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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나는 도다] 09
#1. 창덕궁 후원 돌담벽 - 밤 (과거)
돌담을 넘어 내려오는 누군가의 발. 버선발이다. 서둘러 어디론가 달려가는 발.
그가 떠난 자리에 떨어져있는 어보(옥쇄).
#2. 서린의 집, 안채 뜰 - 밤 (과거)
안채 뜰에 나와 환한 달을 보고 있는 이경문. 낮은 한숨을 내뱉는데 어느새 이경문의 뒤에 와 서있는 서린.
어린서린 : 아버님, 밤공기가 찹니다.
이경문, 문득 돌아본다. 말간 눈을 뜬 채 엷은 미소를 보이는 어린서린.
이경문 : 서린아, 달빛은 저리 밝은데 먹구름이 빠르게 밀려오는구나.
어린서린 : 달무리가 진한 것을 보니 한바탕 쏟아질 모양입니다, 아버님.
이경문 : (쓸쓸한 미소를 보인다)
어린서린 : (근심스레 보며) 무슨 일이라도 계시옵니까?
이경문 : (혼잣말하듯) ...외세를 벗어나 자주적인 조선을 만들고 싶다하셨느니라. 함께 부국강병을 이루자 하셨는데...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죄스럽기 그지없구나.
어린서린 : (눈물을 글썽이는데)
이경문 : (글썽이는 서린을 보고 놀라 눈높이로 앉아 닦아주며) 어찌 눈물을 보이는 게냐?
어린서린 : 소녀는 그저 아버님의 근심을 덜어드릴 수 없어 죄스럽습니다.
이경문 : (씨익 미소지어주며) 아비는 너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단다. (손을 잡으며) 넌 나의 하나뿐인 자식이 아니더냐.
이 아비와 빗장을 열고 나가 넓은 세상을 함께 보자구나. 그러하자구나.
어린서린 : (미소 지으며) 예, 약조하겠습니다.
이경문 : 비가 쏟아지기 전에 어서 들어가보거라.
어린서린은 기쁜 마음에 인사를 하고 사랑채 쪽으로 간다.
이경문 : 서린아.
서린 : (돌아본다) ?
이경문 : 행여, 번개가 치고 천둥이 치면 서둘러 피해야한다. 알겠느냐?
서린 : (끄덕끄덕)
서린은 사랑채로 가버린다.
밀려오는 먹구름을 보는 이경문의 얼굴이 어두워지는데.
#3. 서린의 집, 대문 - 밤 (과거)
초롱을 들고 대문 앞에 서있는 어린치용. 누군가가 대문을 조용히 두 번 두드리면 문을 열어주는 전치용.
버선발로 들어오는 광해. 전치용 안내하는데.
#4. 서린의 집, 사랑채 뜰 - 밤 (과거)
버선발로 서둘러 모퉁이를 돌아가는 광해. 누군가와 부딪쳐 넘어지는데 서린이다.
놀란 얼굴로 넘어져있는 서린. 급한 맘이었으나 서린을 보고 밝아지는 광해의 얼굴.
어리둥절한 얼굴의 서린에게 광해는 손을 뻗는다.
광해 : (반갑게) 산이의 딸, 서린이가 벌써 이만큼이나 자랐구나.
망설이던 서린은 광해군의 손을 잡고 일어난다.
서린 : (동그란 눈으로 말갛게 보며) 어르신은 뉘신지요?
광해 : (인자하게 미소만)
서린 : (버선 발인 광해의 발을 보는데) ...
광해 : (날아다니는 반딧불 하나를 보며) 반딧불을 쫓아온 모양이구나?
서린 : (고개만 끄덕)
광해 : 저놈도 날이 밝으면 저 빛을 다 발하게 될터이니, 저렇게 날아다니게 놔두는 것이 어떻겠느냐?
서린 : (말간 미소를 띠며 유유히 날아다니는 반딧불을 보는데)
문을 열고 나타나는 이경문.
이경문 : 서두르셔야 합니다. 역도들이 금방 들이닥칠 것입니다.
순간, 나타나 광해를 데리고 가는 이경문. 안채 쪽으로 사라진다.
서너발 따라가다 멈춰선 서린, 뭔가 불안이 급습하는데.
#5. 서린의 집, 마당 - 밤 (과거)
요란한 소리와 함께 대문이 부서지듯 열리며, 금부도사와 관군들이 횃불과 칼을 들고 집 안으로 마구 들이닥친다.
금부도사 : 이 안에 강상의 도를 어지럽히고 조선의 사직을 무너트린 폭군이 숨어있을 것이다. 샅샅이 뒤져 반드시 찾아내거라!!
닫혀져있던 동문과 서문을 활짝활짝 열고 횃불을 든 군졸들이 우르르 들어간다.
횃불을 든 관군들을 집안을 마구 휘젓고 다니는데.
#6. 서린의 집, 사랑채 뜰 - 밤 (과거)
번쩍! 콰쾅! 멀리서 번개에 이어 천둥이 치는 소리가 들린다.
불안한 서린, 뒤늦게 안채 쪽으로 달려가는데.
#7. 서린의 집, 안채 뜰 - 밤 (과거)
금부도사의 급습을 알아챈 이경문, 당황해서 광해군을 재촉하는데
이경문 : 전하, 서두르셔야 합니다. 어서 가시지요.
광해 : (자신의 발을 보더니) 이런, 구차하게 버선발로 나왔구나. (보며) 산아, 내게 신을 내어줄 수 있느냐?
이경문 : 전하.
광해 : (초연하다) 역도들이긴 하나, 조선의 임금인 내가 버선발로 신하를 맞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
이경문 : (흐느끼며) 전하.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하는 이경문.
문 앞에 서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서린. 재빨리 서린을 모퉁이 쪽으로 데려가는 전치용.
서린 : 치용아, 이게 무슨 짓이야?
전치용 : (서린의 입을 확 막으면서) 가만히 계십시오, 아씨.
순간 문들이 활짝 열리며 횃불을 든 관군들이 우르르 들어온다.
순식간에 금부도사와 관군들이 광해군과 이경문 일행을 빙 둘러 막아선다.
이경문이 광해군을 보호하며 앞으로 나선다.
이경문 : 네 이놈!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금부도사 : 폐주를 받드는 네놈이야말로 역적 중의 역적이다!!
금부도사, 이경문을 칼로 그대로 베어버린다. 쓰러지는 이경문.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서린. 헉, 그대로 입만 벌린 채 굳어버린다.
전치용도 그 장면을 목격하고는 재빨리 자기 손으로 서린의 눈을 가린다.
그러나 서린, 치용의 손을 거칠게 걷어내며 피흘린 채 쓰러진 이경문의 주검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비참하게 끌려가는 광해를 바라보는 서린의 처연한 눈빛.
#8. 제주, 바다가 보이는 곳 - 낮 (현재)
멀리 바다를 바라보는 서린의 눈. 나란히 서있는 광해를 본다. 광해는 시선을 맞추지 않고 바다만 응시하고 있는데...
광해 : 이렇게 가까운 길을 참 멀리도 돌아왔구나.
서린 : 전하, 이젠 저와 함께 한양으로 올라가셔야합니다.
광해 : 나는 참으로 죄가 많은 사람이야. (물끄러미 보며) 그건 손에 쥘 수 없는 꿈이다.
서린 : 헛된 꿈이 아닙니다. (눈에 눈물 차오르고) 잊으셨습니까, 전하? 그 참혹함을 전 잊지 않았습니다. 어찌 잊겠습니까?
두고두고 갚을 원수인 것을 어찌 잊겠습니까? 다아 눈에 담아두었습니다. 그놈들의 만행을 전 다 담아두었습니다, 전하.
광해 : 그 원한이 너를 호랑이 새끼로 만들었구나. 다 나의 부덕함이다.
서린 : (단호한 어조로) 전하, 명과 청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국과 자유로이 교역하며 어느나라의 눈치도 보지 않는
부국강병의 조선을 만들고 자 한 것이 전하의 꿈이 아니었습니까?!
광해 : (굳어 보며) 진정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게냐? 나를 허수아비 임금으로 복위시켜서
너의 상단이 조선을 집어삼키는 것이더냐?
서린 : (기막히고) 전하!
광해 : 너의 꿈은 부국강병의 조선이 아니라 조선을 외세에 팔아먹겠다는 것이 아니더냐!
서린 : 전하! 외세의 무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손으로 빗장을 열어야 합니다.
그것이 전하의 뜻이고 제 아비의 뜻이었습니다.
광해 : 이제 부질없는 소리다!
서린 : 그 빗장은! 서린상단이 열 것입니다. 조선이란 이름보다 서린이라는 이름이 위에 서는 날을 열 것입니다.
광해 : (매섭게 보며) 돌아가라!
서린 : (지지않고 보며) 오늘은 이리 돌아가겠습니다. 허나, 저의 청을 곱씹어 주시옵소서, 전하.
(예를 올리고는)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가는 서린.
멀어지는 서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광해군의 표정은 어둡기만 하다.
#9. 제주 일각 - 낮
하명의 도움으로 말에 오르는 서린.
서린 : 하명아, 용골대에 연통을 보내라. 소현세자를 잠시 환궁시켜달라 해야겠다. (얼굴에 가득한 독기)
#10. 너른 광장의 단두대 (윌리엄의 꿈) - 낮
포승줄에 꽁꽁 묶인 채 단두대 옆에 끌려온 윌리엄. 사람들의 적대감어린 눈빛과 야유소리에 두려움이 가득한 윌리엄의 얼굴.
몸부림치며 반항해보지만 결국 포졸들은 단두대의 칼날아래 윌리엄의 목을 건다.
윌리엄 : (Eng) No, I can't die just like this. Help! 얀! 버진! 안돼! 이렇게 죽을 순 없어! 도와줘! (두리번거리며) 얀! 버진!
그러나, 얀과 버진 대신 윌리엄의 눈에 들어오는 건 단두대 옆에 서 있는 박규다.
윌리엄 : 박규...나 죽이지 말라고 해. 제발...프리즈...
박규 : (차가운 표정) 국법은 지엄한 것이다.
윌리엄 : (힘껏) 박규! 나 조선을 떠날게. 잉글랜드로 당장 돌아갈게!
박규, 엷은 미소 띤 표정을 보이다가 한 순간 싸늘하게 바뀌며 포졸에게 끊으라는 신호를 보낸다. 헉, 놀라는 윌리엄.
포졸은 박규의 신호에 고개 끄덕이며, 단두대 줄을 단번에 끊어버린다.
윌리엄 : 오, 노!!!!
윌리엄 목을 향해 번개처럼 내려오는 단두대 칼날과 윌리엄의 처절한 비명, 악~~~
#11. 해남, 관아 관군 숙소 안 - 낮
꿈에서 깨는 윌리엄. 식은땀으로 범벅이다. 자신의 목이 붙어 있는 걸 확인하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윌리엄.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포졸 둘이 안으로 들어온다. 윌리엄의 손을 묶으며 키득거리는 포졸들.
포졸1 : 이래도 되는 것인감?
포졸2 : 걱정 말어. 윗분들 싹 나간 거 미리 다 확인했응케.
포졸들, 윌리엄을 잡아 일으킨다. 느낌이 안 좋은 윌리엄은 안 나가려고 버티는데.
포졸1 : 뭐혀? 일어나. 어여 나가자고.
윌리엄 : 어디 가려는 거야?
포졸1 : 참말로 보면 볼수록 신기하구먼. 어디서 우리말을 배웠을까?
윌리엄 : 박규는 어딨어? 박규.
포졸2 : (윌리엄 머리를 때리며) 이게 어디서 어사님 이름을 함부로 불러싸. 어사님이 네 동무여?
포졸1 : 됐으니까 어여 끌고 나가자구.
윌리엄을 억지로 끌고나가는 포졸들.
#12. 해남, 관아 앞 - 낮
관아 문이 열리고 윌리엄이 모습을 드러낸다. 모여있던 사람들 일제히 우와~~ 함성이 절로 나오고...
윌리엄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럽다.
뒤로 주춤거리는 윌리엄을 포졸1,2가 양 옆에서 꽉 잡으며 사람들을 향해.
포졸1 : 다들 구경 잘 혀. 이런 거 평생 가야 못 보고 살 테니께. 자자. 두 냥씩들 내더라고.
사람들, 섣불리 윌리엄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그저 쳐다만 보는데...
포졸 하나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두냥씩 받고 있다.
포졸2 : (윌리엄 툭툭 치면서) 뭐해? 소리 내 봐라. 소리.
윌리엄이 입을 꼭 다물자, 포졸2가 윌리엄을 도리깨로 세게 친다.
윌리엄 : (할 수 없이/산방골 사람들과 처음 대면했을 때처럼) 밥...머겄수꽈?
구경하던 사람들, 처음엔 혹 하는 것 같더니만, 금세 시큰둥해진다.
구경꾼1 : 저게 어디 소리여?
구경꾼3 : 밥 먹었냐고 묻는 거 아녀?
구경꾼2 : 겨우 그거여? 두냥씩이나 내고 보는데 뭐 희한한 거 없어?
구경꾼1 : 히멀건한 귀신 같은 게 영 피죽도 못 먹은 꼬라지네.
구경꾼2 : 음마, 눈깔 색깔 좀 보래이...저래갖고 앞이 보인당가?
윌리엄 : (사람들의 냉랭한 태도에 위축되는데)
포졸1 : 거기 늦게 온 이들도 두냥씩 내고 보랑께.
구경꾼3 : 쟈가 뭐라도 해야 두냥이든 서냥이든 내지. 저거 쪼까 뵈주고 두 냥씩이나 내라고 하나...
그때 윌리엄을 향해 날아오는 홍시. 윌리엄의 얼굴에서 일그러져 흐르는 홍시.
윌리엄의 갑작스러운 봉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까르르 웃으며 좋아한다.
이때, 하나 더 날아와 윌리엄의 얼굴에 뭉개지는 홍시. 다시 까르르 웃는 사람들.
모멸감에 윌리엄의 얼굴은 완전 굳어버리는데.
#12-1. 기생집 앞 - 낮
화려한 기생집 외관. 박규가 얼굴 굳은 채, 대문 밖으로 성큼성큼 나온다. 그 뒤를 절절 매며 쫓아 나오는 해남 현감.
현감 : 어사또! 그리 가시면 어쩌십니까?
박규 : (돌아보며) 참으로 썩었도다! 마을 유지라는 양반들이 고을 백성 돌 볼 생각은 안 하고,
잠시 들린 어사에게 기생놀음이나 권하다니...
현감 : (쩔쩔 매는) 그게 아니옵고... 어사또께 긴히 드릴 청이 있어...
박규 : (비아냥) 긴히 할 얘기를 기생들과 함께 나눈단 말이오?
현감 : (찔끔) 송구합니다. 저의 짧은 소견으로 어사또를 위한 평범한 연회처럼 보이고 싶은 마음에 그만...
관에도 귀가 있는 듯 싶고...
박규 : 관에도 귀가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현감 : (주변을 두리번) 사실은 저희 고을도 꾸준히 진상품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건 열 놈이 도둑 하나 못 잡는다고
어찌나 신출귀몰한지... 이왕 오신 김에 이곳 진상도 밝혀주시고 가시면 안되겠습니까?
박규 : 한양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소?
현감 : (난감한) 그게...아직...제가 이곳에 부임한지도 얼마 안 되었고...
섣불리 알렸다간 저만 괜스레 제주로 좌천당할 수도 있고 해서...
한심스레 현감을 보던 박규. 돌아서 먼저 가버리는데... 자꾸 의문스럽다.
#12-2. 해남, 관아 앞 - 낮
관아 앞에 잔뜩 모여 있는 사람들. 서로 구경하려고 까치발 하고, 어른들은 아이들은 목마 태우고 생난리다.
관아 앞에 도착한 박규는 이 광경이 의아스럽기만 한데... 무심코 사람들 틈새로 쳐다보다 발걸음을 멈추고 만다.
옷은 찢겨지고, 엉망이 된 얼굴에, 아이들은 나뭇가지로 윌리엄을 쿡쿡 찌르고, 윌 머리를 마구 잡아당기고 있다.
만신창이가 되어 이리저리 밀리는 윌리엄. 포졸들은 낄낄거리며, 손에 든 엽전을 세며 희희낙락 좋아한다.
박규, 엽전을 흔들어 대는 포졸의 손을 부채로 세게 내리친다. 그 바람에 포졸 손에 든 엽전들 죄다 허공 위로 날리고.
사람들, 바닥에 떨어진 엽전 줍느라 완전 북새통이다.
포졸1, 사람들 밀치며 엽전 사수하다 짜증이 나서 고개 확 쳐들며.
포졸1 : 언놈이여? 언놈이 감히...
박규 : (매서운 얼굴로 내려보고) 이 무슨 짓이냐?!
윌리엄 : (박규를 본다/원망 섞인 시선)
박규 : 누구 허락을 받고 이양인을 밖으로 데리고 나온 것이야?
포졸들 : (완전 쫄아서 고개만 조아린다)
박규 : (손수 윌리엄을 일으켜 데리고 가며) 내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니, 단단히들 각오하거라.
박규는 윌리엄의 처참한 몰골에 가슴이 답답해져온다.
#12-3. 해남, 관아 숙소 안 - 밤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은 윌리엄, 지친 듯 벽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는다.
방안엔 상이 차려져있다. 하지만 한 숟갈도 뜨지 않는 새 밥상이다.
이내 문이 열리며, 박규가 들어온다. 박규 손에 들고 있는 삿갓.
윌리엄은 미동도 하지 않고 눈감은 채로 마치 잠이라도 든 사람처럼 앉아있다.
박규 : 기력이 떨어졌을 터인데... 한술도 뜨지 않았구나.
윌리엄 : (미동도 없고)...
박규 : (조금 망설이다) 너에게 악의를 품어서가 아니라 이양인이 낯설어 우발적으로 무례를 범한 것이니,
저들을 너무 미워하지는 말거라.
윌리엄 : (역시 그대로)...
박규 : (미동없는 윌리엄을 살피며)..잠이 든 게냐?
윌리엄 : (역시 조금의 미동도 없이)
박규 : (삿갓을 놓으며) 삿갓을 가져왔다. 앞으로는 그것을 쓰도록 해라. 그러면 사람들이 널 이양인으로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윌리엄 : (역시 반응없고)...
박규 : (착잡한/나가려다가 문득 돌아서서) 후회하지 않느냐?
윌리엄 : (그제사 눈을 뜨는)
박규 : 내가 보내준다 했을 때 떠났으면, 이런 꼴은 안 당했을 터인데...
윌리엄 : (대답없이 보기만)
박규 : (낮은 한숨 쉬고 나가려는데)
윌리엄 : (읊조리듯) 버진이는... 버진이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박규 : (멈칫 서서 아련한듯) 오늘 한 물질, 내일도 하고... 모레 또 하고... 그리 산다 했지...
어느 바다밭에서 물질을 하고 있을 게다.
윌리엄 : (고개 끄덕이다) 바다 앞에서 울던 모습이 자꾸 생각나... 박규..., 언젠간 버진 다시 볼 수 있겠지?
박규 : (다시 마음 다잡으며) 어리석은 소리 마라. (스스로에게 타이르듯) 그 아인 결코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박규, 버진 생각을 끊어버리려는 것처럼 서둘러 방을 빠져나간다.
윌리엄은 다시 벽에 몸을 기대며 눈을 스르륵 감는다.
#12-4. 해남 관아 숙소 밖 - 밤
숙소에서 나와 깊은 한숨을 토해내는 박규.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멀리 유성이 하나 떨어진다.
#13. 제주 바닷가 - 밤
유성이 하나 떨어져 내리고... 휘영청한 달빛 아래, 바닷가에 멍하니 앉아 있는 버진.
버진, 멍하니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새 할아방이 다가와 옆에 앉는다.
할아방 : 우리 버진이.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누?
버진 : (여전히 바다에 시선 응시한 채) 할아방, 여서 뭍까지는 얼마나 되나? 하루 꼬박 배 타고 가믄 되는 거라?
할아방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버진 : 나... 멤이 너미 허전하곡 답답해서 꼭 죽을 것 같나네. (바다너머를 보며) 일리암 만나러 가야 허는디...약속했신디...
할아방 : (웃으며) 우리 버진이 뭍에 가고 싶은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구나. (혼잣말처럼) 뭍이라고 이곳보다 나을 건 없단다...
버진 : (할아방 바라보면)
할아방 : 중요한 건 네 마음이지. 네 마음의 응어리가 풀리지 않으면 네 몸이 어디에 있든 똑같을 뿐이야.
마음을 이기는 몸은 없어.
버진 : (갸웃하지만) 허지만 난 일리암땜시 마음이 아픈 거니께 일리암만 보믄 괜찮을 거나네.
할아방 : (장난스런) 단지 푸른 눈 소나이 때문인 거냐?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버진 : (괜히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며) 당연히 일리암 때문이지... 글험 나가 귀양다리...어사땜에 멤이 이러겠수꽈?
버진, 다다다 달려 나가고, 할아방은 껄껄 웃으며 그런 버진을 바라보다, 잠시 후 웃음을 거둔다.
할아방 : 버진이까지 떠나버리면, 탐라가 많이 심심해지겠구나...
#14. 버진의 집 마당 - 밤
평상에 앉아 지붕에 올릴 새를 엮는 원빈, 한쩍벌, 종달부.
한쩍벌 : 어사님이 떠나서 그런가... 집안이 영 휑하우다 형님.
원빈 : 그러게 말이멘. 귀양다리, 아니 어사님 있을 때는 이 좁다란 집안에서 걸치적거릴 때도 많았신디,
없으니 참말로 허전하나네. 언제 한 번 내려 오믄 좋은 것인디...
종달부 : 에이...버진 아방...지금 어사님 또 귀양 오라고 고사 지내는거멘?
원빈 : 아니 꼭 내려오라는 게 아니라...그만큼 나가 어사님을 위하는 마음이 크다는 말이라. 들어봅서. 나랑 어사님이랑 가치
짚신도 짜곡, 새끼도 꼬면서 그새 얼마나 정이 들었는디...어사님이 떠날 때 나 보고 눈시울 붉어지는 거 못 봤나?
쩍벌, 종달부 : (못 봤다는 의미로 도리도리)
한쩍벌 : 못봤수다.
원빈 : (혼자 중얼) 다덜 동태눈깔을 해서리...중헌 장면을 못 봤으메.
쩍벌, 종달부 : 동태?
쩍벌과 종달부 의아하게 원빈 바라보는데, 원빈은 그들이 쳐다보든 말은 박규를 생각하며 회상에 젖은 눈빛이다.
#15. 버진이네 집 고팡 - 밤
고팡에 남은 박규의 짐을 치우는 최잠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남기고 간 책이며 옷가지들을 광주리에 한데 담아서 밖으로 가지고 나가려 하는데,
최잠녀 앞을 막아서는 그림자. 버진이다.
버진 : 어멍...지금 무신 거 허는 거멘?
최잠녀 : 보믄 모르난? 깨끗이 치워놔야 이번에 거둬들인 곡식 겨울 동안 잘 보관할 거 아니라.
니도 멀뚱히 보지만 말고 바닥이라도 닦으라.
버진 : (속상한 표정으로) 어멍...아멩그래도..귀양다리 떠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리 물건을 버리고...
최잠녀 : (애써 강하게) 안 버리고 있시믄...어사님이 도로 돌아 오난?
버진 : (할 말 없고)
최잠녀 : (버진의 마음 눈치 채고) 장버진. 돈돈히 들으라. 계속 그렇게 뭍으로 가고 싶다느니 허드렁한 소리만 하믄서
찰기 없는 미역모냥 축 쳐저 있시믄 아프로 니 밥은 없다. 아라드런?
빨리 여기마저 치우고 아방 지붕새 엮는 거나 도우라.
버진 : 어멍, 이제 그만 합서.
최잠녀 : (빠직하며) 무신 거라?
버진 : 눈만 마주치면 일타령, 지겹지도 않수꽈?
최잠녀 : 다시 한 번 말해 보라.
버진 : 어멍은 나가 어떤 멤으로 뭍에 가고 싶다 하는지 참말 모르는 거라?
최잠녀 : 왜 그러긴, 헛바람만 잔뜩 들어서 그러는 거지.
버진 : (버럭) 어멍처럼 눈만 뜨면 물질 허고, 밭일 허고...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그러메.
최잠녀 : (말없이 버진 바라보는데)
버진 : (일부러 더 독하게) 난 참말로 지긋지긋허나네. 나가 아모리 열심히 물질 혀서 최고 대상군이 된다 혀도...
결국 어멍이 지금 하는 멘치로 사는 거 아니라? 난 죽어도 그리 살기 싫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철썩, 버진의 뺨을 때리는 최잠녀.
버진은 놀라 자기 뺨을 감싸 쥐고, 최잠녀도 자신의 행동에 순간 움찔한다.
최잠녀 : (떨리는 목소리 가다듬으며) 니가 몬딱 치우고 나오라.
최잠녀, 광주리를 바닥에 팡 내려놓으며 고팡을 나가버린다.
#16. 버진네 마당 - 밤
고팡에서 나온 최잠녀는 잔뜩 굳은 얼굴로 성큼성큼 정지로 들어가 버리고,
평상 위의 세 남자는 그런 최잠녀의 눈치만 보는데... 원빈이 짠한 얼굴로 고팡 쪽을 바라본다.
#17. 고팡 - 밤
버진, 흐르는 눈물을 꾸욱 누르며 고팡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광주리 맨 위에 놓인 서책으로 눈길이 가는데...표지가 <소학언해>라고 한글로 써 있다.
버진, 귀양다리가 이런 언문책도 봤나, 하는 얼굴로 무심코 표지를 넘겨보는데... 표지 다음에 “장버진” 이라고 쓰여 있다.
버진, 놀라서 자기 이름을 들여다본다.
ins)
박규가 봉삼이 가져온 언문책에 ‘장버진’이라고 이름을 쓰고 있다. 쓰고선 왠지 만족스러운 듯 싱긋 웃는 박규.
그러다 누가 본 것도 아닌데, 괜히 쑥스러워 헛기침만 흠흠.
현재)
책장을 넘겨보는 버진. 전체가 한글로 써진 서책이다.
flash back) 4회 버진네 마당 평상.
박규 : 좋다. 대신 내가 너에게 한글을 가르쳐주마. (붓을 들고 쓰면서) 따라 써 보거라. 기역. 니은. 디귿.
버진 : (입으로 소리 내며 따라 쓰는) 기억.. 니은.. 디귿..
(점프)
평상에 버진이 써내려 간 종이가 한 무더기 보이고...
박규 : (종이들을 확 치우며) 이제 불러 줄 테니 한 번 써 보거라. 망아지.
버진, 찌릿 박규 한 번 노려보고 쓰는데...종이 들면 “맣하지” 라고 썼다.
박규와 버진의 투덕거림이 계속되고...
현재)
언문책을 가슴에 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버진.
#18. 필립 오두막 - 밤
얀이 자신의 짐을 정리하고 있다. 돈이 두둑이 든 주머니를 확인하고는 짐 깊숙이 집어넣는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버진이 들어온다. 뛰어와서 얼굴이 붉게 상기된 버진.
버진 : (숨 찬 목소리) 니...뭍에 언제 갈거라?
얀 : (경계하는 눈빛으로 버진을 쳐다본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버진 : 니 일리암 구하러 안 갈거멘? 우리 가치 가자.
얀 : 우리라니?
버진 : 너랑 나. 나랑 가치 가믄 일리암도 참말로 기뻐할 거나네.
얀 : (코웃음 치며) 정신차려. 넌 이 탐라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어.
버진 : 니는 수를 쓸 수 있지 않으멘? 니 일리암 잡혔을 때도 사람덜 잘도 속여 먹고 혼자 빠져 나왔으믄서.
얀 : (어이없는) 설사 할 수 있다 해도 내가 널 위해 그럴 이유는 없지.
버진 : 왜 없나? 일리암도 나 보고 시퍼 할 턴디.
얀 : (차갑게) 너만 아니었음 윌리엄은 무사히 떠날 수도 있었어.
버진 : (어리둥절) 그기 무신 소리라?
얀, 버진의 눈길을 피하며 대답을 않고 있는데,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필립이 들어온다.
필립 : (반가운) 누님! 나 돌아왔다는 소식 듣고 이리 온 거멘? 역시 서방 걱정은 각시뿐이라. (자신의 가슴을 든든하게 치며)
나 걱정은 맙서. 시련은 소나이를 강하게 만드우다.
버진 : (필립 말은 듣지 않고 얀만 쳐다보고 있자)
필립 : (뻘줌하여 말 돌리는) 형님 헌티 작별인사는 했수꽈?
버진 : 작별 인사?
필립 : 아직 못 들었수꽈? 내일 아침 일찍 뭍으로 떠난다고 하우다. (슬픈 표정되며) 정들만 허니 이별이라.
(비장한 척) 이거이 뱃사람의 숙명인거메.
얀 : (신경 쓰지 않고 밖으로 나가며, 버진 보고) 넌 여기서 떠날 수 없어. 정신 차리고 물질이나 열심히 해.
밖으로 나가버리는 얀. 망연자실 서 있는 버진.
필립 : (손을 내밀며) 형님. 참으로 매정한 사람이우다. (한숨 쉬며) 우리 선주님 배는 풍비박산 나서 당분간 일허기도 어려운디..
나도 형님이 나 따라가고 시프메.
버진, 필립의 말에 갑자기 눈빛 빛내며 필립을 위아래로 훑어본다.
버진이 필립에게 서서히 다가간다. 필립은 버진의 태도에 영 어리둥절이고...
버진 : 복만아...
복만 : (버진의 태도에 당황스러워) 왜 그러우꽈?
버진, 필립에게 더 바짝 다가가, 필립의 옷고름을 잡는다.
#19. 산방골 저잣거리 - 새벽
새벽의 푸르름이 묻은 스산한 저잣거리.
인적이 느껴지지 않는 거리에 봇짐을 멘 얀이 나타난다.
#20. 저잣거리 뒷골목 - 새벽
얀이 은밀한 뒷골목으로 들어서면, 미리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보인다.
사람 : (주변 살피며, 얀에게 호패를 내민다) 여기 있수다. 확인해봅서.
얀 : (호패를 받아서 확인하고, 돈을 건넨다)
사람이 돈 받아들고 사라지면, 얀도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뒤 발걸음을 옮긴다.
#21. 버진의 방 - 새벽
주섬주섬 일어나서, 필립의 옷을 입는 버진. 버진은 옆에 자고 있는 버설을 보면서 약해지는 마음을 애써 다잡는다.
머리를 패랭이 안에 감춘 버진이 버설의 얼굴을 쓰다듬어 준 후, 보따리를 들고 조용히 밖으로 나가는 버진.
#22. 버진이네 집 마당 - 새벽
고요한 정적을 깨고, 남장한 버진이 마당으로 조심스럽게 나온다.
버진, 집을 찬찬히 둘러본다. 마당의 물건 하나하나에 다 눈이 가고, 최종적으로 최잠녀 방에 눈이 고정된다.
방 앞에 놓인 최잠녀와 원빈의 낡은 신발을 보면서 눈물이 맺히는 버진.
버진은 그러다 결심이 흔들리기라도 할까봐 서둘러 집밖으로 확 뛰쳐나간다.
#23. 산방골 길 일각 - 새벽
버진이 달려가는데, 뒤쫓아 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버진이 혹시 어멍인가 싶어 놀라서 돌아보는데... 원빈이다.
원빈을 보자, 발걸음이 멈추는 버진.
원빈 : (달려와서 버진의 앞을 막는다) 버진아...
버진 : (놀란) 아방...
원빈 : ... (버진의 남장한 모습을 보며 착잡한) 꼭 이래야 허나?
버진 : (눈물 글썽) 미안허우다. 아방... 근디... 나는 더 못견디겠어라. 아모 일 없었던 것처럼 매일매일 물질허믄서
그렇게는 못 살겠으메. 시간이 지날수록 멤만 더 아파지는디, 나가 어떻게 살겠수꽈?
원빈 : (버진의 눈물에 가슴이 아프고)
버진 : (가슴을 툭툭 치며) 나는 이디서는 여기가 체한 것처럼 꽉 막혀서, 숨도 제대로 못 쉬겠으메. 글허니까 보내줍서. 아방...
원빈 : (버진을 꼭 안아주며) 니 멤이 참말 그러믄 어쩌겠나... (돈 주머니를 꺼내, 버진의 손에 꼭 쥐어준다) 가지고 가라.
...살아보니께, 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그나마 후회가 적은 벱이나네.
버진 : (눈물 펑펑 흘리며) 아방... 나가 참말 미안하우다...
원빈 : 허지만 이거 하나는 돈돈히 기억혀라. 우리가 여기서 언제꼬지나 지다리고 있을 테니, 심들믄 탐라로 언제든 돌아오라이.
버진 : (고개만 크게 끄덕끄덕) 아방..
원빈 : ... 첫배 떠날 시간 다 되간다. 얼른 가라.
버진 : (눈물이 멈추지를 않고) 아방...
원빈 : (다른 곳을 보면서, 슬픔 감추며) 어여 가라. 사람들 보기 전에..
원빈이 떠밀자, 버진이 눈물을 흘리며 달려간다.
버진이 달려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는 원빈의 눈에도 눈물이 맺힌다.
#25. 포구 - 아침 (인서트)
북적북적한 새벽 포구 전경.
#26. 포구 한편 - 아침
배에 탑승하기 위해 줄 서있는 사람들.
호패를 검사하고 있는 사공. 호패를 보고, 사람들을 배 안으로 들여보내주고 있다.
얀이 호패를 내밀고 배에 탑승한다.
줄의 맨 끝에 서 있던 버진은 앞의 줄이 짧아질수록, 초조함이 더해간다.
드디어 버진의 순서. 버진은 패랭이를 깊이 눌러쓰고, 사공에게 호패를 내민다.
사공 : (호패를 확인, 버진 힐끔) 아직 어린놈이 뭍에 나가나 보주게.
버진 : (잔뜩 긴장해서, 눈 내리 깔고 고개만 크게 끄덕인다)
사공이 호패를 도로 돌려주면, 버진이 품에 넣고 후다닥 배 안으로 들어간다.
#27. 배 위 - 아침
바다 한가운데 있는 배. 보따리를 가슴에 꼭 안은 버진,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몸을 움츠리고 있다.
지나가던 얀, 패랭이를 쓴 소년을 힐끗 보더니 단번에 버진임을 눈치 챈다. 미간을 찌푸리는데.
자신을 알아본 얀이 반가운 버진은 고개를 돌려 눈을 찡끗하지만 무시당하는데...
그때, 버진을 알아본 승객 하나, 다가와 살핀다.
승객 : (찬찬히 보며) 니 버진이 아니라?
버진 : (얼굴 안 보이게 숨기며, 고개만 세차게 도리도리) 아..아녀라.
승객 : (일으키며) 버진이 맞는 것 같은디... 니 좀녀가 뭍에 가는 거라?!
이 말에 사람들이 일제히 버진을 돌아본다. 버진은 당혹스런 얼굴로 어찌할 줄 모르는데...
얀은 전혀 모르는 척 외면하며, 그저 바다만 바라보고 있다.
승객1 : 잠녀? 지금 잠녀라고 했시난?
승객2 : 배 돌려야 허는 거 아니라? 잠녀가 뭍에 나가면 치도곤을 당할텐디.
승객 : (패랭이를 벗기려고 하며) 니 산방골 버진이 맞제?
버진, 필사적으로 패랭이를 붙잡고 있는데, 승객들 다가와 버진을 둘러싸고 버진은 이제 걸렸구나 싶어 울상이 다 됐는데.
벗겨지려는 패랭이를 버진 머리 위에 쑥 올리며 등장하는 손.
얀(E) : 나 동생에게 무신 볼 일이멘?
버진, 얀 뒤에 몸을 숨기며 얼른 패랭이를 고쳐 쓴다.
승객 : 그 짝 동생이라구? 분멩히 산방골 버진인디...
얀 : 몸이 좋지 않아 뭍으로 치료를 받으러 가는 길이나네.
승객 : (미심쩍어하면서) 아닌디...산방골 하군좀녀 버진이랑 똑 닮았신디...
얀 : 지금 나 동생을 좀녀, 그러니까 계집이라고 하는거멘? (버진의 손목을 잡아 사람들 앞으로 휙 들이민다)
버진 : (얼굴을 못 들고 서서)
일동 : (다들 버진을 주목하고)
얀 : 어려서 큰 병을 앓아 키도 이렇게 자라다 말고, 말도 못하는 바람에 얘가 평생 을마나 놀림 받으며 살았는지 아멘?
승객 : (얀의 포스에 움츠려드나) 분멩히 버진이맹키로 생겼신디...
얀 : (노려보며) 기어코 얘 바지꼬지 벗겨야 되겠난?
버진 : (깜짝 놀라 얀 쳐다보는데)
얀 : (승객 보며) 아픈 아이를 사람들 아피서 이리 망신 주었는디, 소나이인 게 증명이 되믄 아즈방은 무신 보상을 해줄거멘?
승객 : (주변 눈치 보며, 당황) 그기...
얀 : 아무리 못해도 뱃삯의 세 곱절은 내놓아야 될 것이메. (벗기려는데)
승객 : (성급히) 됐네! 됐주! 나가 아맹해도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메.
얀의 강렬한 눈빛에 모두 꽁무니를 빼고 간다.
버진을 데리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얀.
#28. 배 위 일각 - 낮
버진,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얀의 옆에 찰싹 앉는다.
버진 : (사람들 눈치 보면서) 고마워이. 니 보기보다 좋은 사람이나네. 역시 일리암 동무라!
얀 : (차갑게) 내가 도와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버진 : (생각나 발끈) 근디 참말로 바지 벗기려 했나?
얀 : (무시/퉁명스럽게) 뭍에 도착하면 절대로 따라붙을 생각하지마.
버진 : (기죽어서) 안 그런다...
버진은 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빛으로 보지만, 얀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먼 바다를 응시한다.
#29. 바닷가 작업장 - 오후
원빈(E) : 버진이 뭍으로 떠났어라.
최잠녀, 미역을 말리던 손길을 멈추며 한숨을 내쉰다.
넋이 나간 듯한 최잠녀의 얼굴에 미역을 널던 다른 잠녀들이 최잠녀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본다.
고바순 : 아우게. 집에 무신 일이라도 있수꽈? 멘상이 왜 낚시줄에 걸린 낙지 모냥 길어져 있으멘?
최잠녀 : (쳐다도 안 보고 중얼) 아모 일도 없나네...
고바순 : 글헌디 버진이는 왜 안 보이난? 여적 이양인 생각으로 누워있으멘?
최잠녀 : (망설이다 고개만 살짝 끄덕. 둘러대는) 버진이가 원래 정도 많곡 멤도 약하잖어...
고바순 : 허긴... 우리 끝분이도 귀양...아니 어사님 보내구 잠깐 앓아누웠지.
끝분 : (기운차게 미역 널며) 허지만...이제 다 털어냈어라. 어사님도 신분 차 땜시 나를 멀리하냐곡 을마나 심들었겠수꽈?
고바순 : 기주게, 기주게. 어쩐지 니를 돌 보듯 한다 혔지... 다 이유가 있었던 거라.
게나제나간에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드만, 귀양 다리 하나 없을 뿐인디, 산방골이 텅 빈 것 같으메.
최잠녀 : (듣는 둥 마는 둥)
끝분 : (최잠녀 보며) 나가 일 마치고 아즈망네 가서 버진이 조꼼 타일러 주겠수다. 잠녀가 소나이 하나에 웃고 울믄 안 되지라...
최잠녀 : (깜작 놀라 당황) 드가덜 말라! 그 무신 당치도 않는 소리를...
고바순 : (최잠녀 태도에 의심) 왜? 혹시 버진이 집에 없는거멘?
최잠녀 : (펄쩍) 아니라!! (말 돌리며) 혼자들 가라. 할 일이 얼마나 많을 것인디. 재게들 가라우.
고바순.끝분 : 야.야.
툴툴거리는 고바순을 비롯해서 잠녀들 일에 매진하면,
최잠녀는 다시 먼 바다를 바라보며 착잡한 표정을 짓는다.
#30. 해남 포구 - 오후
혼자 성큼성큼 앞서서 걸어가는 얀.
패랭이를 쓴 버진, 안따라가는척 살금살금 뒤를 따라가고 있다.
#31. 해남 저잣거리(박규/버진 교차) - 오후
난생 처음 와본 육지가 두렵고도 신기한 듯 연신 두리번거리는 버진.
버진, 제주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육지 땅의 조신한 여자들 모습이 마냥 신기하기만 한듯,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얀을 따라 걸어가면-
저잣거리 다른일각, 박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사람들 사이를 천천히 걷고 있다.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지나가는 여인네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버진.
버진, 붉은 치마에 댕기 머리를 한 규수가 지나가자 자기도 모르게 눈이 따라간다.
버진을 사내로 오해한 여자들, 버진의 노골적인 시선에 당황해 어쩔 줄 몰라하고 자신도 깜짝 놀라 얀 쪽을 고개를 돌리는 버진.
인파에 묻혀 사라지고 있는 얀의 모습이 보인다. 얀을 뒤쫒아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달리는데.
버진, 서둘러 모퉁이를 돌다 발을 헛딛으며 넘어지면-
박규 앞에, 모퉁이를 급히 돌아 나오던 한 버진이 발을 헛딛으며 넘어진다.
박규 : (자신도 모르게 잡아주면서) 망아지! 조심 좀 하지 못하... (멈칫)
박규, 보면 버진이가 아닌 웬 낯선 여자아이가 박규가 잡은 팔에 당혹스러워 하며 서있다.
황급히 손을 놓는 박규. 죄송하다고 고개 꾸벅인 후 다시 달려가는 여자아이.
박규, 돌아보며 스스로 한 행동이 어이없어 허탈한 웃음을 짓는데-
넘어진 버진의 팔을 잡고 일으켜주는 얀. 버진, 얀의 모습에 그제서야 얀심하는 얼굴로 헤- 웃으면
얀 : (싸늘) 내가 분명히 얘기했지? 뭍에 도착하는 순간부턴 각자 가자고.
버진 : (옷을 털며/시침뚝) 나, 니 따라가는 거 아니라!
얀 : (무시/돌아서 가버린다)
버진 : (얼릉 따라붙어) 어차피 우리 둘 다 일리암 찾으러 가는건디, 그냥 가치 가주?
얀 : (무시하고 계속 걷기만)
버진 : (쫄랑쫄랑 따라가면서) 같이 가자. 나 이마에 좀녀라고 써 붙인 것도 아니곡,
니도 나랑 가치 다니믄 멤 든든하지 않겠으멘? 혼자보단 둘이 나은거다.
얀 : (콧방귀) 너와 하는 둘이라면 혼자인 것이 낫다.
버진 : (계속 쫓아가며, 비굴하게) 니 너미 야박하게 그러지 마라. 탐나에서 나가 갖다준 감귤만도 몇갠디.
얀을 쫓아가던 버진, 국밥집을 보고 문득 멈춰선다. 얀의 옷자락을 잡는데 돌아보는 얀.
베시시 웃는 버진.
버진 : 니 배 고프지 않나?
얀 : (무시/다시 고개 돌리면)
버진 : 나가 살게에. 먹고 가자, 응?
얀은 대답없이 그대로 국밥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씨익 웃으며 뒤따르는 버진.
잠시후, 국밥집 앞을 지나가는 박규.
#32. 해남 객주 - 오후
한 손은 총각김치 들고 있고 걸신 걸린 것처럼 국밥을 먹어대는 버진. 얀, 그런 버진과 같이 앉아있는 것이 창피한 얼굴이다.
버진 : 어차피 가치 다닐걸 무신 걸 그리 빼난?
얀 : 말투나 조심해. 여기 사람들한테 너 제주 잠녀라고 알리고 싶어?
버진 : (움찔 놀라 말투 바꾸며, 박규처럼) 그러니 같이 다니자꾸나.
얀 : (뜨악하고)
버진 : 귀양다리 보니까... (멈칫하다) 이리 말하더라. 이게 한양 말이라.
얀, 옆으로 지나가는 주모를 보곤.
얀 : 이곳에 이양인이 나타났다면서?
버진 : (허겁지겁 먹다가 눈빛 세우고) !
주모 : 그랬지라. 나도 관아 앞에 구경 갔다왔지라. 하따, 참말 징하게 희한하게 생겼더라고.
얀 : 나도 한 번 보고 싶네. 아직도 여기 있나?
주모 : 한양으로 끌고간다던데.. 아마 오늘 강진으로 출발 한다지라.
얀, 주모에게 엽전을 퉁 튕겨준다. 신나서 받는 주모. 주모 가면...
얀 : 강진이라...
버진 : (보따리를 들며/신났다) 강진!!
#33. 강진 산 속 - 오후
우거진 산새가 제법 험악하다. 말을 탄 채로 들어서는 박규 일행.
박규를 선봉으로 양쪽에 호위관졸이 따르고 그 뒤에 삿갓을 쓴 윌리엄,
그 뒤도 역시 호위관졸들이 따르고 우마차에 포승줄에 묶은 죄인 몇과 마지막 우마차엔 짐들이 실려 있는 행령이다.
뒤를 돌아 보는 박규. 윌리엄 씨익 미소를 지어보이는데 안심한 얼굴로 다시 고개 돌리는 박규.
#33-1. 서린상단 - 오후
하명을 뒤에 달고 상단으로 들어오는 서린. 상단사람들은 ‘다녀오셨습니까’ 등등의 인사를 올리는데, 옆에 따라붙는 척사.
서린 : 나가사키에서 해상상단들의 동태를 살펴보니 금과 은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더구나.
척사 : 이번 거래에서 모든 값을 은으로 받아내신 것은 미리 예견하신 것인지요?
서린 : 청은 최대의 은 수요국이고, 왜는 최대의 은 공급국이다.
우리는 그 둘사이에서 중개인 역할을 하며 그 환차익을 챙기면 되는 것이야.
기다리던 한 하인이 하명에게 다가가 속삭이자 눈치 챈 서린.
서린 : 무슨 일이냐?
하명 : 예조판서 박철대감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하옵니다.
서린 : 예판이라하면 제주 그 어사놈의 아비가 아니더냐?!
하명 : 예, 그러하옵니다.
서린 : (비싯 미소 지으며) ...
서린은 거침없이 상단안으로 들어간다. 따라가길 멈추는 척사.
#33-2. 서린상단 살롱 안 - 오후
꼿꼿이 앉아있는 박철. 스스륵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서린, 예를 올린다.
서린 : 예판대감, 처음으로 인사를 올리옵니다. 서린이라 하옵니다.
박철 : (그저 보기만)
서린 : (미소 띄운 채 지지 않고 보며) 대감을 한번 정중히 뫼시려 저희 상단에 방문해주십사 거듭 요청을 드렸었는데
뵙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허나, 이리 직접방문해 주시오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대감.
박철 : (살롱을 훑어보곤) 이곳인가 보군. (보며) 은밀하게 대감들을 만나고 계시다 들었네.
서린 : (시침뚝) 어떤 말씀이신지....?
박철 : 나라의 문을 열어달라는 청을 하고 있다지?
서린 : (머리 조아리며) 대감, 저는 장사치입니다. 좋은 물건들을 거래할 수만 있다면 어디든 무엇이든 마다하겠습니까?
외국의 선진문물들을 조선에 들여오고 조선의 좋은 물건들을 내다팔게 된다면
조선은 저 황제의 나라도 부럽지 않은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박철 : 그래서 들여온 물건이 나라를 좀먹게 하고 있는 담바귀인가?
서린 : (본다) !!
박철 : 더 이상 좌시하고만 볼 수 없어 내 오늘 직접 그대에게 경고를 하러 온 것이네. 자네의 상단이 조선의 상권을 움직이는
큰 상단일지는 모르나, 임금의 정책에 역행하려 든다면 매우 큰 코를 다치게 될 것이야.
서린 : (엷은 미소 뒤 불쑥) 반금친명(反金親明)이 전하의 뜻이라지요?
박철 : 그것이 그분을 보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서린 : 그렇지요. (매섭게 보며) 그날, 조선의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박철 : (물끄러미 보다가 일어나 나간다)
서린 : (그대로) 조선의 외교사를 쥐락펴락하시는 분에게 한낱 미천한 상단 따위가 과한 욕심을 부린 듯 싶습니다,
박철 : (돌아보면)
서린 : (돌아서서 보며 알듯 모를 듯한 미소를 날린 후, 목례를 한다)
나가는 박철. 굳어 노려보는 서린.
#33-3. 서린 집무실 - 오후
집무실로 들어서는 서린. 한쪽에 놓여있는 보따리 서너개가 보인다. 문득 보곤 하인에게
서린 : 이것이 무엇이냐?
하인 : 예, 예조판서 박철대감께서 받을 수 없다며 돌려보낸 물건입니다.
서린 : 꼿꼿하시기가 대쪽 같다더니 과연 소문대로인가 보구나. (빙그레 웃으며) 외아들의 주검을 보고도
꺾기지 않는 기개를 지켜내실지도 두고 봐야할 일이지, 아암... (차갑게) 치우거라.
하인은 비단보따리를 가지고 나가면 서린, 책상에 앉아 장부를 넘겨보다 의미심장한 시선을 세우며 창밖을 바라보는데
서린 : (혼잣말) 내 대감의 아들 목숨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것도 아십니까? (소리내어 웃는다)
#33-4. 강진 산 속 - 오후
아름드리 나무들이 뻗어있는 숲속을 헤치며 빠르게 움직이는 무리.
저 아래, 박규 일행들이 지나가고 있다.
그들을 보고 있는 남자, 전치용이다.
#34. 강진으로 향하는 길 - 오후
푸르른 보리밭이 쫙 펼쳐진 한적한 평야 한가운데를 걷고 있는 버진과 얀.
멀찌감치 혼자 걸어가는 얀과 다리를 두드리며 터덜터덜 뒤따라가는 버진.
버진 : 야안! 좀 쉬었다가메!
얀 : (들은 척도 안하며 가고)
버진 : (이죽거리며) 메께라...
할 수 없이 뒤따라가는 버진. 멀리 버진 뒤에 오고 있는 소달구지.
(시간경과)
봇짐을 멘 얀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지체없이 걷고 있는 얀.
이때, 얀의 옆을 지나가는 소달구지. 풀을 가득 실었다.
소달구지가 지나가고 소달구지의 뒷꽁무니가 얀에게 나타나자
달구지 뒤에 타있는 버진이 뿡!하며 입을 ‘다리 아프지롱?!’ 삐죽이며 얀을 놀린다.
얀은 어이없어 하는데.
(시간경과)
다리를 떨어트린 채 소달구지 뒤에 탄 버진과 얀. 버진은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얀과 자리싸움을 하며 장난을 친다.
언덕배기를 넘어가며 그렇게 멀어지는데...
#35. 산 일각 - 오후
숲속 언덕배기를 넘어 내려오는 박규일행. 평화롭다.
순간, 후다닥 꿩 한 마리가 날아가는데 놀라 움찔하였다가 허허롭게 웃는데
요란하게 말발굽 소리를 내며 박규일행 앞에 나타는 산적들. (삿갓 쓴 전치용이 뒤에 서 있지만, 박규는 그를 몰라본다)
관군들은 ‘산적이다’를 외쳐대고, 윌리엄도 예기치 않은 상황에 놀라는데.
전치용 : (나직이 옆에 수하에게) 평범한 산적으로 보여야 하느니라.
저놈을 죽이는데 성공하더라도 수레에 있는 짐들을 챙겨야 한다.
전치용, 신호를 보내자 일제히 달려드는 산적들. 박규는 호위관군들을 침착시키는데.
박규 : 허둥대지 말고 전열을 가다듬어라. 겨우 산적 떼들일 뿐이다!!
관군들, 물자가 든 수레를 보호하기 위해 사방으로 둘러싸는데,
어느새 박규네 일행을 모조리 포위하고 있는 산적들. 망설임 없이 박규를 향해 달려든다.
말 위에서 산적들과 대적하는 박규. 관군들도 어사인 박규를 보호하며, 산적들과 싸우지만 하나 둘씩 쓰러져간다.
숫적으로 밀리기 시작하는 박규. 결국 무차별로 휘둘러대는 칼끝이 박규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다.
혼란한 틈을 이용해 말 머리를 돌려 도망치려는 윌리엄, 도망가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는데,
부상을 당한 박규가 피를 흘리며 힘겹게 대적하고 있다.
순간 윌리엄의 눈에 박규를 뒤에서 공격하려는 누군가의 모습이 포착되고, 말 머리를 돌려 박규에게 달려가는 윌리엄.
윌리엄 : (다급하게) 박규, 이리로 넘어와.
뒤에서 칼을 꽂으려는 찰라, 박규, 자기의 말을 버리고 윌리엄의 말로 넘어간다.
박규가 쫓아오는 놈들을 처리하는 동안, 정신없이 말을 모는 윌리엄.
산적 일당이 떠나가는 박규와 윌리엄을 쫓기 시작한다.
#36. 산 일각 - 오후
도망치는 윌리엄과 박규를 태운 말. 쫓아오는 산적들의 말들.
박규는 피를 뚝뚝 흘리며 윌리엄의 등에 몸을 기대고 있다.
윌리엄은 박규를 태운 채 달리면서 뒤를 힐끔 보면, 여전히 뒤를 쫓아오는 산적들.
그들의 추격에 더욱 속도를 내며 달리는 윌리엄.
#37. 숲속 일각 - 오후
기진맥진 상태의 박규를 서둘러 말에서 내리는 윌리엄. 박규를 숲속에 숨기고는 말의 엉덩이를 냅다 친다.
히히히! 앞발을 들더니 산 아래쪽으로 마구 달려가는 말.
수하(E) : 저쪽이다!
윌리엄은 박규와 함께 숲에 숨는다. 서둘러 지나가는 산적들의 말들. 말소리가 멀어지자, 숲에서 나와 주변을 살펴본다.
다들 돌아간 것을 확인하곤 수풀 속 박규를 꺼내, 피가 흐르는 부분을 천으로 지혈을 한다.
정신을 잃어가는 박규의 입에서 가는 신음이 흘러나오는데 난감한 윌리엄. 박규를 업고 더 깊은 숲속으로 몸을 숨기는데.
#38. 산 아래 - 오후
풀을 뜯어먹고 있는 윌리엄의 말.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산적들과 전치용.
수하 : 어찌할까요?
전치용 : 우리의 꼬리가 밟혀서는 안된다. 일단 여기서 철수하자.
돌아가는 전치용과 산적들.
이때 지나가는 소달구지. 소달구지 뒤에는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든 버진과 얀의 예쁜 모습.
그들 너머로 붉게 물들어가는 저녁놀.
#40. 산 속 - 저녁
가도 가도 끝이없는 산 속인 첩첩산중이다. 해도 점점 저물어간다.
윌리엄이 거친 숨소리를 내며, 박규를 내려놓는다. 땀범벅인 채 지친 윌리엄.
박규의 의식도 점점 희미해져가고 윌리엄은 불안하다.
주변을 둘러보는 윌리엄. 저 멀리 가느다란 연기가 한 줄기 피어오른다. 언덕으로 올라가보니, 숲속에 작은 집이 하나있다.
반가운 마음에 박규를 서둘러 업고는 연기가 나는 작은 집으로 향한다.
#41. 강진 도공의 집 앞 - 저녁
산 뒤로 노을이 지고 있고. 집앞에 자기가 늘어서있다. 도공의 집 분위기.
박규를 부축한 윌리엄, 걱정스런 얼굴로 집을 살피는데, 아무도 안 보인다.
박규를 한쪽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다가가는 윌리엄.
뭔가에 매우 집중한 한 남자의 뒷모습.
윌리엄은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는데 계속 피가 베어나오는 박규를 보고 안타까워하는 윌리엄.
삿갓을 쓰고 할 수 없이 용기를 내어 그에게 서서히 다가간다.
이때 고개를 휙 돌리는 남자, 이사평.
놀란 윌리엄 그대로 주저앉으면서 삿갓이 벗겨지는데 이사평은 이양인인 윌리엄의 모습에 놀란 눈을 하며 쳐다보는데.
윌리엄 : (서둘러) 나 나쁜 사람 아니야... 도깨비도 아니라... 나.. 나는... 어... 이양인이야. 이양인.
(밖을 가리키며) 아픈 사람이 있어.
이사평 : (갸웃) ??
이때, 밖에서 들리는 박규의 신음소리.
이사평은 서둘러 나가보는데 자상을 입은 곳을 부여잡고 쓰러져있는 박규.
#42. 강진 저잣거리 풍경 - 밤
(인서트)
적당히 한적하고, 거나하게 취한 취객들이 한 둘 지나가는...
#43. 강진 객주 - 밤
늦은 밤 객주에 도착한 얀과 버진. 주모가 달려 나오며 손님을 반긴다.
얀 : 방 있소?
주모 : 아이고 그러믄이라. 마침 방이 딱 하나 남아 있었는디.
버진, 한숨을 내쉬며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리려는데,
얀 : (주모에게 엽전 한 닢 툭 던지며) 잘 됐구려. 주시오.
버진, 당황하며 얀을 보는데, 얀은 버진의 표정따윈 아랑곳 않고 주모가 안내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는다.
주모 : (아래위로 훑어보며) 니는 왜 안 들어가나?
버진 : (약간 당황하여 쭈삣쭈삣 들어가는데)
주모 : 아이고, 계집애마냥 곱상하게도 생겼네! 저치는 누구랴? 둘이 형제라고 하기엔 하나도 안 닮았는디...
버진, 주모의 혼잣말에 저도 모르게 얼른 얀이 들어간 방으로 들어간다.
#44. 강진, 객주 방 안 -밤
버진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자, 윗옷을 벗던 얀이 화들짝 놀라고.
버진도 깜짝 놀라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나, 눈만 가린 채 방 안으로 슬금슬금 들어와 떠억하니 자리를 잡고 앉는다.
얀 : (어이없이 보며) 정말 끈질기군.
버진, 방바닥에 쪼그리고 딱 붙어 앉는다. 결코 나가지 않겠다는 포즈.
버진을 어이없다는 듯 보는 얀.
얀 : 바보인 건 알았지만 겁도 없군. 여긴 탐라도 아니고, 아는 사람 한명 없이, 이 방안엔 우리 둘 뿐인데.
버진 : (뻔뻔/패랭이 벗으며) 그래. 우리 둘 뿐이니께 외롭지 않코롬 나랑 같이 다니믄서 나 도움 받으면 좋을 것이메.
얀 : (어이없어서 보는데)
버진 : 일리암 어디쯤 있을까? 빨리 만나고 싶은디...
얀 : (냉정하게) 윌리엄을 만난 다음에는?
버진 : 만나믄... (딱히 생각나지 않아 당혹스러운)
얀 : (비웃으며) 탐라에서처럼 또 어디 동굴에 숨겨줄건가?
버진 : (발끈) 니 참말 왜 이러나? 윌리엄은 탐라서 나 만나서 행복하다구 했스메.
얀 : 연심에 눈이 멀어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사내의 말을 진짜로 믿다니... (피식)
귀양다리가 널 붕어붕어 하더니 다 그 이유가 있었구나.
버진 : (불쑥/항변하는) 거기서 왜 귀양다리 야그가 나오나?! 귀양다리는 나헌티 (멈칫/물끈 보고 싶은 맘이 솟고/버럭)
거렁청한 소리 말고 빨랑빨랑 잠이나 자라!! 내일도 갈 길이 머니까네!
얀을 등지고 휙 돌아눕는 버진.
얀, 우습다는 듯 입꼬리가 올라가는데 어느새 눈물 차오른 버진은 눈을 꼭 감아버린다.
#45. 강진, 이사평의 집 방 안 - 밤
여기저기 상처 난 몸으로 상의를 벗고 방에 누워 있는 박규.
의원인냥 진지한 표정으로 상처 난 박규의 몸에 쑥을 으깨어 바르고 천으로 처매는 이사평.
여전히 식은땀을 흘리며 의식이 없는 박규의 이마를 짚어본다.
불쑥,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박규를 보는 윌리엄을 빤히 보는 이사평.
윌리엄 : ??!!
이사평 : 차암, 야리꾸리하게도 생겼네.
윌리엄 : (민망하고)
이사평 : (이마에서 손을 떼고 응급처치를 마치며) 죽을 고비는 넘겼네. 지혈을 돕는 쑥과 무청을 개어 처매두었네만
자상은 쉬이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니, 정신이 들면 바로 의원으로 가 보는 것이 좋을 걸세.
윌리엄 : (다행인데) 고...맙수다.
이사평 : (다시 윌리엄을 뚫어지게 바라보는데) ...!
윌리엄 : (애써 안심시키려는데) 우리 나쁜 사람 아니우다. 나는 배 타고 나가사키 가다가 탐라에 표류된 거고,
박규는 나랑 한양으로 가는 거였는데... 나쁜 놈들이 나타나서...
이사평 : (말 끊으며) 이양인.
윌리엄 : (당황) ?
이사평 : (차분히) 일본에서 돌아온 동료 도공들을 통해 자네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말은 일찍이 들은 적이 있지.
이런 산중에서 누렁머리 이양인을 만날 줄이야.
윌리엄 : (애써 안도의 미소)
이사평 : 일단 이이가 깨어날 때까지는 이곳에 머무르면서 한숨 돌리게. 먼 길을 오느라 자네도 지친 듯 싶으니.
(일어나 홀연히 밖으로 나가다 말고 의문에 차 돌아서서) 그런데 조선말은?
윌리엄 : 아, 그건... (약간 애교) 쪼메 긴데...
이사평 : (손을 들고 끊으며) 됐네. (문을 닫고 나간다)
윌리엄,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는 박규의 이마를 이사평을 따라하듯 한번 짚어본다.
그제서야 윌리엄 방 안을 찬찬히 둘러보는데. 방 안을 가득 채운 도자기들.
윌리엄 : (도자기를 하나 들고/ Eng) This must be the Arita Potteries. 이건...아리타 도자기 같은데.
(더 유심히 보다가/ Eng) You can only get Arita potteries from Nagasaki... But how can there be so many
of them here? 나가사키에나 가야 구할 수 있는 아리타 도자기가...왜 이곳에 이렇게 많이 있는 거지?
이사평이 나간 방문을 의미심장한 얼굴로 휙 돌아보는 윌리엄.
#46. 이사평 집 가마 앞 - 밤
가마 속의 불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이사평의 얼굴. 고독한 장인의 포스.
한쪽에 가마에서 구워져나온 도자기들이 놓여져있다. 하나하나 신중한 눈빛으로 살피는 이사평.
그 모습을 뒤쪽에서 지켜보던 윌리엄. 천천히 다가가려는데.
이사평, 매섭게 들고 있던 도자기를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허걱, 놀라는 윌리엄.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바닥에 일렬로 늘어 있는 도자기들을 기다란 막대로 쳐 하나씩 다 깨어 부수는 이사평.
윌리엄 : 오, 로드!! (말리며) 하지 맙서!
이사평, 놀라서 행동을 흠칫 멈추나
곧 윌리엄을 무서운 힘으로 밀어내고 다시 도자기를 부수기 시작한다. 장인의 포스가 활활 타오른다.
윌리엄 도자기 앞으로 가서 몸으로 도자기를 막아서며 버티고 섰다.
윌리엄 : 이 귀한 자기에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이사평 : (윌리엄과 도자기를 번갈아보며 갸웃) 자네... 자기를 볼 줄 아는가?
윌리엄 : (포스에 눌려) 조콤...
이사평 : 그렇다면 이것들은 깨는 시간조차 아까운 부개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봐야 할 터인데...
아직 영근 눈은 아니구만.
윌리엄 : ...어르신은...누구시우꽈?
이사평 : 바람 같은 부질없는 인생... 이름은 알아서 무엇 하나?
이사평, 고독한 아우라를 내품으며 그대로 자리를 떠난다. 범접할 수 없는 이사평의 포스에 넋을 잃고 바라보는 윌리엄.
윌리엄, 이사평이 내팽긴 도자기들을 살피다, 한편에 놓인 붓을 발견한다.
이사평의 다른 자기들을 흉내내 그림을 그려 넣는 윌리엄.
이사평이 멀리서 그 모습을 심상치 않은 눈길로 지켜보는데...
#47. 강진, 객주 전경- 새벽
멀리 미명이 서서히 밝아오는.
#48. 강진, 객주 방 - 새벽
버진의 잠든 모습이 보이고, 누워 있던 얀 조심스럽게 일어난다. 버진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짐을 챙겨 일어나는 얀.
자신의 옷을 깔고 자는 버진에게서 옷을 빼내려하나 여의치 않자 포기한다.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가다가 문득 자고 있는 버진을 한번 돌아보곤 가는 얀.
#49. 강진, 길 일각 - 새벽
아직은 어두운 길거리를 부지런히 걸어가는 얀. 그때, 맞은편으로 걸어오는 관군 두 명.
얀, 애써 냉정을 유지하며 관군을 스쳐 지나가려 하는데, 지나가던 관군들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며 얀을 돌아본다.
관군1 : 어이, 거기 잠깐 멈춰 서 보쇼.
얀 : (못들은 척 그냥 가려는데)
관군1 : 거기, 그짝 말이요.
얀 : (망했다는 표정으로 멈춰서나 돌아보면서 표정관리) 나 말이요?
관군2 : 그려. 그럼 여기 그짝 말고 또 누가 있다고 그러요?
관군1 : (수상쩍은 표정으로 얀에게 다가오며) 어딜 가길래 부르는 소리도 못 듣고 그리 급히 가시나?
얀 : (어색하게 웃으며) 포구에서 첫배를 타려고 가는 중이오. 무슨 일이 십니까?
관군2 : 요즘 마을이 뒤숭숭해서 말이요. 해남에서 강진으로 넘어오는 산속 에서 산적패들이 설쳐대는 통에
한양가던 어사나리가 행방불명되었질 않나...그 바람에 어사 나리가 데리고 가던 죄인들도 죽어뿔고...
얀 : (깜짝 놀라) 죽다니! 이양인이 죽었단 말입니까?
얀, 말을 내뱉곤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지만 이미 늦었다. 관군 수상쩍게 얀을 바라본다.
관군1 : 이이가 왜 이렇게 놀래?
관군2 : 잠깐... 내가 이양인 얘기는 하지도 않았는데, 이양인이 있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얀 : (애써 침착히) 탐라에서 잡힌 이양인이 한양으로 압송되고 있다는 소문은 이 강진바닥에 파다하던데 그것도 모르겠습니까?
(가려 하며) 난 갈 길이 급해서 이만...
관군1 : (도리깨로 막으며) 뭔가 깨운허질 못허네. 호패 조꼼 보여주셔.
얀, 어쩔 수없이 품에서 호패를 뒤지는데 호패가 없다. 당황하는 얀. 옷춤을 이리저리 뒤적이나 호패는 나오지 않고...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얀.
인서트) 버진이 깔고 있던 얀의 옷. (이옷에 호패가 들어있다)
일그러지는 얀의 얼굴. 관군들은 그런 얀을 수상히 보며 서로 눈짓을 교환한다.
관군1 : 호패도 없이 이 식전댓바람부터 다니는 건 쪼까 수상한 일인디...
얀 : 분명 있었는데... 호패 있습니다. 잠시만... (계속 찾는)
관군2 : 뭐가 잠시만이여? 관에 가서 얘기하자고!
관군들, 양 옆으로 얀의 뒷덜미를 잡아세우는데,
버진(E) : 오라버니!
관군들과 얀, 돌아보면 호패를 신나게 흔들고 있는 버진이 보인다. 버진은 남장을 벗고 다시 예전 모습이다.
버진 : 오라버니두 참 칠칠맞긴. 아무리 새벽장이 급해도 그렇지 이 호패를 놓고 댕기면 어쩔 거라.
관군, 버진에게 다가와서 호패를 확인한다. 얀의 얼굴과 버진의 얼굴 번갈아 바라보며,
관군2 : (버진에게) 네 오라비냐?
버진 : 네. 저의 오라비가 원래 평소에도 저리 정신머리 없이 뭘 잘 흘려 쌌고 다니지라.
얀 : (버진 째려보지만 참고)
버진 : (얀을 향해 손짓하며, 눈치 보면서 한양 말투로) 오라버니, 일루 와라. 어멍... (멈칫) 어머니가 오라버니 부르네.
관군1 : (갸우뚱) 근디 어째 동생 말투가 조까 이상한디... (버진 옷차림을 한번 쓱 살피는데)
버진 : (헉, 서둘러) 아침이라 입이 아직 안 풀려서 그러...지라. (입을 오물 오물 움직이며) 날 추운디 찬 바닥에서 자서 그런가..
(애교 있게) 나장어르신들, 아침댓바람부터 수고가 많서라...
얀 : (제법인데 싶고)
관군1 : (버진의 애교에 마음 누그러진) 허긴...날이 하루가 다르게 추워지네. 우리들 순라 돌기만 힘들게 서리.
관군2 : 그럼 어여들 집에 들어가슈. 차라리 날 밝으면 가더라고. 어차피 포구 열리려면 한참 멀었으니.
버진 : 예예, 알겠어라.
얀의 팔짱을 끼고 거의 끌고 가다시피 하며 다시 객주 쪽으로 가는 버진.
#50. 강진, 길 일각 - 새벽
관군들 사라지자마자 버진, 얀에게 꼈던 팔짱을 확 빼고 얀을 본다.
버진 : 귀양다리가 사라졌다는 건 무신 소리멘? 또 죽은 사람은 누구고? (허거걱...) 설마 일리암이...
얀 : (재빨리 말 끊고) 윌리엄은 아니다. 아마 제사장 수하들이겠지...
버진 : 글험 일리암은 지금 어디 있는거멘?
얀 : 단순한 산적떼들로 위장을 했던 것이군. 이곳으로 오려면 어제 우리가 넘어왔던 산뿐이다.
숲속 어딘가에 아직까지 숨어있을지 모른다.
버진 : 일리암.... 별 일 없어야 할텐디..
걱정으로 가득한 버진의 얼굴. 얀과 버진, 서둘러 길로 재촉한다.
#51. 이사평네 집 안 - 낮
희미하게 눈을 뜨는 박규. 흐릿한 시야로 보이는 윌리엄의 금발머리.
마침내 시야가 또렷해지자 옆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는 윌리엄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키려는 박규.
그러나 상처가 쓰라려 자기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내며 상체를 움켜잡는데,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이사평이 들어온다.
박규 : (놀라며) 뉘시요? (두리번) 여긴 어디요?
이사평, 다 알고 있다는 듯 웃으면서 박규의 상처자리를 꾹꾹 눌러본다.
박규, 외마디 비명을 내며, 이사람 뭐야 라는 눈길로 쳐다보는데.
이사평 : 소리 지를 힘이 있는 거 보니 이제 정신을 차렸구만. (마패를 꺼내 스윽 내밀며) 치료하다 그쪽 품에서 이걸 발견했소만..
박규 : (화들짝 놀라 마패를 가로채며) 당신 말고 본 자가 또 있는가?
이사평 : (고개 젓는) 그럴 리가...난 속세를 떠나 홀로 살고 있는 몸이라오.
(박규 지그시 바라보다) 그쪽도 뭔가 곡절이 있는 듯 싶으니, 그건 내 못 본 척 해드리지.
박규 : (이 사람 정말 뭐야 싶은데) ?
이사평 : (은근하게) 내 집에서 이틀 꼬박 사경을 해맨 건 기억하시나?
박규 : (기억을 더듬으면...)
Flash Back) #41. 박규가 산적 일당에게 당해 정신을 잃는 장면.
박규 : (윌리엄 바라보며) 그러면...
이사평 : (고개 끄덕) 저이가 정신 잃은 그쪽을 들쳐 없고 여기까지 왔소이다.
출혈이 심해서 조금만 더 늦었어도 생명이 위험했을 거요.
박규, 짠한 마음으로 윌리엄 바라보는데, 윌리엄이 마침 잠에서 깨어 스윽 눈을 뜬다.
윌리엄과 눈이 딱 마주친 박규.
윌리엄 : (눈비비며/반갑게) 박규 깨어났구나.
박규 : (짠한 표정으로 조금은 어색하게) 네게 신세를 졌구나...
윌리엄 : (머쓱한 미소 지으며 어깨 으쓱)
박규 : (짠한 표정 수습하며) 차비를 서둘러야겠다.
윌리엄 : (무슨 소린가 박규 바라보며) ?
박규 : 벌써 이틀을 지체했다. 한양까지는 먼 길. 어서 출발하도록 하자.
윌리엄 : 박규, 하지만 지금 너 몸으론 걸을 수 없어. 쉬어야 해.
박규 : 괜찮다. 나는 박규니라. 이깟 상처 따위...
박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다 비틀한다.
이사평, 그런 박규의 모습을 날카로이 바라보더니 한마디 던진다.
이사평 : 젊은 선비, 혈기가 대단하시군. 그러나 솟구쳐 오르는 것만이 불은 아니오. 타오르는 불의 한가운데는
오히려 차가운 법이지. 자신의 냉정을 유지하며 주변을 뜨겁게 만드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혈기 아니겠는가.
박규, 갑작스러운 이사평의 말에 그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본다.
이사평 : 내 수십 년간 자기를 구워 오면서 유약이 덜 발리거나 모양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
결국 흉하게 깨어져 나가는 자기들을 수천 차례 보았소. 선비의 몸 역시 충분히 치료되지 않으면 지금은 모르더라도
결국 큰 탈이 날 테니, (윌리엄 보며) 저 나그네 말대로 하시게.
박규, 이사평의 거창한 말을 들으며, 도대체 저 사람은 뭐하는 사람인가 싶은데...
윌리엄 : 그래, 박규. 몸이 괜찮아지기도 전에 나갔다가는 또 그 수상한 놈들 한테 변이라도...
박규 : (끊으며) 됐다. (도공 보며) 그럼 실례를 무릅쓰고 잠시 머물겠소. 내 사례는 후에 톡톡히 하겠소이다.
이사평 : 사례라니, 당치 않은 소리. 완전히 다른 성질의 흙이라도 가마 안에 들어가면 한데 엉겨 붙어
하나의 도자기로 빚어내는데, 이 조선 땅에 함께 살며 도움이 필요할 때 상부상조하는 것은
우리 조선인의 흐르는 피 속에 애초부터 박혀 있는 본성이거늘. (손 휘휘 저으며) 그런 소린 하지 마시오.
박규는 뭔가 말도 안 된다고 느끼는데, 윌리엄은 뭔지 모르지만 멋져서, 고개 끄덕이며 열심히 듣고 있다.
이사평 : (걱정스런 표정으로) 헌데 의원에 가보긴 해야 할 터인데...그대로 있다간 환부가 덧날지도 모르오.
박규 : ... (곤란한 표정)
이사평 : (박규와 윌리엄 번갈아 보더니 고개 끄덕) 사연 하나 없는 생이 어디 있겠나. 의원엔 내가 다녀오겠소. 허...그런데...
(도자기를 하나 들고 나가며 비장하게) 비록 함부로 저잣거리에 내놓을 물건은 아니지만,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이니...
이사평의 결연한 표정에 박규와 윌리엄도 왠지 숙연해지는데...
#52. 강진 저잣거리 의원 앞 - 낮
의원을 나오는 이사평. 두둑한 약을 들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떠난다.
이사평이 사라지면, 그 뒤를 이어 약방 안으로 들어가는 전치용의 모습.
#53. 강진 의원 안 - 낮
도자기를 살피며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의원. 앞에 삿갓을 쓴 전치용이 서있다.
의원이 잔뜩 주눅 든 얼굴로 상대방을 조심스레 쳐다보면...
의원 : 어찌 오셨소?
전치용 : 어제 오늘 자상에 필요한 약을 사간 자가 있었느냐?
의원 : (아래위로 살피며) 댁은 뉘시오?
전치용 : 한양 감찰사에서 나왔느니라.
의원 : (주눅) 방금 전에 약을 사간 사람이 있었는데요...
전치용 : (눈을 빛내며) 그 자가 누구냐?
의원 : (도자기를 가리킨다)
#54. 강진 도공의 집+가마 앞 - 낮
도자기가 구워지고 있는 가마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 윌리엄. 한쪽에 기대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박규.
윌리엄 : (가마 가리키며) 박규는 이거 본 적 있어? 이게 가마라는 거야. 바로 여기서 이 아름다운 도자기들이 나오는 거라구.
박규 : (물끄러미 윌리엄을 바라보다가) ...왜 가지 않았지?
윌리엄 : (여전히 신난 상태로 돌아보면) ?
박규 : 넌 나를 내버려두고 도망갈 수 있었지 않느냐?
윌리엄 : (생긋 웃으며) 깨어났을 때 내가 없길 바랬어?
박규 : ...넌 나에 대한 원망이 없느냐? 널 강제로 한양으로 데려가는데?
윌리엄 : 나 데려가는 건 박규 일이잖아. 그걸로 널 원망하진 않아. 내가 만약 너를 원망한다면... 그건 다른 일 때문이겠지...
박규 : 아직도 버진이를 생각하고 있는 게냐?
윌리엄, 대답없이 빈 목걸이 자리를 손으로 더듬으며 버진을 생각한다. 그런 윌리엄을 바라보는 박규.
#55. 도공 집 가는 길 - 낮
산 속 험한 길을 굽이굽이 잘도 올라가는 이사평.
어제 산적이 지나갔던 길 주위를 살피며 힘겹게 산 곳곳을 뒤지는 얀과 버진.
버진 : (갑자기 무언가를 찾은 듯) 얀!
얀, 버진이 가리키는 쪽 보면 저 위쪽으로 집 한 채가 보인다.
얀 : (고개 끄덕이는) 가보자!
버진, 집이 있는 쪽을 향해 올라가려는데 갑자기 확 낚아채며 버진을 수풀 속으로 밀어 넣는 얀.
버진 : 니 왜 이러는거라?
하는데, 버진의 입을 손으로 막는 얀. 얀이 버진에게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하곤, 눈으로 아래를 가리키는데...
빠른 속도로 올라오고 있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린다.
이내 버진과 얀이 숨은 수풀 앞으로 수많은 다리가 쓱쓱 지나가고, 버진의 눈은 놀라 커져만 가는데...
#56. 도공의 집 바로 근처 - 낮
도공의 집을 바라보는 삿갓 쓴 전치용의 매와 같이 날카로운 눈빛.
전치용의 손짓에 따라 도공의 집을 에워싸는 수하들. 마치 진을 짜듯 체계적으로 도공의 집을 둘러싼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전치용. 칼을 빼어 들고 호기롭게 도공의 집으로 다가간다.
동시에 약봉지를 든 이사평이 집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 보이고.
#57. 도공 집 가는 길 수풀 - 낮
숨어서 지켜보는 버진과 얀은 안절부절 못하고.
버진 : 안에 참말로 귀양다리랑 일리암이 있을까?
얀 : (당혹스럽고) 그렇지 않으면 저들이 어찌 외딴집까지 찾아와 저렇게 둘러싸고 있겠느냐...
버진 : 그라믄 저들이 그 산적떼들로 위장햇엇다는 자들이나? 그람 일리암 하고 귀양다리가 클라는 거 아니멘?
얀 : (그저 당혹스런 얼굴이고)
버진 : (결심하는) 안 되겠나네. 나가 알려줘야지.
얀 : (놀란) 뭐??
자신을 잡고 있던 얀을 뿌리치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버진. 그런 버진을 다시 잡으려고 역시 수풀에서 나오는 얀.
도공의 집을 향해 달려가는 버진의 긴박한 얼굴에서.
-9부 엔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