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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조창나루터 원문보기 글쓴이: 정세주
시조 요약설명
시조는 고려후기에서 조선전기에 걸쳐 정제된 우리나라 고유의 정형시이다.
3장 45자 내외로 구성되며, 유학자들의 정신과 정서를 표출하기에 적합한 형식이었다.
보통 장구장단이나 무릎장단에 맞추어 시조창으로 노래하는데,
조선후기에는 관현악 반주를 동반하고 전문가객이 노래를 전담하는 가곡창으로 발전했다.
김천택이 당시까지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시조들을 수집하여 '청구영언'을 편찬한 이래
가집과 시조집이 속속 편찬되었다.
20세기에 들어 노래를 하지 않게 되어 음악적 특성은 사라졌지만
문학 갈래로서의 특성은 현대시조로 이어지고 있다.
고시조와 현대시조의 차이점
시조는 고려말에 생겨나서 현대까지 창작되는 우리 고유의 문학입니다.
고시조는 현대 시조에 대비되는 말로, 고려말과 조선 시대의 시조를 가리킵니다.
갑오개혁1894년 이후의 시조부터 현대시조라 합니다.
고시조
내용 : 주로 충(忠), 효(孝), 열(烈)과 같은
유교의 전통적인 세계관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현대시조
내용 : 현대인의 복잡하고 다양한 사상과 감정을 표출하였습니다.
주제 형상화를 위해 심상을 중요시하였습니다.
사육신
조선 세조 2년(1456) 조선의 6대 임금인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목숨을 바친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김문기(金文起) 6명
삼은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목은 이색
오백년 도읍지를- 길재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길재(吉再, 1353년~1419년)는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이다.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의 삼은으로 불린다.
고려가 망하자 관직을 버리고 선산에 낙향하여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김숙자, 최운룡, 김종직 등을 통해 사림파로 학맥이 계승되었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 이색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흘에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호올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이색(李穡, 1328년 6월 17일(음력 5월 20일 ~ 1396년 6월 17일(음력 5월 20일)은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정치인이며 대학자, 사상가, 교육자, 철학가, 시인이다
성리학을 고려에 소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며
성리학을 새로운 사회의 개혁, 지향점으로 지목하였다.
정도전, 유창 등의 스승이었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역성혁명에 협조하지 않았고 조선 개국 이후에도 출사하지 않았다.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이화에 월백하고-이조년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
일지 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이조년(李兆年, 1269년 ~ 1343년)은
고려의 원종-충혜왕 때의 문신·시인·문인이며 학자이다.
충렬왕과 왕자의 사이가 나빠졌을 당시
그는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았으나 화를 입고 유배되었다.
그 후 유배에서 풀려나 13년간 고향에 있다가, 1
340년 충혜왕 때 예문관 대제학이 되어 성산군에 봉해졌다.
그는 천성이 결백 강직했으며 특히 시문에 뛰어났으며
시조 한 수가 (청구영언) 등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하여가-이방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까지 누려보세
조선의 제3대 국왕이다.
묘호는 태종 휘는 방원(芳遠) 자는 유덕(遺德).
1367년(공민왕 16년) 6월 13일,
아버지 이성계와 어머니 신의왕후의 5남으로 태어났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려에서 관료 생활을 처음 시작하였으며
이후 아버지의 역성혁명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도왔다.
1398년(태조 6년)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계모인 신덕왕후의 소생이자 이복 막내동생인 왕세자 이방석과
그 친형인 무안군, 세자를 지지하던 개국공신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 일파를 모두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하였고,
마침내 조선의 제3대 국왕으로 즉위,
격동기였던 여말선초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단심가-정몽주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鄭夢周, 1338년 1월 13일 1337년 음력 12월 22일 ~ 1392년 음력 4월 4일)는
고려 말의 문신, 외교관, 유학자이다.
고려 삼은 중 한명으로 호는 포은다.
조선 건국 직전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의 역성혁명에 반대하다
이방원의 지시를 받은 조영규에 의해 선죽교에서 살해되었다.
그는 학문·외교·경제·군사·정치·인품 모든 면에서 특출난 고려 말기의,
고려 최후의 보루. 선비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로는 왜구 토벌에도 공을 세웠던
글자 그대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고려삼은 중 한 사람이다.
이 몸이 죽어가서-성삼문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졔 독야청청 하리라
성삼문(成三問, 1418년~1456년 6월 8일)은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조선의 사간원 우사간 등을 지냈다.
그는 세종대왕을 도와 집현전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의 한사람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1450년 어린 세손을 부탁한다는 세종의 유지를 받들다가
세조 찬위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을 주관하였으나,
신숙주, 정인지 등이 세조의 편에 서고 김질 등이 밀고함으로써 실패하고 만다.
성삼문은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로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세종대왕을 도와 집현전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였다.
자는 근보, 눌옹, 호는 매죽헌, 시호는 충문, 본관은 창녕이다.
성승의 아들이며, 성달생의 손자이다.
생원으로 1438년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의 한사람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1447년 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450년 어린 세손을 부탁한다는 세종의 유지를 받들다가
세조 찬위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을 주관하였으나,
신숙주, 정인지 등이 세조의 편에 서고 김질 등이 밀고함으로써 실패하고 만다.
그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신숙주와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을 13회나 찾아가 왕래하며
그로부터 정확한 음운과 언어 연구를 배워오고,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의 제도를 연구하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기여하였다.
생육신인 성담수, 성담년은 그와 6촌간이며 이기, 이행 등은 외종질이다.
그의 남계 친족은 모두 몰살당했고,
외손 박호의 후손, 회손 엄찬의 후손과
유자미의 며느리가 된 손녀딸의 후손만이 현전한다.
성종 때부터 복권 여론이 나타났으마 숙종 때 가서 복권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이후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절신으로 추앙받게 된다. 충청남도 출신이다.
1418년 성삼문은 충청남도 홍주 홍북면 노은동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를 막 낳으려고 할 때에
공중에서 하늘이 낳았느냐라고 세 번 묻는 소리가 났으므로
하늘이 세번 물었다 하여 그의 이름을 삼문이라 이름을 지었다 한다.
형제로는 동생 삼빙, 삼고, 삼성이 있다.
1435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438년 생원으로서 문과에 급제,
이후 관직에 올라 집현전의 학사의 한사람으로
신숙주, 박팽년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이때 뒷날 생사를 같이 한 하위지가 그의 과거 급제 동기생이다.
집현전학사로 뽑힌 뒤 수찬을 지냈다.
관료생활 초기, 그는 집현전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이때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신숙주와 함께 훈민정음 정리 작업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의 도움을 얻기 위해
신숙주와 함께 13차례나 요동에 다녀오기도 했다.
귀국 후 집현전수찬을 거쳐 직집현전을 지냈다.
1442년 박팽년, 신숙주, 하위지, 이석형 등과 함께
한양 삼각산 진관사에서 사가독서를 했고,
세종의 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독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어 세종대왕이 정음청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정인지, 신숙ㅈ, 박팽년, 이개, 최항 등과 함께 참여했다.
가장 공이 컸는데 세종의 명으로 당시 성균관 주부로 재직중
집현전 교리 신숙주, 행사용 손수산 등과 함께
마침 죄를 짓고 요동에 귀양가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을 찾아가게 된다.
13번이나 요동과 조선을 직접 왕래하여 음운에 관한 것을 의논하였다.
또한 명나라에 사신이 파견될 때는 사시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학자들을 만나 음운과 교장의 제도를 연구해와 이를 보고하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기여하였다.
1446년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몽유도원도를 그리자 이에 대한 찬시를 써서 헌정했다.
1447년 중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447년 경연시강관, 사간원 우사간, 집현전 부제학을 지냈다.
그 후 왕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두를 편찬하는데 참여하였고
경연관이 되어 학문을 강론하였다.
세종이 만년에 숙환으로 온천에 갈 때
성삼문과 박팽년, 신숙주, 최항, 이개 등을 항상 대동하고 고문으로 삼았다.
1451년 명나라 사신 예겸 등이 조선에 당도하자
왕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시짓기에 나서 동방거벽이라는 찬사를 얻기도 했다.
이후 예조 참의, 동부승지, 우부승지와 좌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세종은 병약한 세자도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예견하고
집현전의 학사들을 불러서 어린 원손 홍위를 부탁한다는 유지를 여러 번 남겼다.
성삼문 역시 집현전 학사로 그의 유지를 받들게 되었다.
까마귀 눈비 맞아-박팽년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夜光) 명월(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박팽년(朴彭年, 1417년~1456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 겸 학자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조선국 형조참판, 조선국 좌부승지 등을 지냈다.
조선 세종 때인 14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 학사가 되어 편찬 사업에 참가하였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세조가 즉위한 다음 해인 1456년, 형조참판의 자리에 있으면서
성삼문등과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6월 2일 잡혀가 고문을 받다가 사망하였다.
방 안에 켰는 촛불-이개
방 안에 켰는 촛불 누구와 이별하였기에
겉으로 눈물 흘리고 속 타는 줄 모르는고
저 촛불 나와 같아서 속 타는 줄 모르누나
이개(李塏, 1417년~1456년)는
조선시대 전기의 학자이자 관리이며, 1436년 문과에 급제한 후,
1441년 세종에 의해 집현전 학자가 되었다.
훈민정음의 창제에도 참여했다.
사육신 중의 한 사람으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붙잡혀
형문을 당한 후 아들과 함께 처형당하였다.
조선시대 전기의 학자이자 관리이며,
성삼문, 신숙주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에 참여하였다.
또한 사육신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자는 청보(淸甫) 또는 백고(伯高), 호는 백옥헌(白玉軒)이다.
고려시대 말기의 학자 목은 이색의 증손자이다.
토정비결의 저자 토정 이지함은 그의 종증손이고,
조선 중기의 동인, 북인의 당수 아계 이산해는 그의 종고손이 된다.
1436년 문과에 급제한 후, 1441년 세종에 의해 집현전 학자가 되었다.
그해 저작랑(著作郞)으로 《명황계감》(明皇戒鑑)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집현전 학사로 신숙주, 성삼문,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에도 참여했다.
1447년 문과중시에 급제한 뒤 사가독서하였다.
1448년 교리가 되었고,
세종의 임종에 즈음하여 어린 세손을 부탁한다는 유지를 받들었다.
그 뒤 당상관에 승진하였다가 1450년에 문종이 왕위에 오른 뒤,
후에 단종이 된 왕자의 개인 교사 역할을 하였다.
1455년에 단종이 세조에 의해 왕위를 빼앗기자,
1456년(세조 2) 이개는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되었으나
고위 관리들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붙잡혀 형문을 당한 후
아들과 함께 처형당하였다.
시문(詩文)과 글씨를 잘 지었다.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가 추증되고,
대구의 낙빈서원(洛濱書院),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충주 노운서원(魯雲書院),
과천 민절서원(愍節書院), 의성 충렬사(忠烈祠) 등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의열(義烈)이었다가 뒤에 충간(忠簡)으로 시호가 개정되었다.
토정비결의 저자 토정 이지함이 그의 종증손이고,
종고손은 동인과 북인의 당수이며 3번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와
임진왜란 때 명나라군 파병을 위해 노력하다가 과로사한 이산보이다.
간밤에 불던 바람-유응부
간밤에 불던 바람 눈서리 치단 말가
낙락장송이 다 기우러 가노매라.
하물며 못다 핀 꽃이야 일러 무엇하리오
유응부(兪應孚, ?~1456년)는 조선의 무신으로 사육신 중 한 사람이다.
자는 신지, 호는 벽량, 시호 충목(忠穆), 포천 출신이며 본관은 천녕이다.
유응부는 조선의 무신이다. 자는 신지, 호는 벽량, 시호 충목, 본관은 기계이다.
포천 출신이고 키가 남보다 크고 얼굴 모양은 엄숙했으며 씩씩하고 용감해
활을 잘 쏘아 세종과 문종이 모두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다.
사육신의 한 명으로 단종복위계획이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일찍 무광에 급제하였으며 1448년에 첨지중추원사, 1449년에는 경원도호부사,
경원절제사를 거쳐, 1452년에는 의주목사에 임명되고,
이듬해 1453년에는 평안좌도도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455년 4월에 판강계도호부사를 거쳐,
이해 윤 6월에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동지중추원사를 지냈다.
일찍이 무과에 올라 1448년 첨지중추원사, 1449년 경원도호부사, 경원절제사,
1452년 의주목사를 거쳐 1453년 평안좌도도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455년 4월에 판강계도호부사를 거쳐,
이 해 윤6월에 세조가 즉위한 뒤 동지중추원사에 임명되었다.
단종이 세조에 의해 축출되자 단종복위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고,
사육신 중 한명이 되었다.
효성이 지극해 집이 가난했으나 어머니를 봉양하는 준비는 부족함이 없었다.
사생활은 지극히 청렴해 벼슬이 재상급의 2품 관직에 있으면서도
거적자리로 방문을 가리웠고 고기 반찬 없는 밥을 먹었다.
또 때로는 양식이 떨어지기도 하니 처자가 이를 원망했는데,
그가 죽던 날 그 아내가 울면서 길가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살아서도 남에게 의지함이 없었는데 죽을 때는 큰 화를 입었구나고 하였다.
활을 잘 쏘고 학식이 깊이 세종, 문종의 사랑을 받았다.
기골이 장대하고 효성이 지극했으며 재상급인 종 2품에 이르러서도
끼니를 거를 정도로 청렴결백하였다.
무장이면서 학문에 뛰어나 절의파 학자로 알려졌다.
1456년 성삼문, 박팽년 등이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초청 연회하는 날에
유응부와 성승 등을 별운검으로 선정해 그 자리에서 세조를 살해하고
단종을 다시 세우기로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왕이 운검을 세우지 말도록 명령했고,
세자도 질병 때문에 왕을 따라 연회장에 나오지 아니하였다.
유응부는 그래도 거사하려고 했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이 굳이 말리기를 지금 세자가 경복궁에 있고,
공의 운검을 쓰지 못하게 한 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만약 이곳 창덕궁에서 거사하더라도,
혹시 세자가 변고를 듣고서 경복궁에서 군사를 동원해 온다면
일의 성패를 알 수가 없으니 뒷날을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이런 일은 빨리 할 수록 좋은데 만약 늦춘다면 누설될까 염려가 되오.
지금 세자가 비록 이곳에 오지 않았지만,
왕의 우익이 모두 이곳에 있으니 오늘 이들을 모두 죽이고
단종을 호위하고서 호령한다면 천재일시의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니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될 것이오 했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은 만전의 계책이 아니라고 하면서 굳이 말려서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이때 동모자의 한 사람인 김질이 일이 성공되지 못함을 알고서
급히 달려가 장인인 정창손에게 알리고 함께 반역을 고발해
성삼문 이하 주모자 6인이 모두 죄인으로 끌려와서 국문을 받았다.
너는 무슨 일을 하려고 하였느냐는 세조의 국문에
그는 명나라 사신을 초청 연회하는 날에 내가 한 자루 칼로써 족하를 죽여 폐위시키고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고 했으나,
불행히 간사한 놈에게 고발당했으니 응부는 다시 무슨 일을 가겠소.
족하는 빨리 나를 죽여주오. 하니 세조가 노해 꾸짖었다.
천만리 머나먼 길 -왕방연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단종이 영월로 귀양갈 때 호송책임자)
천만리 머나먼 길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노라
저 물도 내안 같아서 울어 밤길 애놋다
왕방연(王邦衍, 생몰년 미상)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조선 세조 때의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이다.
왕방연은 단종이 영월로 귀양갈 때 호송했다.
영월서 돌아오면서 단종을 그려 읊은 시조 1수가(청구영언) 등에 실려 전한다.
시조한수를 소개합니다.
천리길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 놋다.
왕방연의 시조비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께 사약을 진어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으로 청룡포를 바라보며 읊은 시조입니다.
현장에 가보니 소나무 숲속에 이끼낀 비석이 서있고
그 사연을 적어놓았습니다.
주변에는 이름모를 고총이 방치된 듯 자리하였습니다.
조선의 아픈역사의 한자락인데 관리가 소홀해 보입니다.
그래도 역사의 흔적으로 남아있으니 다행입니다.
장릉은 조선 제6대 임금 端宗의 능으로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황권을 빼앗기고 청령호에 유배된 단종이
17세의 어린 나이에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하여 묻힌 곳이다.
2009년6월30일 장릉을 포함한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영월군의 설명입니다.
단종은 청령포와 관풍헌에서 기거하였습니다.
단종이 영월군(寧越郡) 남면(南面) 광천리(廣川里)국지산(菊芝山) 밑에 있는
청령포로 유배된 그 해 여름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자
관풍헌(觀風軒)으로 거처를 옮겼다.
단종은 이 관풍헌에서 지내면서
동쪽에 있는 매죽루에 자주 올라 자규시(子規詩)를 읊어 심정을 토로하였으므로
후인들이 자규루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인터넷 설명입니다.
오르막은 산등성이를 타고 가서 단종왕릉을 친견하고 내려올때는
비탈길 계단을 이용하였습니다.
이제 나이들어서 올라가면 무릎이 힘들고 내려가면 근육이 뻐근합니다.
그래도 14,000보 이상을 걸었습니다.
한반도 지형을 다녀온 1,600m와 청령포, 단종의 장릉 등 여러곳을 걸어서
축적된 거리입니다.
단종의 애환과 恨이 서린 영월을 돌아보았습니다.
12살 때 즉위한 단종은 정통적인 혈통을 완벽하게 물려받은 임금이었지요.
그런데 수양대군과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고 魯山君으로 격하되어
이곳 영월 땅 淸怜浦로 유배되고 말았습니다.
단종이 유배된 그해 여름에 홍수로 강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겼지요.
단종은 할 수 없이 강 건너 영월부의 客舍인 觀風軒으로 거처를 옮겨 살았습니다.
그러나 17살의 어린 나이에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지요.
정말 애통한 일이었습니다.
단종의 屍身은 강에 버려졌으나
영월의 戶長 엄홍도가 이를 수습해 지금의 장릉으로 모셨지요.
영월은 지금 충절의 고장이라는 슬로건아래
매년 단종문화제를 열고 단종을 추모하고 있습니다.
단종은 1441년7월23일(세종23년)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사이에서 원자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홍위이다.
8세가 되던 1448년(세종30년)에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예문관제학 윤상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405년2월에 세중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하게 되자
그해 7월20일 왕세손이었던 홍위는 10세의 나이로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452년5월18일 문종이 승하후 단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12세의 어린 나이로 제6대 왕에 즉위하였다.
계유정란 이후 1455년6월11일 단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불려주고
15세에 상황이 되었으며(재위기간 1452~1455),
박팽년, 성삼문 등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모두 죽임을 당하는
사육신사건이 일어나 1457년(세조3년) 노산군으로 강봉된 뒤 1
457년 윤6월22일 창덕궁을 출발하여 7일후인 윤 6월28일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그해 9월 금성대군 유가 다시 그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사되자
단종은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내려지고 결국 죽음을 당해
1457년10월24일 유시에 17세 어린 나이로 관풍헌에서 승하하였다.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김종서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 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조선 전기의 문신.
1433년 야인들의 침입을 격퇴하고 6진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수양대군에 의하여 1453년 두 아들과 함께 집에서 격살되고
대역모반죄라는 누명까지 쓰고 효시됨으로써
계유정난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김종서金宗瑞(1383,우왕 9~1453,단종 1).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
할아버지는 지평 김태영金台泳이고, 아버지는 도총제都摠制 김추金錘이며,
어머니는 대사헌 배규裵規의 딸이다.
조선전기 함길도 도관찰사,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383년(우왕 9)에 태어나 1453년(단종 1)에 사망했다.
1443년 함길도 도관찰사가 된 뒤 7, 8년간 북변에서 육진을 개척해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세종의 신임이 두터워 인사권을 전담하기도 했다.
1451년(문종 1) 좌찬성 겸 지춘추관사로서 『고려사』를 찬진했고,
1452년에는 『세종실록』과 『고려사절요』 편찬 책임관을 맡았다.
좌의정으로 단종을 보필하다가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에게 살해되었다.
1746년에 복관되었다.¹
사육신과 생육신
조선시대 단종 복위운동 때 목숨을 바친 충신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당한 단종을 다시 왕위로 올리기 위해 노력하다
죽은 사람들이 바로 사육신과 생육신이죠
하지만 세조 이후로도 계속해서 벼슬길에 오른 인물들이 있었으니,
바로 성산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 6명을 가리켜 사육신이라 불렀고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은 등 6명을 생육신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 역시
당시 사회상을 비판하며 관직을 버리고 은둔생활을 했는데
이를 두고 생육신 중 한명이었다고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많은 선비들이 단종복위운동을 했던 걸까요
단종복위운동이란
세조 2년
1456년 둘째 아들이자 문종의 동생이었던 단종이 즉위한지 1년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게됩니다.
어린나이에 어쩔 수 없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게 된거죠
그러나 한명회, 권람 등 공신세력 중심으로 구성된 계유정난 세력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단종을 몰아내고 스스로 임금이 되기위해
군사를 일으켰는데 이것이 바로 계유정난, 단종복위운동입니다.
결국 단종은 상왕으로 물러나게되고
우배지인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가게됩니다.
왜 하필이면 육신이라는 표현을 썼을까
당시 신하들은 육신 이외에도 칠신, 구신, 십신 등 다양한 표현을 썼는데
유독 육신사라 불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여섯명의 신하 모두 절개를 지킨다는 의미였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사당 이름 앞에 '육'자가 붙게 되었죠.
대표적인 곳으로는 서울 노량진에 위치한 사육신 묘가있고,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 위치한 만해 한용운 생가터 옆
결성향교 안에 자리잡고있는 매죽헌 성삼문선생유허비가 있습니다.
태조 조선의 초대왕
태조는 고려 말의 무신 겸 정치가이자 조선의 초대왕이다.
이성계는 함경도 영흥에서 출생하였으며 함경도 함흥에서 성장하였고 본관은 전주이다.
성은 이, 휘는 단, 초명은 성계, 초자는 중결, 자는 군진, 호는 송헌, 송헌거사이다.
1388년부터 1392년까지 고려 왕조의 실권을 맡은 적이 있는 이성계는
고려에서의 관직이 문하시중 직위에 이르렀고,
고려 우왕때, 우군도통사로서 요동 정벌을 위하여 북진을 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문하시중으로서 정권을 장악하고
고려 공양왕으로부터 보위 선양의 형식으로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함으로써
조선을 개국하였다.
조선 군주 보위에 오른 이후 막강한 권력으로 전제개혁을 단행하였고,
신진세력의 경제적 토대를 구축하였으며,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 조선의 기틀을 다졌다.
이성계의 고조부 목조 이안사는 전주에서 이주하여
간도 지방에서 기반을 마련하였고, 몽골의 산길대왕이 쳐들어왔을 때
그에게 귀순해 다루가치가 되었다.
이후 증조부 이행리, 조부 이춘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이를 세습하였고,
실록에는 풍속을 바로잡고 개혁을 추진하여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고려 충숙왕 복위 3년 음력 10월 11일 함경도 영흥 흑석리에서 태어났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원의 쌍성총관부 만호였다.
어느 날 당시 쌍성총관부 만호 이자춘이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하늘에서 오색 구름을 타고 선녀가 내려왔다.
그 선녀는 이자춘에게 절을 하고 천계에서 그대에게 내리는 것이니,
장차 이것을 동쪽 나라를 측량할 때 쓰십시오. 라며 소매 속에서 침척을 꺼내 바쳤다.
이자춘이 그 자를 받은 뒤에 부인 최씨는 임신을 하였고,
13개월 만에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태어날 때 부터 총명하고 우뚝한 콧마루와 임금다운 얼굴로서,
신체는 영특하고 준수하며,
지략과 용맹은 월등하게 뛰어났다고 한다.
어린 시절 고향인 함경도 영흥과 함주에서 살았다.
북방 민족들이 매를 구하려 주로 내려왔는데,
흔히 말하길 이성계와 같이 걸출한 매를 얻고 싶다라고 하였다.
고려의 무신 가문 출신인 이성계는
어릴 때부터 영웅의 기질을 타고나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며,
용맹하여 수많은 전쟁터에서 전공을 세웠다.
특히 활을 잘 쏘아서 신궁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천하의 명궁으로 알려졌다.
훗날 그의 눈부신 활약상에 관해서는
여러 영웅담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으며,
이성계는 30여년 동안 전장에 나아가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고려 공민왕 5년 유인우가 이끄는 고려군이 원의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아버지와 함께 공을 세웠고,
5년 뒤에 이자춘이 죽자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금오위상장군, 동북면상만호가 되었다.
1361년 음력 10월에 독로강만호 박의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같은 달에 다시 압록강의 결빙을 이용하여
홍건적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의 영내에 침입하여 삽시간에 수도가 함락되자
이성계는 휘하의 고려인 및 여진족으로 구성된
강력한 친병 조직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다.
1362년 심양행성승상을 자처한 원의 장수 나하추가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함경도 홍원 지방으로 쳐들어와 기세를 올리자,
고려에서는 이성계를 동북면 병마사로 삼아 적을 막게 하였다.
여러 차레의 격전 끝에 마침내 함흥 평야에서
원 군대를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
적장인 나하추마저
이성계의 뛰어난 용맹과 탁월한 군사적 재능에 감탄하며
깊이 존경할 정도였다.
1362년 원나라의 기황후가
최유를 시켜 원의 군사를 이끌고 공민왕을 몰아내고
덕흥군을 세우려고 압록강을 넘어 침입하자 이를 막았고,
함주를 침공한 여진족 김삼선, 김삼개 형제를 격퇴하여
밀직부사에 임명되었으며,
1370년 평양의 원의 동녕부를 원정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다.
김시습
김시습은 조선 초기의 문인, 학자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강릉, 자는 열경, 호는 매월당, 동봉, 벽산청은,
췌세옹, 불교 법명은 설잠이다.
충순위를 지낸 김일성의 아들이다.
수양대군의 단종에 대한 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고
은둔생활을 하다 승려가 되었으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일설에는 그가 사육신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경기도 노량진에 암장했다고도 한다.
1493년 조선 충청도 홍산군 무량사에서 병사한 그는
이계전, 김반, 윤상의 문인이다.
아버지 김일성은 무반 출신으로 충순위를 역임했다.
이름인 시습도 논어 학이편 중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에서 따서 지은 이름이라 한다.
생후 8개월에 글뜻을 알았다 하며,
3세에 스스로 글을 지을 정도로 천재적인 재질을 타고 났다 한다.
5세 때 이미 중요, 대학에 통하여 신동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이 그의 재주를 보고 경탄하여
이름을 시습이라 지어 주었다.
어린시절 세종대왕이 그의 천재서을 듣고
5세의 김시습을 불러다가 글을 짓게 하자 바로 글을 지었다.
그 내용에 감동한 세종대왕이
문학에 재능이 있는 그에게 칭찬하며 비단을 선물하자,
그 비단들을 끝을 묶어서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소년기에 그는 당시의 석학인 이계전, 김반, 윤상 등을 찾아가 수학하였다.
삼각산 중흥사에서 독서를 하다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3일 동안 문을 닫고 번민한 끝에 통곡을 하고
책을 불살랐다고 알려져 있다.
머리를 깎고 21세에 방랑의 길에 들어서,
경기도 양주의 수락, 수춘의 사탄, 해상의 설악, 월성의 금오 등지를
두루 방랑하면서 글을 지어 세상의 허무함을 읊었다.
그는 관서, 관동, 삼남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는데,
매월당시사유록에 그때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31세에 경주 금오산에 도착하였다.
47세에 안씨의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고 유학자를 만났을 때는
불도를 말하지 않았다.
세조 때에 변절하여 6신을 고한 영의정 정창손을
길에서 면박을 준 일이 있었다.
세조 정변 이후부터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와 사귀기를 꺼리며 두려워하였으나
종실인 이정은과 남효은, 안응세, 홍유손 4명만은 시종 변하지 않았다.
신숙주와 정인지, 정창손의 행차를 보게 되면
서슴없이 욕설을 날리며 조소하였다.
한편 그가 만나 교유하던 인물로는 서거정, 김담, 김종직 등이었다.
성리학 사상에 염증을 느낀 그는 승려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가 어느 시점에 승려가 되었는가는 불분명하다.
1466년에 김시습은 충청남도 공주군의 지역유지들과 함께
동학사 숙모전을 증축하고,
숙모전 옆에 단을 쌓고 사육신과 단종에 관련되어 순절한 신하들을 추모하였다.
그러나 김시습이 증축한 건물은
영조4에 화재로 동학사가 불에 소실되었다가
후대에 1864년에 만화 스님이 다시 세웠다.
1472년에는 경기도 양주의 시골에 정자를 세우고
조그만 화전을 일구면서 시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언젠가 서강을 여행하다가 한명회의 시를 보고 운을 바꾸어 조롱하기도 했다.
그의 해학에 지나가는 사람마다 배곱을 잡고 웃었고
이후 사람들은 이 시를 읊었다고 한다.
상처한 후 재취하지 않았고 홍산의 무량사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언대로 절 옆에 묻었다가 3년 후에 파 보니
얼굴이 산 사람과 같았다 한다.
이를 본 사람들은 그가 큰 한을 품었다고 하였다.
뒤에 부도를 세웠다.
뒤에 중종은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으며,
선조는 이이를 시켜 시습의 전기를 쓰게 하였고,
숙종 때에는 해동의 백이라 하였으며
집의의 벼슬을 추증, 남효온과 함께 영월 육신사에 배향되었다.
공주의 동학사 숙모전에도 배향된다. 향년 59세였다
만고의 충신으로 추모되는 사육신은
비참한 죽음을 당하면서 그들의 마지막 한을 한 수의 시조로 남기기도 했다.
청구영언(靑丘永言)과 가곡원류(歌曲源流)를 통해
하위지를 제외한 5명의 시조가 전해진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
성삼문
가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박팽년
청안에 혔는 촛불 눌과 이별하였관대
겉으로 눈물 지고 속타는 줄 모르는고
저 촛불 날과 같아야 속 타는 줄 모르는구나
이개
간밤에 부던 바람 눈서리 치단 말가
낙락장송이 다 기울어 가노메라
하물며 못다 핀 꽃이야 일러 무삼하리오
유응부
초당에 일이 없어 거문고를 베고 누워
태평성대를 꿈에나 보려 했더니
문전의 수성어적이 잠든 나를 깨와라
유성원
신하에게 임금은 둘일 수 없다.
먼저 성삼문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었다.
세조(世祖)가 역모를 추궁하자 성삼문은 증거를 요구하였다.
이에 김질을 불러 대질시키자
그제야 그의 밀고로 계획이 발각된 사실을 알게 된 성삼문은
김질의 배신을 통렬하게 꾸짖은 뒤 태연히 역모 사실을 인정하였다.
화가 난 세조가 역모를 꾸미게 된 연유를 추궁하자
성삼문은 이렇게 답변했다.
"어찌하여 우리가 하려고 한 일이 역모입니까?
신하가 제 임금을 모시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거늘,
세상이 다 아는 이치를 왜 나으리만 반역이라고 하십니까?
나으리께서는 평소 주나라의 주공(周公)에 자신을 견주어 말씀하셨는데,
대체 주공이 언제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탐하였단 말입니까?
하늘에 있는 태양이 둘이 아니듯이 신하에게도 임금이 둘이 있을 수는 없소이다."
세조에게 '주상(主上) 전하(殿下)' 대신 대군(大君)을 가리키는
'나으리'라는 호칭을 사용하며 정색을 하고 대답하자,
세조는 더욱 노기충천하여 추궁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내가 양위받을 당시에는 막지 않았다가
지금에 와서 배반하는 거냐?"
성삼문이 대답했다.
"대세를 어찌할 수 없었을 뿐이오.
반역을 막지 못했으니 물러가 죽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으나,
죽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므로 뒷날을 도모하기 위해 참아 왔던 것이오."
세조가 다시 물었다.
"네가 그동안 나에게 신하로 칭해 놓고
이제 와서 나를 나으리라고 부르니 참으로 가증스럽기 짝이 없구나.
그동안 내가 주는 녹을 먹어 놓고 이제 와서 모반이 아니라고 잡아떼느냐?
명색은 상왕을 복위시킨다고 하면서 실상은 자기 잇속만 차리려는 것이 아니냐?"
성삼문이 대답했다.
"상왕이 엄연히 계시거늘 나으리가 어떻게 나를 신하로 삼는단 말이오?
나는 나으리의 녹을 한톨도 먹은 적이 없소.
나으리가 준 것은 집에 그대로 쌓아 놓았으니 내 집을 뒤져 보면 알 것 아니오."
세조는 분노로 몸이 떨려서 더 이상 국문하지 못하고
형리를 시켜 불에 달군 쇠로 성삼문의 맨살을 지질 것을 명했다.
달군 쇠가 성삼문의 살을 태우고 뼈를 뚫었지만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나으리의 형벌은 독하기도 하구려."
이어서 성삼문은 세조 옆에 서 있던 신숙주를 바라보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네 이놈, 예전에 영릉(英陵)께서 원손(元孫)을 안고 산책하시면서
곁에 있던 우리에게 상왕의 후일을 당부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한데,
네 놈만이 그 일을 잊어 버렸단 말이냐?
네 놈이 이렇게 극악할 줄은 차마 몰랐구나."
이 말을 들은 신숙주가 새파랗게 질려 버리자
세조는 신숙주를 국문장에서 나가게 한 후 박팽년을 취조하기 시작했다.
박팽년은 성삼문보다 한술 더 떠서 세조를 아예 '진사(進士)'라고 불렀다.
"진사 어른, 상왕 전하를 모시려는 것을 어찌 반역이라고 하시오.
그 자리는 진사 어른의 자리가 아닌 것을 정녕 모른단 말이오?"
세조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네놈은 이제까지 나에게 신하라고 칭하며 내가 주는 녹까지 받아먹고서는
이제 와서 나를 진사라고 부를 수 있느냐?"
박팽년이 지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진사 어른께 신하라고 칭한 적이 없소이다.
나는 충청감사로 있을 때 장계(壯啓)에도 '신(臣)'자 대신
'거(巨)'자를 써 온 사람이외다.
의심나면 한번 확인해 보시구려."
이에 세조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성삼문과 같은 형벌에 처하도록 명령했다.
성삼문은 조선조 태종(太宗) 재위 18년(서기 1418년)에
홍주에 있던 외가에서 무관(武官)인 성승(成昇)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418년은 세종(世宗)이 태종의 양위를 받아 등극한 해이기도 하여
성삼문은 태어날 때부터 세종과 특별한 인연을 갖게 된 셈이다.
태어날 때 그의 어머니가 하늘에서부터 "낳았느냐?"
하고 묻는 환청을 세번이나 들었다고 해서 이름을 삼문(三問)이라고 지었다.
성격은 쾌활하고 명랑했다.
익살스러운 면이 있어 실없는 말도 곧잘 하면서
맺힌 데가 없이 담백한 성품이었다.
그러나 속마음은 견실하고 범할 수 없는 기상이 가득하여,
우스갯소리를 잘하는 그였지만 주위에서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고 한다.
출처: 위키백과, 네이버지식백과, 나무위키에서 요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