낚시터의 장수
(중봉 조헌 선생과 나의 어머니)
제18회 중봉 조헌문학상 대상 작품 입니다.
전쟁은 살아있다. 아무리 후미진 골짜기라도 찾아온다. 쑥과 엉겅퀴와 민들레와 질경이가 한 뼘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촉수를 겨루고 있다. 허리가 뚝 잘려나가도 다시 새로운 가지를 만들어 어느새 방어 체계를 갖춘다. 아름다움과 향기조차도 소리 없는 전쟁의 일부. 온몸으로 생존을 주장한다.
평화로운 봄날 아침인데 산책길에서 우연히 만나는 전쟁의 흔적은 흥미롭다. 번듯한 기념비 하나 없는, 그냥 작은 약수터에서다. 김포시 운양동에 있는 모담산 자락에‘샘재 약수터’라는 표지판이 서 있고 중봉 조헌 선생이 근처 낚시터에서 위국충절을 달래며 낚싯대를 드리웠다는 약수터의 유래가 적혀있다. 사회개혁론자이며 문인, 의병장이었다는 기록을 보며 한 남자를 읽는다. 여러 번의 상소, 유배. 의병 모집 치열한 전투의 과정에서 그는 언제나 맨 앞에 선 용맹한 장수였다. 임진왜란 즈음이니 어림잡아도 400여 년 전의 일인데, 어떤 분이었기에 아직도 이토록 생생한 모습으로 살아 말을 건넬까.
내가 처음으로 경험한 전쟁은 엄마와 할머니의 전쟁이었다. 아버지는 무슨 큰 사업을 꿈꾸며 밖으로만 돌았는데. 낡은 고택과 밭 세 마지기가 남은 재산이었다. 별채에는 매일 화투와 기타와 바둑으로 소일하는 아버지의 사촌들이 늘 서너 명은 머물러 있었고, 집안의 어른인 할머니는 집 떠나 있는 장남의 무사안일을 주왕 신이나 고목나무 신 등에 의지하고 있었다. 엄마와 할머니 사이에는 늘 아슬아슬한 전운이 감돌았다.
개혁은 한 가정에서도 움텄다.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목표로 사회개혁론을 제시한 중봉 선생의 큰 개혁이 있었다면 집안의 불합리한 사정을 바로잡으려는 작은 개혁이 있었다. 수많은 대소사를 간소화하기. 군식구들에게 어려워진 집안 사정을 알리고 각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도록 여러 번에 걸쳐 설득하기. 전속 당골이 맡아 하던 각종 행사 등을 없애기 등의 개혁이었다. 이 과정은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할머니와 변화해야 살 수 있다는 엄마의 의견이 팽팽했다.
엄마의 마음속 큰 그림은 자식 교육이었다. ‘공부만이 자기 힘’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재산이라 했다. 특히 ‘적성에 맞는 좋은 대학 보내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버스도 다니지 않는 전라도 끝자락 시골에서 적성 운운은 언감생심이었다. 엄마는 도시에 셋방을 얻어 이사를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집안에 도움을 주고 있던 친척들의 비난이 빗발쳤다. 먹고 살기 힘든데 학교는 무슨 학교냐. 굳이 학교를 보내려거든 상고나 공고나 농고를 보내라는 현실적인 조언들이었다. 장손 며느리가 제사와 고택을 지키지 않고 엉뚱하게 자식들 교육에나 전념하는 고집 센 사람이라는 비난이 엄마에게 쏟아진 막말 화살들이었다. 엄마가 겪어냈던 세세한 모욕을 우리가 다 알 수는 없다. 쏟아지는 화살을 막고 있었던 것은 엄마 혼자였다. 엄마는 전쟁터 맨 앞에 선 지휘관이며 장수였을까.
‘온종일의 전투에 화살이 다 떨어져 더 싸울 수 없었다.’라는 기록은 눈물겹다. 중봉 조헌 선생이 치른 그 치열했던 ‘금산 전투’ 때 일이다. 8월이면 더위가 한창일 때가 아닌가.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 부끄럼이 없게 하라!” 는 그의 마지막 외침이 남아 있다. 아무리 훌륭한 사상도 실천과 희생이 따르지 않았으면 700 의사가 죽음으로 그를 따를 수 없었으리라.
엄마의 남은 화살이 다 떨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뇌졸중과 당뇨 합병증으로 더는 몸을 쓸 수 없을 때 비로소 알았다. 엄마는 유학 중인 아들의 손주 돌보기를 쓰러지기 직전까지 해내었다. 앞에서 뒤에서 막일과 허드렛일 가리지 않고 현금 조달자로, 격려와 사랑으로 그 긴 전쟁을 치렀음을 많은 세월을 거치고서야 우리는 절절히 깨달았다. 촌구석에서 상경한 엄마의 여섯 자식 중 셋은 번듯한 대학교수가 되고 둘은 교사가 되었다.
“내 큰 딸은 대학교수요!” 어느 날 엄마의 병실에 큰 딸인 내가 들어섰을 때 들은 말이다. 대여섯 명의 할머니 청중들 앞에서 큰 소리로 말하던 엄마의 눈은 충혈 되어 있었다. 대학교수가 아닌 나는 순간 당황했다. 그 말을 하면서 좀 울었다고 옆 침대 할머니가 말해주었다. 치매를 앓고 있었던 엄마는 희망 사항을 사실처럼 말하곤 했었다. 그러게 왜 큰딸만을 희생시켰나요. 월급을 쪼개 동생들 학비 대는 일이 늘 원망스러웠지요. 돌아오는 길에 나는 중얼거렸다. 그날, 혼자서 나는 엄마와 화해했다. 엄마는 나도 그렇게 키우고 싶었을 거라고, 다만 당신의 화살이 부족하여 나에게까지 닿지 못했을 거라고.
이듬해 62세가 넘어 늦깎이로 사이버대학 문창과에 입학했다. 흩어지는 기억 중에도 잊지 못한 엄마의 간절한 큰 그림 한쪽에 나도 들어선 셈이다.
개혁은 누구나 외치고 실행할 수 있지만 진정 의로운 개혁만이 살아남는다. 단단한 꿈은 죽지 않고 풀씨처럼 흩어져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그 힘으로 세상이 돌아간다.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한가. 패배했지만 이긴 전쟁도 있고, 이겼지만 패배한 전쟁도 있다. 중봉 선생이 치른 ‘금산 전투’도 승리로 끝나지는 않았지만, 그 장렬한 죽음들이 있었기에 최대 곡창지대인 호남과 호서지방을 지킬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살아서 환대받지 못했다. 대신 ‘칠백의총의 기념비’와 ‘동국 18현’의 한 분이 되어 큰 그림으로 남아 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사람들 마음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그의 올곧은 개혁 정신이다. 예나 지금이나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이 최고의 개혁 아닌가.
전쟁은 살아있다. 생명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꿈틀거리며 흐른다. 우리나라도 아직 전쟁 중이다. 반도체, 자동차, 선박, 최신 휴대폰 등을 만드는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지만 고령화, 저출산, 높은 자살률, 기후 변화와 지방 소멸 등으로 위기에 있다. 정치적으로도 어지럽다. 누군가의 한 말씀이 간절하다.
어떻게 혁신할 것인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변방의 낚시터에서 두 손을 턱에 고이고 한 남자가 아직도 궁리 중이다. 그는 살아있는 장수이다!
첫댓글 오 조헌문학상 대상작품이군요. 조헌장군의 업적을 기리고 널리 알리기 위한 여러 일에 힘쓰시는 선생님이 무척 존경스러웠습니다.
한 개인이 겪은 전쟁같은 일화와 조헌선생의 올곧음을 병치시켜서 이해를 돕고 있군요. 맞아요. 한 평생 잘 살아온 개인의 역사도 전쟁의 서사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좋은 작품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죽어서도 살아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습니까만 끝내 살아서 뭇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조헌 선생의 이야기가 참 감명 깊더군요.
좋은 가문이란 무엇인가, 여러 생각이 꼬리를 물던 시간이 생각나네요. 잘 읽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