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목회(牧會)
(신33:29,갈6:14) 102.372
2014.7.13.9.30 시온성군인교회
2014.7.13.13.30. 부석감리교회
2014.7.16.13시 태안보건의료원
(보내지는 곳 8사이트)
글:-남제현목사
태안자살예방생명지킴이협회장
(태안정신보건증진센터 협의체)
자살예방 한국협회 충서지부 이사장
http://cafe.daum.net/sangokli
http://cafe.daum.net/talifecent
행복한 가정, 행복한 일터, 행복한 나라 그리고 행복한 목회를 원한다..행복한 일터가 있고 행복한 가정이 있다..행복하지 못하면 세상을 다 갖는다고 해도 다 소용이 없다..행복이 없으면 가정도 버리고 자녀도 재물도 신앙도 버린다..그래서 우선 자신을 해서 행복을 찾아라..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자신의 행복한 생명이다...
(신33:29)“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 시로다..” 그런데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괴로움뿐이다..<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고 하셨고 육적 생명이 없으면 이 세상을 다 잃은 것이고, 영적 생명을 잃어버리면 다가오는 세상까지 다 잃어버리고 만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생명은 가만히 정체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유동적 관계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 죽은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다. 숨도 쉬지 않고 활동할 수도 없을 뿐더러 변화될 수도 없다. 움직이는 목회를 해야 한다...산 사람은 끊임없이 심장이 박동하고 허파가 움직이고 몸과 생각과 언어로 자신 아닌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는다...
호흡과 활동과 관계를 통하여 그 생명이 존재하는 목적을 향하여 나아간다. 이러한 역동적 관계가 바로 성장이다. 즉 성장이 없으면 죽은 생명이다.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퇴보요 소멸이요 죽음이다. 과연 인생은 성장의 연속이다. 어린아이가 계속 성장하여 온전한 성인이 될 때 인생의 목적을 이룬 행복감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런데 육체적 성장은 한계가 있다.
운동선수는 30세를 전후로 한계가 온다..나의 인간적인 목회에도 권태기가 있었다.. 청장년의 절정기 이후에는 늙고 쇠하여진다. 그러나 정신적 성장, 더 나아가 영적 성장에는 한계가 있는 것을 늙어가면서 깨달음이 왔다. 영적 생명의 성장은 한계와 관계가 없는 데<바울>사도는 (고후4:16)“-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는 자아성취를 위해서도 속사람의 성장에 절대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인간답게 사는 길은 인간의 본질인 영적 생명을 성장시키는 데에 달려 있다. 영적 성장만이 참된 살 길인 것이다. 그래야 영혼이 평안해야 행복하다..불평과 불만이 정신은 영혼뿐 아니라 육체 역시 시들어 간다..영혼의 보약은 감사이다..영혼이 행복하고 육체가 건강해진다..
문제는 영혼을 어떻게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자동차에는 2만개의 부품이 필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엔진이다..그런데 이 엔진을 움직이는 것은 <배터리>에 달렸다. 아무리 좋은 엔진이라도 방전된 배터리는 자동차 시동이 걸리지 않는 다..목회자의 서재에는 수백 수천 권의 책이 나열해 있지만 영혼의 배터리가 방전이 되고나면 목회에 한계에 이른 것을 느끼게 된다..
날마다 내 영혼의 계기판을 점검하여 영혼의 배터리에 경고등이 켜져 있지는 않는지 살펴야 하고 경고등이 들어왔다면 빨리 충전해야 한다..경고표시를 무시하면 결국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면서도 모르고 사는 사이에 영감의 병이 온다..영혼의 배터리를 방전되는 이유가 있다..나는 스스로 만족한 의에 빠져 있었다. 노력으로 만들어 낸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공로를 가지고 <하나님>앞에 서고자 하는 사람이다. 이와 동일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익수한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들처럼 살아 갈 뿐이다.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고, 설교하고 구제와 봉사를 한다. 그런데 회칠한 무덤 같은 위선이다. 어렵고 힘들게 고통 받고 살아가는 이웃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이 없고...심지어 우리 안에 양떼를 부지런히 살피지를 못했다..
오직 사람들 앞에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외식하는 태도 만 있기 때문이다....<바울>사도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 까지는 철저하게 그렇게 살아간 바리새인으로 살았다. <바리새>인들의 자기들 이외는 모두 무식한 이방인에 불과하다..스스로 남을 정죄하면서 자기들만이 구원받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스데반>집사를 돌로 쳐 죽이는 현장에 증인으로 서있던 사람이 <사울>이다..
철저한 자기 의를 가지고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켜 구원받고자 했던 율법주의자였다. 문제는 <예수>님의 음성이다. ‘사울아, 사울아~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런 후에 눈을 멀게 하셨다. 아직도 보이지 않는 눈을 가지고 살아왔다...눈을 덮고 있는 백태가 끼여 <주>님이 지시하는 사람과 장소는 보이지 않고 내 생각과 주관대로 목회를 해 왔다..<바울>사도는 자신이 (딤전1:15)“-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하셨을까? 철저하게 <바울>의 삶은 완전히 새로워졌다.
철저하게 자기 의를 포기하고 자기 자랑을 내려놓았다. 대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호산나교회 <이기복>(88) 원로목사는 하루 종일 폐지를 주우러 다닌다. 자전거를 끌고 동네를 순회한다. 이렇게 한 달 일하면 25만원 수입이 생긴다. 그리고 이 돈으로 매달 아프리카 아이들 4명을 후원한다. 또 북한선교기관인 모퉁이 돌 선교회에도 매달 10만원씩 지원한다.
이 원로목사의 생각을 "목회자는 죽도록 충성하라 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폐지를 줍는다..이웃 사람들은 은퇴한 목회자가 얼마나 어려우면 폐지를 줍나하는 동정과 측은히 여겼지만 폐지를 팔아 아프리카 아이들을 후원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들도 팔을 걷어붙이고 돕기 시작했다. 그는 말년에 훌륭하고 참된 행복한 지역목회를 하고 계신다..
우리는 아직도 무릎과 허리가 편하지만 성장하지 못한 이유는 움직이지 못하는 영혼의 배터리 방전 되고, 행복한 목회가 아니라 초초하고 불안한 목회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현대사회는 교회 목회가 아니라 지역목회를 권하고 쉽다..눈에 보이는 것들은 자랑하기 쉽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자랑거리들이 오래가지 못하고 잠깐이면 사라지는 것들이다.
(렘9:23)“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목회자는 눈에 보이는 육체를 자랑하면 자랑할수록 영적인 힘은 떨어지게 된다. 남이 인정해 주면 기분 좋고 인정받지 못하면 기분 나쁘고 불행한 상처만 남는다..
남을 의식하다보면 자신이 점점 초라해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비교하지 말고 자신이 행복한 목회를 찾아 한다면 피곤을 모르는 목회자 될 것이다. 내가 피곤하고 지쳐 있으면 옆에 있는 성도들이 힘들어 한다.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