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의 위대한 성인 제왕들
백두산의 신시에서 출발한 배달국은 점차 도시국가의 틀을 벗고 동북아의 대국으로 성장하였다.
인류문명의 창시자 태호복희씨
▲ 중국 하남성 주구시 회양현의 복희사당 내에 모셔진 복희상
태호복희씨는 5,600년 전 사람으로, 배달의 5세 태우의 환웅의 막내아들이다.
복희씨는 백두산에서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린 후 천하天河(송화강)에서 용마龍馬의 등에 그려진 상을 보고 하도河圖를 그려 인류 역사상 최초로 가장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수의 체계를 세웠다. 이 하도에서 팔괘가 나오고, 팔괘에서 주역의 64괘 음양론이 나왔다.
복희씨는 또한 천지의 음과 양을 3수 원리로 변화시켜 건乾? 태兌? 리離? 진震? 손巽? 감坎? 간艮? 곤坤? 팔괘를 그어 주역의 기초를 닦았으며 태극기의 시조가 되었다.
이로써 인간이 우주의 시공간의 변화 법칙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태호복희씨는 음양, 팔괘, 태극기의 시조이다. 복희씨는 한마디로 동양철학의 아버지요 인류 문명의 창시자이다.
서양의 철학자 라이프니츠(G. Leibniz)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베이징에 있는 프랑스 전도사 부베와 편지를 교환하면서 주역을 배우고 괘상(卦象)을 스스로 연구하였다. 1697년 ‘파리 과학 학술원’에서 자신이 구상한 개념을 정리하여 「이진법 정수론 주해」 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그 역사적인 논문의 부제가 “0과 1의 기호를 사용, 고대 동양 복희의 괘상에 나타난 이진법 산술이 갖는 의미와 그 효용성에 관한 고찰” 이다.
1701년 부베가 라이프니츠에게 ‘복희 64괘 차서도’와 ‘복희 64괘 방위도’를 보내왔다.
그는 이 도표를 받고 팔괘의 배열이 인류역사상 수학의 ‘이진법’ 원리를 제일 먼저 나타낸 것이라는 발견에 대해 더욱 확신하게 된다. 복희팔괘는 세 개의 효(爻)를 이용하여 ‘건태리진손감간곤’라는 여덟 개의 괘상를 표시하고 있다.
컴퓨터는 0과 1로 ‘계산하는 사람’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농사법을 가르쳐 주었으므로 신농神農이라 하고, 산에 불을 놓아 화전火田을 일구어 화덕火德에 의해 임금이 되었으므로 염제炎帝라 한다.
신농씨는 강수姜水에서 살아 강姜을 성으로 삼았다. 강씨는 현존하는 성씨 중 가장 오래되었으므로 인류 성씨의 원시元始이다.
신농씨는 경농의 시조요 동서의학의 시조이다. 또한 시장을 개설하여 천하의 백성과 물자가 모여들어 교역이 이뤄지게 함으로써 도시 문명과 산업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치우천황(배달국 14세 자오지 환웅)
14세 자오지慈烏支 환웅이 계셨으니, 이분은 신이한 용맹이 매우 뛰어나 구리와 철로 투구를 만들어 쓰고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며, 구치九治(철을 채취하는 기구)를 제작하여 광석을 캐내 이 철을 주조하여 무기를 제작하시니 천하가 모두 외경하였다.
이때 치우천황은 법력이 고강하여 큰 안개를 잘 지었기 때문에 헌원은 매번 참패했다.
10년 동안 73회의 접전을 치른 끝에 헌원이 천황에게 항복하였다.
◀ 탁록 삼조당 - 동북공정의 본원지
중국은 황제헌원의 정통론에서 한걸음 나아가 동이족의 성황인 염제신농, 1995년에는 치우천황까지 중국 역사와 문화의 시조로 날조하여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을 세웠다. 치우천황을 중국의 조상으로 만들어야 그 옛날 치우천황이 다스린 강역을 중국 땅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 탁록 삼조당의 내부 벽화
탁록 삼조당의 내부 벽화에는 치우천황과 헌원이 맞서 싸우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치우천황은 그동안 그들 역사 속에서 사람이 아닌 괴물로 악의 상징과 같은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4,700년 전 요서를 넘어 산동성과 더 멀리 탁록까지 진출하여 광활한 영토를 개척한 치우천황은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법력과 위용을 떨친 한민족의 성웅聖雄으로, 한민족은 물론 중국 백성들까지 숭배하고 추앙하였다.
중국 황제들도 치우천황을 숭상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둑제纛祭’를 지냈는데, 둑纛은 임금의 가마 또는 군대의 대장 앞에 세우는 기旗를 말한다. 그리고 무장武將들은 전쟁터로 떠나기 전 반드시 둑제를 올렸다.
▲ 서울의 '뚝섬'의 유래 : 치우천황에게 제사지내던 둑신사가 있던 곳
치우천황의 머리를 형상화한 둑기纛旗는 소의 꼬리나 검은 비단으로 만들어 ‘대조기 大早旗’라고도 불렀다.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전쟁 중 둑제를 세 차례 거행하였다고 기록했다.
계사(1593)년 2월 초 4일 : 경칩절이라 둑제를 지냈다. 갑오(1594)년 9월 초 8일 : 장흥부사로 헌관獻官을 삼고, 홍양현감으로 전사典祀를 삼아 초아흐레 둑제를 지내기 위해 입재入齋시켰다. 을미(1595)년 9월 20일 : 새벽 두 시에 둑제를 지냈다.
서울의 뚝섬에는 원래 둑제를 지내던 둑신사纛神祠가 있었는데, ‘뚝섬’이라는 이름은 이 둑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 「삼민신고」에 실려 있는 둑신기
「삼민신고」의 저자 조자용은 이 둑신기를 국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안확安廓(1886~1946)의 논문 '황제전쟁 전설의 벽화'에서 얻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청동기 문화는 지금부터 4,700년 전 배달의 14세 치우천황 때에 시작되었다.
◀ 비파형 동검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식 동검이라고도 한다. 아연은 섭씨 7∼8백도에서는 증발된다. 그런데 청동검을 만들려면 섭씨 1200도씨 이상 가열해야 한다. 그래서 당시에 청동기에 아연을 섞는다는 것은 굉장히 고난도의 기술이다. 중국에서는 아연을 합금할 기술이 없었던 것이다. 고조선의 청동기술이 중국보다 뛰어났다. 비파형 동검의 출토지역이 바로 동이족의 세력범위, 즉 고조선의 세력범위하고 아주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거푸집은 비파형 동검을 만드는 틀인데, 그 틀이 나왔다는 것은 그곳이 고조선의 중심지역 중 하나라는 걸 뜻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포항제철이나 광양제철과 같이 철생산의 중심지라는 뜻이다. 그리고 청동기에서 철기로 발전하는데, 철기 제조기술도 우리가 아주 압도적으로 발달했다고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국사 교과서에서는 철기는 한족 위만이 갖고 온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고대 기록에 위만이 철기를 갖고 왔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아 _ STB상생방송 이덕일 초청 고대사 특강 )
구려九黎의 천자天子
‘구려’에서 ‘려黎’의 다른 소릿값으로 ‘리’ 또는 ‘이’가 있다.
구려라는 말은 치우천황 때 비롯되었다.
고구려의 어원은 배달국 14세 치우천황 때의 구려句麗이다.
『환단고기』에서 고주몽 성제가 고구려를 건국하기 약 50년 전에 서한西漢의 침략을 받아 그 일부가 현도군에 속하게 되었는데 그 지역을 ‘고구려’, ‘고리藁離’, ‘구려句麗’라 표기하였다.
천자라는 말은 본래 삼신상제님의 정신을 체득하여 삼신상제님을 대행하여 그 진리(신교)로써 세상을 교화하고 다스리신 환웅 단군을 천제자[天帝子=天子]라 한 데서 연유하였다.
◀ 호남성의 치우천황 동상
치우천황을 조상으로 받으는 묘족은 중국 양자강 이남에서 동남아시아 산간지역에 걸쳐 넓게 분포하는데 귀주, 호남, 운남 지역에 가장 많이 산다.
왕동령王桐齡의 「중국민족사」에는 "삼묘족三苗族의 나라를 구려九黎라 하고 구려의 임금을 치우라 한다."라 하였다. 「회남자淮南子 11권 제속훈」에 "머리채를 삼끈으로 묶은 상투쟁이로서 마치 싹이 돋은 듯하여 묘苗라 했다."는 구절이 있고 「산해경 17권 대황북경」에 "서북해 밖 흑수 북쪽에 날개달린 사람鳥夷系이 있으니 이름하여 묘민苗民이다."라는 기록으로 보면 이夷족이면서 머리에 상투를 튼 민족이다.
즉, 묘족은 우리와 공통의 조상을 가진 민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산해경」에 양자강 이남의 동정호와 팽려호 일대에는 구려九黎의 후예인 ‘유묘有苗’혹은 ‘삼묘三苗’라고 불리는 부족이 있었는데 단주(요임금의 아들)와 사이가 매우 가까웠다.
마침 요임금이 순에게 제위를 넘겨준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승복하지 않고 있던 삼묘의 족장은 단주가 오자 곧바로 세력을 연합하여 요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요의 군대는 단주와 삼묘의 연합군을 궤멸시켰고, 이 싸움에서 삼묘의 족장이 피살당하고 단주도 전사하였다.
이것이 묘족이 남쪽으로 옮겨가게 된 배경이라고 했다.(이재석,「인류 원한의 뿌리 단주」,상생출판,2008)
▲ 5,500 여년 전 만들어 진 것으로 밝혀진 홍산문화의 우하량 제2지점 방형 적석총 복원도
환국-배달-고조선이라는 동북아 시원역사를 인정해야 홍산문화를 포함한 발해연안의 그 엄청난 유적과 유물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홍산문화는 동북아 신석기 문화의 최고봉으로서 중국 한족과는 계통이 전혀 다른 문화이다. 시베리아 과학원의 고고학자 세르게이 알킨 교수도 "홍산문화는 중원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중원문화가 홍산문화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라고 주장하였다.
중국은 홍산문화를 중국 황하문명보다 2~3천 년 앞선 황하문명의 원류로 규정하고 환단 시대의 한민족 문화를 자신들의 문화로 둔갑시켜 중국을 세계 최고最古 문명국으로 내세우고 있다. 환단시대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은 홍산문명에 대해 침묵하거나 우리 역사와 관계없는 것으로 부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원문: 상생출판 환단고기)
역사적으로 타민족을 멸시하는 중국
태호복희씨는 전설에 의하면 고대 동이족의 이름 난 우두머리이다.(중략)
염제신농씨는 전설에 의하면, 상고上古시대 한 부락의 이름 난 우두머리이다.(중략)
「중국역대제왕록」을 보면, 중국인들이 동이족의 역사를 폄하하고 왜곡시키고 있음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치우가 난을 일으키니 황제의 명이 소용없었다.
황제가 섭정을 할 때, 치우는 형제가 81명이 있었는데 치우는 짐승의 몸에 사람 말을 하였고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하였으며 모래와 돌을 먹었다. 칼, 창, 큰 활 등의 병장기를 만들어 천하에 위세를 떨쳤다.(「사기정의」)
「사기」에서는 탁록대전의 승리가 헌원의 것이었고, 치우는 죽임을 당했다고 사실을 반대로 뒤집어 기록했다. 치우천황이 헌원에게 패하고 죽임을 당했다면, 진시황은 왜 치우천황을 병주兵主로 모셨겠는가.
남의 나라 역사까지 빼앗으려 드는 중국
역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중국은 '낙양洛陽은 천하지중天下之中'이라고 해서, 북경, 남경 등 자기네들 도읍하던 수도를 천하의 중심이라고 하고, 동서남북 사방에 사는 타민족들을 가리켜 버러지 같고(南蠻), 짐승 같고(北狄), 오랑캐 같고(東夷), 야만인(西戎) 같다고 했다.
또 그들은 문명의 창시자인 태호 복희씨도 사람 취급을 안했다. 그러면서도 역사적으로 그 뒤에 나온 자기네 나라 통치자들은 면류관도 씌우고 곤룡포도 입혀서 아주 존엄한 위의威儀를 갖춰 그려 놨다. 그네들이 역사를 그렇게 왜곡하였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자민족이 자기네 나라를 통치한 때가 거의 없다. 숱한 역사 얘기를 다 할 수는 없지만 중국이라는 나라는 자기 민족도 자력自力으로 통치를 하지 못한 나라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중국이 우리나라를 정복하러 달려 붙어서 그들이 망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동서양 전쟁사를 통해서 수백만 군대가 한자리 싸움에서 전멸을 당하고 겨우 몇 천 명만 살아남은 전쟁은 오직 그 하나밖에 없다.
그때 이연이라는 사람이 아들 이세민을 데리고 수 양제를 들이쳐 버렸다.
승승장구하여 고구려의 요동지역(난하?河동쪽 지역)을 함락시킨 당 태종은 안시성(하북성 개평부 동북쪽의 탕지보湯地堡 : 옛 번한의 수도 왕검성)에 이르러 성을 포위했다.
중국의 역사가 이러하건만, 다른 민족들을 그렇게 짓밟고, 버러지만도 못하다느니, 짐승만도 못하다느니, 야만인이라느니 하면서 여러 천 년 동안 능욕을 가했다.
태자를 봉하려고 해도 중국의 동의를 얻어야 했고, 왕이 등극을 할래도 중국의 동의를 얻어야 했고, 나라 이름 짓는 것도 중국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허나 역사의 정의라 하는 것은 그렇게 해서 그 틀이 뒤집어지는 것이 아니다.
- 상생출판 『천지의 도, 춘생추살春生秋殺』,180~18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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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sweet heart 원문보기 글쓴이: 슈프림민
첫댓글 어떤 이유에서건 역사적 승패가 갈리면서, 역사적 사실들이 왜곡되고 진실이 묻혀버리는 안타까운 일들이 이어져오는거 같습니다. 하지만 기나긴 세상의 역사를 놓고보면 이런 현실도 짧은한 과정일거라 봅니다. 달라질 때 있겠지요. ^^
인간문명이 근대화를 이루면서 각 나라마다 자기민족의 우월성을 드높이고자 수많은 역사를 왜곡하였지요. 허나 지구태동이래 인간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뜯어보면 하나의 뿌리에서 각 민족으로 그 씨가 전파되었더군요. 인간역사이래 각 세계곳곳에서 나타는 현자들의 용기있는 부르짖음의 근본을 조합해보면 지금과 같은 각나라별로 주장하는 민족의 우월성을 경계하고 있읆을 알게됩니다. 그런 원인으로 평화의 체계가 무너뜨리게된 원인일 것입니다. 부처나 예수를 비롯하여 역사상 현자들의 주장은 인류의 원 뿌리가 하나의 가족공동체임 거듭 천명하였으니 서로 사랑과 자비로 대하라고 거듭 호소한것이지요.
무지한 인간들이 권력을 이용하여 기득권을 누리고자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바로잡혀야 온 세상의 인류가 평온하게 될듯합니다. 각 나라별로 출토된 역사상의 문헌들과 증거자료들은 인류의 원문명이 어느 하나의 나라가 주도함이 아닌 각 나라별로 인류문명의 영적 발전을 위해 시기별로 현자들을 하늘에서 내려주어 계도하고있으니 인류는 분열된 과거의 무지로부터 벗어나 온 인류가 한가족임을 깨달아 평화를 위한 새로운 도약을 시도해나가야 할것입니다. 그래야 태초의 위대한 신들(외계의 뛰어난 지적 생명체들)의 뜻대로 인류문명이 이땅에서 평화로가 정착되어 영원한 파라다이스 노정을 걷게 될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