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8년] 체코 프라하의 봄
← 침공한 소련군의 전차 앞에서 "나를 쏴라" 외치며 서있는 프라하 시민
체코슬로바키아는 1968년 1월 개혁파인 알렉산데르 두프체크를 당 제1서기로 선출했다. 두프체크는 국가 요직에 개혁파를 임명했으며, 4월 몇 가지 행동강령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① 재판의 독립, ② 의회제도의 확립, ③ 사전검열제의 폐지, ④ 민주적인 선거법제도의 창설, ⑤ 언론·출판과 집회의 자유 보장, ⑥ 국외여행·이주의 자유보장, ⑦ 경찰정치의 종식, ⑧ 공업·농업 부문의 개혁, ⑨ 체크·슬로바키아의 동등한 권리에 의한 연방제 이행, ⑩ 자주독립에 대한 대외정책 추진, ⑪ 과거에 권리를 박탈당한 모든 시민의 완전한 복권 등이었다. 이로써 언론·집회·출판 등이 자유화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잠시 동안의 '프라하의 봄'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공산정권체제와 당의 통제를 자유화하려는 것으로 비추어졌고, 특히 소련은 사태가 다른 동유럽 국가들에까지 파급될 것을 우려했다. 이에 소련은 브레주네프 독트린으로 알려진 이론을 만들어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정당화했다.
소련,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동독 5개국으로 구성된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사전통고없이 1968년 8월 20일 오전 11시 일제히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다. ‘우호국’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침공 준비는 면밀했다.
동독부대는 30년 전의 히틀러군과 완전히 같은 길로 보헤미아를 향해 침공했다. 동쪽으로는 폴란드군이, 남쪽으로는 불가리아 군대가 진격해 왔다. 하지만 침략군의 대부분은 소련군이었다. 8월 21일 오전 4시, 프라하 시내에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 건물이 소련군 낙하산 부대의 공격으로 점거됐고 수뇌진도 대부분 체포됐다.
민중은 저항했다. 마을 이름 표지판을 바꿔, 침략군을 혼란스럽게 했고 이동 라디오에서는 냉정하게 행동하도록 방송했다. 작가들도 국제여론에 호소했으나 세계는 냉담했고 침묵했다. 전쟁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소련군에게 돌을 던지거나, 전차 보조탱크에 구멍을 뚫어 유출되는 가솔린에 불을 붙이는 등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프라하, 바르샤바를 비롯한 전 국토가 완전 점령됐다. 이로써 두브체크 제1서기의 지도하에 진행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건설, 이른바 ‘프라하의 봄’은 파국을 맞았다.
[1915년] 독일의 의학자 에를리히 사망
← 파울 에를리히
화학요법의 창시자인 독일의 세균학자이자 화학자인 파울 에를리히가 1915년 8월 20일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독일 슐레지엔 슈트렐렌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브레슬라우·슈트라스부르크·프라이부르크·라이프치히 대학 등에서 의학공부를 했다. 졸업 후에는 베를린 의과대학에서 색소에 대한 연구를 하기도 했다.
1890년부터는 베를린 전염병 연구소에서 면역학에 대한 연구를 했다. 또 그는 독소-항독소에 대한 반응을 연구하여 첫 번째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베링이 티프테리아 혈청요법 개발을 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1910년에는 비소화합물이 매독의 원인이 되는 ‘스피로헤타균’에도 효과가 있음을 밝혀냈다. 이 약제의 이름이 '살바르산'이며, 606번째 실험에서 결과를 얻었다고 하여 보통 '606호'라고 부르기도 한다. '살바르산'은 세계최초의 화학치료제이다. 이후에도 에를리히는 '네오살바르산'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다방면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1908년에는 메치니코프와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에를리히는 노벨상 외에도 제15회 세계의학총회의 명예상을 수상했고, 여러 학회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였으며, 독일정부로부터 의학추밀원에 선임되기도 했다. 그의 주요저서는 ‘스피로헤타병의 실험 화학요법’이 있다.
[1895년] 명성황후 피살
1895년(고종 32) 8월 20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지휘하는 폭도들이 경복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학살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명성황후 세력을 주축으로 한 친러·친미 세력이 득세했다. 일제는 열세를 극복하고자 1895년 7월 13일 미우라를 주한공사로 임명하는 한편, 명성황후 시해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일제는 대원군의 협조를 얻었으며 수십 명의 일본인 낭인을 모으고 일본 수비대, 거류지 담당 경찰관과 훈련대 간부 우범선·이두황·이진호 등 친일파들을 포섭했다. 사건 당일 새벽 폭도들은 건청궁(乾淸宮)에 난입해 고종에게 미리 준비한 왕비의 폐출조서(廢黜詔書)를 보이며 서명을 강요했다. 그러나 고종이 이를 거부하자 옥호루(玉壺樓)에서 명성황후를 무참하게 학살했을 뿐만 아니라 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신을 화장했다. 이후 일제는 친일적인 김홍집 내각을 세우고, 8월 22일 명성황후의 폐위조칙을 위장 발표했다. 시해 사건의 진상은 이를 목격한 외국인들에 의해 외국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주한공사들이 폐위 조치 불인정을 발표하는 등 반발이 거세어지자 난처해진 일제는 이를 무마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10월 12일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계기로 일본은 다시 세력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이후 추진된 친일내각 개혁들과 명성황후 시해가 계기가 되어 전국에서 을미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1901년] 이탈리아의 시인·비평가·번역가 콰시모도(Salvatore Quasimodo) 출생
1901년 8월 20일 태어남 / 1968년 6월 14일 죽음
콰시모도는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비평가·번역가이다. 원래 모더니즘 운동인 에르메티스모의 시인들을 이끌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에 자극받아 현실을 반영한 사회비판적인 시들을 다수 발표했다. 팔레르모에서 공학과 수학을 배운 뒤, 로마에서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이탈리아 정부의 토목기사로 일했다. 일하는 틈틈이 시를 썼으며 <솔라리아 Solaria>에 처녀시를 발표했다. 첫 시집 <바다와 육지 Acque e terre>(1930)를 발표한 뒤 에르메티스모 시인들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1935년 이후 토목기사를 그만두고 창작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이 시기 콰시모도의 시는 딱딱하고 기교적이었으며 에르메티스모 특유의 난해한 상징주의가 두드러졌다. <그리고 곧이어 밤이 되려니 Ed e subito sera>(1942)는 그가 마지막으로 발표한 에르메티스모 시대의 시집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콰시모도의 작품세계는 급변해 파시스트 정권의 부당함과 전쟁의 공포, 이탈리아의 죄악을 상기시키는 시를 주로 썼다. 전쟁 전과는 달리 간결한 언어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심상을 표현해냈다. 번역서와 평론도 다수 발표했는데, 대표적인 번역서에 <그리스 비극 Tragici greci>(1963)·<위선자 Tartuffe>, 평론으로 <연극 비평집 Scritti sul teatro>(1961) 등이 있다. 1959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979년] 한국-나우르(Nauru) 국교 수립
하와이에서 남서쪽으로 약 3,900km 떨어져 있는 남서태평양상의 공화국.
타원형의 섬으로 둘레가 19km이며, 수도는 야렌이다. 면적 21.2㎢, 인구 12,600(2003 추계). 나우루 주민의 약 3/5은 폴리네시아·미크로네시아·멜라네시아계의 나우루 원주민이다. 또한 주민 중 1/4은 키리바시·투발루·필리핀 및 다른 여러 섬에서 온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중국 화교와 유럽인들이다. 많은 외국인들은 광부로서 광산을 따라 이동한다. 국어인 나우루어는 폴리네시아어·미크로네시아어·멜라네시아어가 섞인 특이한 방언인데, 영어가 널리 쓰이며 학교에서도 영어로 가르친다. 종교는 그리스도교가 지배적이며, 나우루 조합교회와 나우루 독립교회 및 로마 가톨릭 교회가 많다. 인구밀도는 1㎢당 376명인데 거의 해안지대에 밀집해 산다. 1,000명당 19.8명인 출생률과 4.5명인 사망률, 그리고 연평균 자연증가율 1.3%는 선진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남부해안의 메넹 지구와 야렌 지구에 인구가 가장 많으나 이 섬에 도시는 하나도 없다.
[2000년] 동티모르 독립운동지도자 구스마오 민족해방군 총사령관직에서 사임
구스마오(Gusmao, Xanana, 1948~ )는 동티모르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정치인으로, 예수회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뒤 라틴어를 포함해 5개국 언어를 익혔다. 1975년 인도네시아군(軍)이 동티모르를 강제 점령하자 곧바로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을 조직하고 대규모 무장 독립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1981년 동티모르 민족해방군 총사령관으로 선출되어 계속 무장 투쟁을 전개하던 중 1992년 동티모르의 수도 딜리(Dili)에서 체포되어 연금 생활을 하였고, 풀려난 뒤에는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지도하였다.
1999년 8월, UN(United Nations:국제연합) 감시 아래 치러진 동티모르의 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에서 독립이 결정되면서 7년 만에 귀환, 동티모르민족저항평의회(CNRT) 의장을 맡아 독립국가 건설을 준비해왔다. 2002년 4월 치러진 동티모르 첫 번째 대통령 선거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장기간 폭력과 내전으로 시달려 온 동티모르의 평화 분위기 조성과 동티모르인(人)들의 정치적 공감대 형성, 지도부 조직 문제 등 여러 문제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1999년 사하로프 인권상, 2000년 제1회 광주인권상을 받았다. /naver
[1975년] 미국항공우주국의 화성 탐사선 바이킹 1호 발사
바이킹 1호는 1975년 8월 20일 미국 케이프케네디우주기지를 출발하였다. 무게 2.3t의 궤도선(軌道船)과 1.12t의 착륙선으로 되어 있었다. 바이킹 2호도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바이킹 탐사선을 싣고 발사한 로켓은 3단식 타이탄이었으며 전체의 길이가 48.8m, 무게는 640t이었다.
11개월 후인 1976년 7월 19일 약 8억 km의 긴 여행 끝에 화성궤도에 돌입하였고, 7월 20일 오전 5시 12분 7초(한국시간 오후 9시 12분 7초)에 바이킹 1호는 크리세 평원 착륙에 성공하였다. 곧 카메라가 작동하여 처음에는 흑백으로, 이어서 천연색으로 화성표면의 사진을 보내왔다.
사진에 나타난 화성 풍경은 NASA과학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돌이 뒹구는 돌 들판과 핑크색[紅色]의 화성하늘이었다. 바이킹 1호를 뒤따라간 바이킹 2호도 1976년 9월 3일 오후 3시 58분(한국시간 4일 오전 7시 58분)에 북반구의 유토피아 평원에 무사히 착륙하였다. 여기도 역시 갈색의 돌 ·바윗덩어리가 뒹굴고 있는 돌 들판이었다. /naver
[1960년] 세네갈, 프랑스로부터 독립
1986년에는 포르투갈령(領) 기니와, 1904년에는 감비아와의 경계에 관한 협정이 성립되었고 프랑스는 아프리카에 대한 동화정책(同化政策)과 침략기지로서 세네갈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생루이, 고레섬, 루피스크 및 다카르는 ‘4개의 코뮌’으로서 1887년 이래 프랑스 본국의 지방자치제(自治制)와 동등하게 취급되었다. 1995년 프랑스령 서아프리카가 하나의 통치단위가 되고 생루이가 수도(首都)가 되었다.
1902년에는 수도를 다카르로 옮겼으며 1908년 건설이 완료되면서 다카르가 서아프리카의 정치 중심지가 되었다. 제1·2차 세계대전을 거쳐 ‘블랙아프리카’의 정책의식이 고조되면서 세네갈은 다른 프랑스령 아프리카 국가와 함께 1946년 프랑스연합 내의 해외 영토가 되었고, 1957년 자치권이 확대되었으며, 1958년 프랑스공동체 내의 자치공화국이 되었다. 1960년 6월에는 말리와 함께 연방으로 구성하였다가 같은 해 8월 20일 세네갈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naver
[1913년] 미국의 신경생물학자 스페리(Sperry, Roger Wolcott, 1913~1994.4.17) 출생
코네티컷주(州) 하트퍼드 출생. 시카고대학교 및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1946∼1952년 시카고대학교 해부학 조교수에 이어 심리학 부교수, 1952∼1953년 국립보건연구소의 발생신경학 과장을 거쳐, 1954년부터 신경생물학 교수가 되었다. 1972년 케임브리지대학교로부터 명예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눈을 통하여 외부세계의 정보가 뇌에 도달하는 비밀을 밝혀낸 업적으로 T.N.비셀, D.H.허블과 함께 1981년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naver
[1912년] 구세군을 창설한 영국의 종교가 부스(William Booth, 1829.4.10~1912) 사망
1829. 4. 10 잉글랜드 노팅엄셔 노팅엄~1912. 8. 20 런던.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나 전당포에서 견습생활을 했다. 15세 때 종교적 회심을 체험하고 부흥설교사가 되었다. 1849년 런던으로 간 그는 전당포 일을 혐오하면서도 집으로 돈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런던의 월워스에 있는 전당포에서 일했다. 이무렵 평생의 반려자가 된 캐서린 멈퍼드를 만났다. 1852년 개혁 감리회의 정식 설교자가 되었고, 1855년 캐서린 멈퍼드와 결혼했다. 9년간 전도활동을 한 뒤 개혁감리회와 관계를 끊고 독립적인 부흥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형벌을 받게 된다는 단순한 신앙을 강조했다. 버림받은 자에 대해서는 깊은 연민을, 더러움·추함·고통에 대해서는 증오심을 가졌다. 1864년 런던으로 가 천막과 야외에서 집회를 인도했으며, 화이트채플에 '그리스도교 선교회'라는 단체를 세웠다. 1878년 구세군으로 바뀐 이 단체는 모든 회심자로 하여금 공생활 및 사생활에서 '날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가 되게 했다. 그는 영국 군대의 계급과 규율을 모방하여 구세군의 성직체계와 규율을 만들었다. 구세군의 초기운동은 격렬한 반발을 일으켰다. 집회를 방해하기 위해 해골군대가 조직되었고, 수년 동안 부스의 추종자들은 평화의 교란자로 몰려 벌금형과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889년 이후에는 이런 혼란들이 거의 사라졌다. 구세군의 활동범위는 1880년에는 미국, 1881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그후에는 유럽 대륙과 인도, 실론, 그밖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는 실로 지칠 줄 모르는 여행가·조직가·웅변가였다.
1890년 〈칠흑 속의 영국, 그리고 탈출구 In Darkest England, and the Way Out〉를 발표했는데, 이 책에서 부스는 윌리엄 토머스 스테드를 지지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빈곤과 악습을 철폐하기 위한 10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① 시 실업자 구제기관, ② 농촌 실업자 구제기관, ③ 해외 실업자 구제기관, ④ 가정 구조대원, ⑤ 매춘부들을 위한 구제의 집, ⑥ 술주정뱅이 구제, ⑦ 교도소 방문대원, ⑧ 빈민은행, ⑨ 빈민들을 위한 변호사, ⑩ 해안가에 화이트채플 건립 등이 그것이다. 많은 사람이 구세군에 기부금을 내 이 계획의 대부분이 실현되었다. 부스의 활동은 처음 몇 년 동안은 반대와 조롱을 받았지만 19세기말에 이르러 사람들이 그의 천재성과 그가 행한 일의 결과를 충분히 인식하게 되면서 폭넓은 공감을 얻었고, 구세군 운동도 더욱 확산되었다. 그가 이룩한 변화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영국 왕 에드워드 7세의 적극적인 격려였다. 1902년 부스는 에드워드의 초청으로 그의 대관식에 참석했으며, 1905년에는 영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여러 도시의 시장과 단체장의 영접을 받았다. 미국과 다른 나라 정부에서도 그의 활동을 진심으로 격려해주었다. 그는 노인이 되어서도 열정적으로 활동해 영국인의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1901년] 경부선 기공, 북부기공식(영등포)(8.20), 남부기공식(부산 초량)(8.21)
철도만큼 많은 사람과 화물을 정확하고 안전하게 운반하는 교통수단이 또 있을까.
한반도를 넘어 대륙 진출을 꿈꾸던 일제에 철도가 꼭 필요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1899년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선이 완공됐지만 일제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선 건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일제는 1880년대 중반부터 지형탐사를 시작했고, 1896년에는 경부철도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조선 민중은 저항했다. 측량 기계를 짊어진 일본인이 나타나기만 하면 “땅 뺏어가는 측량꾼이다, 쫓아내라”며 고함을 질렀다. 일본인 측량 기술자들은 장사꾼이나 나그네로 가장하고 비밀리에 측량을 해야 했다.
대한제국 황실도 경부선 건설에 반대했다. 고종은 1896년 두 차례나 일제의 경부철도부설청원서를 거부했다. 그러나 나날이 약해지던 대한제국은 일제의 집요한 요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 1898년 대한제국은 일제에 경부선 건설을 허락하는 경부철도합동조약을 체결했다.
1901년 8월 20일 오전 11시. 마침내 서울 영등포에서 경부선 철도 기공식이 열렸다.
경부선 건설은 조선 민중의 피와 땀으로 이뤄졌다.
일제는 헐값에 토지를 수용했고, 조선 백성들을 강제 부역에 동원했다. 일꾼들에게는 품삯 대신 군용표(軍用標) 한 장으로 때웠다.
1905년 1월 1일 경부선은 세계 철도 역사상 가장 적은 비용으로 완전 개통됐다.
개통 당시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13시간 45분이 걸렸다. 그해 9월에는 부관(釜關) 연락선을 매개로 경부선과 일본철도가 연결됐다. 1906년에는 경의선이 개통돼 일본에서 중국 국경까지 가는 길이 열렸다.
1945년 일본의 패망 전까지 철도를 통해 일본에서 군인과 군수물자가 한반도와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곡물과 각종 자원들은 일본으로 흘러갔다.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철도가 우리나라 사회의 근대화에 기여한 측면도 있다. 광복 후 한국은 일제가 건설한 철도망을 이용해 사람과 자원을 수송하면서 경제성장을 이루기도 했다.
철도는 어떤 목적으로 쓰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경부선의 불행했던 역사는 과거의 기억으로 끝나기를…. 이헌재 기자 /동아닷컴 2007-08-20 /Google
[1031년] 고려 장군 강감찬(姜邯贊, 948~1031) 사망
본관 금주(衿州:서울 관악구 봉천동-낙성대), 초명 은천(殷川). 983년(성종 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부시랑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조신(朝臣)들은 항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이를 반대하고 하공진(河拱辰)으로 하여금 적을 설득하여 물러가게 하였다. 그 뒤 한림학사·승지·중추원사(中樞院使)·이부상서·서경유수·내사시랑평장사를 역임하였다.
1018년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으로 침입해 오자 이듬해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군사 20만 8000명을 이끌고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무찔렀다. 그 위에 쫓겨가는 적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고 개선할 때 영파역(迎波驛)에서 왕의 영접을 받았으며, 검교태위(檢校太尉)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 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 식읍 3백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그 이듬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가 1030년 왕에게 청하여 성을 쌓고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이듬해 특진검교태사시중 천수국 개국후(開國侯)에 봉해졌다. 현종 묘정(廟庭)에 배향, 수태사 겸 중서령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 《구선집(求善集)》 등이 있다. /naver
[1741년] 덴마크의 항해가 베링, 현재의 알래스카 발견
← 베링
베링(Bering, Vitus, 1681~1741)의 2차탐험은 안나 여제(1730~40)가 통치하던 1733년 3월에 페트로그라드를 출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737년 오오츠크에 도달한 베링일행은 탐험에 사용할 배를 만들기 시작하여 1740년 6월에 세인트피터(St.Peter)호와 세인트폴(St.Paul)호 등 2척을 완성하였다. 세인트 피터호는 베링이 지휘하였고, 세인트 폴호는 치리코프 대령이 조선하였다.
베링 탐사대는 1741년 6월 4일 탐사를 시작하였으나, 6월 12일에 악천후를 만나 두 배가 서로 떨어지게 되었다. 치리코프가 조선한 세인트폴 호는 항해를 계속하여 알류샨열도의 몇 개 섬을 발견하였으나, 베링이 조선한 세인트피터 호는 악천후로 이리저리 떠밀리다가 8월 20일에 알래스카만으로 진입하였다. 안전한 곳으로 피항하는 데 급급했던 베링 탐사대는 알래스카 남서해안과 알래스카반도, 알류샨열도 등을 정찰하는 데 그쳤다. 바다를 떠돈 지 5개월만인 1741년 11월 4일 육지가 발견되었다. [범양사보 2001년 가을호] /info.hobbyworld.co.kr
[1884년] 독일의 신약성서 학자 불트만(Bultmann, Rudolf Karl) 출생
1884. 8. 20 독일 비펠슈테데~1976. 7. 30 독일 마르부르크.
20세기 〈신약성서〉의 '비신화화'(非神話化) 프로그램으로 유명하다. '비신화화'는 신화적 용어들로 표현된 〈신약성서〉의 본질적 메시지를 실존철학의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초기생애
불트만의 아버지는 루터교 목사였으며, 할아버지는 선교사였다. 그는 언제나 학문적 신학의 길을 따르고자 했으며, 19세 때 튀빙겐대학교에서 신학 수업을 시작했다. 1912년 교수자격 취득논문을 쓴 다음, 마르부르크대학교의 강사로 임명되었고, 브레슬라우(1916)·기센(1920) 대학교 강사를 역임했다. 1921년에 마르부르크대학교의 신약학교수로 임명되어 1951년 은퇴할 때까지 재직했다.
1921년 불트만은 〈공관복음서 전승사 Geschichte der synoptischen Tradition〉를 발간했는데, 이것은 복음서 기자인 마태오(마태)·마르코(마가)·루가(누가)가 사용한 전승 자료를 분석하고 그들vftgg이 사용하기 이전에 형성된 이 자료들의 교회전승사를 추적하려는 시도였다. 이 책은 독창성이 풍부한 저작으로 인정되었으며, 학자로서 불트만의 명성을 확립했다. 이어서 그는 〈예수 Jesus〉(1926)·〈예수와 말씀 Jesus and the Word〉(1934) 등 예수에 관한 책을 써냈는데, 이 책들에는 그의 신학적 입장이 나타난다. 1922~28년에 마르부르크대학교에서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와 함께 일했다. 1927년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 을 발간한 하이데거는 불트만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철학적인 관점에서 전개된 인간 실존에 대한 하이데거의 분석이 불트만 자신이 해석한 바울로 신학과 요한 신학의 인간 실존 이해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불트만의 신학
하이데거와 토론을 벌인 이 몇 년 동안 불트만은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발전시켰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역사적 예수에 대해 비교적 무관심한 대신에 초월적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고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교회의 케리그마(Kērygma:선포)에 대한 신앙이며, 예수는 케리그마 속으로 부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불트만의 부활 이해)고 전제한 불트만은 그리스도교 신앙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견해가 최초로 표현된 것은 〈신약성서의 계시 개념 Der Begriff der Offenbarung im Neuen Testament〉(1929) 〈현존재의 역사성과 신앙 Die Geschichtlichkeit des Daseins und der Glaube〉(1930) 등에서이다. 불트만의 이런 입장은 그후 계속 유지되었으며, 1941년의 비신화화 제안을 포함한 그의 모든 저작들은 이를 일관성 있게 발전시켰다.
히틀러가 독일을 지배할 때 불트만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가르침을 수정해 나치 이데올로기에 맞추기를 거부했고, 나치의 교회 정책에 대항해 조직된 독일 프로테스탄트 운동인 고백교회를 지지했다(→ 국가사회주의). 그러나 자신의 말 그대로 그는 "결코 직접적으로, 적극적으로 정치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는 나치 정권을 정면으로는 반대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대학교와 세계의 다른 대학교 사이에 교류가 재개되면서 불트만은 국제적인 학술분야의 주요인사가 되었다. 그의 제자들은 독일대학교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했고, 그의 견해들은 전세계적으로 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신약학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와 대화를 나누어야 했고, 신학자들 가운데서 불트만의 입장은 독일과 미국에서 이루어지는 중요한 신학적 논의의 출발점이 되었다. 불트만은 1955년 영국에서 〈역사와 종말론 History and Eschatology:The Presence of Eternity〉을 강의했고, 1958년 미국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 Jesus Christ and Mythology〉를 강의했는데, 이 강의들은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볼트만의 비신화화 프로그램은 여러 권으로 이루어진 〈케리그마와 신화 Kerygma und Mythos〉 시리즈의 주제가 되었다.
평가
불트만은 탁월한 스승이었으며, 제자들에게 정신의 독립성을 북돋웠다. 그결과 두 갈래의 '불트만 학파'가 나타났다. 1954년 E.케제만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물음'(역사적 예수에 대한 인식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 갖는 의미에 대한 물음)을 제기했고, 많은 제자들은 스승과 무관한 입장을 전개했다. 그러나 E. 푹스와 G.에벨링은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분석을 토대로 하여 인간 실존의 언어적 양식을 강조하는 신약성서 해석방법을 발전시켰다. 이것이 이른바 새로운 해석학(new hermeneutic)이다. 불트만 자신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제자들과 함께 이 논의에 참여했다. 말년에는 마르부르크에서 조용히 살았다.(N. Perrin 글)/출처: 브리태니커
그 밖에
2005년 삼미 초대 감독 박현식씨 별세
1996년 한국 고전문학의 대가 장덕순씨 별세
1995년 방송인 김경태씨 별세
1993년 경부고속철도의 차종이 프랑스 알스톰사의 TGV로 결정
1993년 제1차 대학수학능력시험
1992년 체신부, 제2이동통신 사업자로 선경그룹의 대한텔레콤을 선정
1988년 이란-이라크 정전 발효
1984년 유엔, 이디오피아 기아사태 보고
1977년 연극 ‘빠알간 피이터의 고백’ 초연
1977년 원자력발전소 가동
1976년 비동맹회의, 콜롬보선언 채택
1971년 남북적십자 연락관 분단 26년 만에 첫 대면
1969년 박정희 대통령 미국 방문
1964년 조선일보 주관, 납북인사 송환위한 100만인 서명운동 완결
1963년 서울교외선 개통
1955년 프랑스령 모로코-알제리서 폭동
1953년 소련 수소폭탄 첫 실험 성공을 발표
1949년 니카라과 대한민국 승인
1948년 국제난민기구(IRO) 발족
1945년 소련군, 원산 상륙
1940년 쌀배급제 실시(출하. 판매 금지)
1940년 트로츠키 피살
1940년 중국 8로군 40만 출격작전 개시
1919년 총독부 관제(官制) 개정
1911년 포르투갈, 신헌법 제정
1909년 터키, 불가리아의 독립을 승인
1906년 쿠바에서 반란
1905년 손문, 일본 동경에서 중국혁명동맹회 결성
1904년 친일단체 일진회 창립
1904년 송병준 윤시병 등 유신회(維新會) 조직
1901년 경부선 기공, 북부기공식(영등포). 9.21일 부산 초양에서 남부기공식
1833년 미국의 제23대 대통령 해리슨 출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