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 생 자 1
1972년 5월 6일 오후 7시 한강 호텔.
이 날은 부산에 간다던 다나베 준이라는 201호 손님이 올라오기로 되어 있는 날이다. 그에게서 1만 엔의
두둑한 팁을 받은 프런트 주임은 객실 청소 상태까지 일일이 체크하며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프런트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로비에서는 한 사내가 줄담배를 피우며 두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 사내는 허열이 미리 잠입시켜 놓은 심복 남성우였다.
그는 얼굴을 깊숙이 감춘 채, 백수웅의 모습이 나타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허열과 최일우, 그리고 세 명의 새로운 병력은 바로 옆 워커힐 에메랄드 빌라에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수웅이 언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남성우의 두 눈은 더욱 반짝이고 있었고,
가슴은 잔뜩 긴장되어 있었다.
"녀석이 객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라. 그리고 자정까지 기다렸다가 보고하라.
그러면 새벽 4시 30분에 일제히 덮칠 것이다."
이것이 허열의 명령이었다. 그래서 아침부터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로비에서 프런트로, 현관으로 부지런히 시선을 옮겨 가며 앉아있던 남성우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댔다. 어느 새 밤 8시가 되었지만, 백수웅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 때다. 저 쪽 한구석에서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쓴 사내 하나가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어린 국민 학생 손을 잡고 나오는 고객의 멱살을 움켜잡고 욕설을 퍼부었다.
"야, 난 돈이 없어 내 새끼 이런 데 못 데려온다. 돈만 많으면 최고야? 짜식 -."
키가 약간 작은 편이었다.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 있는데, 걸음걸이로 보아 만취된 듯싶었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고객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프런트 직원들을 바라 보았다.
"뭐요, 이거, 호텔에서? 좀 말려 주시오."
남성우가 벌떡 일어났다.
손을 주머니 속으로 집어 넣어 권총을 움켜잡았다. 사내의 행동이 틀림없이 백수웅 같아 보였다.
직원들이 달라붙고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남성우가 구경꾼들을 헤집고 싸움판이 벌어진 로비구석으로 달려갔다.
백수웅에게 너무나 여러 번 당한 경험이 있어 남성우는 조금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사내의 모자가 벗겨지고 나서야 그가 백수웅이 아님을 알았다.
싸움에 끼여들 형편이 아니어서 로비 소파로 되돌아왔다.
"미친 자식이구만."
백수웅의 계산된 출현으로 생각했던 그는, 허탈한 마음으로 다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7분의 시간을 헛되게 보낸 셈이다. 술주정꾼은 호텔 직원들에 의해 밖으로 떠밀려 나갔다.
"여어, 홍 형, 홍 형!"
그는 홍이라는 사람을 부르며 비틀걸음으로 사라졌다.
백수웅은 벌써 201호 객실에 들어와 있었다. 남대문 시장에서 불만 많은 짐꾼 하나를 꼬드겨
실컷 술을 퍼먹인 다음, 2차로 한잔 더 사겠다고 유혹하여 한강 호텔로 데려온 것이다.
'제길, 어제가 어린이날이었는데, 돈 많은 녀석들은 자식 새끼들 호텔에서 밥 사 주고, 우리 같은 천더기는
새끼들 장난감 하나 못 사 준다.'며 백수웅이 먼저 흥분하기 시작했고,
녀석은 기어이 손님 하나를 잡고 시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사키 하쓰요 때문에 일 주일간 미리 예약은 해 놓았지만, 이곳에 머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허열의 앞집 구멍가게 여주인이 언제 잠자리를 같이 하자고 졸라댈지는 모르지만,
그 곳보다 더 안전한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호텔에 와 있는 허열의 부하가 남성우라면 반드시 서지아의 복수를 해 주겠다고 잔뜩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몇 번의 살해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조무래기를 살해하여 피를 묻히기에는
자신의 손이 아깝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그가 테러 이전에 남성우에게만은 반드시 피의 보복을 하겠다고
다짐한 것은 노옥진 때문이었다.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했고 또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회담 정보를 요청하면 쉽사리
알아 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기대가 허물어지면서부터 그는 광폭해지기 시작했다.
엉뚱한 곳 으로 분노가 치솟은 것이다. 그런데 기다렸던 남성우에 대한 보복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로비에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드디어 밤 11시가 되었다.
로비는 고객들이 썰물처럼 몰려나가 텅 비어 있었고, 이따금 찾아오는 일본 관광객들이 복도를 오가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생각에 골몰하고 있던 백수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터덜터덜 프런트로 내려갔다. 흘깃 곁눈질로 보니, 남성우는 아직도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신문을 뒤적이고 있었다.
백수웅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들어간 일이 없는 백수웅이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것을 본 때문이었다.
'아니, 저 자식이?'
남성우는 재빨리 몸을 돌려 왼쪽 화장실로 몸을 감추었다.
백수웅은 프런트에 키를 주고, 사정이 있다며 체크아웃을 신청했다.
1만 엔이나 받은 주임이 수다를 떨며 키를 넘겨 받았다.
"왜요, 불편한 점이라도?"
"아, 아니오. 친구가 타워 호텔에 투숙했는데, 같이 있자고 해서 그 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그는 밖으로 걸어 나왔다.
남성우가 뒤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한강 호텔 아래쪽에는 거대한 한강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이 일대는 아직도 개발이 덜 되어
썰렁한 편이었다. 밤은 어둡고 거리는 인적이 끊겨 쥐죽은듯 조용했다. 이따금 때늦은 데이트족들이
시시덕거리며 곁을 스쳐 갔다.
백수웅은 뒷골목을 가로질러 강가로 향했다. 한강은 천호동 불빛의 반사로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고,
흐르는 물 소리가 정적을 깨고 있었다. 뒤에서 숨 죽이며 미행하는 남성우의 심장 소리가
들려 오는 듯했다. 그는 무작정 걸었다.
남성우는 무척 당황하고 있었다. 객실에서 밤을 보낼 줄 알았던 백수웅이 자정을 얼마 남겨 두지 않고
체크아웃 한 것이다. 미행은 하고 있지만, 기습하기에는 너무나 무기력한 자신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용기를 냈다.
'목적은 녀석의 제거에 있다. 이 틈에 너석을 기습하자.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켠 후 주머니에 찔러 넣은 권총을 꺼냈다. 그리고 노리쇠를 후퇴시켰다.
작은 쇳소리가 났지만, 백수웅이 알아들을 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그 대신, 어둠과 거리가 있어 한 방에 녀석을 맞히기는 힘들었다.
백수웅은 숲 속으로 들어가더니 한 나무 아래에 앉았다.
그래서 남성우는 겨냥하기가 힘들었다.
남성우는 허리를 잔뜩 굽힌 채 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백수웅은 심장의 고동이 조금 더 빨라졌다.
그는 조금 전에, 권총 노리쇠 작동 소리를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규슈에서 첩보 훈련을 받을 때 뛰어난 청각을 소유할 수있었다.
그것을 그들은 '근접 감각' 이라고 알려 주었다.
사무라이들이 눈을 감고도 칼을 휘둘러 적의 목을 떨어뜨릴 수 있는 힘이 바로 이 근접 감각이었다.
더구나 이 훈련은 밤에 당하는 기습을 피하고 적을 쓰러뜨리는 훈련이었기 때문에, 남성우로서는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그것이 부질없는 짓임을 알 수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남성우는 10미터까지 다가갔다.
그 때까지도 백수웅은 무슨 상념에 빠져 있는지 꼼짝도 하지않고 앉아 있었다.
남성우는 권총을 든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총구가 녀석의 등을 정확히 겨냥하고 있다는 확신이 섰다.
백수웅은 숨을 멈추었다.
남성우의 숨소리까지도, 들어올리는 팔뚝의 옷 스치는 소리까지도 놓치지 않고 듣고 있었다.
이 어둠 속에서 나의 등을 겨냥하자면, 팔을 들어올리는 시간까지 합쳐 3초 정도가 걸릴 것이다.
방아쇠를 잡아당기기 위해 손가락 움직이는 시간이 있어, 최소한 3.5초는 시간이 지나야 총알이 튀어나온다.
그렇다면 이미 손에 들려 있는 잭 나이프를 던져 녀석에게 상처를 입혀 쓰러뜨리기에는
2초 정도의 시간이 가장 좋은 시간이다. 몸을 피할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1초, 1.5초, 2초! 획-!
칼이 어둠을 가르며 날아갔다. 날아간 칼 끝이 총구 바로 위를 스치고 지나 가슴 한복판에 꽂혔다.
"퍽 !"
커다란 덩치의 남성우가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손목에서 힘이 빠졌는지 털썩 권총까지 놓쳐 버렸다.
"헉-."
숨이 막혔다. 온몸의 힘이 한꺼번에 빠져나가 버렸다. 남성우는 땅바닥에 머리를 찧어 박으며 쓰러졌다.
백수웅이 고양이처럼 튀어나가 쓰러진 남성우를 숲으로 끌고 갔다.
심장을 겨냥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을 염려는 없다. 백수웅은 남성우의 가슴에 박힌 칼을 뽑았다.
백수웅이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남성우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잇었다.
"어리석은 놈! 너, 나 알지?"
얼굴을 마주 보았다.
체포되어 고문당할 때에도 이를 갈며 이 얼굴을 보았고, 노범호에 의해 부산에까지 납치되어
상선에 강제로 실려 가던 밤에도 이녀석 얼굴을 보았다.
모르긴 해도 서지아가 차에 깔려 숨질 때도 이 녀석이 웃으며 서 있었을 것이다.
남성우의 찢어진 살가죽에서 피가 흘렀다. 백수웅은 자신의 옷을 찢어 상처를 틀어막았다.
"아픈가?"
"휴-."
백수웅이 남성우의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떼자, 남성우는 긴 숨을 내쉬었다.
숨통이 트인 것이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너를 없앨 기회를 여러 번 가졌었지. 하지만 살려 주었어. 한강에서 한 번, 그린파크에서 한 번."
" "
"그렇다면 스스로 물러났어야지. 난 불사조야. 네놈들이 나를 일본에 버릴 때 이를 악물고 맹세했어.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 돌아 오고야 말겠다'라고."
"으흐흐"
남성우는 고통을 참을 수 없는지 계속 신음을 토해 내고 있었다.
"난 죽지 않아. 조국에 돌아올 때는, 어느 녀석이든 걸리적거리면 사정 보아 줄 것 없이 없애겠다고 맹세했었지.
내 칼이 피맛이 보고 싶어 매일 윙윙 울어 댔거든. 그래서 두 녀석이나 희생되었지. 부산에서 순찰대 순경,
그리고 죄 없이 죽은, 청평 열차에 버린 청년."
"나 날 살려 줘."
"죽을 곳을 찌르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나는 너를 살려 둔다. 하지만 그냥은 못 돌려 보내!
평생 네가 지은 죄 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사 살려 줘 그럼 은퇴하겠다 내겐... 처 자식이"
"처자식? 네 처자식이 귀한 걸 알면 남의 처자식 귀한 줄도 알아야지, 분명히 약속하지만 넌 살아!"
" 고 고맙다."
"허열은 지금 어디 있나?"
"워 워커힐 에메랄드 빌라에"
"일본서 온 그 계집도 거기 있나?"
남성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널 살려 보내 준다. 그 대신 내 말 꼭 전하라. 일본서 온 그 계집, 내가 내 손으로 없애 버릴 거라고.
나는 무엇이든 한다면 꼭 하는 사람이다. 그 다음은 노범호와 허열! 알겠느냐? 그리고 넌 은퇴하라.
만일 이번에도 은퇴하지 않으면 네 가족을 몰살시키겠다."
남성우는 자기 자신에게 거듭 다짐했다. 이번에 살아 남으면 정말 은퇴하겠다고.
위험해서 견딜 수가 없고, 가족이 희생당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야 약속한다. 날 빨리 병원으로"
"30분 남았어, 통금까지. 넌 두 시간 이상 지나야 움직일 수 있어."
백수웅이 갑자기 남성우 바지 혁대를 풀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또 백수웅의 입을 틀어막고,
한 손을 바지 속으로 집어넣었다.
"서지아가 너희들에게 죽었다는 걸 인정하지?"
"그 그렇다. 미안하다."
"나에 대한 잘못은 용서한다. 정부에 반기를 든 나의 행동을 저지하여 국가를 지키는 것이 너희들 임무이니까.
하긴, 그래서 살려두는 거지만, 하지만 서지아의 생명을 희생시킨 건 용서할 수 없어."
"우지직!"
백수웅은 남성우의 고환을 움켜쥐고 힘을 주었다.
남성우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그 때는 이미 고환이 터진 뒤이고, 그는 풀밭에 털썩 쓰러졌다.
백수웅은 쓰러진 남성우를 풀섶에 버려 둔 채 벌떡 일어나 한강 호텔 주차장 구석으로 달려갔다.
기사키 하쓰요가 제공해 준 검은색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천호동을 향해 쏜살처럼 달려갔다.
통금이 얼마 남지 않아, 싸구려 호텔에 들었다. 이제 일은 벌어지기 시작했다. 남성우는 30~40분 정도
지나면 정신을 차려 허열에게 보고할 것이다.
기사키 하쓰요가 말한 대로, 정보 수집을 하고 또 활동 영역을 넓히려면 자신을 뒤쫓는 허열을 미치게 만들어야 한다.
남성우가 그 첫 번째 희생자가 된 셈이다. 남성우는 두 번 다시 뒤쫓을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백수웅은 두 번째 희생자를 고르고 있었다. 허열은 안 된다. 만일 그가 희생되면,
한국 당국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공개 수배로 자신을 토끼 몰듯 몰 것이다. 그의 머리에서 허열이
지워지고, 두 번째 희생자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은 뒤 이불에 코를 쑤셔박고 잠에 빠져들었다.
남성우가 기절하여 누워 있다 깨어난 것은 새벽 1시가 가까워 올 무렵이었다. 고환이 터졌는지 충격을 받은 것인지,
도무지 통증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아픔을 참지 못해 울기 시작했다.
"으흐흐 으흐흐 에이구."
울면서 기어가기 시작했다. 광나루 마루 공중 전화가 있는 곳까지 기어가는 데 마치 몇 달쯤은 족히 걸리는 것 같았다.
45-0181. 워커힐 교환이 나왔고, 그는 고통을 참아 가며 사고를 보고했다.
기습이 아닌 단순한 감시 업무만 지시받았던 남성우의 부상은 허열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허열은 놀란 눈으로 기사키 하쓰요를 바라보았다.
"큰일났소. 남성우가 백수웅에게 당한 모양이오. 빨리 출동합시다."
남성우가 보고한 위치, 한강 호텔 후문 쪽 광나루 유원지 입구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차를 몰았다.
남성우는 수화기를 손에 든 채 널브러져 있었다. 머리를 받쳐 들고 몇 번이나 빰을 갈겨 댄 뒤에야 눈을 떴다.
"당했습니다 녀석에게"
허열이 다그쳤다.
"어떻게 된 거야! 어딜 다쳤어?"
"녀석이 제 고환을 전 이제"
"빨리 병원으로 옮겨."
최일우가, 쓰러진 남성우를 차에 싣고 왕십리 경찰 병원을 향해 달렸다.
허열은 분함을 참지 못해 미친 개처럼 헐떡이고 있었다.
"여우 같은 자식 남성우를 먼저 본 것이 틀림없어. 이 자식을 어디 가서 잡지?"
"자, 돌아갑시다. 여기 있다고 녀석이 걸어올 리는 없으니까."
기사키 하쓰요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남성우가 대기하고 있다는 정보를 건네 주기까지 했는데,
허술히 꼬리 잡힐 백수웅은 아니지 않은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허열이 난감한 듯 기사키 하쓰요를 바라보았다.
"무능한 당신 부하들 때문에 애써 추적한 먹이를 놓쳤잖아요!"
그녀가 허열에게 책임을 덮어씌웠다.
허열은 치욕감에 몸을 떨면서도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구르고 있었다. 남성우가 습격당하고도 1시간 이상이나
시간이 흘렀으니, 지금쯤 그는 훨씬 먼 곳에 몸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주먹을 움켜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허열에게 기사키 하쓰요가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백수웅을 놓친 겁니다. 여기서 시간을 허비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부하에게 좀더 정확한 보고를 받은 뒤 대책을 세우도록 합시다."
"좋소, 경찰 병원으로 갑시다."
이들 일행은 다시 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비상등을 켜고 사이렌을 울리며 통금으로 정적에 뒤덮인 거리를 질주했다.
차 속에서 허열은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는 무엇인가 승부를 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회담은 불과 3주 정도밖에 남지 않았고, 백수웅은 여전히 꼬리조차 잡을 수 없다. 그러나 어떻게
무엇으로 최후의 도박을 걸어야 할지 방법이 서지 않았다.
수사대의 차가 어느 새 병원에 도착했다. 남성우는 응급실에서 두 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은 뒤 병실로 옮겨졌다.
수술을 맡았던 닥터가 남성우의 상처 부위를 확인하고 허열에게 왔다.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겠지만, 앞으로 성 생활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상관 없소. 정신은 차렸습니까?"
"들어가 보십시오. 말할 힘은 있으니까."
이들은 다시 우르르 몰려 병실로 들어갔다. 남성우가 시트를 머리까지 뒤집어쓴 채 흐느끼고 있었다.
허열이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괜찮다. 목숨은 건졌으니까."
남성우가 허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패기와 야심으로 가득했던 허열의 눈동자는 힘을 잃고 있었고,
표정은 패배와 자괴감으로 가득했다.
"절 용서하십시오. 녀석에게 당했습니다. 최선을 다했는데"
"좋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보고할 게 있습니다."
"보고? 말해."
"백 백수웅이 전해 드리랍니다. 일본서 온 계집, 반드시 자기 손으로 없애 버리겠다고요.
아마도 그 녀석은 하쓰요에게 속아 온 걸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옆에 서 있던 하쓰요가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정말이오?"
남성우가 고개를 돌리며 끄덕였다.
기사키 하쓰요가 허열에게 얼굴을 돌렸다.
그 여우 같은 자식이 기어이 눈치챈 모양입니다. 하긴, 한강호텔에 투숙하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나뿐인데,
그 곳에 남성우가 나타났으니 눈치채지 못할 백수웅이 아니죠. 틀렸습니다.
이젠 녀석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허열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참담해하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럼 어쩌죠? 기사키 하쓰요도 포기하는 겁니까?"
"아뇨. 난 절대 물러서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면 승부를 걸겠습니다."
기사키 하쓰요가 의자에 앉으며 담배를 뽑아 물었다.
허열은 자존심을 구겨 가며 기사키 하쓰요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정면 돌파의 방법은 있습니까?"
"난 그 녀석을 잘 알아요. 한번 칼을 뽑으면 쉴 틈이 없는 녀석이죠. 어차피 남성우는 희생된 겁니다.
그는 나를 다음 목표로 삼을 것입니다. 테러에 방해되는 인물들을 하나씩 제거하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당신을 다음 목표로?"
"그렇소. 그는 나를 향해 공격의 칼을 휘두를 거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백수웅은 자신의 무덤을
자신이 파는 결과가 될 거요. 그 녀석보다는 내가 한 수 위니까."
"방법은?"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소. 약간의 시간만 주시오, 너무 실망하지 말고.
나를 믿고 초청하신 이후락 부장님의 은혜는 보답할 줄아는 여자라는 걸 기억하시오."
이 때 누워 있던 남성우가 허열의 손을 움켜잡았다.
"검사님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니, 너는 최선을 다했어."
"그게 아니라 저 , 은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쉬고 싶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허열은 조용히 남성우의 손을 밀어 냈다. 그리고 병실 베란다로 걸어 나갔다. 그는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사랑하는 부하를 잃게 된 아픔과 안타까움과 백수웅에 대한 불다는 적개심으로 흘리는 사나이의 눈물을
다른 사람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미 남성우의 은퇴 결심을 번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허열은 잘 알고 있었다.
'정말 믿을 만한 부하였는데, 내 힘이 이렇게 부족했단 말인가. 하지만
백수웅! 네가 포기하지 않는 한 나도 포기하지 않는다.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나머지 반생을 성 불구자로 살아가야 할 남성우가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이 개새끼, 잡기만 하면 사타구니부터 찢어 버리겠다."
허열은 고함을 지르며 병실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고, 침울하게 서 있던 최일우 등 부하들이 우르르 뒤따랐다.
기사키 하쓰요마저 달려나가 허열을 위로해 주었다.
"기다리시오. 오늘의 패배는 반드시 대가를 받게 될 거요. 내게 맡기시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속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기쁨에 어쩔줄 모르고 있었다.
백수웅이 남성우를 살려 주는 대가로 위장정보를 전해 준 것이다. 이들은 자신이 백수웅의 테러를 돕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 기사키 하쓰요를 자기 손으로 반드시 없애겠다고? 아이디어 하나는 기발났어. 좋다. 2~3일 후 다시 만나자.'
그녀의 계획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척척 맞아 들어갔다. 마지막 고지를 남겨 두고 그녀는 실수
'제로'를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기사키 하쓰요는 아스토리아 호텔로 되돌아왔고, 허열은 부하들과 함께 영빈관 앞 자신의 본부로 돌아왔다.
허열은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침통한 마음으로 생각에 잠기고 있었디.
이 날 새벽.
거대한 공룡 같은 서울 거리는 아침을 맞기 위해 꿈틀대기 시작했고, 어둠에 휩싸였던 건물들은
어둠이 벗겨지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터로 나가는 사람들과 이들을 위해 달려나온
시내 버스와 택시들이 질주하는 5시 30분, 한 대의 검은 오토바이가 광진교에 굉음을 일으키며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었다. 지난 밤, 남성우의 사타구니를 뭉개 놓고 천호동으로 도망쳤던 백수웅이엇다.
그는 광진교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워커힐로 달려갔다. 광장은 몇 대의 자가용 승용차들만
썰렁하게 서 있을뿐 텅 비어 있었다. 오토바이를 구석에 세워 놓고 희미한 윤곽의 별장들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가 꼽고 있는 남북 회담장 1순위 장소가 바로 이 곳 워커힐이다. 워커힐에 대해서는 이미 완벽한 조사를 끝마쳤다.
광장동 쪽으로 본관이 우뚝 자리잡고 있고, 이 곳을 중심으로 10여만 평의 야산이 형성되어 있는데,
구내 도로는 대한 민국 지도를 형성하고 있다.
백두산 정상에 힐탑 바가 있고, 압록강 위치에 더글라스 호텔이, 그 위로 여러 개의 빌라(별장)가 있었다.
그는 가장 큰 빌라인 에메랄드를 향해 걸어갔다. 이 곳이 바로 미국 존슨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투숙한 곳이었다.
'그들이 이 곳에 회담장을 차려 놓는다면 금상첨화일 텐데 뒤에 웅장한 아차산이 있어 도주하기에 안성맞춤이거든.'
워커힐을 둘러본 후, 이번에는 왕십리를 지나 장층 채육관 옆에 우뚝 버티고 선 영빈관으로 달려갔다.
이 곳이 백수웅이 꼽고 있는 제2의 후보지였다. 그는 밖에서 몇 번이나 둘러보았다.
정문에 경비가 버티고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영빈관을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장충 체육관으로, 다시 그 정면의 흰색 4층 빌딩으로 옮겨졌다.
흰색 빌딩. 이 곳이 허열과 그 부하들이 진치고 있는 특수대 본부다.
"잘못 선택했어, 허열. 너는 나의 적수가 되지 못해. 더구나 네게는 반드시 갚아야 할 빚이 있지.
허열! 넌 나의 옥진이를 빼앗아 갔어. 그리고 날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어. 네 눈에서 곧 피눈물이 흐를 거다.
너와 노옥진은 미라를 자식으로 갖게 된 것이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들 가슴에 못을 박기로 결심했지. 그건 바로 미라의 처참한 희생이다."
그렇다. 기사키 하쓰요의 말대로 허열은 미쳐 버릴 것이다. 이미 남성우를 잃어,
그는 한 팔이 잘려 나가는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그 다음은 미라다. 가장 사랑하는 그의 딸 허미라.
노옥진의 딸이기도 하지. 하지만 이제 그런 것쯤은 문제도 안돼. 그녀는 과거라는 무덤 속에 매장된 여자니까.
움켜쥐었던 주먹을 풀고 머리를 떨어뜨렸다. 그렇게 힘없이 서있던 그가 다시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분풀이라도 하듯 맹렬한 속도로 우이동을 향해 달려갔다.
우이동 은신처를 향해 달리면서도 백수웅은, 자신이 추리하고 있는 회담장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서울의 실정으로 보아 가장 적합한 회담 장소는 워커힐과 영빈관밖에 없다. 당국도 그 이상의 장소는
찾아 내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후락 부장은 반드시 두 군데 중 한곳을 선정할 것이다. 그러나 회담장을 목표로 한
테러리스트가 출현했고, 2개월간이나 쫓고 쫓기는 추적을 벌여 왔는데, 과연 그가 그 곳을 선택하겠는가.'
그것이 가장 큰 장애였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장소를 한국 당국이 선택한다고 추리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더구나 이번 회담은
공식 회담도 아니고, 한국의 발전상을 꼭 보여 주어야 할 부담이 있는 회담도 아니다. 그야말로 극비에 왔다가
극비에 마치고 돌아갈 회담이다. 남북한 수뇌부가 머리 맞대고 앉아 있으면 충분한 회담을,
기어이 위험을 무릅쓰고 워커힐이나 영빈관처럼 누구나 추측할 수 있는 장소에서 하겠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백수웅은 그린파크를 코앞에 두고 갑자기 오토바이를 세웠다.
그리고 두리번거리며 공중 전화를 찾았다.
첫댓글 신출귀몰 백수웅!! 상대가 없네요! 감사히 잘봤읍니다~
백수웅이 바라는대로 모든게 잘 되어가길 빌뿐입니다
제3공화국이 이렇게 허무한 인간들의 세계라니...원ㅉㅉㅉ
즐감요 ~~
잘 읽고갑니다~~
감사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늘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