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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카의 빛
현장으로 찾아가서 여는 ‘세계의 십자가 展’에서 늘 맨 앞을 장식하는 작품은 ‘파스카의 검은 벽’이다. 두꺼운 검은 마분지를 일정한 크기로 찢어 이어붙인 것으로, 멀리서 보면 검은 물결 띠가 겹겹이 밀려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원래 작품은 집채만 한 크기인데, 그중 작은 일부분을 전시한 것이다. 겨우 1평방 미터가 넘는 정도이다.
애초에 파스카의 검은 벽은 독일 복흠시 멜랑히톤교회 예배당 전면을 가릴만한 크기로 제작한 것이다. 한 조각 한 조각은 어른 손바닥 크기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연결하여 붙이자 예배당의 강단을 완전히 가릴 정도가 되었다. 예배당 중앙의 스테인드글라스도, 십자가도, 아름다운 설교단도 모두 차단하였다.
1995년 사순절, 오스트리아인 작가는 내내 힘들게 작업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며 그의 작업을 궁금하게 지켜보았는데,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뭐랄까, 점점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내 앞에 검은 벽이 쌓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무엇을 의미하는 작품인지 알 수 없었다. 완성하고 나니 두 공간을 완전히 분리한 벽 그 자체였다.
‘파스카의 검은 벽’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다. 높고 두터운 담은 고통스러웠다. 작가는 검은 벽 퍼포먼스를 통해 사순절과 고난주간 동안 복흠 시내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었다. 교회가 행위예술을 통해 어떻게 사람들과 메시지를 소통하는지 보여주는 참신한 실례였다. 부활주일 이후 해체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덕분에 검은 벽의 일부분을 얻었다. 여전히 ‘세계의 십자가’와 함께 전시하게 된 배경이다.
파스카는 유대교의 유월절을 말하는데, 절기상 고난주간과 겹친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나누신 마지막 만찬은 파스카 절기의 저녁 식사였다. 파스카를 표현한 어마어마한 검은 벽은 ‘넘사벽’ 곧 감히 넘지 못할 벽을 강조한 것이다. 물 샐 틈도, 빛이 스밀 틈도 없다. 깜깜한 절망이고, 고통이다. 검은 벽은 저마다 감춘 자신의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무언가와 마주하게 하려는 의도처럼 느껴진다.
고난주간과 일치하는 파스카 절기는 죽음을 극복한다. 파스카를 번역한 ‘유월’(踰越)의 의미는 넘어선다(passover)는 뜻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금요일을 지나 부활전야인 토요일 깊은 밤부터 밝히는 빛을 ‘파스카의 초’(Paschal Candle)라고 부른다. 마침내 거대한 어둠 속에 빛이 드리운 것이다. 교회 전통에서 파스카의 초는 부활절 새벽에 세례받을 사람들의 행렬을 이끈다. 교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이를 “머리와 몸을 포함한 그리스도 전체가 죽음에서 생명에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넘어가는 파스카의 첫 시기”라고 하였다.
“파스카의 초는 오순절 날(성령강림주일)에 소화할 때까지 매 예배 때마다 불을 밝힌다.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이 땅 위에 현존하시는 것을 상징하며, 또한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서 인도했던 불기둥에 비견된다”(문성모). 같은 의미로 적용한 파스카의 초는 부활절 새벽부터 승천일까지 40일 동안 밝히는 두 개의 초이다. 광야 40년을 이끈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연상시키는 두 개의 빛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생의 빛을 의미하고 있다.
고난주간은 검은 벽과 같은 무게의 두려움, 아픔, 절망과 마주하는 시간이다. 그 어두움은 결국 죽음을 극복하며 진정한 파스카에 이른다. 누구나 인생에서 자신만의 벽과 마주한다. 엄두를 내지 못할 벽, 무력감에 빠져 좌절하게 하는 벽, 그러나 도전하고 씨름한 끝에 마침내 극복해야 할 그 벽이다.
그 검은 벽을 열 빛의 열쇠는 무엇인가? 십자가 전시회에서 맨 앞에 둔 이유가 그것인데, 바로 천차만별(千差萬別)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고유한 자신의 십자가를 열쇠로 하여 두터운 벽을 열고, 담을 넘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어둠, 내 앞에 놓인 검은 벽, 우리가 함께 겪는 아픔과 두려움과 불신을 이겨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