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당시의 정황을 조선의 野史를 집대성 했다고 전해지는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얘기가 기록되어 있다.
"갑인년(1614년,광해군 6년) 봄에 강화의 새부사 鄭沆이 이이첨이 시키는 대로 명령을 받들어 영창대군
을 압박해 죽였다.정항이 광해군의 뜻을 받들어 영창을 밀실에 가두어 두고 그 아궁이에 불을 뜨겁게
때어 답답하게 만들어 죽였다"
로 쓰고 있다.
새 강화부사가 된 정항은 당시의 권력 실세였던 이이첨이 보낸 사람이었다.1614년 2월 어느날 강화도
에 유배된(조선사의 강화도는 큰 江이 흐르는 華州의 오지 섬을 말하는 것임) 영창대군은 아침 한나절
을 귀양지의 마당에서 서성이다가 방안으로 들었다.그의 모습이 사라지면서 건장한 사내들이 하나 둘
씩 소리없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그들은 서까래로 쓰이는 긴 나무와 군불을 때기에 좋은 장작을 한아름
가지고 있었다.이들이 곧 만인들이 알수있는 蒸殺을 시도했던 자들이다.이들은 방으로 통하는 장지문
을 서가래 나무로 x 자로 봉했다.이로서 방안에 갇힌 영창대군은 사태의 위급함을 알고 목이 터져라
소리쳤지만,사내들은 사전의 명령을 이행하려 부억으로 달려가 아궁이에 불을 지폈을 뿐이다.방안은
時時刻刻으로 찜통으로 변해갔다.마침내 구들장도 발을 디딜틈이 없을 정도로 뜨거워 졌다.
2, 이제 겨우 9살(1614년경)에 불과했던 어린 영창이 무슨죄를 지었길래 증살을 당하는가? 이 모두는
이권이 걸린 권력의 파쟁 때문에 온것이 아닌가? 마침내 영창은 견딜만큼 견디다 방바닥에서 굴렀고,
손톱까지 까맣게 타서 숨이 끊어 졌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그러나 영창대군의 죽음은 1614년 2월
9일에 가서야 조정에 알려진다.도승지로 부터 영창의 죽음을 전해들은 광해는 말없이 앉아 있을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죽음의 원인도 증살이 아닌 病死로 보고 되었다.이모두는 이이첨이 꾸민
것 들이다.이때 완평부원군 李元翼은 목욕 재개를 마치고 책상앞에 앉았다. 이미 영의정을 두번이나
지냈고,나이 69세를 바라보던 이원익은 이제 더 바랄것이 없었다.남은 소망이 있다면 젊은 士林들이
모범이 되어 죽는 그날까지 그들로 부터 존경을 받는다면 아무런 여한이 없을 것이란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었던 나라의 원로였다.그는 평생을 초라한 초가에 살면서 정직과 청렴을 고집했던 사람으로
이쯤에서 삶에 때를 묻힐수 없다고 생각했고,그는 저항하기로 맘을 먹었다.
3, 광해군 7년(1615) 정월,아직 세배객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는데 이원익의 초가에는 공 廢母論이
발의될 것이라는 소식이 날아 들었다.이원익은 이모든 사태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벌어지는 인륜
의 타락이라는 자책감을 견디지 못했다.즉 목숨을 버려서라도 直言을 하지 않을수 없는 상황에 이르
게 된 것이다.東方禮儀之國(동방이자 동국은 예의지국=조선)으로 유학을 숭상하는 나라에서 군주가
어머니를 폐하는 悖德을 저질러서는 안된다고 생각을 했다.이윽고 이원익은 붓을 들어 간곡한 상소
문을 써내려 갔다.그 내용의 일부를 보면,
" 어머니가 비록 자식을 사랑하지 않더라도,자식은 어머니에게 孝道를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어머니와
자식 사이는 名分이 크고 倫紀(윤리와 기강)가 지극히 중한 것인데 성스럽고 밝은 전하의 시대를 맞이
하여 어찌 이런 종류의 일들(증살,폐모)이 있을수 있겠는지요?신은 先朝의 늙은 신하로서 충성은 鄭蘊
에 미치지 못하고 죽는 것은 李德馨보다 먼저하지 못하였으나 나라를 저버리고 군주를 속였으니 그죄
는 만번 죽어 마땅 하옵니다"(중략)
이렇게 시작되는 이원익의 폐모불가론은 눈물로 읽어야 할 정도로 구구절절했다.1615년 1월 9일 이원익
의 상소문이 광해에게 전해진다.광해군도 사람인지라 이원익의 상소문을 읽고 가책을 받았던 모양이나
애써 노여움을 누르면서 사관인 南溟羽(남명우)에게 시켜 이원익에게 상소문을 돌려주게 했다.즉 이원익
을 곤경에 처하게 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그러나 이원익은 광해군의 好意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그는
더 강경한 문장으로 폐모불가론을 당당하게 제기하자 광해도 더 이상 참지 않았다.
4, 영창대군을 보호하는 것이 인륜이라고 주청했던 이덕형은 削奪官職을 당한후 이미 세상을 떠났고,
폐모불가론을 강력하게 주장한 이원익 마져 '洪州'로 귀양을 가게 되었으니 그나마 지조를 지키던 조정
의 원로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현실을 보면서 사람들은 겁에 질려 입을 다물게 됐다.이어 광해는 인목
대비의 폐모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임진왜침때 의주까지 도망갔던 선조가 전쟁이 끝난후 도성에 돌아
왔지만 궁궐의 모두가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결국 선조는 월산대군(성종의 형님)의 사저였던 慶運宮
(지금의 반도 덕수궁이라고 억지를 쓰는 이들이 있다)을 임시 거처로 사용했었다.그러다 폐모론이 등장
할때 광해는 새로지은 창덕궁으로 이어를 한다.이어 경운궁에는 인목대비 혼자만 남게 된것인데 따라서
자동으로 유폐가 돤 것이다.이때 사정을 광해군 일기에서 보면,
" 3월 17일 왕이 전교하기를 창덕궁으로 이어한 이후에는 수문장을 입직시켜 경운궁의 잡인들의 출입
을 엄금해야 할것이니 수문장 10여 사람을 더 충원토록 하라"
고 했고,3월 19일 일기를 보면 더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 왕이 傳敎하기를 경운궁의 東門은 아침이면 닫고,저녘이면 열어야 할것이니 열고 닫는 시간을 상세히
아뢰도록 하라"
명했다.인목대비가 살고있는 경운궁에 수문장을 10명 이상 충원하라는 것은 감시용 宿衛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요 경운궁의 동문을 아침에 닫고 저녘에 열라고 한것은 교통(소통)을 끊어 출입을 통제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 겠는가? 그리고 4월 2일 광해는 인목대비만 경운궁에 남겨두고 자신은 신축한 창덕궁으로
이어를 했다.이른바 大妃의 칭호를 깍아 내린 것이다.경비는 삼엄했다.광해는 사헌부에 일러 광원들로 하여
금 돌아가면서 숙직을 하게 했고 감시를 철저히 하라고 했다.경운궁을 지키는 병사들로 하여금 밤마다 총포
를 쏘아 올리게 했는데,이는 인목대비를 공포에 떨게 하려는 술책이었다.겉 구실은 요사스러운 음기이자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