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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덴 근처의 호텔에서 자고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로 가는 길이다. 즐번한 평야가 이어졌다. 들과 숲을 지났다. 붉은 지붕과 흰 벽이 있는 작은 집들, 옹기종기 집들이 모인 작은 마을, 그 가운데에 십자가가 걸린 작은 교회 하나, 이 마을들이 루터 파 사람들이 살던 마을들일 것이다. 그들의 선조들이 막강한 로마교황청의 권력을 향해 반기를 들었다. 글도 모르는 사람들, 무지렁이들, 선제후의 도움을 받으며 그를 위해 평생 노예처럼 일했던 사람들, 그들에게 영적 지도자가 나타난 것이다. 루터를 따르고 그의 찬송을 불렀던 사람들, 그 동네를 찾아가는 길이다. 농민전쟁의 분위기가 어떠했을지 상상도 해본다. 체리가 익어가는 계절에 우리는 비텐베르크에 도착했다. 비텐베르크 성(城)교회와 시(市)교회의 첨탑이 보이는 동네에서 점심을 먹었다. 중국집. 식사는 풍성한데 콜라 값은 각자 지불이다.
먼저 비텐베르크 성교회(Schlosskirche, Castle Church)에 들렸다. 둥근 탑이 힘차게 하늘로 치솟고 있다. 루터의 강력한 의지와 신념의 표현일까? 탑의 머리부분 아래에는 띠가 둘러있고 Ein feste Burg ist unser Gott (내 주는 강한 성이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교회 앞마당에 발굴이 진행되는 곳이 있다. 구교회의 부속건물터라고 한다. 정면 흰색 문이 박물관 출입구이고 북쪽 문이 유명한 95개 논제(Anschlag der 95 Thesen)가 붙었던 문이다. 18세기 이래 청동 문으로 만들어져 있고 그 위에 글이 써있는데 공교롭게도 수리중이어서 큰 사진을 수리하는 부분에 붙여놓고 있다. 루터의 생애 중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는 95개 논제를 문에 붙이는 장면이 가장 극적인 사건 중의 하나인데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사실과 다른 면이 있는 것 같다. 루터 자신은 이 대목의 언급이 전혀 없고 후에 멜랑히톤이 “문에 논제를 못 박았다”라고 쓰고 있다고 한다. 당시에 토론할 의제를 대자보처럼 문에 게시하는 것이 관행이었지만 그 많은 분량의 논제를 문에 게시할 수 있겠느냐는 이론도 있는 모양이다. 아무튼 루터는 교황청에 항의할 의도보다 성경에 언급이 없는 면죄부 판매가 옳은 것인지 여러 신학자들과 토론을 원했던 것 같다.
성교회 안에 들어갔다. 성전 입구에 여러 명의 선제후를 매장한 무덤이 있고 루터와 멜랑히톤의 묘가 설교단 아래 좌우에 같은 모양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어느 곳에서나 루터와 멜랑히톤이 같은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놀랍다. 제단에는 예수의 십자가 고상이 서있고 그 뒤로 세분의 대리석 상이 서있는데 예수그리스도와 베드로와 바울이다. 제단의 오른편으로 성경을 든 루터가, 왼편에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들고 있는 멜랑히톤의 그림이 있다. 루터를 보살펴주었던 선제후 프리드리히(Friedrich III the Wise)의 무덤도 이 교회 안에 있다.
비텐베르크 광장으로 나왔다. 시(립)교회(Stadtkirche)와 박물관으로 사용하는 시청사가 광장을 만들고 있고 중앙에 루터와 멜랑히톤의 동상이 거리를 두고 서있다. 여기에도 두 분의 동상이 같은 크기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1.10-1546.2.18)는 1511년 비텐베르크로 부름을 받았고 수도원의 담당 설교자로 일하며 공부했다. 같은 해에 로마에 다녀와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이듬해 작센 선제후에 의해 비텐베르크 대학 종신교수로 임명받는다. 10년 전에 선제후가 자기 통치령 안에 비텐베르크 대학을 설립했던 것이다. 1513년부터 시편을 강의했고 1515년부터 로마서를 강의했다. 롬 1:17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하박국 선지로부터 내려오는 테제를 묵상하며 오랫동안 고민하며 갈등했던 신앙의 문제를 해결 받았다. 하나님의 의가 죄인을 심판하고 벌하시는 것으로 이해해왔으나 그를 믿는 자는 의롭다 여겨주시고 구원해주신다고 이해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구원이 믿는 자에게 전적으로 값없이 주시는 선물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1517년 10월 31일 12시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는 95개 논제를 게시하고 교황의 연옥에 대한 권능을 부정했다. 과거에도 면죄부를 발행한 일이 있었다. 십자군에 참가한 사람이나 십자군을 위해 특별헌금을 한 사람에게 면죄부가 주어졌고 로마에 순례하여 베드로와 바울의 묘를 참배하는 사람에게도 면죄부를 발행한 일도 있었다. 베드로 사원의 건축을 위하여 막대한 재정을 마련하려는 교황청에 반기를 든 것이다.
1520년은 루터에게 치열한 해였다. 그의 유명한 세 개의 논문을 잇달라 발표했다.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 기독교회의 개선에 관하여” 에서는 교회가 스스로 자정할 능력이 없을 때는 황제나 독일 귀족들은 기독교인의 자격으로 교회를 개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속 권력이 교회의 힘보다 우위에 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 대하여”에서는 교회의 성례전을 비판했다. 잘못된 성례전의 포로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했다. 세례와 성만찬을 성례로 인정했고 고해는 부분적으로, 나머지는 성례로 인정하지 않았다. 성찬에서 사제가 축성을 하면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의 교리를 반대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는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사랑 안에서는 그리스도인은 충실한 종으로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문과 주장들은 1440년 구텐베르크(Gutenberg)에 의해 발명된 금속활자 인쇄기를 통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작센 주를 휩쓸고 전 독일로,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1520년 7월 15일 교황 레오 10세(1475-1521)는 루터에게 파문장을 보낸다. 루터는 파문장을 도시의 소각장에서 불태워버린다. 1521년 봄, 보름스(Worms) 제국의회에 소환 명령을 받는다.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피신해 있는 동안 비텐베르크에서는 격렬한 종교개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멜랑히톤과 칼슈타트, 아우구스티누스 은둔수도회 신부들이 교회의 성상을 파괴하고 교회개혁을 단행했다. 선제후는 교회를 파괴하지 말라고 요구했지만 사제단 회의나 시의회에서도 막을 수가 없었다. 바르트부르크 성에 있는 루터에게 사태를 수습해줄 것을 요청했다.
1522년 3월,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와 3월 9일 사순절 첫 주일부터 시교회에서 설교를 시작했다. 폭력적인 교회개혁을 비판하며 자제할 것을 요구했다. 시교회(Stadtkirche, Marienkirche)는 13세기에 건립된 비텐베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이곳에서 마르틴 루터는 정기적으로 설교했다. 수도원을 떠난 신부들과 수녀들을 짝지어 결혼시켰고 루터 자신은 1525년 6월 13일 이 교회에서 수녀 출신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한다. 루터의 6 아이들도 모두 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시교회 안에 들어서자 정숙하고 시원한 분위기가 압도한다. 눈을 감고 기도한다. 깊은 감동이 온다. 제단에는 작은 십자가가 걸려 있고 그 아래로 유명한 제단화가 펼쳐져 있다. 이 제단화는 크라나흐(Lucas Cranach d.A)가 그린 것이다. 그는 비텐베르크의 시장이었고 루터의 친구였으며 가장 유명한 종교개혁 화가였다. 그의 아들 크라나흐(Lucas Cranach d.J)도 유명한데 성교회의 루터와 멜랑히톤의 초상화는 그가 그린 것이다.
제단화는 네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가운데 큰 그림이 크라나흐의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의 12제자 중에는 마르틴 루터, 멜랑히톤, 다른 종교개혁자들의 얼굴로 대치된 것도 있다. 좌편에는 세례를 베푸는 멜랑히톤, 우편에는 공개적인 고해의 장면이 있다. 루터의 개혁교회가 인정했던 성례 즉 세례(Baptism), 성찬(Communion), 고해(Confession)의 그림이 연결되어 있다. 하단 그림은 십자가 고상이 가운데에 있고 오른편 설교단 위에서 마르틴 루터가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설교를 하고 좌편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서 설교를 듣고 있다. 그곳에는 루터의 부인 카타리나와 화가 크라나흐 자신의 얼굴도 보인다. 성경만의 권위를 강조하고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설교했을 것이라고 한다.
시교회 안에는 15세기에 조각가가 만든 8각의 세례반이 있다. 위에는 물을 담아 놓았을 큰 통이 있고 아래로 받힘대가 있다. 교회마다 비슷한 세례반이 있는데 어떻게 세례를 베풀었을지 궁금했다.
시내로 나와 거리를 걷는다. 짙은 녹색 유니폼에 붉은 견장을 단 사람 대여섯이 드럼을 치고 행진을 한다. 고대의 무기 같은 것을 든 사람도 있는데 설명서에는 비텐베르크 역사적 도시행진이라고 써있다. 역사의 어느 부분인지 궁금했지만 설명서는 독일어로 써있어서 이해할 수 없었다. 시내를 걷다가 Leucorea 표지판이 붙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마르틴 루터가 강의했던 비텐베르크 대학이다. 의외로 건물은 크지 않았고 건장한 젊은이들이 모여서 놀고 있었다. 저 녀석들도 마르틴 루터를 알겠지. 동양에서 온 이상한 사람들이 떼 지어 다니며 구경하는 것이 신기하게 보였을 것이다.
멜랑히톤의 집도 보았다. 필립 멜랑히톤(Melanchthon 1497-1560)은 원래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고 인문주의자로 1518년부터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헬라어 교수를 했다. 마르틴 루터와 친구가 되어 종교개혁을 추진했다. 후대 사람들이 그를 마르틴 루터와 똑같이 추앙하는 것을 보면 그가 종교개혁에 얼마만큼 공헌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530년 6월 25일 아우구스부르크 시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신구 타협책을 모색했을 때 멜랑히톤은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제출했다.
루터의 집에 들렀다. 원래 수도원 자리인데 루터가 1511년 수도원 설교담당 사제로 비텐베르크에 온 이래 이 집에서 30년 이상을 살았다. 이곳에서 결혼하고 6 아이를 낳고 말년에 임종 직전에 고향에 다니러 갈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현재는 종교개혁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길을 걷다보면 루터의 참나무(Luther Oak)가 있다. 큰 고목 옆에 곧게 자란 어린 나무가 있고 그 앞에 표지판이 있다. 과거에 흑사병이 흔했기 때문에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의 옷을 태운 소각장이라고 한다. 루터는 교황에게서 온 파문장을 이곳에서 태웠다. 표지판을 읽어보니 불태운 다음날 이곳에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당시의 나무는 죽어서 베었고 현재의 고목이 1830년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오후 시간이 늦어지는 것 같아 서둘러서 아이슬레벤으로 갔다. 두 시간쯤 걸리는 거리였던 것 같다. 아이슬레벤(Eisleben)도 이름 앞에 루터스타트(Lutherstadt 루터의 도시)가 붙어있다. 비텐베르크와 아이슬레벤만 루터스타트가 불어 있는 것을 보면 두 도시에 루터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슬레벤에서 제일 먼저 루터의 생가를 보았다. Martin Luther Geburts Haus 표지판이 붙어있고 집은 수리 중이다. 마르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이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광부였는데 이듬해에 만스펠트(Mansfeld)시로 이사하여 광산업으로 재산을 모은 듯하다. 생가는 1689년에 불타버려 재건축했다. 루터의 집은 1693년부터 돈이 없어 학교에 못 가는 아이들을 위해 빈민학교로 사용되었다. 1817년 프러시아의 왕 프리드리히 빌헤름 3세는 새로운 빈민학교 건물을 생가의 마당에 지어주었다. 약 150명의 아이들이 공부했다고 한다. 생가의 골목에서 몇 걸음 걸으면 루터가 태어난 다음날 세례를 받았다는 성 베드로 바울 교회(St. Petri-Pauli-kirche)가 나온다. 세례 받은 날이 성 마르틴 축일이어서 마르틴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성 안드레아 교회(St. Andrew's Church)에 들렀다. 루터가 마지막으로 설교했던 교회다. 설교단은 루터 당시와 같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제단은 목각 제단화로 장식되어 있고 그 아래로 루터와 멜랑히톤의 흉상이 있다. 비텐베르크 시교회에서 루터는 1546년 1월 17일 마지막 설교를 하고 1월 28일 고향 아이슬레벤을 찾게 되었다. 고향사람들이 재산문제로 분규가 생겨 루터의 중재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이때 이미 루터는 질병으로 쇠약해진데다가 세 아들과 함께 고향으로 가며 얼음물의 홍수로 큰 고생을 했다. 그러는 중에도 2월에 네 번이나 설교를 했다. 그 마지막 설교를 성 안드레아교회 설교단에서 했던 것이다. 루터는 현기증을 느끼고 2월 17일 밤부터 사경을 헤매다가 1546년 2월 18일 아이슬레벤의 출생 장소에서 63세로 영민했다. 그의 시신은 2월 19일 안드레아 교회 안에 안치되었고 작센 선제후의 명령에 따라 비텐베르크로 이송되어 성교회 안에 매장되었다. 그의 마지막 설교에서도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을 것이다.
교회를 나와 시 광장으로 왔다. 안드레아 교회와 시청사가 광장을 만들고 있고 그 가운데에 성경을 든 루터의 동상이 우뚝 서있다. 기독교 역사상의 위대한 영웅을 그의 고향에서 만나는 것은 감동적인 일이었다. 근처에 루터가 임종했던 집(Luther Sterbehaus)이 있고 그 안에 데스마스크와 복원된 침대도 있다는데 시간이 늦어 들어가 볼 수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 해질녘의 아카시아 숲길을 달려 괴테와 실러의 도시, 또 음악대학이 유명한 바이마르(Weimar)로 향한다. (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