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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사람이 무엇이기에”입니다. 사람이 무엇일까요?
다윗은 본문 1-3절에서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감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즉 주님의 영광은 온 하늘에 미치고 있다는 것이고 2절의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라고 한 것은 악한 마귀가 아무리 세력을 얻어 권능을 떨치나 주님은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를 통하여서도 잠잠하게 하실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찬양과 예배드림이 영적 원수 마귀를 이기고 주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할 수 있으며 비록 두 세 사람이 모여 기도할지라도 주님이 함께 하시기에 능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힘만 믿고 나가면 패배하지만 주님이 함께 하시면 다윗을 통해 골리앗을 이기는 역사가 지금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3절의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다윗은 하나님의 창조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천하 만상을 보면서 자신이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다윗이 누리는 특혜를 생각하면서 고백합니다. "사람이 무엇이이기에?" 도대체 내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라고 합니다.
다윗이 감탄하고 있는 이 질문, 사람이 무엇이기에? 한 마디로 내가 무엇인가? 사람인 나는 무엇인가? 에 대한 질문입니다.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어느 철학자가 하루 종일 공원에 앉아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경비아저씨가 "아까부터 여기서 왜 이르고 있소, 당신, 어디서 왔소?" 라고 하자 "내가 그걸 몰라 지금 이러고 있는 거요. 내가 어디서 왔는지 당신이 좀 가르쳐 주시오." 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경비원이 "그걸 당신이 알지 내가 어떻게 알겠소? 이 사람 정신이 나갔구먼." 했답니다. 서로 차원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국어사전은 사람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합니다. '두 발로 서서 다니고 언어와 도구를 사용하며, 문화를 향유하고 생각과 웃음을 가진 동물' 두 발로 서서 다니는 동물,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 생각하는 동물입니다. 동물이라 하니까 속상하십니까? 그래도 짐승이라 안 해서 다행이지요. 이 정의가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요즘은 유발 하라리가 인간을 ‘호모 루덴스’, ‘호모 데오스’라고 정의했습니다. 루덴스는 유희의 인간, 놀이를 즐길 줄 아는 인간이란 말입니다. 내가 좀 놀 줄 안다, 왕년에 나도 좀 놀았어! 하는 분들은 호모 루덴스입니다. 호모 데오스는 돈과 권력을 가진 특권층이 자기들만이 누리고 즐기는 세상, 유토피아를 만들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희망적인 나라 유토피아가 아니라 가장 절망스러운 디스토피아가 될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사람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정의를 내린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그 중에 몇 사람을 살펴보면 먼저 찰스 다윈입니다. 창조론에 반대한 진화론을 주장한 다윈은 이렇게 정의합니다. '사람이 짐승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침팬지가 진화해서 인간이 되었다. 조상을 거슬려 올라가면 원숭이가 인간의 조상이다.'라고 합니다. 아직도 학교에서는 이걸 가르칩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대과학은 인간게놈 연구를 통해 원숭이와 인간은 결코 동질 유전자가 아님을 밝혔습니다.
또 한 사람은 지그문트 프로이드인데 인간은 결국 성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은 오로지 성적인 충동을 발산하고자 하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은 성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려 하는 본능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산주의 창시자인 칼 막스입니다. 그의 인간관은 유물론입니다. 즉 인간도 하나의 물질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신도 없고 영혼도 없고 개인의 권리나 인권도 인정하지 않고 사람의 가치를 공동을 위한 생산 활동의 도구로 그 존재를 인정합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지만 그는 개인의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결정한다고 했습니다. 전체를 위해, 당을 위해 나 하나가 존재한다는 무서운 인간관입니다. 그래서 당에 반대하거나 해가 되면 반동분자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런 정의, 의식이 잘못되었기에 그야말로 무자비한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성경적 인간관은 어떻습니까? 최초의 인간을 흙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일컬어 아담, 여자를 하와라 하였습니다. 아담이라는 말의 뜻은 사는 영이고 하와는 산 자의 어미입니다. 아담이후 사람을 히브리어로 '에노시'라고 기록했는데 이 말은 '깨지기 쉬운 존재, 연약한 질그릇'이라는 뜻입니다. 신약에 와서는 인간을 헬라어로 '안드로포스'라고 기록합니다. 안드로포스! 이 말 뜻이 얼마나 놀랍고 정확한지 모릅니다. 이 말은 "위를 바라보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존재, 단순히 희망을, 소망을 가진 존재라는 말이 아니라 창조자를 바라보는 존재, 신을 생각하는, 경배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에노시와 안드로포스를 함께 생각하면 인간은 깨어지기 쉬운 존재이나 자신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영적 존재입니다. 얼마나 정확합니까! 옆에 사람에게 그렇게 인사를 한 번 해 보십시오. 당신은 깨어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이나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영적 존재입니다. 말 한 마디에도 상처받고 깨어지기 쉬운 그런 아주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서로 조심해야합니다. '나 건드리지 마! 그러다 네가 다쳐!' 가 아니라 '건드리면 깨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고전15:45입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첫 아담은 사는 영이나 둘째 아담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고(요6:63)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요10:10).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사는 영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므로 우리 영이 살게 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오늘 다윗은 '사람이 무엇이기에' 라는 질문에 세 가지를 감탄합니다. 1.먼저 "사람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시는가" 라고 합니다. 생각한다는 말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말입니다.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어진 존재입니다. 우리는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 사랑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십니다. 돌보다는 말은 '조심스럽게 충고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끄러워,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시키는 대로 하면 될 것이지. 안 하면 밥도, 돈도 주지 마.' 이렇게 우리를 다그치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을 최대한 존중해 주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생각해서 깨우쳐 알도록 이끄시고 충고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죄에 대하여서도 너희가 내게 나와 변론하자고 합니다. "너희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사1:18)"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토론하잡니다. 솔직한 대화를 나누자고 하십니다. 왜 그렇게 인자하십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착하고 귀여울 때만 돌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하여 죄인 되고 원수 되고 스스로 살겠다고 떠나갔을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찾아오셨습니다. '삼고초려'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비가 제갈 공명을 세 번씩 찾아가서 만났다는 말입니다. 왜 찾아갑니까? 제갈 공명의 가치를 아니까 찾아갑니다. 장비는 그 가치를 모르니까 "형님, 그만 돌아갑시다. 저 놈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라고 합니다. 그러나 유비는 공명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기를 더 낮추고 굽힙니다. 그의 가치를 아니까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십자가에까지 찾아오셔서 아들의 피를 지불하고도 우리를 용서하고 얻으려고 합니까? 생명의 가치를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인 것을 우리는 몰랐지만 하나님은 아니까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어머니에게는 천하보다 귀한 아들인데 아들은 그걸 모르고 왜 날 낳으셨냐고 자신을 하찮게 여긴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진실로 당신은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돌아보시고 찾으시는 존재인 줄 오늘 이 시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믿으시길 바랍니다.
아주 탁월한 재능을 가진 이들을 그 방면에 천재라고 합니다. 운동선수들도 저 애는 십년에 한 명 나올만한 천재라고 감탄합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10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 정도가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일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처럼 귀한 보석은 이후에 더 이상 안 나옵니다. 여러분이 명품입니다. 자신이 명품인줄 모르니 더 좋은 명품을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물이 사람을 위해 있나요? 사람이 만물을 위해 있나요? 질문이 너무 거창합니까? 나무가 우리를 위해 있나요? 우리가 나무를 위해 있나요? 바다가 우리를 위해 있습니까? 우리가 바다를 위해 있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한 마지막 날에 사람을 창조한 것은 사람이 살아갈 최적의 조건을 갖추게 한 후에 만드신 것입니다. 즉 만물을 우리 위해 만드신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시기 위해 바다도, 고기도 만드신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명품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명품이 우리를 위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점점 명품을 얻기 위해 달려가는 어리석은 인간이 되어 갑니다. 자신이 명품인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명품임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2. 다윗이 두 번째 감탄하는 것은 5절에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영화와 존귀는 하나님의 속성을 표시하는 단어입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종류대로’ 창조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식물학에서 말하는 종을 따라 지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을 닮게 지었습니다. 이것이 인간 창조의 독특성입니다. 단순히 외모를 닮게 지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속성을 닮도록 지은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받은 축복입니다. 우리가 마귀의 성품과 속성을 닮도록 하지 않고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하셨다는 것이 얼마나 기뻐할 일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내면을 닮아가도록 지어졌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여,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못한 자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녀로 삼으시고 가장 존귀한 자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모세와 솔로몬이 성전기구를 만들 때 하나님은 제단과 등잔만 아니라 성전에 쓰는 모든 기구들, 즉 불집게나 불 담는 통, 부젓가락, 주발, 숟가락도 모두 정금으로 만들게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직분은 각각 달라도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모두가 순금 같은 가치 있는 자녀임을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입니다.
3.끝으로 다윗이 감탄하는 것은 우리가 만물을 다스리는 자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6절에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라고 합니다. 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어놓고 말씀하십니다. "생육하라! 번성하라! 땅을 정복하라! 땅을 다스리라!" 이처럼 우리에게 모든 만물들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창1:28). 정복하라는 말은 힘으로 짓밟아 뺏으라는 말이 아니라 잘 관리하여 돌보라는 말입니다. 가장 연약한 존재 같은 인간이 모든 동물과 식물을 다스리고 관리하도록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자보다 강하지 못하고 코끼리보다 힘이 없지만 지혜가 있어 도구를 사용하고 그들을 능히 부리며 다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능력을 주신 결과입니다.
이것이 오늘 다윗이 본문에서 감탄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또한 성경적인 인간관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자녀입니다. 육체는 흙이니 잠시 세상에서 낙을 누리며 호모 루덴스로 살다가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지만 우리 영혼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가기 전에 하나님을 기억하라,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전12:7입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요, 하나님을 닮아가는 존재요, 하나님께로부터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부여받은 존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정체성, 나의 정체성입니다. 이러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사셔야합니다.
이제 우리는 다윗이 감탄한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품 자녀답게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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