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룡 李明龍(1873 ~ 1956)】 "사업가에서 민족 대표로 이명룡 장로"
1873년 8월 2일 평북 철산군(鐵山郡) 참면(站面) 서부동(西部洞) 차련관(車輦館)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호는 춘헌(春軒)이다. 고향 철산에서 1887년 정주(定州)로 이사한 후 1892년 기독교에 입교하였으며, 기독교(장로교) 전도자로 활동하였다.
1902년 정주군 상업회의소 소장으로 활동하면서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의 토지 매입을 극력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동시에 한인들의 주권(株券)소유운동을 추진하여 정주 지역민으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받았다. 1903년 정주서면교회(定州西面敎會) 집사(執事)가 되었다. 1911년 초 일본시찰단(日本視察團)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일본에서 돌아온 직후 일제 경찰이 조작, 날조한 이른바 105인 사건 피의자로 구속되었다. 경술국치 직후 일본시찰단에 선발된 것과 정주 지역의 반일 인사로 지목되어 105인 사건의 피의자가 된 이유는 당시 정주 지역민들로부터 신망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정주 지역을 대표하는 재력가였기 때문이었다.
105인 사건 피의자 진술에 따르면 그는 대금업자(貸金業者)였다. 당시 2만 원 상당의 재산을 소유했던 재산가였다. 정주 지역을 대표하는 자본가였기에 신민회 조직과 총독 모살 계획에 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가혹한 문초를 받았다. 대금업은 전통적으로 고리채로서 부정적인 성격이 강한 업종이다. 그러나 개항 이후 특히 일본은행의 독점적 금융 혜택과 지원을 받은 일본 자본이 침투하면서 일본 대금업이 변칙적인 토지 수탈에 악용되었다.
이 점을 감안할 때 당시 한인 대금업자의 자본은 상대적으로 토착자본(土着資本)의 성격이 강했다. 1900년대 한국에서 일인들이 제일 선호한 사업이 대금업이었다고 하며, 일인들은 거억(巨億)의 군자금을 소비하고 거만(巨萬)의 인민을 희생시켜 전쟁을 일으키기보다 오히려 2억 엔을 들여 조선 전토(全土)를 매수하면 이보다 더 확실한 병략(兵略)은 없다고 주장할 만큼 식민지 토지수탈 방책으로 재한 일본인의 대금업이 성행하였다.
그는 105인 사건 피의자 및 신민회 지도부 인사로 지목된 인사 중 이승훈(李昇薰) · 오희원(吳熙源) · 양준명(梁濬明) · 김일준(金一濬) · 이창석(李昌錫) · 이춘섭(李春燮) · 홍성린(洪成麟) 등과 함께 재력가로 분류되어 있었다. 당시 이들의 자본은 우리나라에 침투한 일본 거대 자본에 대항한 토착자본에 해당한다.
일제 측은 이러한 토착 자본가들을 105인 사건에 연루시켜 피의자로 구속 실형을 선고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일제가 작성한 자료에 의하면 1908년 3월 이승훈의 권유로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신민회 입회 후 홍성린(洪成麟) · 최상주(崔聖柱) · 임경렵(林冏燁) 등과 함께 정주와 납청정(納淸亭) 산하 신민회 평의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11년 가을 테라우치총독 모살 미수사건(寺內總督謀殺未遂事件) 곧 105인 사건 피의자로 구속, 갖은 고문을 받은 후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2년 6월 경성지방법원 1심 공개 공판 때 경찰과 검사 신문에서의 진술은 잔인한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虛僞自白)이었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1912년 9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김동원(金東元) · 윤성운(尹聖運) · 양전백(梁甸伯) 등과 함께 징역 6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3년 3월 20일 경성복심법원 판결에서 충분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윤치호(尹致昊) · 양기탁(梁起鐸) 등 주모자 6인을 제외한 99인이 무죄 판결을 받을 때 풀려났다. 같은 해 10월 9일 고등법원 판결에서도 무죄를 받았다. 2년여간의 옥고에서 풀려난 후 교회를 중심으로 한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그 결과 1917년 8월 평북노회평북노회 제12회 총회에서 정주의 덕흥교회(德興敎會) 장로(長老)에 장립되었다. 한편 평북 안주군 덕달면에서 농장을 경영하면서 농업에 종사했다.
1919년 3 · 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2월 12일 선천군 양전백의 집에서 유여대(劉如大) · 김병조(金秉祚) 등과 함께 만세 운동과 관련된 동지 규합을 위해 선천(宣川)에 와있던 이승훈을 만나 3 · 1운동의 계획을 듣고 기독교계 민족 대표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때 민족 대표로서 『독립선언서』 및 『독립청원서』 등에 서명 날인을 위한 도장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도장을 이승훈에게 맡겼다.
2월 27일 최린(崔麟)의 집에서 함태영(咸台永)에 의해 『독립선언서』와 임규(林圭)가 도쿄에 가서 일본 귀족원과 중의원 등에 제출할 독립청원서 『독립청원서』에 대표 자격으로 날인되었다. 한편 2월 27~28일경 상경, 이승훈을 방문하고 3월 1일 태화관에서 모인다는 말을 듣고 3월 1일 손병희 등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태화관 현장에 참석하였다. 그 자리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종로경찰서 경찰에게 체포되어 경무총감부에 구금당했다.
경무총감부에 구속되어 그해 3월 25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취조를 받은 후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산입)을 선고받고 경성 감옥에서 복역, 1921년 11월 5일 출옥했다.
출옥 후 주로 교회와 교육 분야에 종사하였다. 1925년 3월 방응모(方應謨) 등과 함께 정주산업조합(定州産業組合)을 조직하고 이사직을 맡았다. 한편 여러 교육기관과 평북노회(平北老會) 총회 회계 등 교육과 교회 활동에 진력했다. 1930년 3월 정주군 학교평의원, 1932년 2월부터는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정주지국 고문, 1935년 2월에는 평북노회 총회 부회계, 1936년 10월에는 정주군 미곡통제조합(米穀統制組合) 총대(總代)를 맡아보았다.
해방 후 조만식(曺晩植)과 함께 북에서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을 조직하고 고문에 추대되어 활동하던 중 1947년 4월 월남했다. 1948년 4월 이북인대표단(以北人代表團) 특선위원에 선출되었으며, 그해 8월 삼일혁명동지회(三一革命同志會)를 조직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53년에는 오산학원 재건위원회(五山學園再建委員會) 고문, 1954년에는 한국반공연맹(韓國反共聯盟) 이사, 1955년에는 평안북도 도민회 고문, 3 · 1정신선양회 고문, 1956년에는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安重根義士記念事業會) 회장, UN가입 전국추진위원회 고문 등에 추대되어 활동하던 중 1956년 11월 12일 84세의 나이로 사거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