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계절
2023년 12월 3일 사 64:3-9
1. 기다림
(1) 고도를 기다리며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라는 희곡이 있습니다. 프랑스 작가 사무엘 베켓(Samuel Beckett)의 2막짜리 연극 대본입니다. 1953년 파리에서 첫 공연의 성공으로 반연극(反演劇, anti-théâtre), 혹은 부조리연극의 대표작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현대 전위극의 고전으로서 세계 각국에서 공연되었으며, l969년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연극 내용은 이렇습니다.
해질 무렵, 어딘지도 모르는 시골길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사람의 떠돌이가 ‘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부질없는 대사와 동작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냅니다. 거기에 노예 럭키를 데리고 포조가 등장하여 역시 두서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떠나는데, 심부름하는 양치기 소년이 와서 “고도 씨는 오늘 오지 않고 내일 온다.”고 알려 줍니다. 1막은 끝나고 다음날인 2막에서도 거의 같은 내용이 되풀이됩니다. 관객은 고도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갈수록 알 수 없게 되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기다리고, 그렇게 기다리는 가운데 막이 내려갑니다.
젊은 시절에 이 연극을 보고서 참 황당했던 기억이 납니다. 뭔 이야기가 전개될 줄 알았는데, 아무런 내용의 전개가 없이, 심지어 그 기다리는 고도라는 사람이 누군지조차 알지 못한 채 연극이 끝나자 정말 어이가 없었습니다. 뭔 놈의 연극이 1막, 2막 동안 기다리기만 하다 끝나나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연극은 제 평생에 도무지 잊히지 않는 연극입니다.
(2) 기다리는 우리
현대인들은, 아니 우리는 무언가를 기다리며 삽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합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우리 청년들 가운데도 있습니다. 행복한 결혼, 단란한 가정을 꿈꾸고 기다리기도 하지요. 저는 주변에 과거 잘 나가던 사업을 생각하며 재기를 꿈꾸는 분들을 보곤 합니다. 지금은 비록 실업자 처지지만, 그러나 조만간 재기하리라 와신상담하는 분들입니다. 이들은 자기 사업을 일으키는 그날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어떤 분들은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이런 분들은 약삭빠르고 변칙적인 방법으로 처세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제대로 대우받는 사회, 불의한 방법으로 치부하는 일이 비난받을 뿐 아니라,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사회를 꿈꾸며,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런 기다림이 그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모두 현실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에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면서 달아나곤 합니다. 김동인의 소설 ‘무지개’에 나오는 것처럼, 소년이 무지개를 찾아 동산에 오르면 무지개는 산 너머로 도망가 있고, 또 그 산으로 올라가면 무지개는 그 다음 산 너머에 있고 하는 식으로 무지개는 잡히지 않습니다. 무지개를 좇는 가운데 소년은 늙어갑니다. 물론 우리의 소망과 기다림이 모두 무지개를 잡는 것같이 허황된 것은 아니지요. 다만 우리가 소망하고 기다리는 바가 모두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란 점, 또한 어떤 것들은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란 점을 이 소설은 일러주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2. 이사야서 64:3-9
오늘 본문은 이사야서 63장부터 이어지는 긴 기도의 일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혼자 하는 기도가 아니라 공동체로 하는 기도이고, 그 내용이 하나님에게 하소연하는 탄식조로 되어있기에 공동체 애가(community lament)라고 합니다. 정확한 역사적 배경을 밝혀내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의 성전이 훼손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사 64:11입니다.
우리의 조상이 주님을 찬송하던 성전, 우리의 거룩하고 영광스럽던 성전이 불에 탔고,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던 곳들이 모두 황폐해졌습니다.
이런 내용으로 보아 예루살렘 성전이 약탈당한 바빌론 침략 후의 일이 아닌가 짐작합니다. 어쨌든 이렇게 불행한 현실에서 이들은 공동으로 하나님께 탄식의 기도를 드립니다.
(1) 주님의 강림
이 기도에서 이들은 주님의 강림을 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의 구절 1-2절입니다.
주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내려오시면, 산들이 주님 앞에서 떨 것입니다. 마치 불이 섶을 사르듯, 불이 물을 끓이듯 할 것입니다. 주님의 대적들에게 주님의 이름을 알게 하시고, 이방 나라들이 주님 앞에서 떨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 주님,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이 땅으로 강림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왜 그럽니까? 상황이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개입 밖에는 없기에 하나님의 개입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내려오시면, 산들이 주님 앞에서 떨 것입니다.”
(2) 죄의 고백
또한 이 기도에는 진실한 죄의 고백이 있습니다. 5절 하반절입니다.
… 그러나 주님, 보십시오. 주님께서 진노하신 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찌 구원을 받겠습니까?”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불행의 원인이 바로 우리의 범죄에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중요합니다. 자기 불행의 원인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이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구원의 길에서, 회복의 길에서 멀리 있습니다. 좀처럼 구원받기 힘듭니다.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정직하게 자신의 범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죄의 고백이 구원의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이사야예언자는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한 후에 간절한 마음으로, 진실한 고백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8-9절입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님은 우리를 빚으신 토기장이이십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이 손수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주님, 진노를 거두어 주십시오. 우리의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말아주십시오. 주님, 보십시오. 우리는 다 주님의 백성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기에 앞서 우리 죄를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고하는 것이 항상 간구보다 앞에 위치해야 합니다. 이것은 기도문을 작성하는 순서에도 해당됩니다만, 그것보다도 하나님 앞에 서는 우리의 마음 자세, 태도에 관한 문제입니다. 간구에 앞서 죄를 고백하는 것, 매우 중요합니다.
3. 기다림의 계절
(1) 대림절
오늘부터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대림절은 말 그대로 기다림의 계절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고대하는 절기이지요. 왜 기다림의 계절이 교회력에 있을까요? 왜 기다림의 계절로부터 교회력은 시작될까요?
오늘 우리 사는 세상에 참 슬프고 안타까운 소식들이 많습니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코로나 3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코로나로 죽은 사람보다 자살한 사람이 더 많답니다. 이 3년간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가 모두 32,156명인데, 같은 기간 자살자는 39,453명이었습니다. 해마다 13,000명 이상씩 자살하고 있고, 이는 한 달에 1,000명 이상씩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기가 막힌 노릇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코로나를 그렇게 무서워했지요. 마스크를 쓰고, 손을 씻고, 소독을 하고, 집합금지 명령을 내리고 그 난리를 치면서 경계했지요. 그래도 몸이 약한 이들은 코로나에 걸려 유명을 달리했지요. 어제 사망자가 몇 명이라고 매일 매일 보도하면서 난리를 쳤지요. 그런데 실상은 조용히, 아무 소리 없이, 뉴스에도 보도되지 않은 채 스스로 생명을 끊은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겁니다. 우리나라 얘기입니다. 우리 사는 세상이 참 거칠지요. 거칠어도 너무 거칩니다. 어쩌다 이런 세상이 되었을까요?
답이 없는 전쟁의 소식이 우크라이나에서 들리더니 이제는 팔레스타인에서 들리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항복을 요구하는데, 누구도 항복할 기미는 안 보이고, 그 가운데 힘없는 사람들만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정치하는 이들은 민족의 번영과 발전이라는 장기적인 비전보다는 그때그때 필요한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당리당략에 따라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주택정책, 금융정책, 대북정책에 이르기까지 사회 곳곳에서 이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여야는 머리를 맞대고 그야말로 민초들의 삶, 민생을 의논할 수는 없을까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전쟁을 멈출 수 있을까요? 중동에는 평화가 정착될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의 10대, 20대, 30대에서는 사망원인의 1위가 자살이라는데, 젊은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 대한민국을 이룰 수는 없을까요? 정말로 어느 것 하나 뾰족한 대책이 보이지 않습니다. 도무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습니다.
(2) 임마누엘
그런데, 아니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다립니다. 그 때에는 우리가 상상도 못한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야말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도저히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은 때에도 기다리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래서 이 기간의 구호는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어서 오십시오!’라는 간절한 부르짖음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임마누엘은 바빌론제국의 침략 하에 성전을 잃어버리고 비참한 현실 가운데 울부짖었던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외침이었습니다. 임마누엘은 또한 1세기 유대 땅에 살던 가난한 이들의 간절한 소망의 외침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이 임마누엘의 부르짖음은 아직도 어둠 가운데 있는 이 땅에 사는 우리가 드려야 할 간절한 기도입니다. 이 기다림의 계절에 우리 모두 간절히 기도합시다. “곧 오소서. 임마누엘! 곧 오소서. 임마누엘!” 대림절 첫째주일, 하나님의 은총이 성도들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