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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8일(주일) 주일설교 레위기 10:1~20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려면'
오늘은 레위기 10장 1~20절 본문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려면‘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삶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이 땅을 그렇게도 열심히 살아가고 계십니까?
네이버 지식인에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질문~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중학교에 재학 중인 15살 학생입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중2병인 것 같지만 요즘 왜 사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종종 들어서요. 저는 삶을 살아가는 목표도 딱히 없고 살아가는 이유도 없는데 왜 사는지 잘 모르겠어요. 보통 행복하려고 산다고 하는데 저는 제가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모르겠고 하고 싶다고 생각이 드는 일도 없어요. 그리고 가족이나 친구들 때문에 살아간다고도 하는데 좀 작위적인 것 같고 저는 그렇게 친한 친구도 없고 부모님이 저를 사랑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가끔씩 의심이 들기도 해요. 그래도 그냥 살고 있긴 한데 가끔 반복되는 하루에 아무 생각 없이 숨만 쉬며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어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청 열심히 노는 것도 아니라 그냥 어중간하게 공부를 하고 있어서 한심하게 느껴져요. 이왕 태어난 김에 사는 거고 태어나면 죽음을 향해 간다고 하는데 그러면 죽지는 않아도 열심히 살 이유는 없지 않나요? 좀 글이 두서없이 써졌네요. 답변 부탁드립니다.
답변 네, 질문자님이 중학생이라면 학교에서나 가정 등에서 오직 공부가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왜 사는지 등에서 대해서 질문자님이 궁금해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유는 행복하기 위해서인데요.
만약에 행복이 없다면 인생을 살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을 위해서 아주 큰 목표를 가져야 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정말로 목표를 이루어 아주 행복하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인생을 사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질문자님은 목표가 있습니까? 만일 없다면 목표를 가지시고 그 목표를 가지고 매일매일 열심히 최선을 다한다면 그것이 우리가 사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힘내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 목표를 정하고 최선을 다하면 그 목표를 이루게 되고 그렇게 되면 행복하게 된다는 것이 답변의 요지겠지요. 너무 막연합니다.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고, 참으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소요리문답 제1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가장 먼저 인간이 스스로 존재하는 자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창조에 의한 피조물인가 하는 문제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로서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수많은 혼동과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인간 외에도 수많은 우주만물과 그 안의 피조물들에 대한 출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가 1:1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이 성경의 첫 번째 책과 첫 절에서 나오는 것은 우연한 일이거나 단순한 수사학적인 출발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과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창조에서 출발하지 않는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과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에 의해서 존재의 기원과 목적을 찾는 것은 합당한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논리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에서 논의의 출발점을 찾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즐거워하는 것으로서 존재와 행위의 목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를 증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 그 목적을 위해서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전 10:31에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4:11에서는 하늘의 광경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지상의 존재가 아닐진 데, 보좌에 앉으신 세세토록 사시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나, 경배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고, 보좌에 앉으신 이가 만물을 지으셨고, 만물이 주님의 뜻대로 있었고, 지으심을 받았다는 것, 즉 창조되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비이성적인 존재나 이성적인 존재 모두가 이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의 창조주가 전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당연한 일로서 하나님과 성경을 인정하는 사람들의 모든 존재 목적과 존재와 행위, 그리고 삶과 그 삶의 모든 영역과 가치관 까지 포괄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즐거워하는 것으로서 존재와 행위의 목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를 증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 그 목적을 위해서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큐티인을 큐티하면서 늘 듣는 말씀이 바로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입니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동의하셔야 우리의 인생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이 명령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하나님 앞에 분향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한 아버지 아론의 반응에 대한 내용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이 정하신 불이 아닌 다른 불을 각자 향로에 담아 분향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 앞에서 불이 나와 그들을 삼킵니다. 참으로 전혀 생각하지 못한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땅을 살아가면서 참으로 전혀 생각하지 못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경험한 적이 있다면,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고 이제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려는 삶의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3절)을 드러내는 삶을 살려면, 내 삶의 모든 사건을 말씀으로 해석해야 합니다(1~7절).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의 모든 사건들을 무엇으로 해석하십니까? 바라기는 ‘말씀’으로 해석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건을 해석하려는 내 생각과 나의 방법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내게 명령하신 것을 정확히 알고 준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해석은 시대는 물론 사람마다 다릅니다. 역사를 보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해석도 진영에 따라 다릅니다. 보수는 진정한 대통령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진보는 독재자라고 해석합니다. 성경에도 보면,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가 있는데요, 거인 골리앗은 소년 다윗이 한 주먹거리도 되지 않는다고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힘으로 나가면 가능하다고 해석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인간적으로 해석한 골리앗은 패배했고, 하나님 중심으로 해석한 다윗이 승리했습니다. 성도들의 삶의 관건은 주일예배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있다고 봅니다. 저는 주일 예배가 인생을 바꾼다고 해석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매주 드리는 주일 예배, 이 한 시간쯤이야! 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드리는 주일 예배 1시간은 아주 적은 시간입니다. 일주일의 168분의 1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해석에 따라 주일예배 한 시간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저는 1시간의 예배가 일주일 168시간을 좌우한다고 해석합니다. 아니 1시간의 예배가 인생 전체를 좌우할 수 있다고 해석합니다. 이런 해석 때문에 예배 1시간에 인생을 거는 것입니다. 그만큼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한 시간동안에 어떤 역사를 일으키실지 모르니, 기대하고 또 기대하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1절에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합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명하신 여호와의 불’로 분향했어야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명하신 여호와의 불’ 속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제사에는 제물을 번제단에 올려서 태워드리는 방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중에 가장 중요한 제사는 번제입니다. 번제는 제단 위에 숫양의 제물을 재가 될 때까지 연기를 피워 하늘로 올리우는 제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법대로 아론과 그 아들들이 이와 같은 제사를 마치고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서 나오며 백성들에게 축복하자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들 앞에 나타났고, 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나와 단위에 있는 번제물과 기름을 살랐습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이 드린 제사를 열납하셨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답과 아비후가 가져온 다른 불은 ‘이상한 불’로 해석됩니다. 이들이 드린 불은 번제단으로부터 취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이 내리신 번제단의 불을 가져오지 않고 하나님이 명령하지 않으신 장소에서 남은 불씨를 붙여온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번제단의 불은 여호와의 명령대로 드린 번제물을 태우는 ‘축복의 불’이었지만(레 9:24), 오늘 본문 2절에 나온 불은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 들 편한 대로 제사를 드린 나답과 아비후를 태운 ‘심판의 불’이었습니다. 한 순간에 두 아들을 잃은 아론은 모세가 전한 말씀을 듣고 3절에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에 의해 일어났음을 깨달았습니다.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 아론은 모세에게 하신 이 사건의 해석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 해석으로 인하여 잠잠합니다. 이처럼 눈 앞에서 두 아들을 잃은 슬픔과 두려움 앞에서도 아론과 같이 주님의 말씀으로 그 사건이 해석될 때 그로 인해 요동되지 않고 무사히 지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손양원목사님 예화)
1948년 여수·순천사건의 와중에 순천사범학교를 다니던 손 목사님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 순교하게 됩니다. 당시 손 목사님은 애양원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 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두 아들의 순교 소식을 접하고도 모든 예배를 정상으로 인도한 후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뜻이 계셔서 제 두 아들을 불러 가신 것으로 믿고 감사합니다. 하나님, 제 두 아들을 죽인 사람, 그의 생명을 보존해주십시오. 제가 전도하겠습니다. 그가 그대로 지옥에 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저에게 그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두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손 목사님이 한 인사말입니다. “제가 이 시간에 무슨 답사를 하고 무슨 인사를 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서 몇 말씀 드립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도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합니다.
열 번째, 이렇듯 과분한 축복 누리게 되는 것을 감사합니다.”
장례예배는 눈물바다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손 목사님은 슬퍼하기보다 “영광일세 영광일세 내가 누릴 영광일세”하고 찬송을 힘차게 불렀습니다. 장례식 후에 감사헌금 1만 원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렸습니다. 당시 손 목사님의 한 달 사례비는 80원이었습니다. 1만원은 목사님의 전 재산을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손 목사님은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양자로 삼아 손재선이라는 새 이름을 주었고, 나중에 목회자로 키워내는 사랑의 기적을 이룹니다. 출처 : 뉴스제이 (http://www.newsjesus.net)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려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말씀으로 나에게 닥친 고난의 사건을 해석해야 합니다.
적용) 요즈음 혹은 과거 내 마음을 요동케 했던 사건은 무엇입니까? 그 사건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과 어떻게 연결되고, 나는 그 사건을 말씀으로 해석했습니까?
둘째,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3절)을 드러내는 삶을 살려면, 말씀을 듣고 죄의 자리에서 떠나야 합니다(8~11절).
여러분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기 위해서 죄 지은 자리에서 떠납니까? 아니면 미련이 남아서 떠나지 못하고 버티고 뭉개고 앉아계십니까? 모세가 전한 말을 듣고 잠잠히 자리를 지킨 아론을 이제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해주십니다. 8~11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론에게 ‘회막에 들어갈 때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죽음을 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신 이유는 제사장이 규례대로 자신을 구별해야 거룩하고 속된 것, 정하고 부정한 것을 분별하여 백성을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낙심해 있는 아론을 말씀으로 찾아와 위로하시고 올바른 규례를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사람의 위로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가장 적절한 말씀을 주시고 나의 죄를 그 말씀을 통해 깨닫고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동물과는 다르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소요리문답 제7문에 보면 “하나님의 작정이 무엇입니까”라는 제목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하며 살아갑니다. 거기에 하나님은 위협하거나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능력을 주신 후 자유롭게 선택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방법으로 당신의 작정을 이루십니다. 사람은 스스로 선과 악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이 선택 또한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 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판단한 후에 결정하고 행동합니다. 소위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제한하지 않으면서도 당신의 작정을 이루십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론에게 회막에서 금주(禁酒) 규례를 영원히 지켜 제사장의 사명을 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어떻게 반응할지를 선택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입니다. 그러나 내 생각하는 대로, 내 마음대로, 내 욕심대로 살아가는 것은 망하는 지름길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살아가는 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나의 삶 속에서 내 마음대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어겨 방탕한 것에 취해 있다면, 오늘 말씀을 들으시고 지금 그 자리에서 떠나야 합니다. 엡 5:18은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죄의 자리에서 떠나는 것이 나 자신을 거룩히 구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의 첫걸음입니다.
적용) 내가 아직 나 자신을 거룩히 구별하지 못하여 방탕하거나 나태하게 행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 자리에서 당장 떠나고자 오늘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셋째,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3절)을 드러내는 삶을 살려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옳으심을 인정해야 합니다(12~20절).
여러분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도록 전적으로 하나님의 옳으심을 인정하십니까? 아니면 내가 하나님보다 옳다고 고집부리면서 살고 계십니까? 제사장은 속죄제를 드리고 남은 고기를 정해진 곳에서 먹어야 했습니다(12~15절). 그런데 모세가 속죄제 드린 염소를 찾으니 이미 불살랐음을 알게 됩니다(16절) 제사장 아론은 두 아들이 죽은 후 속죄제를 드리면서 고기를 먹지 않고 모두 불살라버립니다. 이것은 아론이 불순종으로 속죄제물을 먹지 않은 것이 아니라, 두 아들을 잃은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제물을 먹는 일을 하나님이 좋게 여기지 않으실까 하여 먹지 않은 것입니다. 19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자 20절에 모세는 그의 마음을 좋게 여깁니다. 어떤 사건에서도 전적으로 옳으신 주님을 인정하는 성도는 특별한 은혜를 받습니다. 나단선지자의 책망을 들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다윗이 자신의 죄를 인정한 것도 이와 같은 태도입니다. 내가 당한 고난보다 내 죄가 더 큼을 인정하는 성도가 바로 하나님의 옳으심을 인정하는 성도입니다.
윤선디자인 대표인 정윤선님의 작사/작곡한 찬양인 ‘하나님은 늘 옳습니다’는 찬양의 가사를 보면 은혜가 됩니다.
하나님은 늘 옳습니다. 이러하든 저러하든 아니라고 여겨도 하나님은 늘 옳습니다.
내 맘속에 새겨진 변함없는 그 진리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옳습니다.
그리하지 않아도 그러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하신다면 그 길만을 따르리라
내 맘 속에 새겨진 변함없는 그 진리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옳습니다.
그리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늘 옳습니다.
이 찬양 가사와 고백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사건과 상황 속에서 주님이 전적으로 옳으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이해하기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옳으십니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진정한 믿음 아닐까요?. 믿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항상 같이 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유한하고 무지무능한 우리가 무한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어떻게 모두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때론 내 머리로 이해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옳으심을 믿는 것이 믿음이요,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그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를 사랑하시며 내가 처난 그 어떤 상황과 사건도 그분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요셉이 꿈을 꾼 뒤 자신에게 일어나는 힘든 일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 모든 일들 가운데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었음을 고백하게 되었던 것을 우리는 요셉의 생애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순항하는 인생 뿐만 아니라 역경과 고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나는 순풍과 역풍을 모두 사용해 일하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지금 당장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믿읍시다. 하나님은 항상 옳으십니다.
적용) 하나님이 전적으로 옳으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지만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결론)
소요리 문답 제1조에서 강조하는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저와 여러분들이 이런 인생관을, 이런 신앙관을 갖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기 위해서 오늘 본문의 말씀에 교훈을 삼아서 우리의 삶의 깊은 슬픔과 두려움이 닥칠 때 주님의 말씀으로 은혜 받고 해석되는 그런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주님이 말씀하실 때 내가 머물러 있고 싶은 죄악의 자리에서 과감하게 떠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삶에 일어나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전적으로 옳으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특별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