출가 재가 구분이 없고 내가 재가를 해서 회사를 하나 해서 모범 교도가
되어서 교화를 아주 잘 하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재대 후에 학교에 복학하러 갔는데 기간이 넘어서 복학은 못하고 머리
좀 식힐 겸 일단 총부를 갔습니다. 교무님이 법문을 하시는데 교전을
대여섯 번 보고 들으니까 얼마나 좋던지 법열이 느껴졌습니다. 기쁠
희자는 겉으로 나타나는 기쁨이고, 기쁠 열자는 안에서 솟아나오는
기쁨을 열이라고 합니다. 가슴 속에서 눈물이 펑펑펑 나왔습니다.
그래서 다시 출가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소유무는 감각 감상이라고 합니다. 시비이해가 일어나는 것을 심신
작용이라고 합니다. 내가 살다 보면 감각 감상이 일어납니다. 잡초를
매다가 ‘이 놈의 잡초는 씨도 안 뿌리는데 잘만 나냐? 꼭 내 마음 속의
번뇌심 같이 기어 나오는 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 일기에 기재를 하는
것입니다.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물은 저렇게 바위에 부딪쳐도
돌아가는구나 나는 경계가 오면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이렇게 대조하면서 감각 감상이 쏟아져 나옵니다.
제가 운전할 때는 심신 작용이 쏟아져 나옵니다. 화가 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온갖 감정의 세계가 나오는 것들을 일기에 기재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오는 생각들은 어디서 나오는지 모아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경전을 통해서 기본으로 습득한 다음에 일어나는 것을
생각을 정리하면서 글로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염불과 좌선을 해서 마음을 비워버려야 일과 이치에 관심이 있지
마음을 비우지 못하면 결국 사람은 시비이해(是非利害)에서 이(利) 하나
보면서 삽니다. 중생들의 99%는 이(利) 하나 보고 살아요.
어저께 유아실 마루 바닥 공사를 했습니다. 공사 후에 바닥 판 하나
남은 것이 있어서 혹시 고치려면 써야 하니까 남겨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원진 교무님이 그렇게 말을 했는데 아저씨가 안 남았다면 얼른
짐을 싸서 가지고 갔답니다. 그 사람을 거짓말을 한 것이죠. 왜? 자기가
가져가서 재활용해서 쓰려고 자신의 이득밖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 이득 된 마음이 들어 섰을 때 염불과 좌선을 통해서 내 마음을 멈출
줄 알고 대소유무의 심신 작용을 대조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 주의,
조행으로 나투어야 하는데, 이 사람은 그런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득만 생각하기 때문에 2시간 일하면서 하루 일당은 다
받아가고 남은 재료도 자신이 가져갔습니다.
보통 사람은 옭고 그름, 이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욕심
속에서 사니까 염불과 좌선을 안 합니다. 기본적으로 경전만 봐도
독경의 해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독경.. 경을 읽으면, 해액.. 액이
풀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새해에 스님들을 초청해서 독경하는
것이 액을 풀려고 하는 것입니다.
경이라는 것은 날줄과 씨줄, 도 또는 법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경은
아무나 해주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글을 쓰면 ‘소고, 초고, 안’ 이라고
합니다. 달마가 글을 쓰면? 달마는 이입사행론(理入四行論)을 썼습니다.
그것을 ‘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 같은 분들이 한 것을 경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 경이 많지 않습니다.
서가모니 부처님이 했던 각 종 경들이 있는데 능엄경, 화엄경, 법화경,
반야심경, 금강경 등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경이라고 합니다. 우리
원불교도 대종경이 있습니다. 도교에는 노자의 도덕경. 또 성경이
있습니다. 유가에는 사서삼경이 있습니다.
그런데 재가 교도가 쓴 경이 있습니다. 인도의 유마거사가 쓴
유마경입니다. 그리고 육조대사가 부처님의 후손이라는 소리가 있는데
그분이 쓴 육조단경이 있습니다. 진짜 육조단경을 공부하면 ‘이런 경이
있을까?’ 라고 할 정도입니다. 완전히 사통오달입니다. 보조국사는
수심결이라고 합니다. 조사, 출가위 정도가 쓴 것을 논이라고 하고
여래위 정도가 쓰신 것을 경이라고 합니다.
경은 ‘길’이라고 하고 ‘도’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절대 틀리지 않습니다.
논 등은 후세들에 의해서 다시 업어집니다. 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경은 엎어지지 않습니다. 누가 아무리 반박해도 여지 없습니다.
깨침의 세계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경전에 보면 경이라는 것은
공부의 방향로를 알려준다고 합니다.
특히 이 세계에서 원불교의 경은 원(元)경이라고 해서 딱 하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경들은 다 언행록입니다. 우리 대종경도 언행록입니다.
그런데 성자가 직접 써 놓은 경은 딱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정전입니다. 다른 데를 보면 ‘여시아문, 왈, 가로대,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런데 정전에서는 ‘이것 이니라.’라고 탁 떨어 버립니다. 마땅히 이렇다.
왜? 깨친 분께서 그대로 정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대종사님은 ‘이것이다!’ 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대종사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의 교육 정신을 가다듬고 어떻게
교단을 이끌고 갈 것인지 계획을 다 짜시고 지방 순회까지 마치고 나서
정전에 가장 신경을 많이 쓰셨다고 합니다. 경전을 내시면 경찰서에서
못 내게 다 잘랐답니다.
그런데 다리를 놔서 불교 시보사 사장인 태업 스님과 대종사님이 만나게
했는데 그 분이 대종사님을 너무 맘에 들어 했습니다. 그래서 태업
스님이 다시 제안을 해서 대종사님이 일본에서 큰 스님으로 인정받은
일본스님을 만나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 일본 스님이 전적으로 도와
주셔서 이 정전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 나온 정전을 보면 일본색이 묻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출판을 허락 안 해주니까? 대종사님이 정전을 쓰실 때 새벽 한 두
시까지도 불이 꺼지지 않았답니다. 구타원
주먹씩 나왔답니다. 저녁 내내 당신이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정전의 한 말씀, 한 말씀이 그냥 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소설을 많이 봐서 짠 하고 깨치면 한 번에 쓰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어떤 소설가도 어떤
연극인도 어떤 화가도 어떤 성자도 그렇게 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소설에 속아서 그렇습니다.
또 대부분의 경은 요란하게 탄생하고 사족을 붙여서 팔만장경을
만들어서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주석에 주석을 붙여서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되었습니다. 옛날의 경들은 그렇게 되어있어요. 여러분은 너무
쉽게 알려주니까 너무 우습게 아는 것 같습니다.
대종사님의 삼학, 정신 수양, 사리 연구, 작업 취사, 솔성요론, 일원상
서원문 등을 볼 때 그냥 건성건성 보면 안 됩니다. 대종사님이 정말
체계적으로 잘 해 놓으셨는지 모릅니다. 어떤 경을 보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성경책을 보았는데 거기에 나온 사람이 몇 명인 줄 아세요? 우리가
외국 사람 보면 다들 비슷하게 생겼잖아요? 이름을 봐도 그 이름이 그
이름 같아서 기억할 수 있겠어요? 사도행전은 사도 바울의 편지입니다.
그런데 대종사님은 딱 이것이다 라고 확실하게 내 놓았습니다. 명료해서
얼마나 좋습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성자가 나오기 전에는 진리가
하늘에 있고 성자가 나오면 진리가 성자에게 있고 성자가 가시면 진리가
경전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말씀을 귀하게 압니다.
그런데 그 말씀의 본의를 파악해야 하는데 본의는 모르고 말씀에
얽매이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거나
바다가 쫙 갈라졌다던가 다시 부활을 했다는 말씀까지 다 믿습니다.
공자는 주역을 위편삼절(韋編三絶) 이라고 합니다. 가죽 끈으로 된 주역
책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죽도 아닌 레자라고
하는데 이것도 안 끊어지죠? (편집자주: 레자[일본어] - 인조 가죽)
그런데 공자님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습니다.
양산 법사님이 정전을 당신이 독경으로 만들었습니다. 당신 목소리로
녹음을 했습니다. 돌아가시기 3일 전에 당신의 통장을 전부 비우고
그 정전 독경을 쓰라고 총부와 원광 신문사 등에다 여기 저기에 다
뿌려주었습니다. 3일 후 아침에 양산 법사님이 당신의 정전 독경을
틀어놓고 앉아서 딱 가셨습니다.
제가 훈타원님 방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가 그 양반이 퇴임하시고
70대 중반 이었습니다. 제가 갔더니 나에게 종이 한 장을 주셨는데
정전에서 대종경까지 30으로 나누어 표기를 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매달 정전과 대종경을 보시는 것입니다.
훈타원님은 출가위 아니에요? 훈타원님은 대종사님 당대에 제대로
교육을 받으시고 남원에 계실 때는 완전히 영문이 열려서 이에서
생사리까지 나오신 분입니다. 경전을 강설해 놓은 것을 보면 대종사님의
법을 자유자재로 하셨습니다. 그 정도인데도 당신이 돌아가시기 전에
정전과 대종경을 계속 보신 것입니다. 지금도 교무님들 퇴임하고
원로원에 가면 대종사님 당대 제자인 상산 법사님 모시고
대종경 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성 경전 찾고, 현실 경전을 찾으면서 이 지묵으로 된
경전을 안 본다면? 이것은 아까 말한 신선한 생각이 아닙니다.
찌든 생각입니다. 현실의 먹고 사는 생각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교무님이 종법사님께 가서 자신은
‘교무 못하겠습니다. 자신이 없다’고 했습니다.
종법사님께서는 ‘야 경전 100독만 더 해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당에서 사경한다고 하는데 사경 한 번 하면 수양적으로나
내용적으로 경전을 10~20독 하는 것과 맞먹습니다. 그런데 사경을
얼마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경전을 읽거나 쓴다는 것은 대종사님을 만나는 일이고 마음을 챙기는
것입니다. 대종사님의 지혜를 내가 얻는 것입니다. 대종사님 같은
성자와 기운이 통하고 만나는 일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경전을
6~7번 읽었고 성가는 겨우 2개 알고 출가를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 꼬임에 내가 넘어 간 것입니다. 경전을 보내 주니까 내가
읽게 된 것입니다. 이 경전을 만약에 안 보내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사회 생활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경마장, 스킨스쿠버,
행글라이더, 골프를 했을 것입니다. 우리 친구들은 만나면 골프
이야기를 합니다. 저도 그런 것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강연 회화 이야기 하겠습니다. 강연에 대한 예화가 참 많습니다.
대종사님 당대에는 유가의 문화였고 남녀노소가 서로 섞여서 훈련을
하였는데 강연 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이 체면이었습니다. 자기의 실력이
드러날까 봐 불안해 합니다. 그래서 강연을 안 하려고 합니다.
강연은 격을 갖추는 것이고 구속을 통한 것입니다. 강연은 주제가
주어지지만, 회화는 주제가 없습니다. 회화는 감각 감상과 심신 작용의
처리건 중에서 아무거나 상관이 없이 자유스럽습니다.
우리 사람의 성품 가운데 강연을 통해서 구속을 주어서 개발 되지 않은
부분도 개발 하도록 해주셨고, 우리의 성품 가운데 회화를 통해서
자유스러운 부분을 개발 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본래 원만한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모르지만 속으로는 잘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바마가 강연 실력이
없다면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이 어린 흑인이었지만 강연을
잘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강연을 말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말 속에 그 사람의 기운과 마음과 가치관과 인생관과 철학
등 온갖 깊이 있는 생각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옛날 광주에서
떨었습니다. 그 정도의 힘이 있었습니다.
하게 된 뿌리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사람은 엄청나게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엄청나게 사유의 세계, 즉, 의두, 성리을
엄청나게 연마 했습니다. 그 속에서 품어져 나온 말입니다.
격을 갖춘다는 것은 외적으로 형식을 갖춘다는 것입니다. 머리를
단정하게 하고 옷을 예쁘게 하고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상도 미리
깔끔하게 준비를 하고 원고를 준비해서 말도 정확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적으로는 깊이 생각 그것이고 조리와 강령이 있는 것입니다. 서론,
본론, 결론 또는 기승전결 또는 원인과 결과 등이 다 나옵니다.
강연을 10분 한다면 성의 없는 사람은 100분 준비를 하고 10분 강연을
하려면 약 500분에서 1000분을 준비 해야 합니다. 그래야 10분 강연을
하는 것입니다. 강연을 하렴 심신 작용이나 감각 감상 또는 경전을 봐야
하고 연마를 해야 합니다. 제가 다른 것은 다 하겠는데 글을 못 쓰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글에 대해서 참 아픈 상처가 있습니다.
옛날에 호남예술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이 공부 잘한 아이에게
시킵니다. 내가 하도 귀찮아서 선생님에게 ‘그림이랑 다 제가 할게요.
글은 쓰라고 하지 마세요.’ 라고 말을 했는데 그 말 때문에
‘나는 글을 못 쓰는 사람’ 이라고 제가 믿게 되었습니다.
제가 스스로 나를 속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글 쓰는 것을 그렇게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살다 보면 글 쓰는 일이 왜 없겠습니까?
염불 좌선 경전 강연 회화 의두는 원불교에서만 쓸모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어느 사회나 직장에서 어디든지 쓸 수 있는 것입니다.
학교 선생님도 마찬가집니다. 정말로 중요합니다.
강연할 때 성의가 없고 원력이 없는 사람은 대충하지만, 성의가 있고
원력이 있는 사람은 그 시간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여기에 60~70명
있는데 10분을 강연 했다면 60~70 곱하기 10분 하면 몇 분입니까?
건성건성 준비하면 빚을 집니다. 강연은 정말 준비를 잘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오면 하셔야 합니다. 사람이 똑똑한 척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모른 것을 모른다고 할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투명하게 자신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당이 특화 된 것 중의 하나가 강연입니다. 강연 때문에 이 교당
떠나서 여의도 교당에 간 놈이 한 사람, 아예 사라진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강연 할 때 사라집니다. 그래서 일단은 원력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얼굴이 흉하거나 말을 못하거나 무대 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라도
‘대종사님이 하라고 했으니 내가 하는 데까지 해보자’ 또는 ‘강연도
성불제중, 제생의세하는 길이다.’ 라고 생각하고 그런 확실한 믿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게 되어 있습니다. 설사 못하더라도 오히려 은혜가
됩니다.
오체불만족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팔과 다리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강연하고 다니잖아요. 그 자체로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꼭 얼굴이 예쁘게 잘 생겨야 합니까? 옷을 잘 입어야 합니까? 물론
필요하지만 있는 그대로 내 보여주는 것 그 자체가 아름답습니다.
강연은 말을 필요로 하지만 그 자체가 강연이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회화도 마찬가집니다. 대종사님 당대에 10일 간 저녁에 염불을 하고
다음 10일 간은 강연을 합니다. 그 다음 10일 간은 회화를 합니다.
회화를 할 대는 회화봉이 있습니다. 회화봉이 자기에게 오면 말을 해야
합니다. 자유롭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낮에 심신 작용이나 감각 감상, 즉, 일과 이치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깊은 통찰력과 관찰력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회의 할 때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생각의 깊이와 체계성과
통찰력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경전, 강연, 회화에서 일과 이치에 대한 방향로을 알려주는 것이
경전이요, 일과 이치의 지혜의 핵심을 단련할 대 구속을 주고 격을
갖추어서 하는 것이 강연이고, 자유스럽게 앉아서 하는 것이 회화입니다.
그 회화를 응용하는 것이 교당 내왕 시에 다 들어 있습니다. 문답, 감정,
해오, 단회, 일기발표. 이것들이 다 회화입니다. 이 11과목이 그대로
하나로 묶여져 있습니다. 사람이 어디를 가서나 글을 쓸 자리에서는
글을 쓰고, 말을 할 자리에서는 말을 하고, 기운으로 할 것은 기운으로
해서 전체적으로 다 활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원만한 지도자로 성장해서 어디서나 필요한 사람. 도움이 되는 사람.
가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유용한 사람이 되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그 속에서 일과 이치에 대해서 깨달음을 얻고, 그 속에서 삼대력을
얻어서, 그 속에서 사실적 도덕의 훈련이 되어서 자기의 수행이 되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강연 하기 싫다고 하는데 그것은 수행입니다. 회화, 단회 싫어요 하는데
그것이 수행입니다. 그것이 일과 이치를 깨닫도록 서로서로 훈련으로써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회화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강연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얼마나 좋아요? 강연은 특히
젊은 사람한테 정말 좋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잘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열심히 할 것 아니에요? 앞에서 어리버리한 사람은
사귀지도 말아요. 뭐 하러 사귑니까? 강연을 못한다는 것은 준비를 안
했다는 것이고 통찰력도 없고 생각이 깊지 않다는 것이고 일과 이치에
가늠이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음 주부터는 부담되어서 강연 잘
못하겠네요?
- ㅎㅎㅎ
자 질문해 주십시오.
n 질문과 답변 =========================================
Q_오선허 : 강연에 대해 질문하겠습니다. 학교에서 강연이 지루하고
재미없는 교수님 수업을 듣게 되었습니다. 서로 은혜가 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A_교무님 : 교수는 세 가지로 나뉩니다. 연구 하는 교수, 조직 행정
쪽에 예산을 따로는 교수, 그리고 직접 가르치는 교수. 그 세 가지를
병행하기도 하고 각각 나누어서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가 원만성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분명히 회사에서 면접할 수도 있고, 어디 가서 강의할 수도
있고, 때로는 브리핑도 하고, 때로는 장사를 해도 설득을 해야 할 것
아니에요? 강연을 잘 하는 사람은 설득략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게
됩니다.
옛날에는 교수의 실력을 논문으로 평가했는데, 이제는 강의 지도력으로
평가한다고 합니다. 대종사님은 이미 일제 시대 때 야학해서 여자들을
지도자로 만들어서 원불교가 이렇게 큰 것입니다.
그런 경우는 교수님이 아무리 못해도 너 보다는 실력이 있습니다.
대학교 교수님의 강의를 잘 들으려고 하기 보다는 내가 예습을 해서
물어보고, 따로 상담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Q_웜미근 : 한 시간 전에 교무님 우리에게 사리 연구 가르쳐주었는데
리(理)가 무엇인가요?
A_교무님 : 리(理) = 이치를 말한다. 유니버셜 프린스플 유 노우?
Universal Principles. You know? 예를 들면, 빙하가 있는데 물 위에
솟아 있는 작은 얼음은 일이고 물 밑에 숨어 있는 커다란 것은 이치와
같습니다. 이치라는 것은 숨어 있으면서 감독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못 알아 듣겠다. 옆에서 통역을 잘 해줘라.
또 질문 있으면 하세요? 감사합니다.
타이핑:
편 집:
950309_화공_46_제2장_1절 정기훈련법-경전 강연.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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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