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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가는대로 스크랩 태호복희씨, 염제신농씨, 치우천황(배달 14세 자오지 환웅) - 배달의 위대한 성인 제왕들
얼레벌레 추천 0 조회 145 15.02.16 03:04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배달의 위대한 성인 제왕들

 

 

백두산의 신시에서 출발한 배달국은 점차 도시국가의 틀을 벗고 동북아의 대국으로 성장하였다.
그 과정에서 특히 세 분 성황의 지대한 공덕이 있었다.
그 세 분은 태호복희씨, 염제신농씨, 그리고 치우천황이다.

 

인류문명의 창시자 태호복희씨

 

▲ 중국 하남성 주구시 회양현의 복희사당 내에 모셔진 복희상 

 

태호복희씨는 5,600년 전 사람으로, 배달의 5세 태우의 환웅의 막내아들이다.
‘크게 밝다’는 뜻의 태호太昊와 ‘밝은 해’란 뜻의 복희로 그 이름이 천지 광명사상을 담고 있다.

 

 

복희씨는 백두산에서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린 후 천하天河(송화강)에서 용마龍馬의 등에 그려진 상을 보고 하도河圖를 그려 인류 역사상 최초로 가장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수의 체계를 세웠다.

이 하도에서 팔괘가 나오고, 팔괘에서 주역의 64괘 음양론이 나왔다.
음양오행문화 역시 신교의 우주론에서 뻗어 나온 것이다.

 

복희씨는 또한 천지의 음과 양을 3수 원리로 변화시켜 건乾? 태兌? 리離? 진震? 손巽? 감坎? 간艮? 곤坤? 팔괘를 그어 주역의 기초를 닦았으며 태극기의 시조가 되었다.

 

이로써 인간이 우주의 시공간의 변화 법칙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태호복희씨는 음양, 팔괘, 태극기의 시조이다.
또한 복희씨는 그물을 만들어 물고기 잡는 법을 알아내고, 야생 동물을 잡아 제물로 삼기도 하였으며, 일부일처의 혼인 제도를 정하고, 구침(치료목적의 아홉 종류의 침)과 금슬琴瑟(거문고 비파 등의 현악기)을 만들어 삶의 편리를 도모하였다.
풍산風山에서 살아 풍風을 성씨로 삼았는데 인류 성씨의 원조이다.

복희씨는 한마디로 동양철학의 아버지요 인류 문명의 창시자이다.
중국에서는 이분을 인문시조人文始祖(인류 문명의 첫 조상)로 받들고 있다.

 

 

서양의 철학자 라이프니츠(G. Leibniz)는 이렇게 말했다.
“복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철학자이자 동양 과학의 창립자이다.
이 역(易)의 그림은 현존하는 과학의 최고 기념물이라 할 수 있다.
나의 불가사의한 이진법의 새로운 발견은 5천여 년 전 고대 동양의 복희왕이 발견한 철학서이며 문학서인 주역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베이징에 있는 프랑스 전도사 부베와 편지를 교환하면서 주역을 배우고 괘상(卦象)을 스스로 연구하였다.
그는 한문으로 쓰여진 주역을 읽지 못했기 때문에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동양을 다녀온 신부들의 보고서를 입수하여 주역을 공부하였다.

1697년 ‘파리 과학 학술원’에서 자신이 구상한 개념을 정리하여 「이진법 정수론 주해」 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그 역사적인 논문의 부제가 “0과 1의 기호를 사용, 고대 동양 복희의 괘상에 나타난 이진법 산술이 갖는 의미와 그 효용성에 관한 고찰” 이다.

 

1701년 부베가 라이프니츠에게 ‘복희 64괘 차서도’와 ‘복희 64괘 방위도’를 보내왔다. 

 

 

그는 이 도표를 받고 팔괘의 배열이 인류역사상 수학의 ‘이진법’ 원리를 제일 먼저 나타낸 것이라는 발견에 대해 더욱 확신하게 된다.

복희팔괘는 세 개의 효(爻)를 이용하여 ‘건태리진손감간곤’라는 여덟 개의 괘상를 표시하고 있다.
라이프니츠는 양(1)을 1, 음(0)을 0으로 생각하고 고쳐 쓰게 되는데, 팔괘를 이진수로 나타내면 111, 110, 101, 100, 011, 010, 001, 000이 된다.

 

 

컴퓨터는 0과 1로 ‘계산하는 사람’
 
18세기 라이프니츠가 세상의 모든 언어 표현을 간단한 기호 속에 모두 담으려는 꿈은 힐베르트, 괴델, 튜링으로 이어지는 수학자들이 실현하려고 애썼고, 그 과정에서 튜링이 최초의 컴퓨터를 발명할 수 있게 되었다.
컴퓨터(computer)라는 단어는 인간의 사고를 기계가 할 수 있게 하려는 소망이 담겨있는데, ‘계산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태호복희씨의 팔괘는 이진법을 낳고 이진법을 응용한 사칙연산 계산기는 컴퓨터로 이어지고 있다.

 

 

 

 


염제신농씨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농사법을 가르쳐 주었으므로 신농神農이라 하고, 산에 불을 놓아 화전火田을 일구어 화덕火德에 의해 임금이 되었으므로 염제炎帝라 한다.


8세 안부련 환웅 (BCE 3240~BCE 3167)때 웅족熊族 출신인 소전少典이 환웅천황의 명을 받아 섬서성 강수姜水에 가서 군사를 감독하였는데, 그곳(섬서성 보계시寶鷄市 상양산商羊山)에서 낳은 아들 중에 맏이가 석년石年(염제신농)이고 둘째가 욱勖(공손公孫씨의 조상)이다.
욱의 10세 손이 바로 중국 한족漢族의 시조인 황제헌원이다.

 

신농씨는 강수姜水에서 살아 강姜을 성으로 삼았다.

강씨는 현존하는 성씨 중 가장 오래되었으므로 인류 성씨의 원시元始이다.
신농씨는 나무로 보습과  쟁기, 호미를 만들고 지력地力 있는 땅에 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고 채소를 재배하였다.

 

신농씨는 경농의 시조요 동서의학의 시조이다.
수많은 약초를 직접 맛보며 약을 만들었다.
자편紫鞭이라 불리는 붉은 색 채찍을 몸에 지니고 다니며 약초를 찾아내어 그 약초의 독성毒性 유무와 성질의 온溫, 냉冷 등을 가려 내었다.

또한 시장을 개설하여 천하의 백성과 물자가 모여들어 교역이 이뤄지게 함으로써 도시 문명과 산업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신농씨가 세운 나라는 후손인 유망까지 모두 8대에 걸쳐 530년 동안 이어졌다.

 

 

 

 

 

치우천황(배달국 14세 자오지 환웅)

 

 

14세 자오지慈烏支 환웅이 계셨으니, 이분은 신이한 용맹이 매우 뛰어나 구리와 철로 투구를 만들어 쓰고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며, 구치九治(철을 채취하는 기구)를 제작하여 광석을 캐내 이 철을 주조하여 무기를 제작하시니 천하가 모두 외경하였다.


그리하여 세상에서는 이 분을 치우천황이라 불렀는데, 치우治尤란 세속에서 말하길 ‘뇌우雷雨(천둥과 비)가 크게 일어 산과 강이 뒤바뀐다’는 뜻이다.


배달은 14세 치우천황이 백두산의 신시에서 대륙의 청구로 도읍을 옮김으로써 역사의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신농씨가 세운 신농국이 유망楡罔에 이르러 쇠퇴의 길을 걷는 것을 본 치우천황은 서방으로 출정하여 지금의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을 배달의 영토로 흡수하였다.


그런데 유망의 제후였던 헌원이 유망에게 도전하여 판천(阪泉: 현 산서성 운성運城시 남쪽)의 들녘에서 싸워 자립하려 했다.
그러다가 유망이 동방의 천자 치우천황에게 무릎을 꿇자 헌원은 자신이 천자라며 치우천황에게 도전하여 탁록대전을 일으켰다.

 

이때 치우천황은 법력이 고강하여 큰 안개를 잘 지었기 때문에 헌원은 매번 참패했다.
이에 헌원은 천황의 ‘안개 술법’에 대항하기 위해 방향을 일정하게 가리키는 지남거指南車를 만들어 싸웠다.
천황의 장수 치우비蚩尤飛가 성급히 공격하려다가 진중에서 전사하자, 천황이 ‘비석박격기飛石迫擊機’를 만들어 하늘이 뒤덮이도록 큰 돌을 쏘아 올려 헌원군을 초토화시켰다.

 

10년 동안 73회의 접전을 치른 끝에 헌원이 천황에게 항복하였다.
그 후 넓어진 강역을 다스리기 위해 도읍을 백두산 신시에서 서토에 가까운 청구靑丘(현 대릉하 유역)로 옮김으로써 치우천황의 전성기이자 배달의 전성기인 청구 시대를 열게 되었다.

 

 

◀ 탁록 삼조당 - 동북공정의 본원지

 

중국은 황제헌원의 정통론에서 한걸음 나아가 동이족의 성황인 염제신농, 1995년에는 치우천황까지 중국 역사와 문화의 시조로 날조하여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을 세웠다.
각기 높이가 무려 5.5미터나 되는 거대한 상像인데 황제헌원이 중앙에 앉고, 그 좌우에 두 분이 배치되어 있다.

치우천황을 중국의 조상으로 만들어야 그 옛날 치우천황이 다스린 강역을 중국 땅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말하는 치우천황의 강역에는 오늘날 중국 영토가 되어 버린 산동반도, 요동반도, 만주는 물론이고 한반도까지 포함된다.

 

 

 

 

◀ 탁록 삼조당의 내부 벽화

 

탁록 삼조당의 내부 벽화에는 치우천황과 헌원이 맞서 싸우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이것은 정치적 의도에서 억지로 치우천황을 중국인의 조상으로 만들어 삼조당에 앉혔지만, 결코 중국인들은 마음속으로 치우천황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인정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치우천황은 그동안 그들 역사 속에서 사람이 아닌 괴물로 악의 상징과 같은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그런 인물이 핵심 조상으로 모셔진 것은 중국이 ‘현재 자국 영토 내에서 역사적으로 활동했던 민족은 모두 중화민족’이라는 정치적 목적에 따른 역사 왜곡의 결정판이다.

 

 

4,700년 전 요서를 넘어 산동성과 더 멀리 탁록까지 진출하여 광활한 영토를 개척한 치우천황은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법력과 위용을 떨친 한민족의 성웅聖雄으로, 한민족은 물론 중국 백성들까지 숭배하고 추앙하였다.
중국의 진나라와 한나라 때에는 백성들이 10월에 치우천황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그때마다 반드시 ‘붉은 기운’이 천황의 능에서 하늘로 뻗쳤다고 한다.
이 붉은 기운을 동방 배달족과 한족 백성들이 ‘치우기蚩尤旗’라 불렀다.(「사기집해史記集解」)

 

중국 황제들도 치우천황을 숭상하였다.
주나라 혁명의 일등 공신이며 병법의 중시조인 동이족의 재상 강태공姜太公도 제나라의 왕으로 분봉된 뒤 팔신八神께 제사를 올리면서 치우천황을 병주兵主로 모셨다.
팔신은 천주天主, 지주地主, 병주兵主, 양주陽主, 음주陰主, 월주月主, 일주日主, 사시주四時主를 말한다.
천주는 천지만물의 조상인 삼신상제님을, 병주는 병가의 원시조인 치우천황을 뜻한다.(「사기 봉선서」)
후에 진시황도 불로장생을 구하며 팔신제를 올렸는데 병주인 치우천황을 모신 사당이 동평 육감향에 있었으니 제나라의 서쪽이었다.
한고조 유방은 치우천황의 전각을 지어 제사를 지낸 뒤 군사를 일으켜, 진秦의 수도 함양을 평정하였다.
초패왕 항우와 5년간 싸워 마침내 천하를 얻어 제위에 오른 유방은 장안長安에 치우천황의 사당을 짓고 치우천황을 더욱 돈독히 공경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둑제纛祭’를 지냈는데, 둑纛은 임금의 가마 또는 군대의 대장 앞에 세우는 기旗를 말한다.
둑제란  고대로부터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군신軍神 치우천황을 상징하는 깃발에 제사를 올리는 의식이다.
우리민족의 조상이며 불패의 군신인 치우천황을 구국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올린 것이다.

그리고 무장武將들은 전쟁터로 떠나기 전 반드시 둑제를 올렸다.

 

▲ 서울의 '뚝섬'의 유래 : 치우천황에게 제사지내던 둑신사가 있던 곳

 

치우천황의 머리를 형상화한 둑기纛旗는 소의 꼬리나 검은 비단으로 만들어 ‘대조기 大早旗’라고도 불렀다.
조선은 둑제를 국가제사인 소사小祀의 하나로 정비하고 전국에 둑소纛所를 마련하여 매년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다.
둑제는 서울과 각 지방의 병영, 수영에서 각각 시행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전쟁 중 둑제를 세 차례 거행하였다고 기록했다.

 

계사(1593)년 2월 초 4일 : 경칩절이라 둑제를 지냈다.

갑오(1594)년 9월 초 8일 : 장흥부사로 헌관獻官을 삼고, 홍양현감으로 전사典祀를 삼아 초아흐레 둑제를 지내기 위해 입재入齋시켰다.

을미(1595)년 9월 20일 : 새벽 두 시에 둑제를 지냈다.

 

서울의 뚝섬에는 원래 둑제를 지내던 둑신사纛神祠가 있었는데, ‘뚝섬’이라는 이름은 이 둑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둑신사에는 높이 6자, 폭 6자의 벽화가 있었는데, 치우천황과 황제헌원의 싸움인 탁록대전을 그린 그림으로 일제 말기까지 있었으나 분실되었다고 한다.

 

◀ 「삼민신고」에 실려 있는 둑신기

 

「삼민신고」의 저자 조자용은 이 둑신기를 국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안확安廓(1886~1946)의 논문 '황제전쟁 전설의 벽화'에서 얻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청동기 문화는 지금부터 4,700년 전 배달의 14세 치우천황 때에 시작되었다.
「관자 지수地數」에서 “치우천황이 갈로산 옹호산의 쇠와 수금을 캐어 투구, 갑옷, 칼, 창 등을 만들었다.”라고 한 기록과 함께 이를 명확히 입증하고 있다.
최근의 조사 발굴 성과에 따르면 단군조선의 강역인 만주 요령성 지역의 청동기 문화 개시 연대는 지금부터 4,400년 전이다.
이에 비하여 중국 황하 유역에서 가장 오래된 청동기 문화인 하남성 이리두二里頭 문화(하夏나라의 유적)는 4,000년 전의 것이다.
따라서 문헌 기록뿐 아니라 고고학상으로도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가 중국보다 400년 내지 700년 앞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철기 문화도 우리나라에서 먼저 시작되어 중국 지역에 보급되었다.
그것은 철鐵의 옛 글자[古字]가 ‘동이족의 쇠’를 뜻하는 ‘철(?=金+夷)이라는 사실이 명백히 증명한다.

 

◀ 비파형 동검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식 동검이라고도 한다. 
청동은 주석과 아연의 합금인데, 우리나라 청동검에는 아연이 상당히 많이 들어있다.

아연은 섭씨 7∼8백도에서는 증발된다.

그런데 청동검을 만들려면 섭씨 1200도씨 이상 가열해야 한다.

그래서 당시에 청동기에 아연을 섞는다는 것은 굉장히 고난도의 기술이다.
우리나라 청동기에는 아연이 20∼30%씩 들어있는 반면 중국 청동기는 아연이 거의 함유되어 있지 않다.

중국에서는 아연을 합금할 기술이 없었던 것이다.

고조선의 청동기술이 중국보다 뛰어났다.
 
비파형 동검은 중국지역에서는 전혀 출토되지 않는다.

비파형 동검의 출토지역이 바로 동이족의 세력범위, 즉 고조선의 세력범위하고 아주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내몽고 지역에서도 비파형 동검과 거푸집이 발견되었다.

거푸집은 비파형 동검을 만드는 틀인데, 그 틀이 나왔다는 것은 그곳이 고조선의 중심지역 중 하나라는 걸 뜻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포항제철이나 광양제철과 같이 철생산의 중심지라는 뜻이다.
 
고조선의 청동 제조기술은 당시 세계 최고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청동기에서 철기로 발전하는데, 철기 제조기술도 우리가 아주 압도적으로 발달했다고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국사 교과서에서는 철기는 한족 위만이 갖고 온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고대 기록에 위만이 철기를 갖고 왔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아 _ STB상생방송 이덕일 초청 고대사 특강 )

 

 

구려九黎의 천자天子

 

‘구려’에서 ‘려黎’의 다른 소릿값으로 ‘리’ 또는 ‘이’가 있다.
따라서 ‘구려句麗’는 ‘구리’ 또는 ‘구이’가 된다.
‘구이’는 곧 ‘구려’이니, 치우천황께서 다스리신 구려는 배달의 다른 이름이다.

 

구려라는 말은 치우천황 때 비롯되었다.
동이東夷의 아홉 겨레를 말한다.
이것이 변하여 고구려-고려-코리아로 불리게 된 것이다.

 

고구려의 어원은 배달국 14세 치우천황 때의 구려句麗이다.
중국 사서에서도 고주몽성제의 고구려 개국 이전인 BCE 2세기 말에 이미 고구려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의 둘째 아들인 고진이 고구려후로 봉해졌는데, 후에 고진의 증손자인 고주몽이 북부여의 대통을 이어 ‘고구려’라는 나라 이름을 정함으로써 고구려는 제후국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영도국으로서 위상을 얻게 되었다.

 

『환단고기』에서 고주몽 성제가 고구려를 건국하기 약 50년 전에 서한西漢의 침략을 받아 그 일부가 현도군에 속하게 되었는데 그 지역을 ‘고구려’, ‘고리藁離’, ‘구려句麗’라 표기하였다.
북부여의 해모수 단군과 고두막 단군도 본래 고리국 혈통이다.
「일주서逸周書 왕회王會편」에는 “동북 지역에 고이高夷가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 고이高夷에 대한 공조孔晁의 주석에 “동북의 이夷로서 고구려이다.”라고 하였다.
「수서隋書 배구전裵矩傳」에는 “고려는 본래 고죽국孤竹國이다.”라고 하였다.

 

천자라는 말은 본래 삼신상제님의 정신을 체득하여 삼신상제님을 대행하여 그 진리(신교)로써 세상을 교화하고 다스리신 환웅 단군을 천제자[天帝子=天子]라 한 데서 연유하였다.
이 신교의 삼신三神사상이 중국으로 건너가 한 차원 낮은 ‘천天 사상’으로 바뀌면서 천자天子로 불리게 된 것이다.
중국에서는 춘추전국 시대에 이르러 6국을 통일한 진왕秦王 정政이 중국 최초의 천자로서 황제皇帝가 되었을 뿐이다.
즉 중국에서 천자 제도가 시행된 것은 2,200년 전 일이다.
우리 동방 한민족이 배달 시대부터 환웅을 ‘천제자[天帝之子]’라 부른 것에 비하면 2,600여 년이 지난 후세의 일이다.


『환단고기 신시본기』에는 치우천황이 강姜씨라고 하였다.

 

 

◀ 호남성의 치우천황 동상

 

치우천황을 조상으로 받으는 묘족은 중국 양자강 이남에서 동남아시아 산간지역에 걸쳐 넓게 분포하는데 귀주, 호남, 운남 지역에 가장 많이 산다.

 

왕동령王桐齡의 「중국민족사」에는 "삼묘족三苗族의 나라를 구려九黎라 하고 구려의 임금을 치우라 한다."라 하였다.

「회남자淮南子 11권 제속훈」에 "머리채를 삼끈으로 묶은 상투쟁이로서 마치 싹이 돋은 듯하여 묘苗라 했다."는 구절이 있고

「산해경 17권 대황북경」에 "서북해 밖 흑수 북쪽에 날개달린 사람鳥夷系이 있으니 이름하여 묘민苗民이다."라는 기록으로 보면 이夷족이면서 머리에 상투를 튼 민족이다.

 

즉, 묘족은 우리와 공통의 조상을 가진 민족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묘족이 있던 영역까지 배달국의 영역이었다고 추정해 볼 수도 있고, 『환단고기』에 의하면 이러한 모든 추정들이 사실임이 밝혀진다.

 

「산해경」에 양자강 이남의 동정호와 팽려호 일대에는 구려九黎의 후예인 ‘유묘有苗’혹은 ‘삼묘三苗’라고 불리는 부족이 있었는데 단주(요임금의 아들)와 사이가 매우 가까웠다.

 

마침 요임금이 순에게 제위를 넘겨준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승복하지 않고 있던 삼묘의 족장은 단주가 오자 곧바로 세력을 연합하여 요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요의 군대는 단주와 삼묘의 연합군을 궤멸시켰고, 이 싸움에서 삼묘의 족장이 피살당하고 단주도 전사하였다.

 

이것이 묘족이 남쪽으로 옮겨가게 된 배경이라고 했다.(이재석,「인류 원한의 뿌리 단주」,상생출판,2008)

 

 

 

 

▲ 5,500 여년 전 만들어 진 것으로 밝혀진 홍산문화의 우하량 제2지점 방형 적석총 복원도


홍산문화는 요서지역(발해연안 지역)에서 발견된 신석기·청동기 문화이다.
우하량 유적에는 대형제단大型祭壇, 여신묘女神廟, 적석총군積石塚群이 나왔다.
총묘단塚廟壇이 함께 나왔다는 것과 최고 통치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대묘를 주변의 작은 무덤들이 에워싸고 있는 것을 볼 때, 홍산문화는 이미 씨족사회를 넘어선 계급이 분화된 국가단계의 문명을 누렸음을 알 수 있다.
적석총과 고인돌로 대표되는 거석문화는 우리 문화이다.
근래 학자들은 거석문화가 태양신숭배와 연관된 것으로 본다.

 

환국-배달-고조선이라는 동북아 시원역사를 인정해야 홍산문화를 포함한 발해연안의 그 엄청난 유적과 유물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홍산문화는 동북아 신석기 문화의 최고봉으로서 중국 한족과는 계통이 전혀 다른 문화이다.

시베리아 과학원의 고고학자 세르게이 알킨 교수도 "홍산문화는 중원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중원문화가 홍산문화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라고 주장하였다.

 

중국은 홍산문화를 중국 황하문명보다 2~3천 년 앞선 황하문명의 원류로 규정하고 환단 시대의 한민족 문화를 자신들의 문화로 둔갑시켜 중국을 세계 최고最古 문명국으로 내세우고 있다.

환단시대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은 홍산문명에 대해 침묵하거나 우리 역사와 관계없는 것으로 부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원문: 상생출판 환단고기)


* 출처: 환단고기(http://www.hwandangogi.or.kr)


 

 

 

역사적으로 타민족을 멸시하는 중국

 

 

태호복희씨는 전설에 의하면 고대 동이족의 이름 난 우두머리이다.(중략)
전설에 의하면, 그는 사람의 머리에 뱀의 몸이었다고 한다.(후략)

 

염제신농씨는 전설에 의하면, 상고上古시대 한 부락의 이름 난 우두머리이다.(중략)
전설에 의하면 그는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이었다고 한다.(후략)

 

「중국역대제왕록」을 보면, 중국인들이 동이족의 역사를 폄하하고 왜곡시키고 있음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치우가 난을 일으키니 황제의 명이 소용없었다.
이에 황제가 군사를 징발하고 제후를 모아 치우와 탁록의 들에서 싸워 마침내 치우를 잡아 죽였다. (「사기 오제본기」)

 

황제가 섭정을 할 때, 치우는 형제가 81명이 있었는데 치우는 짐승의 몸에 사람 말을 하였고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하였으며 모래와 돌을 먹었다.

칼, 창, 큰 활 등의 병장기를 만들어 천하에 위세를 떨쳤다.(「사기정의」)

 

「사기」에서는 탁록대전의 승리가 헌원의 것이었고, 치우는 죽임을 당했다고 사실을 반대로 뒤집어 기록했다.
그리하여 동북아 역사와 문명의 뿌리를 헌원 중심으로 조작하고, 중국이 천하의 중심, 천자국이며 주변 민족은 모두 야만족이라는 중화사관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치우천황이 헌원에게 패하고 죽임을 당했다면, 진시황은 왜 치우천황을 병주兵主로 모셨겠는가.
게다가 이제 와서는 중국은 수천 년 동안 지켜 온 황제헌원의 자손이라는 주장을 버리고 1980년대 이후 황제와 염제, 1990년대 이후에는 중화삼조당을 세워 황제와 염제 그리고 치우, 모두가 자신의 시조라고 주장하고 있다.

 

 

 

 

남의 나라 역사까지 빼앗으려 드는 중국

 

 

역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중국은 '낙양洛陽은 천하지중天下之中'이라고 해서, 북경, 남경 등 자기네들 도읍하던 수도를 천하의 중심이라고 하고, 동서남북 사방에 사는 타민족들을 가리켜 버러지 같고(南蠻), 짐승 같고(北狄), 오랑캐 같고(東夷), 야만인(西戎) 같다고 했다.
중국권외의 각색 인종들은 물건으로 말하면 미완성품이고 자기네들 족속만이 완성품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여러 천 년 동안 타민족을 멸시하고, 학대하고, 죄악시하고, 인간 이하 취급을 했다.

 

또 그들은 문명의 창시자인 태호 복희씨도 사람 취급을 안했다.
태호 복희씨가 팔괘를 그어 천하를 문명케 했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고 또한 그네들도 그 문화권에 수용을 당해서 생존해 왔건만, 문화의 창시자를 원시 자연인의 백두, 맨 머리에 '인두사신人頭蛇身', '사람 머리에 뱀의 몸'으로 그려 놓았다.
신농씨는 '우두인신牛頭人身', '소머리에 사람 몸뚱이'로 전락시켰다.


그러면서도 역사적으로 그 뒤에 나온 자기네 나라 통치자들은 면류관도 씌우고 곤룡포도 입혀서 아주 존엄한 위의威儀를 갖춰 그려 놨다.

그네들이 역사를 그렇게 왜곡하였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자민족이 자기네 나라를 통치한 때가 거의 없다.
청나라 하면 그게 여진족이다.
여진족 누루하치가 명나라를 정복하고 청나라를 세웠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우리나라 사람이다.
주원장이 중국에 들어가 원나라를 정복하고 명나라를 세웠다.
또 원나라를 세운 칭기즈칸은 몽고족이다.

숱한 역사 얘기를 다 할 수는 없지만 중국이라는 나라는 자기 민족도 자력自力으로 통치를 하지 못한 나라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중국이 우리나라를 정복하러 달려 붙어서 그들이 망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우선 수나라 양제가 수륙대군 113만 명을 출병할 때, 식량 조달을 하는 보급부대와 같은 군속 130만 명을 포함해서 250만 대군을 거느리고 기세등등하게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가 살수 싸움에서 을지문덕 장군에게 전멸을 당하고 말았다.
간신히 자기네 나라로 도망가서 군대를 점검해 보니 살아남은 군사가 겨우 호위병 2천 700명에 불과했다.

동서양 전쟁사를 통해서 수백만 군대가 한자리 싸움에서 전멸을 당하고 겨우 몇 천 명만 살아남은 전쟁은 오직 그 하나밖에 없다.

 

그때 이연이라는 사람이 아들 이세민을 데리고 수 양제를 들이쳐 버렸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나라가 당나라다.
그 후에 당 태종 이세민이 생각하기에, 나라 하나 빼앗는 게 별로 어렵지 않게 여겨졌다.
그래서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도 정복하기로 결심을 하고, 정규군 30만에 군속 25만 해서 오륙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 토벌에 나섰다.

 

승승장구하여 고구려의 요동지역(난하?河동쪽 지역)을 함락시킨 당 태종은 안시성(하북성 개평부 동북쪽의 탕지보湯地堡 : 옛 번한의 수도 왕검성)에 이르러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고구려군의 끈질긴 저항으로 싸움은 2~3개월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연개소문의 대반격에 크게 패한 당 태종은 설상가상으로 그만 양만춘의 화살에 눈을 맞아 부상을 당하고서 쫓겨 들어갔다.
요택(하북성 천진 일대)을 건너서 군대를 점검해 보니, 겨우 호위병 3~4천 명이 따랐을 뿐이었다.
그 후 당태종은 수 년 동안 화살 맞은 눈을 앓다가 그 여독으로 죽게 되었다.

 

 

중국의 역사가 이러하건만, 다른 민족들을 그렇게 짓밟고, 버러지만도 못하다느니, 짐승만도 못하다느니, 야만인이라느니 하면서 여러 천 년 동안 능욕을 가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그네들이 우리나라를 얼마나 압박했는가?

태자를 봉하려고 해도 중국의 동의를 얻어야 했고, 왕이 등극을 할래도 중국의 동의를 얻어야 했고, 나라 이름 짓는 것도 중국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그 얼마나 남의 민족에게 부당한 처사인가.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러 동북공정이라는 미명하에 우리나라 고조선, 고구려 역사를 전부 다 자기네 부속품으로 만들기 위해서 2002년부터 5년 간에 걸쳐 200억 위안(약 2조 5천억 원)을 쏟아 부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사를 자기네 역사로 날조하는 걸 합리화시키는 데에, 누가 봐도 그렇다고 타당하게 여기게끔 역사를 조작하는데에, 그 공작금으로 2조 5천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쓴 것이다.

 

허나 역사의 정의라 하는 것은 그렇게 해서 그 틀이 뒤집어지는 것이 아니다. 

 

 

- 상생출판 『천지의 도, 춘생추살春生秋殺』,180~18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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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02.16 04:54

    첫댓글 어떤 이유에서건 역사적 승패가 갈리면서, 역사적 사실들이 왜곡되고 진실이 묻혀버리는 안타까운 일들이 이어져오는거 같습니다. 하지만 기나긴 세상의 역사를 놓고보면 이런 현실도 짧은한 과정일거라 봅니다. 달라질 때 있겠지요. ^^

  • 15.02.18 00:45

    인간문명이 근대화를 이루면서 각 나라마다 자기민족의 우월성을 드높이고자 수많은 역사를 왜곡하였지요. 허나 지구태동이래 인간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뜯어보면 하나의 뿌리에서 각 민족으로 그 씨가 전파되었더군요. 인간역사이래 각 세계곳곳에서 나타는 현자들의 용기있는 부르짖음의 근본을 조합해보면 지금과 같은 각나라별로 주장하는 민족의 우월성을 경계하고 있읆을 알게됩니다. 그런 원인으로 평화의 체계가 무너뜨리게된 원인일 것입니다. 부처나 예수를 비롯하여 역사상 현자들의 주장은 인류의 원 뿌리가 하나의 가족공동체임 거듭 천명하였으니 서로 사랑과 자비로 대하라고 거듭 호소한것이지요.

  • 15.02.18 00:54

    무지한 인간들이 권력을 이용하여 기득권을 누리고자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바로잡혀야 온 세상의 인류가 평온하게 될듯합니다. 각 나라별로 출토된 역사상의 문헌들과 증거자료들은 인류의 원문명이 어느 하나의 나라가 주도함이 아닌 각 나라별로 인류문명의 영적 발전을 위해 시기별로 현자들을 하늘에서 내려주어 계도하고있으니 인류는 분열된 과거의 무지로부터 벗어나 온 인류가 한가족임을 깨달아 평화를 위한 새로운 도약을 시도해나가야 할것입니다. 그래야 태초의 위대한 신들(외계의 뛰어난 지적 생명체들)의 뜻대로 인류문명이 이땅에서 평화로가 정착되어 영원한 파라다이스 노정을 걷게 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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