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란 남가일몽(南柯一夢:지나간 헛된 꿈)이요 수류운공(水流雲空:흐르는 물과 구름)이나, 그 역사는 남는다.
사초(史草) 기록된 자료는 시정기(時政記)라 하여 매달마다 1책 혹은 2책으로 묶어 매년 마지막 달에 왕에게 책수만 보고 하고 춘추관에 보관했다가 실록 편찬 때 이용하였다. 비밀이 엄격히 지켜져 실록이 편찬되면 세초(洗草)라 하여 물에 빨아 글씨를 지운 후, 그 종이를 다시 물에 넣고 풀어서 재활용하여 종이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사초와 시정기를 작성하는 이를 사관 또는 한림이라 불렀다. 블로그(Blog)를 운영하는 블로거(blogger)는 현대판 사관이 아닐까?
올들어 제일 추운 날이지만 하늘 파란 겨울날 아침 출근 길에 둘러 본 이숙번 묘 하루에 두번, 출근과 퇴근 안성부원군을 지내신 이숙번님의 묘소앞을 지난다. [답사·촬영. 2008. 2. 13일(수요일). 한국의산천 ]
이숙번(李叔蕃 : 1373(공민왕 22)∼1440(세종 22). ▲ 물왕리 저수지 옆 산기슭에 위치한 안성 부원군 이숙번 유택(幽宅·묘) 입구 ⓒ2008 한국의산천
▲ 이숙번 유택 앞에 있는 안내문 안산 향토유적 제18호 ⓒ 2008 한국의산천
이숙번(李叔蕃 : 1373(공민왕 22)∼1440(세종 22). 그뒤 방원의 측근이 되어 정종이 왕위에 오르자 방원에게 "공을 왕으로 추대하고 싶을 뿐이다."라고까지 말하였다고 한다.
정종 2년(1400) 박포(朴苞)가 방원과 사이가 좋지 않던 이방간(李芳幹)을 충동하여 군사를 일으켰을 때도 사병을 동원, 이들을 제거함으로써 방원의 지위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태종 1년(1401)에는 다시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책록되어 좌군총제(左軍摠制) · 상 만호(上萬戶)를 지내고, 이듬해 삼군 도총제(三軍都摠制)가 설치되면서 내갑사(內甲士)의 좌번(左番)을 관장하였다. 이어 지승추부사(知承樞府事)를 거쳐 도진무(都鎭撫)가 되어 안변 부사 조사의(趙思義)의 반란을 진압하기도 하였다. 그 뒤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와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차례로 역임하고, 1405년에는 지공거(知貢擧)를 맡기도 하였다. 이 해 다시 참찬의정부사에 임명된 이래 여러 차례 이 직책을 수행하였을 뿐 아니라 중군 총제(中軍摠制) ·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 · 중군 도총제 · 지의흥부사(知義興府事) 등을 차례로 겸직하였다. 그 사이 1409년에는 잠시 동북면절제사(東北面節制使)를 지냈고, 1412년 종1품(從一品)의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병조 판서로 기용되었으나 곧 체직되어 참찬의정부사 · 의정부 찬성사 · 동판의정부사(同判議政府事) · 의정부 좌참찬 등을 지내다가 태종 15년(1415) 관제개편에 따라 의정부의 찬성(贊成)이 되었다.
한편, 1414년에는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가되어 영춘추관사 하륜(河崙) 등과 함께 '고려사' 중 공민왕 이후의 사실을 고쳐서 개수작업에 참여하여 바로잡도록 명을 받았다. 이듬해 공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직책을 맡기지 말아야 한다는 태종의 뜻에 따라 관직을 물러나 안성부원군(安城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그러나 원래 성품이 과격하고 자신의 공과 태종의 총애를 믿고 방자하여 국왕에게 불충하고 동료들에게 무례하였기 때문에 여러 차례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아 이듬해 연안부(延安府)로 축출되고 공신 녹권(功臣錄券)과 직첩(職牒)을 삭탈당하고 1417년 함양(咸陽)에 유배되었다. 세종 때 '용비어천가'를 짓게 되자 선왕 때의 일을 상세히 알고 있다 하여 서울에 불려와서 편찬을 도왔다. 편찬이 끝난 뒤 다시 유배지에 보내졌으나 세종 21년(1439) 왕의 은총으로 경기도 안산(安山)으로 옮겨 살았고 이듬해 타계하였다.
▲ 이숙번의 유택(묘) 앞의 안내문 ⓒ 2008 한국의산천
이숙번은 조선왕조 최초의 과거시험 합격자로서 조선시대 최초로 치러진 과거시험은 1393년(태조2년) 3월에 실시된 식년문과 시험으로 33인의 급제자가 배출되었는데 약관의 나이로 무과가 아닌 문과로 급제하였으나 다른 무신보다 더 장수기질을 타고나 이방원과 같이 두 번의 왕자의 난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강한 리더쉽으로 이방원 정권이 들어선 이후 핵심인물로 승승장구 하다가 이후 오만방자함으로 인하여 모든 관직을 삭탈 당하고 유배를 가게된다. 그는 조선초기 문무를 겸비하고 과감한 결단력을 가진 그의 재능이 권력과 합하여져서 안성부원군에 봉해질 때까지 자신의 공과 태종의 총애로 전성기였다면 그후 68세로 죽을 때까지는 거만방자하게 행동하다가 결국 탄핵으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경남 함양으로 유배생활을 떠나는 등 고난의 세월이 이었다. 다시 한번 권력의 무상함을 느낀다.
▲ 이숙번의 유택(幽宅)ⓒ 2008 한국의산천 1398년 안산군지사로 있을 때 후일의 태종을 도와 병력을 출동시켜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을 제거하는 등 제1차 장자의 난에 공을 세운 인물이다. 태종과는 막역한 사이로 지냈으나, 태종 재위 후반부에 권력이 비대해지며 견제를 받아 농장으로 축출되기도 하였다. ▲ 이숙번의 묘의 문인석 ⓒ 2008 한국의산천
요즘 흔히 메스컴에서, 재벌의 형제 다툼을 왕자의 난이라고 표현한다.
왕자의 난(王子의 亂)
태조는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와의 사이에 방우(芳雨)·방과(芳果 : 후의 정종)·방원(芳遠 : 후의 태종) 등 여섯 형제를 두었고,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와의 사이에 방번(芳蕃)·방석(芳碩)을 두었다. 조선 성립 후 태조의 후계자 지위를 놓고 양쪽 소생 간에 일련의 정치적 갈등이 있었다. 먼저 태조는 신덕왕후의 소생인 방번을 세자로 삼으려 했으나 자질이 부족하다는 개국공신의 반대로 막내인 방석을 후계자로 선정했다. 이 과정에서 소외당한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의 불만이 상당히 컸다. 특히 개국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방원의 경우는 논공에서 제외되었던 사실에 대해 불평이 대단히 컸을 뿐만 아니라 방석을 보도(輔導)한다는 명목으로 정치계를 좌우하고 있던 정도전·남은(南誾)과의 입장 차이로 인해 한층 더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특히 정도전은 최고의 군통솔기관인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의 판사직(判事職)을 차지하고서 이를 바탕으로 병권의 집중과 일련의 중앙집권화정책을 추진하여 권력구조면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왕실의 힘을 약화시키고 그 대신 유신(儒臣) 중심의 집권체제를 강화하려고 했다. 이로 인해 방원을 비롯한 왕자와 종친세력은 그 힘을 급속히 잃게 되었다.
정도전계열은 1398년 진법훈련의 실시를 계기로 권력의 마지막 기반인 사병(私兵)마저 혁파하고자 했다. 마침내 그해 8월 진법훈련에 불참한 왕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논의가 정도전 일파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때 방원은 이숙번(李叔蕃) 등의 휘하 인물을 동원하여 정도전·남은 일파를 불의에 기습하여 살해하고, 이에 대항하는 세자 방석과 그의 동모형(同母兄)도 아울러 살해했다. 결국 방원과 정치적으로 대결 관계에 있는 인물들을 대부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제1차 왕자의 난 또는 무인정사라고 한다. 조선개국을 이끌고 국가 기틀을 마련하여 이상적인 왕도 정치를 꿈꾸었던 풍운아 정도전은 1398년 62세의 일기로 이렇게 생을 마쳤다. (뒤늦게 이 상황을 전해들은 태조는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은 방석, 방번 두 형제의 이름을 부르며 대성통곡하였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고 싶었겠지만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고 임금자리만 생각하는, 천리(天理)와 인륜도 모르는 자라고 질책하며 기막힌 운명을 곱씹으며 권자에 머무르기를 거부하고 왕위를 둘째아들 방과에게 전해주고 자신은 한많은 서울을 떠나 고향인 함경도의 함흥 별궁으로 떠난다. 이때가 태조7년(1341년) 9월의 일로 이때 전위 받은 이가 제2대 정종이다. 정종은 즉위하자 바로 부왕을 높이어 상왕이라 존칭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치정세는 크게 바뀌어 정도전의 권력 증대에 불안을 느끼던 왕자·종친과 일부 개국공신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처음에 이들은 방원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하여 우선 태조의 제2자 방과를 옹립했다. 이가 곧 정종(定宗)이다. 그런데 정종은 정비인 정안왕후(定安王后) 김씨(金氏)와의 사이에서 소생이 없었고, 후궁에게서 서자들만 낳았다. 이때문에 그의 후계자 선정문제가 미묘하게 전개되었다. 따라서 1400년 1월에 신의왕후의 소생인 방간과 방원이 다시 세자의 지위를 놓고 무력충돌을 벌였다. 이 사건은 왕자간의 왕위계승전쟁에서 기인된 것이지만,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지중추부사 박포가 방간을 충동시킨 데 있었다.
박포는 개국공신의 일원으로 무인정사 때 방원을 도운 공이 있으나, 일등 공신에 책봉되지 못한 것을 불만으로 여겨 방원과 반목을 보이던 중, 방원에 대한 방간의 불평을 이용하여 방간의 거병을 선동한 것이었다. 양자는 치열하게 싸웠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방원의 승리로 끝났다. 이를 제2차 왕자의 난, 방간의 난 이라고 한다. 이로써 방원의 지위는 확고해지고 마침내 세자로 책봉된 후 그해 11월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태종이 되었다.
▲ 안성 부원군 이숙번 유택(幽宅)과 그 앞으로 보이는 경기 시흥 물왕리 흥부저수지. ⓒ2008 한국의산천
물왕리 흥부저수지 (일반적으로 물왕리 저수지로 부른다) 총면적은 58만㎡, 저수지를 이용하는 논의 면적은 866만 5000㎡, 담수량은 189만 4000톤, 만수 때 수심은 7.2m이다. 공식 명칭은 시흥군의 '흥(興)' 자와 부천군의 '부(富)'를 합한 흥부저수지인데, 이는 1946년 준공 당시에 몽리면적(저수지를 이용하는 논의 면적)이 시흥군과 부천군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시흥시 최대의 담수호이자 대표적인 휴식처이며, 농업기반공사 수화흥안 지부에서 관리하고 있다.
서울·안양·안산 등 수도권 가까이에 자리잡고 주위를 관무산(일명 성인봉)·마하산·운흥산이 둘러싸고 있어, 조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낚시터로서 명성이 높아졌다. 1950년대 후반에는 대통령 이승만이 전용 낚시터를 만들어놓고 자주 들러 더 유명해졌다. 지금은 저수지 주변에 라이브 카페와 음식점이 자리하고 있어 많은 이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주변에는 조선 초기의 문신 이숙번(李叔蕃)의 묘와 가까이에 연꽃 전래지인 관곡지가 있다.2003년 포동폐염전~물왕저수지 간 자전거도로가 조성되었으며, 수인산업도로가 가까이 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편의시설이 풍부하다.
▲ 자료출처. 조선왕조실록·조선왕조사·조선통사·조선의 왕세자교육 등등..졸릴때까지 주섬 주섬 읽은 책 참고 ⓒ 2008 한국의산천
세계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은 정족산본 1,181책,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27책, 기타 산엽본 21책을 포함해서 총 2,077책이 일괄적으로 국보 제 15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세계사에 전례가 없을 만큼 방대한 왕조실록을 기록 작성 보존하였다.
방대한 '실록'의 이면에는 서릿발 같은 조선의 선비정신이 형형이 빛나고 있다. 바른 역사와 직필을 위해 일개 9품 벼슬아치가 하늘 같은 왕에 맞서간 감투가 있으며, 끝내 붓을 휘지 않고 초개처럼 목숨을 내던진 수많은 사관들의 붉은 자국이 선연히 남아 있다. 후세에 바른 역사를 전하기 위해 붓자루 하나에 목숨을 걸었던 조선의 사관들
국왕이 가장 겁냈던 사람은 사관이었다.사관은 보고 듣는 대로 기록하였다 사관 위로는 하늘뿐이었다. 호방한 태종은 사관을 싫어했다. 그렇지만, 사관들은 늘 태종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어느날 역시 사관의 눈을 피해 사냥에 나섰던 태종은 노루를 쫓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졌다. 그의 첫마디는 "이 일을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라"였으나, 그 이야기까지 전해지고 말았다. 조선조의 국왕은 간관은 싫어하고, 사관은 겁냈다 한다. 간관은 살아있을 때 듣기 싫은 소리를 하지만, 사관은 자신의 사후에 듣기 싫은 이야기를 기록하기 때문. 그래서, 국왕과 사관 사이에 실랑이와 긴장관계가 끊이지 않았다. 사관들은 당대의 사초는 물론, 바로 선대왕의 실록도 국왕에 보여주지 않았다. 세종대왕도 태조와 태종실록을 좀 보자고 했다가 변계량(아래 참고)에게 점잖게 거부당했다. 사관들의 거부 이유는 분명하다. "국왕이 자꾸 보자고 하면, 역사를 똑바로 쓸 수 없다"는 것. 또 한 가지, 사관들이 가장 싫어한 것은 사관의 참석을 배제하는 이른바 '독대'였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날 사관(한림) 임덕제(林德蹄)는 최후의 수단으로 황급히 내전에 연락하여 당시 열한 살의 왕세손(훗날의 정조)을 업어 오게 한 뒤 할아버지인 영조에게 아버지(사도세자)를 용서해 달라고 빌게 하였다. 세손의 눈물에도 영조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한림 임덕제가 세자 뒤에 엎드려 일어나지 않자 영조가 끌어내라고 명했고, 위사(衛士)들이 달려들자, "내 손은 사필(史筆)을 잡는 손이다. 이 손을 끊을지언정 나를 끌어낼 수는 없다"고 항의했지만...
또한 열번 죽어도 씻을 수 없는 한을 지닌 사도세자의 시신이 27년만에 임금이된 자신의 아들 정조와 함께 새로운 안식처로 떠나는 날. 어가와 잉여가 함께 새로운 안식처인 화성으로 향하는 웅장한 행렬을 경기 관찰사가 선도하고 담당 신하들은 예법에 따라 좌우로 늘어섰다. 취타수 18명과 붉은 군복을 입은 4백여명의 군사들이 세줄로 늘어섰으며, 사도세자와 잉여 곁에는 호위군사 200여명이 겹줄로 늘어섰고 가가각 50여개의 만장이 앞뒤로 하늘을 수놓았다. 노제 장소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몰려 사도세자의 원혼을 위로했으며, 수백리 밖에서 어가와 영가의 행렬을 보기위해 몰려 들었다. 이 행렬을 호위한 인물은 사관출신 병조판서 윤숙이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날 정승들에게 세자를 구하라고 명한죄로 홍봉한의 주청으로 인해 탄핵당해 해남으로 귀향길에 올랐던 한림 윤숙. 다시 사도세자를 구하려던 자의 호위를 받으며 안식처로 길을 떠나고 있었다. (젊은 사관이었던 윤숙은 해남으로, 영조의 명에도 물러가지 않고 세자를 지키고 세손 정조를 업고 들어와 할아버지에게 죄를 빌게 했던 사관 임덕제-'나의 손은 사필(史筆)을 잡는 손이다. 내 손이 짤릴 지언정 나를 끌어낼수는 없다'고 외쳤다-는 강진으로 유배되었다.)사초와 시정기를 작성하는 이를 사관 또는 한림이라 불렀다
변계량(卞季良: 1369 ~ 1430 ) 고려 말 ·조선 초 문신. 진덕박사, 사헌부시사, 성균관학정, 예문관의 응교, 직제학, 예조우참의, 예문관제학, 대제학 ·예조판서, 참찬, 판우군 도총제부사을 지냈다. 대제학 재임 시 외교문서를 거의 도맡아 지었고 '태조실록' 편찬, '고려사' 개수에 참여했다. 세종 즉위 후 경연관으로 위촉되어 세종에게 학문을 가르쳤고 말년에는 다시 세자(문종)을 가르쳤다. 변계량은 양녕대군을 가르친 스승이었으며 세종 문종을 연이어 가르친 당대의 사부였다.
고사성어 함흥차사 (咸興差使) : 한 번 함흥에 간 차사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여 심부름 또는 어디를 가기만 하면 감감무소식일 때 사용하는 말이다. 태조 이성계가 창업을 할 때에 방원(芳遠)이 큰 공을 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조는 계비인 강(康)씨의 소생 방석(芳碩)을 세자로 봉했다. 이에 방원은 불만을 품고 방석을 옹호하는 정도전(鄭道傳)등을 죽이고 방석을 폐묵(廢默)시켰다. 이렇게 되니 태조가 크게 노하여 장남인 정종(定宗)을 임금 자리에 앉히고 조용하게 세월을 보내기 위해 고향인 함경도 함흥 별궁으로 떠나 거쳐하였다. 방원은 아버지의 노한 마음을 돌리려고 수없이 문안사(問安使)를 보냈다. 그러나 태조는 이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다. 이토록 태조의 심정을 돌리기가 어려웠던 것이다.결국은 마음을 돌려 서울로 왔지만,이전에 간 문안사는 모두 죽고 죽고하여 소식이 있을 리가 없었다.여기서 '함흥차사'란 말이 나온 것이다.
ⓒ 2008 한국의산천 과거의 사실이 햇빛을 받으면 역사가 되고 달빛을 받으면 신화가 된다고 했다. 역사란 긴 세월에 걸쳐서 쌓여진 금맥(金脈)이다. 그 금맥은 미래를 내다볼수있는 황금사다리가 되어준다. 과거가 없는 현재가 없고 역사가 없는 미래를 생각 할수는 없다. 역사를 단순히 지나간 일로 치부할 때는 미래를 알수없다. 우리가 조상의 역사와 문화유산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역사를 바로 알고 우리 후손에게 물려 줄때에 우리의 미래는 빛날것이다.
촛불집회로 시작하여 마침내 큰불로 국보1호 남대문을 태워 검은 숯덩이로 만들고 마감하는 정치를 보니, 한국의산천을 돌아보는 나그네의 마음은 착찹하기만하다. [한국의산천]
▲ 문화·예술편 블로그 Best 1 으로 선정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2008 한국의산천 열심히 책읽고 답사를 통하여 저도 공부하며 유용한 정보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바람의 노래] 태평무. 월악산 깊은골에 밤새가 울어 갯창에 비친달이 너무 ?구나 꽃그림자 내려밟고 님 떠날 때 울 밑에 귀뚜리도 슬피 울었지 아 나그네 나그네 사연 사무친 옛 생각에 눈물 삼키며 재너머 강건너 흘러가는 나그네
월악산 영마루에 달이 떠오르면 들려오는 피리소리 애달프고나 떠난님 그리워 잠못 이룰 때 추풍에 지는 낙엽 함께 울었지 아 나그네 나그네 사연 한서린 옛 생각에 가슴 적시며 강너머 전송길로 사라지는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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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의산천 원문보기 글쓴이: 한국의산천
첫댓글 역사를 주름잡았던 이숙번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원이 임금이 되도록 도왔던 대들보였었다면, .... 노년에 방자함으로 탄핵을 받고 유배지로 가야했었던 인물, 역사가 그렇게 인걸을 만들었는가?...인걸이 역사를 만들어 갔던가?...문화재를 자신의 몸처럼 아껴오고, 사랑했었던 산천님의 가슴이 찢겨져 나가는 남대문 국보1호의 소실은 역사인지?...인재인지?...불에 타도록 방조 했었던 것은 아닌지?...석연치 않은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