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배재록
사진, 배용정
흙탕물로 꾸불꾸불 흐르던 낙동강이 갈선대 앞에서는 유유자적
흐른다. 백두대간 계곡과 대지를 넘어 정처 없이 흘러온 강물이다. 피라미, 뱀장어, 은어, 수달, 꺽지 등 수많은 어종이 약육강식의
생과사의 전선에서 유영하며 살고 있는 생명의 물이다.
수 백리 물길을 흘러오면서 때로는 협곡을 흘러나온 지류를
모조리 합치 쳤다, 농업용수나 식용수로 몸을 기꺼이 바쳐
먹히면서 희생도 했다. 오로지 앞만 보며 낮은 곳으로 흘렀다.
흐르는 곳곳에 무수한 역사와 전설도 남겼을 것이다.
시인 묵객들의 심금을 울려 만들어 낸 대하극과 성찰 한 글도
남기며 오로지 낮은 자세로 흘러 왔다. 경사진 곳은 흐를수록
유속은 빨라지고, 폭포를 지나면서 깊은 소를 만들기도 했을
것이다. 물을 가두어 양이 점점 늘어난 댐은 어머니 자궁이 되어
생명의 강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태고부터 산은 모퉁이를 내주며 그 강을 가뿐하게 보듬고 넓은
품안에 안았다. 기꺼이 길을 내주던 산이 강이 그리워 산 그림자로 물속에 누웠다. 산 그림자를 품에 안은 강물은 왕모산 갈선대의
박수를 받으며 당당하게 안동댐으로 흘러든다.
안동댐에서 휴식을 마친 강물은 다시 흐를 것이다. 마침내 1,300리 낙동강 물길을 완성하고 부산 다대포 바다와 만나 심연의 바다로 흘러갈 것이다. 어머니 자궁이고 생명줄이었던 낙동강은 숭고하게 바다 세계로 여행을 떠난 것이다.
“더블유(W) 형태로 흐르는 낙동강을 볼 수 있는 산”
왕모산이다. 주소는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와 예안면 삼계리다.
퇴계 이황의 역사가 묻혀있는 산을 오르다 보며 산길 곳곳이
낙동강 전망대다.
산 아래는 구렁이가 기어가듯 구불구불 흐르는 사양천이 안동댐으로 흘러든다. 여성이 쪼그리고 앉아 있는 W자 형상의 물길을
만들었다. 긴 산줄기가 그 음부를 향하고 있으니 왕모산은
양기가 센 산일게다. 마을은 인물이 많 나왔을 것이라는 나름의
풍수를 쳤다. 땅의 이치를 음과 양의 조화와 오행으로 보는 것이
풍수가 아닌가. 기가 막히는 수려한 조망이다. 시를 읊고 수필이
저절로 이는 곳이다. 뭇 사람들이 왕모산을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왕모산의 발을 적셔주며 강은 흐른다. 단종이 유폐된
영월 청령포를 닮았다.
왕모산은 해발 고도는 648m에 불과하다. 숲과 기묘하게 생긴
소나무가 가득한 산자락과, 깎아지른 절벽이 걸작이다. 늠름한
낙동강 물줄기 조망은 기본이다. 멀리 북쪽으로 보이는 청량산의 정수리 봉우리가 실루엣으로 다가 왔다. 괴물 같은 고사목이
가끔 나타나 인생의 허무함을 일깨워 주고 각기 다른 나무들이
한 몸이 되는 연지리가 사랑을 모래 해 준다.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라고 했던가.
산 속에서 걷기의 여유는 잊고 있던 감정을 되찾게 했다,
왕모산에 숨쉬고 있는 신들의 세계를 관능으로 느꼈으니 참으로
값진 선물을 받았다. 12개의 산봉을 넘을 때 마다 마주한 절묘한 풍경은 걷는 자 만의 특권이었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안동으로 왔을 때 ‘왕의 어머니인 노국공주가 이곳에 피난하였다’고 하여 왕모산이라고 부른다.
나라 잃고 피난을 와서도 제 어머니는 챙긴 공민왕의 효심이 엿보인 산이다.
왕모산성은 길이 360m 중 현재 50m 정도가 남아 있다하나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왕모의 전설이 산의 이름이 된 것으로 기억하자. 가파른 등산로 자체가 천혜의 요새였다. 자연이 형성한 산성의 흔적이 엿보인다. 성 중앙에 왕모가 거처했던 왕모당이 있다.
2개의 목각인형이 안에 있다. 왕과 왕모의 형상이며, 주민들이
추모의식을 했던 새끼줄 흔적이 남아 있다.
공민왕이 안동에 피난 와서 안전한 곳에 있었던 몽진은 왕모당과 가송리의 공민왕당, 공주당이 남아 있다.
왕모당을 지나면 `갈선대’라는 간판과 가파른 수직암벽 위에
전망대가 있다. 자연전망대다. 공간이 협소하고, 발아래가 까마득한 절벽이다. 떨어지면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다.
한 폭의 동양화가 그려져 있는 것처럼 아름답다. 환상적인 낙동강의 조망이 발아래 깔린다.
갈선대의 갈선은 중국 오나라 때 신선이 된 갈현에서 옮겨왔다.
이육사도 갈선대에 올라 ‘절정’이란 시의 시상을 가다듬었다.
물 건너 원천리에 이육사 박물관이 있다. 퇴계의 14대손.
강직한 저항 시인으로 알려진 그의 문학적 기질도 퇴계의
학통에서 나왔다. 퇴계 선생이 자주 올라 시작을 했고, 읊기도 한 곳이니 멋진 전망대다.
먼 곳에 도산 9곡의 제7곡인 단사곡의 아름다운 절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퇴계 이황이 거닐던 길 중에 하나로, 신선이 살던
전설이 있는 절벽이다. 아기자기한 벌판을 파고드는 강줄기가
햇빛에 은빛을 뿜으며 빛났다.
한번 가본 사람은 반드시 다시 찾는다는 곳. `흥이 일어난다면
혼자도 갈 수 있는 갈선대’라고 퇴계선생은 설파했다.
교육과 학문 연구를 겸비한 성리학의 대 스승 퇴계. 퇴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안동 도산면이다. 도산면 온혜리에
태어난 퇴계태실, 토계리에 머물렀던 퇴계종택, 하계리에
퇴계묘소가 있다. 퇴계가 평생 학문을 닦던 서당이 사후 증축
되어 지금의 도산서원이 되었다.
도산면은 가장 많은 문화재와 유적이 있는 곳이다.
안동으로의 외출은 몸의 외출만은 아니었다. 생각과 느낌의
외출이었다.
공민왕 못지않게 왕건의 이야기도 많이 남아 있는 곳,
안동을 떠나면서 맛깔나는 삼겹살 구이를 했다.
첫댓글 배재록 전회장님!
구구절절 재미나는 산행기
잘 봤습니다.
왕모산에 대해 세세히 알려주심에
넘넘 감사하고요 수고많았습니다~♡
아 그분, 신부같은 악우님 무한의 역사적인 기록을 위해 글을 스는 사람 좋게 봐 주심에 감사를 드림니다.
좋은글과사진함께어우러져 글 잘 읽고갑니다
산행하느라 넘 수고하셨습니다
배작가, 고맙소, 자구봅시다.
항상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산행기 잘 읽고 갑니다 배재록 전
회장님 앞으로도 좋은글 많이 부탁드립니다
장국장 수고가 많습니다. 기다림과 인내의 끝에 번창이 옵니다, 홧틴
좋은글 잘 보고갑니다
고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