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26. 주일예배설교
사도행전 23장 11절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 혹시 설악산에 있는 흔들바위를 아시는지요? 가서 흔들어 보신 적은 있으신지요? 제 기억에는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가본 것 같습니다. 친구 여럿이 흔들었는데 그대로 있더군요. 혹시 천하장사 수십 명이 붙어 흔들면 굴러 떨어뜨릴 수 있을까요?
이 흔들바위는 만우절만 되면 단골 소재가 됩니다. ‘흔들바위가 굴러떨어졌대!’ 그런데 설악산 흔들바위는 여전히 건재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바울을 보면 설악산 흔들바위가 생각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이유를 통해 우리의 믿음의 태도에 도전을 받고자 합니다.
■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복음전도자로 헌신하였습니다. 물론 이방인을 위한 헌신이 본인의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진작부터 바울을 점찍어 놓으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진작부터 이 일에 쓰기로 작정하셨기에, 그의 집안 배경, 그의 학식, 그의 재능 등 모든 것을 이방인 선교에 적합하도록 준비시키셨습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바리새파로 이스라엘 주류에 속했고, 주류 중에서도 명문가였습니다. 특히 로마 시민권을 태어나면서부터 가질 수 있을 만큼 막강한 재력과 권력을 소유한 집안이었습니다. 덕분에 뛰어난 교사 밑에서 수학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갖고 태어난 재능과 지력도 탁월했습니다.
이렇게 준비된 사람이기에 세계의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소화하고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성령님은 바울을 준비시키셨습니다.
이렇게 모든 준비가 끝나자, 주님은 다메섹에서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복음전도자로 살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부르심에 순종한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복음전도자로 헌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헌신은 결코 만만한 헌신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이동 수단이라는 것이 그리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였으니 나라를 옮겨 다닌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비행기도 없고, 자동차도 없고, 모터보트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이동이 보통 어려웠던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불평 없이 헌신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동 수단의 불편함은 바울을 위협하는 것들에 비교하면 껌(?)에 불과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을 위협했던 그것들이란 무엇인가요? 바울의 복음 전도 행위를 방해하고 위협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바울을 향한 위협은, 무엇보다도, 동족 유대인들의 난동이었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유대인들의 방해와 횡포가 있었습니다. 마치 이전의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난폭하게 괴롭혔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동족으로부터 수많은 살해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전적으로 종교적인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동족은 아니지만, 우상 제조업자와 장사꾼들로부터 위협을 받기도 했습니다. 바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섬기던 우상을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이런 우상을 섬기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며 주변을 설득하였습니다. 이에 우상 제조업자와 장사꾼들의 생계가 끊어질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들은 주민을 선동하여 바울을 없애려고 했던 것입니다. 전적으로 개인적인 이유였습니다.
이러한 위협, 살해의 위협이 있음에도 바울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사명으로부터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 일을 맡기신 분을 전적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바울을 믿음의 동료들이 간곡히 만류했지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만났을 때, 바울은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20장 23~24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렇게 신앙고백을 한 후, 예루살렘으로 가던 중, 두로 항을 경유하게 되었는데, 그곳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로부터도 예루살렘행을 간곡히 만류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21장 12~14절입니다.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아니나 다를까,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만류하던 이유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바울을 기다렸다는 듯이 유대인들의 모함 작전이 시작되었고, 결국 바울은 잡혔습니다. 유대인들은 쾌거를 불렀고, 바울을 처단할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때마다 살아났습니다. 이처럼 잡히고, 고통받지만, 결국 살아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믿었고, 사명을 맡기신 분을 전적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처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온몸으로 주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기적을 경험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임재와 주님의 음성을 직접 보고 들으니, 이에 믿음은 확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울이 체험한 대표적인 주님의 임재와 음성입니다. 11절입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이러한 신앙적 체험들이 바울을 견고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 누가, 그 어떤 힘이 바울을 흔들어대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체험했다는 사실로 흔들리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전적인 붙잡아 주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죄수가 된 이후 로마에 이르는 동안만 보더라도, 주님의 붙잡아 주심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는 간계를 치밀하게 세웠습니다. 그리고 목숨을 건 결사대까지 조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울의 조카를 통해 그러한 간계를 알게 하셨습니다. 결국 그들의 간계는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로마로 호송되는 과정에서는 죽을 위기를 수도 없이 겪어야 했습니다. 폭풍과 풍랑으로 인해 배가 파손되고 침수되는 등 죽을 위기를 수없이 겪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울과 그의 일행을 붙잡고 계셨습니다. 27장 18~26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 바울을 흔드는 일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웬만하면 조금이라도 흔들릴 법한데, 바울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특히 자신의 사명에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 일을 맡기신 분을 전적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자신을 붙잡고 계신 주님을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를까요? 바울은 위대한 사람이니 흔들리지 않게 해주시지만 우리는 다를까요? 바울은 사명이 크니 흔들리지 않게 해주시고 우리는 다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만 위대하시니, 누구도 위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두고 ‘위대하다, 초라하다’를 말해서는 안 됩니다. 사명을 두고도 ‘크다, 작다’를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만 위대하십니다. 우리는 단지 위대하신 하나님에 의해 존귀한 자가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바울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임재와 음성을 놓치지 마십시오. 주님이 함께하심을 놓치지 마십시오. 주님이 베푸시는 일상의 크고 작은 기적들을 놓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여러분 누구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여러분 모두에게서 흔들리지 않는, 아니 흔들 수 없는 믿음을 보고 싶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