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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페르시아어: ایران)은 서남아시아에 있는 이슬람 공화국이다. 공식 명칭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페르시아어: جمهوری اسلامی ایران 좀후리-예 에슬라미-예 이란)이며, 1935년 전에는 페르시아로 알려져 있었다. 옛날부터 이란은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군주제는 시작된 지 약 1400년 만에 폐지되었으며 현재는 공화제 국가이다.
이란인의 직접적인 조상은 인도-유럽어족의 한 갈래인 아리아인이다. 이들이 이란 고원에 들어온 것은 기원전 2500년 쯤으로 추정된다. 중앙아시아 초원에 살던 아리아인들은 기원전 4000년~3000년 무렵에 이동해서 일부는 유럽에 들어가 게르만, 슬라브, 라틴의 원조가 되었고 일부는 남쪽의 이란 고원에 정착해 이란인이 되었다. 더 밑으로, 더 남쪽으로 내려간 사람들은 인도에 진출해 원주민이던 드라비다인은 남쪽으로 내려가고 현재 인도의 다수를 차지하는 인도이란어파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조상이 됐다.
지금의 이란 땅에 처음으로 페르시아인들이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9세기경이다. 흑해 북부지방인 러시아 남부지역으로부터 아리아 족들이 부족별로 지금의 이란지역으로 남하해왔다. 그 중 대표적인 민족이 파르사족과 메디아족이었다. 메디아족이 먼저 강대국으로서 국가를 형성하였고 파르사족은 메디아족의 지배를 당하는 민족이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 초에 메디아족에 이어 파르사족이 중동의 패권을 잡게 되었다. 모계는 메대의 왕손이었고 파르사족의 피를 이어받은 키루스 2세가 기원전 533년에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때 조로아스터교가 이란인들의 종교로 유입되었다. 키루스 2세는 구약 성경에 고레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 묘사되고 있을 정도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은 인물로 매우 유명하다.
아케메네스조는 전제군주제로서 다리우스 1세는 자신을 ‘왕 중의 왕’이라 부르며 높은 보좌에 군림하였다. 사방의 모든 민족이 매년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제국에 조공을 바칠 정도로 페르시아 제국은 강성해졌다.
기원전 4세기에 그리스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치러야 했고, 기원전 330년에 결국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정복당하였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지배하에서 그리스 문물이 이란 지역에까지 흘러들어왔고 후세에 헬레니즘 문화라고 불리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그리스인들의 지배 후에 이란은 뒤늦게 남하해온 한 유목민의 지배를 받았으며 그들의 제국은 파르티아라고 불렸다.
기원전 250년 경에 세워진 파르티아 제국은 전통적인 페르시아 제국의 전제 왕정과는 다른 정치체제로 세워졌다. 유목생활을 하던 지배층 민족은 거대한 제국을 통솔할 만한 정치지도력이 없어서 기존의 지방세력들을 그대로 정치세력으로 이용하였다.
따라서 파르티아 제국은 수많은 소공국들로 구성된 연방국가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파르티아 제국 안에는 페르시아족을 비롯하여 쿠르드족, 아프간족 등이 나름대로 소공국을 형성하여 포함되어 있었다. 파르티아 제국은 서쪽의 로마제국과 대치하였으며 강력한 로마제국과 벌인 많은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은 강대국으로 오랫동안 지금의 중동지역에서 세력균형을 이루었다.
파르티아 제국의 뒤를 이어 이란 땅에는 또 다시 전제군주체제의 전통적인 이란 국가인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이 226년에 건국되었다.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은 국교로 조로아스터교를 선포하였고 강력한 군주체제를 부활시켰다.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 때까지 이란인들의 생활 모습은 오늘날 이란인들의 생활 모습과는 다른 면이 많다.
그들은 1년 중 낮이 밤보다 길어지기 시작하는 춘분인 3월 21일을 가장 중요한 명절로 지켰으며 조로아스터교의 상징과도 같은 불을 숭상했다.
사산조는 7세기경 아라비아 반도에서 출현한 아랍 이슬람 국가의 침공을 받아 서서히 조로아스터교 대신 이슬람교를 그들의 종교로 따르게 되었다.
이란인들은 공식적으로 1258년까지 아랍인의 지배를 받았으며(물론 10세기에 페르시아 국가를 지향하는 사만조라는 페르시아 왕국이 세워진 적은 있지만) 1256년부터는 몽골의 침입을 받아 몽골인이 지배하는 일 한국에 편입되었으며 또 다시 16세기 초까지 몽골계 출신인 티무르가 세운 티무르 왕조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1502년 이란에서는 다시 모든 외세를 물리치고 이스마일 1세에 의해 사파비 왕조가 건국되어 1736년까지 국가가 지속되었다. 시아파 이슬람을 국교로 내세우면서 시작된 사파비조는 압바스 1세의 통치기(1588년-1629년)에 정치적, 문화적으로 최대 절정기를 누렸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 제정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침략(1724년), 아프간 왕국의 침공(1731년) 등을 당하는 등 쇠퇴의 길을 걷다가 1736년 멸망하였다. 하지만 카자르 왕조가 대를 잇게 된다.
사파비조 이후에 1794년에 카자르 왕조가 세워져 1925년까지 이어짐으로써 근대 이란의 모체가 되었다. 19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이란은 러시아 제국과 영국 사이의 전쟁터였다. 외세의 개입에 반대하는 신진 지식인들이 단체를 결성하여 외세에 대항하였으며 이들 세력에 의해 이란의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1906년 입헌 혁명이 성공함으로써 입헌 군주제가 이란의 새로운 정치제도가 되었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인 이란은 1907년 러시아와 영국의 보호지대로 분할되었으며 1914-1918년 사이에 발생한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중립을 선포하였으나 이란의 석유로 인해 양 세력들의 목표물이 되어 전쟁터로 변했다.
1919년 이란은 러시아의 공산주의 혁명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1921년 리자 칸이 쿠데타를 성공시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였으며 1925년, 카자르 왕조를 팔라비 왕조로 바꿈에 따라 샤로 등극되어 팔라비 1세가 되었다.
리자 샤는 터키의 서구화를 모방하여 서구화를 추진하였다(이미 이란의 서구화는 카자르 왕조 때에도 이뤄지고 있었다). 1935년에 와서는 국호를 페르시아에서 지금의 이란으로 변경하였으며 1936년부터 궁정의 여성들부터 베일을 벗기 시작하여 서서히 이란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같은 해에 리자 샤가 죽고 황태자인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팔레비 2세)가 샤에 올랐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국제 연합의 창설 회원국이 되었으며 1951년 석유 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였다. 한편, 1962년에는 백색 혁명이 일어나 종교 재단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등 강력한 개혁정책이 실시되었다.
이 개혁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서구문물의 유입으로 인한 이슬람 사회의 변질을 우려하던 여러 종교 지도자들의 반정부 운동을 부추기게 되었다(특히 호메이니의 경우이다). 팔라비 왕조는 1979년에 혁명으로 폐지되어 지금의 공화국으로 바뀌고 말았다.
1963년 6월 호메이니(Khomeini)의 주도로 반백색혁명이 발생하여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호메이니는 이라크의 바그다드로 망명하였으나 그의 정신적 지도력은 이란 내 학생들과 농민들 사이에 계속 영향을 미쳤으며 1970년대에 경제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샤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높아져 갔다. 샤는 국가를 통제하기 위해 이러한 불만세력들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하였고 이러한 강경대응은 더욱 반정부 운동을 강화시켰다.
1977년 11월 테헤란에서 시위가 일어났으며 1978년 2월 타브리즈(Tabriz)에서 폭동이 발생하는 등 심화된 반 팔레비 운동은 1979년의 이슬람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79년 3월 30-31일 국민투표에서 98%가 이슬람 공화국 수립을 지지하였으며 파리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루홀라 호메이니가 4월 1일 이슬람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슬람 공화국 수립 이후 이란은 국내외적으로 아주 복잡한 정치환경에 처하게 되었다.
1980년 1월 25일 대통령 선거에서 제1대 대통령으로 아볼하산 바니사드르가 당선되었으며 4월 7일 공식적으로 미국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1979년까지는 친미 국가). 그 해 9월 22일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생하였다. 바니샤르 대통령은 그로부터 1년 남짓 지난 1981년 6월 호메이니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해임되고 7월 24일 모하마드 알리 라자이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나 8월 30일 일어난 폭발 사건으로 사망하였다. 호메이니는 국기를 변경하고 남녀 공학을 금지하였다.
10월 2일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현재 호메이니를 이어서 국가원수인 최고 종교지도자 직위에 있는 알리 하메네이가 당선되었다. 하메네이는 1985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되었으며 호메이니와 협력관계를 잘 유지하였고 결국 1989년 6월 3일 호메이니가 사망한 다음 날 이란 최고 종교지도자로 피선되었다.
호메이니 사후 이란 정치는 하메네이와 대통령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의 2인 구도로 확정되었다. 라프산자니는 1989년 7월 28일 제5대 대통령 선거와 1993년 6월 12일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연이어 당선되었다.
이란의 주요 지명 |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거대한 사막 국가와 달리 기본적으로 사막이 아닌 고원으로 이뤄져 있다. 북쪽의 고원지대는 상당히 추워서 1년의 절반 동안 눈에 덮여 있는 곳들도 있다. 이란의 국토는 남부(자그로스 산맥)와 북부(알보르즈 산맥)에 있는 두 개의 산맥과 함께 3개의 지형구로 구분된다.
북부에선 이란의 최고봉 다마반드 산(5771m)이 있는 알보르즈 산맥(엘부르즈 산맥이라고도 한다)이 아르메니아 고원에서부터 카스피해 남안을 거쳐 힌두쿠시 산맥으로 이어지며, 남부에선 자그로스 산맥이 리자이야 호 부근에서부터 페르시아만에 연해서 달리고 있다. 두 산맥을 별도로 할 때, 국토는 알보르즈 산맥과 카스피 해 사이에 낀 협장(狹長)한 평야지대, 알보르즈 산맥과 자그로스 산맥에 둘러싸인 이란 고원 본토, 자그로스 산맥 남쪽의 페르시아 만 연안지방의 3개의 지형구로 구분된다. 이 중 면적이 가장 큰 지형구가 표고 500 ~ 1,500m의 이란 고원 본토인데, 이 고원 북부에 카비르 사막과 나마크 호수, 동남부에 루트 사막과 소택지 등이 산재한다.
대륙성 기후로서 기온의 연·일교차가 크다. 연강우량은 수도 테헤란 지방의 경우 230㎜에 불과해 완전한 사막, 스텝 기후를 보이고 있는 데 비해, 카스피해 연안지방은 1,000㎜ 이상으로 아열대 식물도 자란다.
1979년 이후 헌법 규정에 따른 입헌이슬람공화제를 취하고 있다. 정치 제도상 여러 평의회 조직이 있어 복잡한 관계다. 이들 평의회는 민주주의적인 선거로 선출되는 의회와 종교적인 맥락에서 선출되는 의회, 또는 양자로 구성되는 의회가 있다.
행정부 수장으로서 정책을 집행하는 역할을 한다. 임기는 4년. 재선은 가능하지만 3선은 금지된다.
육군 350,000명 , 해군 18,000명 , 공군 52,000명 , 바시즈 민병대 1,000,000여명(소집 시)
혁명 수비대 125,000명 사업영역 : 운송과 건설, 수출입, 석유와 가스, 기간산업 등에 관여, 이란에 밀수입되는 상품들이 거래되는 지하경제 장악
코도스 군단(Qods Force) : 혁명 수비대 정예부대 임무 불명확, 이란 전략 탄도 미사일 통제 및 핵심 권력기관에 관여
F-14A 36대, MIG-29 UB 펄크럼 40대, F-4D , F-4E 총 72대, F-5 프리덤 파이터, F-5 II 타이거 총 102대, C-130 허큘리스 수송기 24대, P-3대잠 초계기 6대, IL-76AEW 조기경보기 2대, 아자라크쉬(번개), 새케흐(천둥) 전투기, Ababil III 등을 보유
Ababil III 무인 정찰기는 항속거리 145Km, 상승고도 4,300m이다. 공격기로도 개조가 가능하다.
이란이 설계하고 자체개발한 스텔스 전투기 카헤르(Quaher)-313를 보유하고 있다. 저고도로 비행으로 적군의 레이더를 피할 수 있으며 무기를 탑재하고 비교적 짧은 거리에서 착륙할 수 있다. 공중 목표와 지상 목표를 타격할 수 있다.
핵무기 성능을 진전시키는 중이고 지속적인 핵무기 생산능력을 발전시키는 중이다.
대한민국과는 1962년 10월 23일 수교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1973년 수교하여 이란-이라크 전쟁 때 이란을 군사적으로 지원했던 적이 있었다. 2016년 현재 이란과 대한민국을 직접 연결하는 항공편은 없어 다른 나라를 경유해야 이란에 갈 수 있다.
2016년 초 이란의 국제 제제 해제로 인해 대한민국과 이란 간의 교류도 가속화될 예정이다. 1월 27일, 청와대는 "박근혜 대통령이 이란 방문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으며,[1] 지난 1977년 자매결연을 맺었던 양국의 수도인 서울특별시와 테헤란은 각 시장이 서로의 도시를 방문 및 논의하여 양국 교류를 확대키로 했다.[2]
이집트와 이란은 1939년 양국에 대사관을 설치하였다. 1979년 이란 혁명이 일어나 축출된 팔라비 왕조에 이집트는 도피처를 제공하였다. 또한 1979년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는 평화조약에 서명하자 이란은 이집트와 단교를 선언하였다. 이후 이란은 시아파 무슬림 국가의 종주국으로 서방과 대립각을 세웠고, 수니파 무슬림이 많은 이집트는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친서방 노선을 걸었다.[3]
미국과는 달리 러시아와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다. 소련 시절부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지금도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원래 이란은 미국과 외교관계가 있었으나, 공화정이 출범한 이후 반미정부가 출범하면서 단교하였다. 이란의 이맘 알리 하메네이는 "미국이 석유를 잡아먹겠다면 미국은 석유의 위기를 겪게 될 것이다"고 발언하여 미국을 압박했다.
이란은 자국 내 아제르바이잔 계 주민이 아제르바이잔의 도움을 받아 분리독립을 요구하거나 아제르바이잔이 이란령 아제르바이잔의 영유권을 주장할 것을 우려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과의 관계는 그리 좋지 못한 편이다. 일례로 이란은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때 아르메니아를 지지하기도 했다.
이란의 경제는 중앙계획의 국유 석유회사와 국유 대기업, 농촌지역의 농업 및 소규모의 상업, 벤처에 의한 서비스업 등의 민영 기업으로 이루어진 혼합경제이다. 석유개발 이전에는 농업이 주요산업이었으며, 공업은 페르시아융단을 생산하는 전통적 수공업이 있을 뿐이었으나,[4] 정부는 이전부터 줄곧 시장화 개혁을 행하여, 석유에 의존하는 이란 경제의 다각화를 도모하여, 수익을 자동차 공업, 우주항공 산업, 가전 제조업, 석유화학 공업, 핵 산업 등 타 부문에 분산 투자하고 있다. 차바하르 자유무역지역, 키슈 섬 자유무역지역의 설정 등을 통하여 투자환경의 정비에 노력하여 수억 달러 단위로 외국 투자를 유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현대 이란의 중산계층은 두텁고 견실하여 경제는 발전을 지속하고 있으나, 한편으로 고인플레, 고실업률이 문제이다. 인플레율은 2007년 평균 18.4%, 2008년 4월(이란력)에는 24.2%에 이르렀다. 재정적자는 만성적인 문제로서, 이것은 식품, 가솔린 등을 중심으로 년 총계 약 72억 5천만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정부보조금이 원인의 하나가 되고 있다. 이란은 OPEC 제2위의 석유 생산국으로서, 확인되고 있는 세계석유 매장량의 10%를 차지하고 있으며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다음가는 세계 제2의 석유 수출국이다. 1996년에 매우 견실했던 원유가격은 이란의 재정적자를 보충하고, 채무 원리금 미지급금의 상환에 충당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또한 천연가스 매장량에서도 러시아에 이어 세계 제2위이다.
취업 인구의 약 55%가 종사하는 농목업이 이란의 기간산업이지만, 기후와 지형조건 때문에 농경지는 총면적의 10%에 불과하며 휴한지가 많아 작부 면적은 매년 농경지면적의 3분의 1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이란 고원에서의 농경지는 오아시스 주변의 좁은 지역에만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보링에 의한 지하수 개발과 트랙터의 보급 등 생산 기술의 개선도 약간은 이루어진 편이나, 농업 기술은 아직 낙후된 상태이며, 대토지 소유 제도가 근절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생산성이 낮아, 농업 생산액은 총생산액의 20% 정도에 머물고 있다. 주요한 농작물은 밀·보리·야채·사탕무·면화·포도·멜론 등이며 카스피해 연안에서는 벼·차·오렌지의 재배를 볼 수 있다.[4] 농업에 있어서 국가투자, 생산자유화에 의한 활성화를 목적으로, 외국에 대한 판로 확장, 마케팅 등으로 수출시장을 개발하여, 전반적으로 개선되었다. 대추야자, 피스타치오, 화훼 등 수출용 농업 생산물의 확대, 대규모 관개 계획에 의한 1990년대의 이란 농업은 경제 부문 중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이 있었던 분야이다. 농업은 여전히 이란의 최대의 고용을 유지하고 있는 부문이다. 이란은 바이오테크놀로지와 의약품 제조 등에도 힘을 쏟고 있다. 주요 무역국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러시아, 중국, 일본, 한국 등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시리아, 인도, 쿠바, 베네수엘라,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개발도상국과의 경제 협력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역내의 터키와 파키스탄의 통상을 확대시키고 있어, 서아시아, 중앙아시아의 시장 통합의 비전을 공유하고 있다.
이란 경제제재는 이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경제제재로 인해 이란 리알의 가치는 폭락했다.[5] 2012년에는 1달러에 16,000리알이던 것이 2013년 4월에는 36,000리알까지 떨어졌다. 2016년 1월 16일 이란이 포괄적 공동행동계획을 잘 이행함에 따라서, 이란에 대한 모든 경제제재는 해제되었다.
육상 교통은 산유국답게 잘 정비된 도로망에 주로 자동차가 이용되고 있다. 원거리 버스 노선도 잘 발달하여 북·서유럽 여러 나라와의 사이에 국제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테헤란에서 서쪽으로는 자동차전용고속도로가 이어져 있다. 도시교통도 전적으로 택시·버스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교통의 마비상태는 대단하다. 철도는 테헤란을 중심으로 페르시아만연안·카스피해연안·아제르바이잔·호라산·케르만에 통하고 있으며 그 연장은 5,000㎞에 달한다.[6]
이란의 인구는 전체 67,540,002명(1997년 7월 통계)이며 다민족으로 이뤄져 있다. 페르시아족이 51%, 아제르바이잔족이 24%, 길란-마잔다란족이 8%, 쿠르드족이 7%, 아랍족이 3%, 루르족이 2%, 발루치족이 2%, 투르크멘족이 2%, 기타 1%(유럽계, 러시아인, 인도인, 유대인, 집시, 한국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이란에 사는 약 500명의 한국 교민들은 주로 테헤란 지역에 거주한다.
'고귀하다’라는 뜻을 가진 이란 사람들은 대체로 온순하며 여러 사람이 함께 토론하고 대화하는 것을 선호한다. 또한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에서 널리 사용되는 말인 "인샬라"(모든 것은 신에게 달려있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며 이러한 정신이 삶 속에 깊이 새겨져 있어서 매사에 느긋하며 의사결정에 상당한 시일이 소요된다.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이어서 상대방이 자신에게 직설적으로 잘못을 지적하는 경우 이를 잘 참지 못하는 면이 있다. 또한 과거 페르시아 상인이라는 말이 있듯 상술에 정통하다.
한편, 이란은 지역마다 서로 다른 인종, 언어, 문화적인 독립성을 가지고 있어서 지방색이 강하다. 이란에서는 다음의 이야기가 있다.
이란의 인구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페르시아족은 기원전 12세기로부터 기원전 9세기까지 지금의 이란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던 아리아족의 대표적인 무리였으며 이들이 이란 중남부 지역의 파르스 지방에 정착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명으로부터 페르시아라는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 페르시아족은 쿠르드족과 같이 인도유럽어족의 일원이며 본래 백색 피부에 곱슬머리카락을 가진 자들로서 유럽인들과 같은 체질을 가지고 있었던 민족이다. 페르시아족이 이란 역사의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흔히 ‘이란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바로 페르시아인을 뜻한다.
이란에서 두 번째로 많은 민족인 아제리족은 터키 민족과 같은 민족 튀르크족의 일파이다. 아제리족이 사용하는 아제리어는 아제르바이잔의 아제리족이 사용하는 언어와 같으며 원주민들은 터키 사람들과 통역 없이도 어느 정도 의사전달이 가능한 정도이다. 튀르크계 민족인 아제리족이 이란에 거주하게 된 것은 이란이 오랫동안 튀르크계 민족의 지배를 받은 것을 반영해 준다.
그리고 이란의 북서부 카스피해 연안의 길란주와 머잔다런주에 거주하고 있는 길란-머잔다런인들이 세 번째로 많은 인구를 차지하고 있으며, 네 번째는 인구 3,000만 이상의 거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국가를 가지지 못한 쿠르드족이 서부의 산악지대에 거주하고 있다. 이란에 살고 있는 쿠르드족은 500만~600만 명 정도에 달한다.
이러한 주요 민족집단 외에도 투르크메니스탄과 접경한 후라산 지역에는 투르크멘족이 살고 있으며 이란의 남부 지역에는 수많은 소수 민족이 아직도 유목생활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밖에도 북서부 지역에는 약간의 조지아인, 러시아인도 거주한다.
이란은 민영 방송이 헌법으로 금지되어 있어서, 국영 방송인 이란 이슬람 공화국 방송이 방송을 독점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2005년 무하마드 하타미 대통령이 퇴임하기까지 개혁파 집권 기간에는 국영통신 IRNA, 이란학생통신(ISNA), 파르시타임스 같은 언론들이 파르시와 영어로 활발하게 안팎의 소식을 전했으며 오히려 국영, 관영 언론들이 개혁과 민주주의의 대변자가 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슬람권에선 역설적으로 언론이 자유로운 나라에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보수파의 반격으로 법원이 제동을 걸어 2002년, 2003년 물리적 충돌이 벌어졌으며 2005년 보수파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로 통제가 강화됐다.
이란의 공용어는 페르시아어이다. 페르시아어는 이란전역에서 사용되며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등 다른 나라에도 페르시아어사용자가 존재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사용되는 다리어, 타지키스탄의 타지크어도 페르시아어에 포함되기도 한다. 이란의 소수 민족들은 페르시아어를 포함해서 자신들의 언어도 구사하며 쿠르드족들은 쿠르드어를 사용한다. 그 외에도 교육받은 사람들은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도 사용할 줄 안다.
이란은 인접한 이라크와 아라비아반도 등 서남아시아 이슬람지역 다른 나라들과 달리 아랍 문화권에 속하지 않으며, 민족도 아랍과 다른 이란 민족이다. 언어 또한 파르시(페르시아어)를 쓰고 있다. 다만 이슬람교가 지배종교가 되고 칼리프제에 복속된 이후 아랍어와 파르시의 교류가 많아졌다. 파르시는 기원전 7세기~ 기원전 4세기 무렵에 쐐기문자를 빌려서 기록하였으나, 7세기 말에 이슬람 문화가 이란에 전파되면서, 아랍 문자와 비슷한 알파벳을 쓰는 표기로 바뀌었다.
이슬람 문화권의 여성들이 흔히 쓰는 히잡(머리쓰개) 중에서 특히 이란 지역의 여성들이 많이 사용하는 온몸을 덮는 두건을 차도르라고 부른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의 거리를 걷는 페르시아 여성들을 보면은 차도르를 입고 다니는 여성들이 있지만, 반면에 차도르를 입지 않고 양의를 입는 여성들도 많이 있다. 이슬람 문화로 인해 남녀 공학이 금지되어 있다. 여기에 더해 이란은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도 여성 챔피언을 규제하고 있다.
2011년 조사에 따르면 이슬람교 99.4%, 기독교 0.16%, 조로아스터교 0.03%, 유대교 0.01% 등으로 조사되었다.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슬람교 신자의 92%는 시아파 중 열두이맘파에 속한다.[7][8][9] 나머지 8%는 이슬람교 수니파인데, 이들 대부분은 쿠르드족과 발루치족이다. 그 밖의 종교로는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유대교 등이 있으나 신자 수는 매우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