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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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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예술인 -남농선생-
"벌써 왔어? 지금 가믄 좀 빠르다 싶은디…"
9시에 맞추어 오라는 말을 기억하고 좀 이르다 싶게 신발 가게로 갔다.
재래시장과 가까운 그 신발 가게는 아침에도 가계 앞을 지나가는 유동 인구가 많았다.
시끄러운 장사치들의 바쁜 움직임이 보였다.
"여 앉아 있으믄 오만 생각을 다 하제.
젊은 날의... 그 막 나가던 시절의 생각도 나고,..
그라고 이놈의 신발 장사가 아침 장사는 아니여....
이상하게 아침에는 신발 사러 오는 사람이 없어.
그러다 해 떨어지고 나믄 손님이 들기 시작 허는디
그래도 되든 안 되든 장사는 점빵 문을 열어 놔야 헌께 할 수 없이 열어 놓기는 허제."
그러면서 고무신 한 켤레를 꺼내어 비닐 봉투에 담았다.
"영감이 내가 해마다 고무신을 갇다 줘 싼께
그래도 나를 많이 이뻐라 허는디 작년 여름에 깜빡 잊고 안 갔드만
이걸 살라고 사람을 보냈드만…
뜬금없이 왠 젊은이가 와가꼬 '허 화백께서 기차를 여서 사 오랍디다'
이래서 우리 마누라가 뭔소리 인지 몰라 가꼬 한참을 헤매다가
내가 들어온께 마누라가 그라드만...
'당신 뭔 기차표도 팔았소?'....
근디 그것이 아니고 이 고무신이 '기차표' 고무신이거든…
그랑께 그 소리는 고무신 한 켤레 달라는 소리가 아니고 뭣 이겄어?
또 사이즈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은께… 영감이 발이 커...
그래서 내가 부랴부랴 또 갇다 주고 오고 그랬제…
영감이 말은 안 해도 올해도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꺼그만…."
쌍식이 형님…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이분의 과거지사를 듣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이곳에 와서 이런 분을 알았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참으로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택시 한대가 가게 앞에 섰다.
"여그서 좀 멀어. 택시 타고 가야 할 것인께 빨리 가드라고."
택시 기사는 쌍식이 형님과 잘 아는 사람 같았다. 그들의 대화로 그걸 알 수 있었다.
"해장부터 뭔일이요?"
"응. 손님이 와가꼬 그란다. 허 화백 집으로 가자이."
"성님도 그림 받으로 가요?"
"아 염병하고…
내가 언제 그런 거 좋아 한거 봤냐?
이 손님이 거를 가야 한께 지금 내가 모시고 안가냐.
싸게 가자.
그라고 집 앞에서 쫌만 기다려라이
나는 가서 이야기만 하고 다시 가게로 와야 헌께 쪼메만 기다리고 있그라
그래서 내가 니를 안 불렀냐."
"아따 성님 그라지 말고 나도 그림 한 점 얻어 주쇼. 딴 놈들은 더러 얻어 주었다 그라드만 …"
그 순간 사정없이 운전사의 뒤통수를 손으로 쳤다.
보통 장난삼아 때리는 정도가 아닌 핸들이 휘청 거릴 정도로 뒤통수를 쳤다.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던 내가 갑자기 당황스러울 정도 이었다.
"싸가지 없는 새끼야 이 좆만한 새끼가 인자 많이 컸네.
니가 언제 부터 나한테 이거 주라 저거 주라 지랄이야 이 씹할 놈이.... "
쌍식이 형님이 살짝 내 눈치를 봤다.
"손님 있고 한께 긴말 안할란다. 싸게 차나 몰아라이..."
"아따 성님은 그림 한 점 얻어 주라 그랬다고 아침부터 대가리를 쎄려브요.
내가 성님을 20년 모시고 살아도 그놈의 성깔은 아직도 여전 하그만."
얻어맞은 택시 기사는 그렇게 기분 나빠 하지 않는 표정이다.
때린 쌍식이 형님도 그렇게 미안해하는 표정이 없다.
'쌍식이 형님을 20년 모시고 살았다'는 택시기사의 말에 쌍식이 형님의 전력(前歷)을 말하는 듯 했다.
뭔가 야릇한 상상이 이어 질려는 걸 쌍식이 형님이 말을 막았다.
"아그야 손님 있응께 씰데 없는 소리 말어라이."
그리고 별 말이 없이 기와집으로 된 한옥 앞에 차가 멈추어 섰다.
"내려. 여그여. 아야 쫌만 기다리고 있어라이.
내가 이것만 건네주고 나는 금방 나올랑께.
시동 끄고 연초나 한대 빨고 있어라."
"빨리 갔다 오기나 허쇼.
그라고 성님- 나올 때 쓰레기통 뒤져서 그림 나오믄 한 장 뚱쳐 가꼬 오쇼이."
“알았다.“
참 낯짝도 좋은 운전기사다.
그렇게 맞고도 그림에 대한 미련이 있는 모양이다.
어찌 보면 남농 허건 선생의 작품에 대한 비싼 대가를 말하는 듯 했다.
"형님 그렇게 쎄게 때려도 됩니까? 나이도 제법 드신 분 같던데…"
"저것들 내 밥이여.
인자 낫살 쳐 묵었다고 같이 야그도 하고 그란디…
옛날 같으믄 내 옆 에서 쌩까고 그라지는 않제.
저놈도 삼청 교육대 끌려 갈라는 거 내가 빼 줬는디 인자 정신 차려가꼬 도라꾸라도 끌고 다니네..
그래도 저놈은 다행이여 늦게 라도 정신 차려서…."
마치 남 이야기 하듯 살짝 자기 이야기를 섞어 넣어 이야기 했다.
"들어 가믄 영감한테는 그냥 목례만 하고 집안 구경함서 사진도 찍고 해.
원래 이집이 살림살이를 하는 영감이 따로 있응께 내가 그 사람 한티 잘 이야기 해 줄랑께.
지금쯤 마당에서 난(蘭)을 치고 있을 시간인께 옆에 가서 그냥 인사만 하믄 될 것 이그만.
영감이 한쪽 다리가 불편해서 시원스럽게 움직이시는 그런 분이 아닌께.
그라고 나는 또 가게 가봐야 헌께 일 다 보고 가게로 와.
그 사이에 우석이 한테 연락해서 그림을 가게로 가져 오라고 그랄랑께. 뭔 소린인지 알겄어?"
대문을 들어가기 전에 내가 취해야 할 약간의 행동 지침을 이야기 하는듯 했다.
안으로 들어간 쌍식이 형님은 성큼성큼 비닐하우스 쪽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어르신-. 저 왔습니다."
크게 소리치듯 부르며 인기척을 해도 듣지 못한 듯
열심히 맨손으로 난초를 만지고 있는 노인이 있었다.
연로한 풍채와 넓은 등이 대가(大家) 다운 풍모가 보였다.
다시 한 번 큰소리로 쌍식이 형님이 그를 불러 본다.
"어르신 저 왔다고요-."
그 소리는 들었던지 그 풍채 좋은 노인은
천천히 몸을 돌려 쌍식이 형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한눈에 반갑다는 표정이다.
손을 들어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하더니 쌍식이 형님의 손을 덥석 잡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어르신 기차 가져 왔어라."
큰소리로 외치면서 비닐 봉투를 들어 보여 주었다.
연신 고개를 끄덕 이시고 눈길이 나에게 오자 쌍식이 형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진 찍는 흉내를 같이 섞어 가면서 역시 큰 소리로 나를 소개 했다
"서울에서 어르신 집을 사진 찍어 간다고 해서 내가 델꼬 왔응께
집 구경 시켜 주고 갈라고 그라요.
그라고 나는 먼저 갈랑께 어르신 몸 간수 잘 허고 계시쇼."
그 대가는 손을 양옆으로 흔들며 차 마시는 흉내를 냈다.
아마 가지 말고 차라도 한잔하고 가라는 나이 드신 분의 만류 같았다.
그리고 몸을 비틀 거리며 난으로 가득한 비닐하우스 밖으로 나가실 그런 형국 이였다.
"어르신. 저는 지금 가 봐야 한께 나중에 또 들릴 라요
. 담에 또 올건께 그냥 편히 쉬쇼
귀가 어둡다는 제언이 없었다면
아마 밖에서 듣는 사람은 싸우는 걸로 착각할 정도로
악을 바락바락 써 가면서 쌍식이 형님은 소리를 질렀다.
그때 밖에서 다른 나이 들어 보이는 사내가 들어 왔다.
쌍식이 형님을 보더니 대뜸 한마디 한다.
"어제 신발을 들어 보여서 자네 올줄 알았네.
오늘 안 오면 내가 연락할라고 했는디...
그래 잘 왔그만. 사실 자네가 준 고무신 여즉 많이 있어.
근디 이때 되믄 자네가 꼭 찾아와 줘서 그리워서 그러제.
그라고 이참에는 자네 오믄 주라고 그림을 몇 개 챙겨 놨응께 그거나 들고 가봐.
지금 어르신이 그걸 주고 싶어서 그런 모양인디 어제 내가 챙겨 놨응께...."
그리고는 그 집사격인 사내는 큰소리로 외쳤다
"형님 내가 어제 챙겨 놓은거 쌍식이 줄랍니다.
그냥 여서 난이나 계속 치고 계시쇼 '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연신 손으로 잘 가라고 손을 밑에서 위로 흔들어 주었다.
그사이 나는 깊게 목례를 하고 셋이서 그 비닐하우스를 나왔다.
전형적인 한국의 고풍스러운 한옥에 수많은 돌들이 집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인사해- ,성님 여기는 서울에서 온 잡지사 기자라고 하는디
이참에 기회가 되서 허 화백님 집하고 작품을 사진으로 찍어서 책에다 내준다 안하요.
사진 팍팍 찍게 하고 그라고 그림도 설명 좀 해주고 그라쇼.
나는 원체 이런 것에 관심이 없는 놈 아니요.
그라고 나는 또 가게 가 봐야 한께… 그라고 그림 줄거 있으믄 주쇼.
아침부터 그림 때문에 나한테 뒤통수 얻어터진 놈이 있는디 그놈 줄라요.
아 뭐해? 인사 드리랑께.."
일순간에 모든 상황을 설명 해 버렸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개 숙여 인사를 드렸다.
"월간지 문화춘추의 안 우상 입니다.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잘 오셨그만… 그라고 쌍식아 이 그림은 남들 주고 그럴 그림이 아닌디....
니 준다고 직접 챙겨 주신건디...."
"내가 언제 그런 거 좋아 합디까?
얻어 갈라믄 나는 수십장도 더 얻어 갔제.
그런거 욕심이 없은께 어르신이 나를 좋아 했을 것이요.
우째도 한 장은 줘야 할 놈이 있응께 줄라믄 빨리 주쇼. 그라고 기자 양반…잘 하고.."
잠시 들어갔다 나온 그 사내에게서 그림을 받아 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문을 나서는 쌍식이 형님을 보고 나는 천천히 카메라의 렌즈 뚜껑을 열어 목에 걸고
어찌 할 바를 몰라쌍식이 형님을 배웅하고 돌아온 사내의 처신만 바라고 서 있었다.
"더러 집 구경 하러 오는 사람이 많이 있는디.....
워낙에 보물 같은 집이 돼놔서 항상 내가동행을 하네.
여그 널브러져 있는 돌들은 우리 어르신이 전국을 이 잡듯 돌아다니면서 하나 둘씩 모아온
귀중한 수석들 이네. 수석 좀 아는가? "
"아니요. 전혀 문외한 입니다. 그저 비싸다는 소리만 …"
"기자 양반 이라고 해서 뭘 좀 알고 온줄 알았드만…
부끄럽게 생각할건 없네. 젊은 사람들이 모르는 건 당연 한 거니까…
내가 간단히 설명을 함세."
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선배들이 말하는 기자 수칙의 첫 번째는 '알아도 모른 척 하라' 라는것 아니던가.
또 실제로 수석은 아는 게 없었다.
그저 설명만 듣기로 했다.
"수석은 목숨수(壽)를 쓰는 수석(壽石)이 있고 물수(水)를 쓰는 수석(水石)이 있는디
수석(壽石)은 돌이 풍기는 내면적인 거 뭐랄까
돌이 살아 있는 것에 비유를 할 때 그렇게 부르고,
수석(水石)은 단지 외형적인걸 볼 때 그렇게 부른다네.
산수경석(山水景石)이 본래의 의미라고 할 수 있네,
사진을 찍을 때는 어떤걸 찍어도 좋네만
특히 돌에 문양이 있거나 산이나 호수를 축소해 놓은 형상이 좋은 돌이라고 생각 하고 찍으면
아마 큰 무리가 없을 거네.
주의 할 것은 돌에 흠이 있거나,
뒤로 넘어 질듯 하게 놓인 거나,
또는 삼각형인 거는 될 수 있으면 찍지 않는 게 좋네.
물론 이집에는 그런 돌이 많이 없긴 하지만…
그리고 수석은 사람이 들수 있을 정도가 가장 좋은 크기라고 말들 하지…
저기 대문 옆에 있는 저 돌은 좀 커 보이지?
저런 정도의 크기는 수석 이라고 하지 않고 정원석 이라고들 하는디
지금 저 앞에 있는 돌은 어르신께서 강원도 에서 모셔 오다 시피 해서 가져온 돌이네.
나중에 가서 보면 알겄지만 저 돌은 지금 어르신을 꼭 닮아서 보통은 자화석(自畵石象)이라고 하네…
나중에 나갈 때 한번 쳐다보면 아마 우리 어리신과 비슷하게 생겼을 거네.…
수석 사진을 다 찍거든 안으로 들어오시게.
그러면 또 그림 설명을 해 줌세.
더러 수석을 훔쳐가기도 하지만 기자 양반은 믿겠네.
여기가 한 이천 여점이 있지만 하나 같이 값비싼 돌들만 있다고 보면 되네….
그리고 진짜 좋은 거는 집안에 있응께 나중에 들어와서 찍어 가면 될 거고…"
말을 마친 그 사내는 또 다른 할일이 있다는 듯 안으로 들어 가 버렸다.
녹음기를 함께 가져 오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특별히 대담을 녹음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챙겨 오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다만 기억이 있을 때 메모장에 적는 방법밖에 없었다.
체면 불구하고 열심히 받아 적었다.
나중에 공부를 더 해야만 보고서 작성이 될 듯싶었다.
정말 대단했다. 가방 안에 가져온 필름은 세통뿐이다.
한통에 서른여섯 장을 찍을 수 있다. 결국 백여 장밖에 찍을 수가 없다.
한장 한장 신중하게 찍어야 한다.
엄청난 작품들을 보면서 기자로서의 신분을 잊고 정원의 구석구석을 열심히 찍었다.
마지막으로 대문 옆에 있는 자화석(自畵石像)을 보고 나서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좀 전에 뵈었던 그 대가의 얼굴이 그곳에도 있었다.
강원도 에서 모시고 왔다던 그 대가의 정성이 눈앞에 그림처럼 보이는 듯 했다.
필름이 부족 할 거라는 생각도 잊고 또 몇 컷을 그 자화석에 소모 해 버렸다.
안채를 들어 가지전에 비닐하우스 안을 쳐다봤다.
여전히 맨손으로 난을 만지는 대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사람이 풀을 만지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건 큰 대자연의 손길이 또 다른 작은 자연 세계를 어루만지고 있는 모습 이였다.
한 여름인 까닭에 안채의 문은 열려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 이여서 인지 많이 모인다는 식객들은 보이지 않았다.
섬돌 위에 그렇게 많은 신발이 놓여 있지는 않아서 쌍식이 형님이 말한 '예술가라고 자처 한다던
장사꾼들' 도 아직은 없는 듯 했다.
대청마루는 넓어 보였고 한눈에 봐도 비쌀 것 같은 고서화가 많이 진열 되어 있었다.
조용히 신발을 벗고 마루 위로 올라가 사진을 찍을 생각도 잊은 채
한동안 걸려 있는 멋스러운 동양화와 진열된 수석들을 쳐다봤다.
나는 동양화라는 그림이 사람에게 위압감을 줄 수 있다는 느낌을 처음 받았고
가끔 서양화 전시회 에서 봐 왔던 채색의 절묘한 조화나 기막힌 구도 같은 다소 이론적 이고
사실적인 형상만 봐 오다 마치 산꼭대기 정상에서 또는 하늘에서 내려다 본 듯한
자연을 접했을 때의 기분은 뭐라고 형용 할수 없는 심한 압박감마저 느끼게 했다.
우석이 라는 사람이 말했던
'붓이 춤을 춰쁠믄 걍 산이 살고 소나무가 흔들리고 바다가 출렁 인다고 보믄 되요' 했던
그 말이 실감 났다.
어떻게 검은 먹물 하나로 세상을 이렇게 멋있게 표현할 수 있는지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언젠가 중광 스님의 그림을 보고 무슨 의미를 애써 찾으려 했던 때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대자연의 세상이 이곳에 펼쳐져 있었다.
"왜? 뭔지 몰라도 좋아 보여? "
언제 왔는지 집사격인 그 사내가 뒤에서 인기척을 했다.
"예. 비싼 값에 팔려 나간단 이야기가 빈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생각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예끼 이 사람아. 그런 식으로 감상 했다면 곤란 하고…
그림을 볼 때는 큰 사람이 자기가 좋아 하는 자연의 한 부분을 큰 삽으로 퍼서 이곳에 옮겨 왔구나
생각하고 봐야 제대로 된 감상이 되는 거네.
그림은 남을 보여 주기 위해 그리는 게 아니라 자기만족 때문에 그린다고 보면 정확 하겠지.
남이 뭐라고 말하든 자기만 좋으면 그걸로 그만 일수도 있거든,
자기 손으로 그리지 못해서 남이 그린 그림을 보고 좋다고 한다면 그건 대리만족 이겠고…
우리 어르신도 남들은 아까워해도 당신 맘에 안 들면 그 자리에서 파기 시켜 버리니까….
그림 그리는걸 참관 하는 건 우리 어르신은 별 상관 하진 않으신 편인데 옆에서 아깝다느니
또는 그림에 대한 촌평을 하면 그건 아주 싫어하시네.
다행이 귀가 안 좋아서 그런 소리 저런 소리 듣지 않는 건 어쩌면
저 어르신을 위해 하늘이 그렇게 만들어 주셨는지도 모를 일이지."
갑자기 쌍식이 형님한테 뒤통수를 얻어맞은 택시 기사가 생각났다.
'형님 나올 때 쓰레기통 뒤져서 그림 있으믄 한 장 뚱쳐 가꼬 나오쇼이' 했던
택시 기사의 말은 아마 파기시키기 위해 버렸던 그림조차 그 가치를 인정 한다는 소리로
새삼스럽게 내 기억을 되살려 놨다.
"저 위에 있는 그림은 어르신의 조부이신 소치(小癡) 허유(許維) 선생님의 작품인데
주로 산수화(山水畵)를 그리셨네. 괴석이나 소나무가 많이 있고
낙관에 연(鍊)이나 유(維)가 찍힌 거는 다 그분 작품이네.
처음에 허(許)자 련(鍊)자를 쓰시다가 중국 남종화의 대가인 왕유(王維)의 이름을 따서
이름의 뒷자를 유(維)로 바꾸셨네.
그분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는 기자 양반이 나중에 공부 하도록 하고,
그리고 나머지는 거의 어르신 작품인데,
어르신 작품은 초기 때와 지금의 그림이 많이 달라져 있는데 기자양반이 그걸 발견 할 수 있다면
대단한 소질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냥 참고만 하시고 특별히 물어 볼게 있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물어 보시게.
사실 지금은 어르신이 손이 떨려서 그렇게 많은 작품 활동 하시지는 않네.
그러나 꼭 작품은 만들어 내시는데
그건 아마 그런 작품 활동이 어르신의 건강을 유지 하는 비결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
나는 이미 우석이 라는 사람에게 들어서 조금은 알고 있었다.
요사이 작품은 예전에 비해 많이 한국적이 되어 있다는 그의 조언을 상기 하면서
유심히 허건 선생의 작품을 음미 하듯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댔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그 집사에게 이것저것 물어 보지 않을 수 없는
나의 짧은 배움의 한계를 느꼈다.
특히 한문이 그랬다.
최고의 예술가가 그려 넣은 한문의 대다수를 읽어 내지 못함을 내 스스로 통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솔직하지 않고는 취재가 곤란 하다 싶어 겨우 부끄러운 입을 떼었다.
"저… 사실은 그림의 제목을 함께 책에 올리고 싶은데…
제가 한문을 도통 읽을 수가 없어서 그러는데 좀 편하게 써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어찌 보면 좀 귀찮은 부탁 일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맞는 말 이네.
우리도 모르는 한자가 있고,
사실은 저렇게 흘려서 써 놓으면 아무도 쉽게 읽을 수는 없지.
일전에 전시회 할 때 책으로 만들어서 정리 해 두었던 게 있는데 그걸 한권 줌세.
지금 사진으로 찍힌 그림 들은 다 거기 있으니까…"
"그래 주시면 고맙고요.."
팸플릿 형식으로 제작된 책자를 받아서 펼쳐 보고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지막 남아 있는 카메라의 필름을 전부 소진 하고서도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다.
수석을 전시 해놓은 방안에 들어섰을 때는
마치 내가 신이 되어 세상을 내려다 보는듯한 착각이 들 정도 이었다.
내가 마치 천계(天界)에 사는 신이고 그림이나 수석들은 지상세계의 일부를 삽질 하여
이곳에 퍼 놓은 듯한 자연 한 가운데에 나는 서 있는 것 이였다.
수석 중에는 더러 동물을 닮은 것들도 있어서
우주 만물을 위에서 관조 하는 창조주 같은 느낌에 빠져 들었다.
이런걸 그리고 모으신 저 남농 허건선생은 평생 동안 자연을 창조하고
그 자연을 즐기셨던 위대한 대가(大家)임에 틀림없었다.
그런 기분에 젖어 있을 때 집사가 그 방으로 들어 왔다.
"그래 사진은 다 찍었어?
원래 이방은 쉽게 누구한테 공개를 하는 방이 아니여.
기자라고 그래서 암말도 안 했는디…
이런걸 공개를 해 놓으믄 이집이 많이 시끄러워져서…
지금 은 아예 어르신이 이 방에는 외래객을 못 들이게 하셨그만…"
"왜요? 좋은 작품은 여기 다 있는 것 같은데…"
"사람들은 이런걸 좋아 하면서도 다 어떤 금전적 가치로 계산을 하려고
그래서 어르신이 더 이상 이방의 물건들로 흥정 같은걸 하기 싫어하시네.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파실 분도 아니고…
그분도 나름 데로 뜻이 있어서 귀하게 보관 하고 계시는디…
나중에 큰 회당 같은 거 지어서
여러 사람이 볼 수 있게 하신다고 그렇게 말씀 하셨으니까…
그게 또 저 어르신 꿈이고…"
역시 대가다운 아름답고 고차원적 발상에 절로 고개가 끄덕 거려 졌다.
"근데 아직도 허 화백님은 난을 만지고 계십니까?"
"그렇지.
오전에는 내 저렇게 살아 있는 생물과 계시고 오후에는 그림이나 돌을 관리 하시지.
어르신 말씀으로는 살아 있는 난도 그렇고 숨을 쉬지 않는 돌도 그렇고
자꾸 저렇게 손으로 만져 주면 여자들 화장 한 것처럼 예뻐진다고 그러시네.
자네 이방에 저 검은 돌들이 왜 빤짝빤짝 빛이 나는지 아는가?
저게 무슨 화장품이나 광택제를 발라서가 아니고
저 어르신이 자꾸 손으로 만져 줘서 저렇게 빛이 나는 거네.
첨에 산에서 주워 올때 물로 한번 씻어 내고 나면 내 저렇게 손으로 만져 주는 게
저분의 하루 일과 라네.
생명 없는 것들에게 기(氣)를 불어 넣어 주신다고 그러시드만…"
정말 대단한 정성이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