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병 치료하면 내가 변하고 세상도 바꾼다 / 법륜 스님
불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목표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삼보에 귀의한 가장 핵심적인 목표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니르바나, 열반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해탈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불교인들이 열반이나 해탈을 생의 목표로 살고 있습니까.
열반이란 괴로움이 없다는 말입니다. 괴로움이 사라졌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이 앓고 있는 질병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괴로움입니다. 마음의 병을 한 마디로 하자면 고(苦)입니다.
괴로움은 미움, 슬픔, 분노 등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요.
열반이란 이런 괴로움들이 모두 없어진 상태입니다.
마음이 아주 맑고 건강한 상태입니다. 슬픔도 외로움도 괴로움도 없고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귀찮지도 않아요.
그러나 우리는 혼자 살면 외롭고 같이 살면 귀찮으며 같이 살다 헤어지면
또 외롭다고 합니다. 이래도 고(苦) 이며 저래도 고(苦) 입니다.
고집멸도가 불교 핵심사상
왜 그럴까요. 환자이기 때문입니다. 마음병을 갖고 있는 환자,
그 환자가 바로 중생이지요. 중생이라는 것은 곧 환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건강할 수 있습니다. 본래 건강했기 때문입니다.
본래 건강했는데 몸을 잘 못써서 결국은 병이 나지요.
그럼 치유라는 것이 무엇이냐. 본래 자리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의 상태도 본래 병이 없습니다.
본래 병이 없는데 마음을 잘 못 써서 결국 병이 난 것입니다.
그러니 본래 상태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본래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본래 있었던 자리이니까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면 됩니다.
우선 현재 내가 아픈 상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프다는 것이 바로 고(苦) 입니다.
이것을 알려면 먼저 진찰을 해봐야 합니다. 병의 근본을 아는 것이 집(集)입니다.
그리고 이 병은 치료가 될 수 있는 병이라는 사실은 멸(滅)이지요.
어떻게 치료하느냐가 바로 도(道)입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 이것이 불교의 핵심사상입니다.
열반을 목표로 열반에 이르기 위해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 하는 순서를 밟아서
사물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마음의 병을 치료해 나가면 누구나 다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괴롭다고 하는 이들의 병은 거의 치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등의식이나 피해의식 등은 깨쳐도
이미 그것이 몸과 마음에 습관이 돼 있어 계속 돌아갑니다.
지속적으로 치료를 하지 않으면 반복되지요.
그래서 몰라서 괴로운 게 있고, 알아도 치료가 안 돼 괴로운 게 있습니다.
알긴 아는데 뜻대로 잘 안 되는 경우이지요.
이것이 바로 무의식의 세계이며 불교적으로 말하면 업식입니다. 이런 경우 노력이 필요합니다.
순간 놓쳤지만 곧 업식이 작용한 것을 깨닫고 다시 돌이키면서 본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반면 치료가 절반도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우울증입니다.
우울증은 말하자면 정신 자체가 약한 사례입니다.
깨우친다고 해도 치료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굉장히 보살펴야 하지요.
부처님은 스스로 자신의 병을 치료하신 분입니다.
병의 유형이 어떤 것들인지 아주 잘 아십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병에 대해서도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온갖 경험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경전에서 병, 즉 번뇌는 주로 마왕의 유혹으로 등장합니다.
가만히 읽어보면 수행할 때 내면에서 어떤 번뇌가 일어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제일 절망적일 때가 있지요. 마왕이 열반이란 없다고 계속해서 속삭이는 순간입니다.
깨달음은 없다는 것입니다.
몸만 상하고 힘드니 왕궁으로 돌아가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축복을 받으면 황제가 될 수 있다고 부처님을 유혹합니다.
수행의 마지막 순간에 곳곳에서 번뇌가 나타나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성경에서도 예수님에게 세 가지 시련이 보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시험하지 말라는 말로 속삭임을 한 마디로 잘라 버렸습니다.
이게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대결정심입니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닫기 전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것처럼 죽기를 각오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참 어려움을 많이 느끼셨습니다.
처음 길을 나선 사람은 길의 끝을 잘 몰라 어려움을 겪습니다.
허나 뒤 따라가는 사람은 쉽지요. 이미 누군가가 가 본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셨습니다.
수행에는 애씀이 따로 필요 없어
그래서 부처님은 남을 치료한다는 교화라는 측면에서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부처님이 길 끝에 서서 깨닫고 보니 시행착오를 겪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부처님이 그 사람에 맞게 가르침을 전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럼 우리를 돌아봅시다. 우리의 믿음은 사실 보잘 것 없습니다.
믿어야지 하는 말은 이미 믿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줘야지 하는 말은 주기 싫다는 것이지요. 본질을 꿰뚫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배고픈 개에게 흙덩이를 던지면 개는 흙덩이를 좇지만
사자는 사람을 좇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을 좇으면 굶주림은 한 방에 끝나지요.
아침에 알람이 울리는 데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하면서 대부분 못 일어납니다.
원인이 몸에 있는 건가요. 아닙니다. 본질은 일어나기 싫은 거지요.
몸이 피곤해서라는 핑계는 현상에 대한 피상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일어나기 싫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겁니다. 그냥 일어나세요.
30분간 일어나야지 하면서 번뇌에 얽매이는 것이 이익입니까, 자버리는 것이 이익입니까.
번뇌만 일으키고 잠도 못자고 시간만 보내면 손해이지 않나요.
그러나 자는 것도 방법이나 여기엔 반드시 과보가 따릅니다.
지각이나 야단 등 과보가 싫으면 그냥 일어나세요. 일어나려는 노력은 하지마세요.
노력한다는 말은 이미 싫음에 사로잡힌 상태를 일컫습니다.
수행에서는 애씀이 없습니다. 사로잡힘에서 벗어나라는 뜻입니다.
벌떡 일어나세요. 그냥 탁 놓으란 말입니다.
유식하게 표현하자면 방하착이라고 합니다.
번뇌를 번뇌인 줄 알고 그냥 탁 놓으세요.
부처님 말씀에 자신이 깨쳐야
부처님은 본질을 꿰뚫어보고 본질을 터치해 줍니다.
부처님이 말했으니까 옳다라고 여기는 것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자신이 깨쳐야합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부처님 제자가 수행을 하다가 브라만이 사람들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 브라만은 “이 강은 성스러운 강이기 때문에
목욕을 하면 업이 씻겨 나가 극락에 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는 궁금했습니다. 브라만의 말을 부정하기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목욕을 하고 있었고,
그 풍습은 사실 오래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쉬운데 왜 부처님은 고된 수행을 하라고 했는지 의문이 들었겠죠.
그래서 묻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브라만의 말이 맞다면 강에 사는 물고기들이 가장 먼저 극락에 갈 것이다.”
제자의 번뇌는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수행하라고 했으면 제자는 그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깨달음은 그렇게 번뇌를 뿌리 채 뽑아 버리는 겁니다.
슬픔은 슬픔이라는 것이 있어서 슬픈 것이 아니라 그 순간 뭔가에 사로잡혀서 생긴 겁니다.
분노와 원망, 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에게 어떤 노처녀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세상이 이래도 되는 거예요?”
“무슨 일입니까.”
“전철에서 어떤 남자가 엉덩이를 만졌어요. 화가 너무 납니다.
그런 사람을 그냥 둬도 괜찮나요? 바로잡아야 하잖아요.”
“돈은 주었나요?”
“네? 무슨 말씀이세요?”
“공짜로 지압을 받았으면 좋은 일 아닙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그 사람 그냥 둬도 괜찮아요? 바로잡아야 하잖아요.”
“내일부터 송곳하나를 가지고 다니시면서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콕 질러버리세요.”
“욕 얻어먹잖아요.”
“세상을 바꾸려면 비난을 받아야 합니다.”
“뺨 맞잖아요.”
“세상을 바꾸려면 뺨 맞는 수고도 해야 합니다.”
“치료비는요.”
“세상을 바꾸려면 치료비를 물어주는 돈 드는 노력도 해야 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일입니다. 그 정도는 기꺼이 희생을 해야 해요.
내가 먼저 바뀌어야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이런 데서 의식이 바뀌면 깨달음이라는 것이 자신에 그치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번집니다.
변화가 오게 되면 자기 밖에 모르던 사람이 북한 동포 돕기도 하고 보시도 하고 봉사도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깨달음을 의심해 봐야 합니다.
마음병을 치유해 깨달음을 얻게 되면 주위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부처님도 많은 중생들을 해탈로 이끄셨습니다.
우리 역시 자신의 변화가 주위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겠습니다.
이 법문은 한국불교심리치료학회가
2008년 11월 8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개최한
가을 학술대회에서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 스님이
‘위대한 치료자 붓다’를 주제로 법문한 내용을 요약 게재한 것이다.
법륜 스님은
1969년 경주 분황사에서 도문 스님에게 입문,
1988년 1월 정토포교원을 개원하고 월간 「정토」 발행을 시작으로
불교계의 대표적 NGO-신행단체인 정토회를 설립했다.
JTS와 좋은벗들 등 민간 구호단체를 통해 해외 빈민구제사업과
대북 지원사업 등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
아시아 각국에서 펼친 구호 및 봉사활동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2년에는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최근에는 북한의 대량 아사를 막기 위한 긴급지원운동을 펼치고 있다.
출처 :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